엘라가발루스

 


[image]
'''휘'''
섹스투스[1] 바리우스 아비투스 바시아누스(Sextus Varius Avitus Bassianus, 본명)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Marcus Aurelius Antoninus Augustus, 제호)
'''별칭'''
엘라가발루스(Elagabalus)
헬리오가발루스(Heliogabalus)
'''생몰 년도'''
203년 ~ 222년
'''재위 기간'''
218년 ~ 222년
'''세베루스 왕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게타
엘라가발루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1. 소개
2. 생애
2.1. 즉위 전까지의 삶
2.2.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
2.3. 즉위
2.5. 몰락
3. 평가
4. 기타


1. 소개


로마 제국의 제23대 황제이자 세베루스 왕조의 세 번째 황제. 오늘날까지 서구권과 대중들에게 괴짜, 장난꾸러기 사차원막장 황제, 미치광이로 불리는 황제이자 최초의 트랜스젠더 등으로도 잘 알려진 인물 중 한 명이다.
본명은 섹스투스 바리우스 아비투스 바시아누스(Sextus Varius Avitus Bassianus)이고, 오늘날까지 부르는 이름인 엘리오가발루스, 헬리오가발루스는 그가 제사장으로서 섬기던 고대 시리아로마태양신 엘리오가발루스(또는 헬리오가발루스, 엘리가발)에서 따온 별칭이다.
그는 카라칼라의 이종 사촌 누이의 아들이며, 카라칼라가 암살되고 황제 근위대장인 마크리누스가 황제가 되자 외할머니이자 카라칼라의 이모인 율리아 마이사가 이에 복수하기 위한 패로 쓰면서 졸지에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카라칼라의 숨겨진 자식’이 되면서 황제에 올랐다.

2. 생애



2.1. 즉위 전까지의 삶


본명은 섹스투스 바리우스 아비투스 바시아누스(Sextus Varius Avitus Bassianus)이며, 섹스투스 바리우스 마르켈루스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사이에서 203년경에 태어났다. 엘라가발루스의 아버지 섹스투스 바리우스 마르켈루스는 기사계급 출신으로 뒤에 원로원에 들어간 인물이라고 하며,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2]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내이자 황후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의 딸이다. 따라서 그녀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처조카이며, 카라칼라, 게타의 이종사촌이다.
엘라가발루스의 외가는 오랫동안 시리아에서 살던 제사장 집안으로 고대 시리아와 로마에서 태양신으로 숭배된 엘라가발루스(헬리오가발루스, 엘리가발) 신을 모셨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읜 엘라가발루스는 어머니 소마이미아스와 함께 시리아 다마스쿠스 북쪽에서 멀지 않은 소도시 에메사에서 성장했고, 어린 시절부터 외가의 가업인 엘라가발루스 신을 섬기는 대사제 교육을 받았다.

2.2.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


엘라가발루스의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는 시리아의 대사제 딸로서 어린 시절부터 명민하고 강인했으며,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언니 율리아 돔나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결혼한 이후 로마에서 살았고,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비투스 알렉시아누스라는 남성과 결혼해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율리아 마마이아를 낳았다.
카라칼라가 215년 파르티아 원정길 도중 암살된 뒤, 황실 근위대장 마크리누스가 병사들의 추대로 황제가 됐다. 카라칼라의 이모 율리아 마이사는 언니 율리아 돔나, 조카 카라칼라와 함께 로마를 떠나 시리아 안티오크까지 동행했는데, 원정 도중 카라칼라가 암살됐고 율리아 돔나 역시 얼마 안 가 그곳에서 죽었다. 이때 새로 즉위한 마크리누스는 마이사를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 뒤 강제로 시리아에 남아 있게 했다. 따라서 마이사는 졸지에 언니, 조카를 잃고 로마에 있던 모든 재산을 마크리누스에게 사실상 빼앗기게 됐다.
사실상 빈털터리로 추방된 마이사는 두 딸과 함께 시리아 속주에 있던 고향 에메사에 머무르면서 자기 가문과 세베루스 왕조의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 딸 소아이미아스의 외아들, 즉 자신의 외손주 엘라가발루스를 반전의 카드로 사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당시 로마군 내에서 암살된 카라칼라의 인기는 높았고, 로마 일반병들과 그 가족들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일가에 대해 좋은 기억과 감사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마이사는 태양신 대사제로 있던 14살짜리 외손자 바리우스 아비투스(엘라가발루스)가 실은 카라칼라의 숨겨진 아들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그리고 시리아 주둔 군단들에게 막대한 후원금을 기부해 군심을 잡았다. 이후 그녀는 소문의 주인공인 외손자 바리우스 아비투스와 함께 시리아 군단들을 방문해 바리우스 아비투스가 “카라칼라의 친아들”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친손자”라는 소문을 더욱 믿도록 했다.

2.3. 즉위


마이사의 계획대로 동방 군단병들은 눈 앞에 나타난 바리우스 아비투스가 진짜 카라칼라의 숨겨둔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소문이 아닌 진실로 확신했다. 따라서 동방군은 14살 소년 바리우스 아비투스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라고 부르고 황제로 추대했다. 바리우스 아비투스가 황제로 추대되자 마크리누스는 기반도 완벽하게 갖춰지지 않는 상태에서 병사들에게 버림받았다. 그는 마이사와 그녀의 외손주를 옹립한 군에게 전투에서 패했고, 도주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는 추격대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마크라누스에게 승리를 거뒀음에도 새 황제는 1년 뒤에야 로마로 귀환했다.
219년 로마에 입성한 새 황제는 로마 전체를 충격에 빠뜨렸다. 소년 황제는 황제를 상징하는 보라색 비단 겉옷을 입었지만, 볼에 연지 화장을 하고 머리에는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면류관을 쓰고 있었다. 또 목에는 진주목걸이를 찼으며 손목 등에도 각종 장신구를 착용했다. 이때 헬레니즘 군주 또는 동방의 파르티아 군주를 퍼포먼스하는 듯한 황제의 모습보다 로마 사람들을 더 충격에 빠뜨린 것은 황제 행렬과 함께 로마에 입성한 거대한 원뿔형 검은 돌이었다. 태양신 엘라가발루스를 상징하는 이 돌덩어리는 여러 문화를 접했던 로마인들에게 낯설고 지나치게 해괴망측했는데, 바리우스 아비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 돌을 신성시하면서 팔리티누스 언덕 위에 있는 신전에 안치했다. 이때 북을 치고 심벌즈를 치는 악사들의 동방 음악에 맞춰 생전 처음 듣는 시리아 여인들의 노래가 계속 들렸고, 팔라티누스 언덕의 신전에서는 로마인들이 난생 처음보는 “음란하고 낯선 성행위” 의식까지 벌어졌다.

2.4. 기행


원래 엘라가발루스라는 명칭은 이름이 아니라 별명으로 뜻은 '태양신 엘라가발루스(헬리오가발루스) 신의 성소를 관리하는 자'였는데, 로마인들은 새 황제를 엘라가발루스 또는 헬리오가발루스라고 불렀다. 그런데 의외로 그는 이 별명을 마음에 들어했다.
로마 입성 후, 엘라가발루스는 아예 에데사에 봉안되어 있던 태양신의 신체를 로마로 옮겨오고 수도 한복판에 태양신 신전을 건립하면서 이를 강요했다.[3] 이때 그는 동방 출신 로마 황제라는 부분을 마음에 들지 않게 생각한 관료들을 색출해 처형하고, 로마 시민들에게 바알을 믿게 했으며 황궁으로 동방의 이방인들을 불러들였다.
따라서 엘라가발루스는 생애 동안 흔히 괴팍한 행동과 장난을 많이 친 황제로 유명하며, 그의 통치 자체가 전부 우스갯짓이었다는 평가까지 있게 됐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세계상식백과에서는 그를 "장난꾸러기 황제"라는 타이틀로 소개했는데, 그가 한 행각들을 보면 장난 수준으로 넘기긴 힘든 여러 가지 기행들이 적지 않다. 해당 원문을 옮겨놓은 블로그
거미줄을 수집하게 하거나 동물들을 마차에 태우고 연회에는 손님에게 유리로 만든 음식을 대접하기도 했다. 또, 제대로 된 음식에는 거미를 넣거나 말똥을 섞고 꽃잎을 마구 퍼부었다가 몇 명이 질식사했다든가,[4] 사제로 사는 동안에는 반드시 순결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가진 베스타의 여제사장을 강간했다거나, 하여튼 별의 별 기행으로 로마인들의 반감을 사고 만다.
당시 베스타의 여사제들은 로마에서는 공연 등에서는 언제나 '''특등석을 배정받고, 지나갈 때 누구나 경외를 표현해야 할 정도'''로 로마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만큼 규율도 엄격해서, 베스타의 여사제들이 강간이 아닌 걸로 순결을 잃으면 보통 생매장했으며, 상대 남자는 무조건 때려 죽였다. 보통은 열 살 이전에 사제생활을 시작해서 40대 때 은퇴했으며, 은퇴하면 사제의 의무에서 해방되기에 평생 지키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엘라가발루스의 출신지인 레반트에서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고 신의 축복을 받는다는 의미로 여사제가 남성 신도와 성관계를 하는 일도 있었다는데, 그 관습을 적용시킨 거라고 한다.
문제는 그게 레반트의 전통인 만큼 '''그곳에서만 통하지 로마 시에서는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생각 안 하고, 황제라며 제멋대로 베스타의 여사제 같은 고위 성직자를 모욕하는 짓을 하니 당연히 증오를 받았다.[5]
또한, 다섯 번 결혼했다 이혼하기도 했으며 특히나 그의 게이 성향, 그것도 바텀이었다는 사실이 까였다. 아예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는 설도 있는데, 이것은 황제 본인이 '짐을 여자로 만들어주면 제국의 절반을 주겠노라'고 포고령을 내린 것이 와전된 듯하다.
당시 로마의 관념에서 이는 매우 역겨운 일이었다. 기독교화 이전에도 로마는 동성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데다[6], 만약 하더라도 '''로마 시민은 박을지언정 박혀선 안 되는 존재였다.'''[7] 군대에서 동성애를 하다 걸리면 한 놈은 로마 시민에게 박은 죄, 당한 놈은 박혀서는 안 되는데 박힌 죄로 사형이라고 딱 규정해놓았을 정도였다.[8] 그런데 그 로마 시민의 수장인 황제라는 작자가, 그것도 대놓고 남들 보는데서 여장을 하고 짙은 화장을 한 뒤 동성애 상대에게 아양을 떨곤 했다니 얼마나 경멸감을 샀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9]

2.5. 몰락


일찍이 이전 황제들에 관한 소문을 진짜 한 일로 인식하여 까기도 했고, 대놓고 다른 직업으로 활동한 막장 폭군 황제들까지 경험한 로마인들에게조차 엘라가발루스의 정신나간 행동은 꿈 속에서나 경험할 법한 충격 그 자체였다. 따라서 엘라가발루스는 즉위한 지 4년여 만에 많은 사람들의 증오를 받아 민심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특히 이미지상 도저히 그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던 섭정 율리아 마이사는 엘라가발루스가 몰락할 때 그녀와 세베루스 왕조 전체가 누구보다 비참하게 끝날 거라고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따라서 마이사는 외손주를 찾아가 “태양신 엘라가발루스를 로마 최고의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황제 책무보다 대사제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라고 구슬린 뒤 둘째 딸의 아들, 즉 자신의 또 다른 외손자이자 엘라가발루스의 이종 사촌 동생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황제의 양자로 삼도록 설득했다. 이렇게 외할머니 마이사는 엘라가발루스를 포기한 뒤 새로운 패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이런 뜻도 제대로 파악 못 한 엘라가발루스는 외할머니에게 속아서 외사촌 알렉산데르를 양자 입적 후 카이사르로 삼아 황태자로 만들었다.
마이사의 또 다른 외손자 알렉산데르는 어렸지만 본래부터 착실한 성격이었고 차분한 아이였다. 따라서 자연스레 인망이 모아져 로마인들과 원로원, 군부는 알렉산데르를 지지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엘라가발루스는 뒤늦게 땅을 치며 후회했다. 그는 매일같이 잠을 설치며 긴장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알렉산데르를 죽이려 들었다.
하지만 암살 사주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자객에게 시키는게 당연한 법인데, 엘라가발루스는 사태 파악도 못 하고 이런 짓을 '''근위대장'''에게 시켰다. 떳떳하지 않은 짓을 비선실세 류가 아닌 공식 경로로 시키기에는 황제의 혈통적[10] / 카리스마적[11] 권위가 모두 부족했다.
설상가상으로 근위대장과 근위대는 알렉산데르에게 호의적이었고, 엘라가발루스를 '''구제불능 부적격자'''로 판단내렸기 때문에 이들은 거꾸로 명을 내린 황제와 황제의 어머니 소아이미아스, 총신 히에로클레스를 살해했다. 이때 로마 전체에게 엘라가발루스 모자와 측근들이 얼마나 증오를 받았던지 이 세 명의 시신은 조리돌림당해 온 로마 시내에 질질 끌려다니다가 결국 난도질당하고 사지가 잘려 티베리스 강 하수구에 버려졌다. 콤모두스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도 암살되었지만 시체만은 온전하게 장사지내준 것과 달리, 최후가 매우 비참했다.

3. 평가


'''200여 년 전 황제였던 칼리굴라가 소문이 진짜로 한 일이 되면서 기행을 벌인 미치광이, 사치와 낭비벽이 심한 폭군이라고 오늘날까지 까이고 있다'''면 '''엘라가발루스는 소문으로 일어날 법한 일을 진짜로 벌인 인물'''이다. 그래서 '''로마 역사상 손꼽히는 암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재위 내내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무에 소홀히 하고, 거기에 온갖 장난과 기행을 밥먹듯이 해서 별의 별 민폐는 다 주었기에 황제로서는 정말 최악의 인물이었다. 미성년자였고 외할머니의 패로 사용되면서 대사제 일을 하다가 옹립된 탓에 로마사 전체에서도 까이는 콤모두스처럼 최악이라고 욕을 먹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가 문제가 된 것은 정무 소홀만이 아니라 4차원같은 정신세계에 해괴한 짓을 한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마술사나 가수나 배우 같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예능인 직종이었으면 되레 유쾌하다는 말은 들을지언정 욕은 많이 먹지 않았을 텐데, 문제는 그가 어리긴 해도 '''로마의 황제'''라는 것이었다.
전술했듯 재위 기간 내내 먹고 놀기만 했으며, 재위 기간 동안 얌전히 있던 것도 아니어서 온갖 기행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일반인들의 황제 로망을 실현시킨 인물. 그 오랜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도 이런 황제는 정말 드물며, 제국은 엘라가발루스와 같은 인물을 다시 가지려면 그가 죽은 이래로 무려 칠백 년 넘게 기다려야 한다. 게다가 하필이면 바로 그 인물도 그의 바로 뒤 후계자와 이름이 같은 알렉산드로스 2세였다.
다행히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반대로 '''그의 치세 중에 로마 제국이 갑자기 엉망이 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외부적으로는 카라칼라가 한바탕 주변 정리를 해놓은 덕택에 제국의 국방 시스템이 안정된 상태에 있었고 또한 실무는 전술한 외할머니인 율리아 마이사가 맡고 있었는데 그녀는 악녀에 야심가라는 평을 들었지만 내치만큼은 꽤 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위 기간이 겨우 4년밖에 안 되었으니 온갖 기행으로 로마를 놀라게 했을지언정 정치적 내치와 외치로는 중대한 실책이 적은 것도 당연하다.

4. 기타


특이한 성적 지향으로 인해 엘라가발루스는 19세기 미술에서 많은 소재가 되었고 트랜스젠더의 시초격인 인물로 꼽기도 한다.
엘라가발루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동명의 오토코노코 동인지가 나오기도 했다.
크루세이더 킹즈 3에서는 의외로 여자로 나온다.

[1] 어감은 이상하지만 뜻은 ‘여섯 번째 아들’, ‘육남’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다. ‘첫 번째 아들’, ‘장남’, ‘맏이’라는 뜻을 지닌 그나이우스와 마찬가지로 가이우스, 루키우스, 마르쿠스와 함께 고대 로마 시대 당시 흔했던 이름이다. [2] 한 집안 내의 같은 인명을 대/소 등으로 구분할 때의 소(Minor, The Younger, The Junior) 아이미아스가 아니라 이름 자체가 소아이미아스(Soaemias)다. 종래의 로마인 이름에는 없던 이름과 성인데, 본토박이 라틴-이탈리아인이 아닌 레반트(시리아)인이라 그렇다.[3] 물론 이 때문에 헬리오가발루스(Heliogabalus)라는 별명이 생겼다. 여기서 접두사 헬리오는 태양을 뜻한다. 세상에서 두번째로 가벼운 원소인 헬륨도 예전에는 태양에만 존재하는 물질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헬리오라는 접두사에서 따온 것이다.[4] 혹은 연회에 꽃잎을 너무 많이 동원하는 바람에 시종들 몇 명이 질식사했다는 말이 있다. 사실 이 때 쓰인 꽃잎의 출처는 제비꽃이었으나, 한참 이후 시대에 화가인 알마 타데마가 이를 그릴 땐 장미로 바꿔 그렸다고 한다(...). 덤으로 엘라가발루스는 제비꽃을 광적으로 좋아했던 사람이었다고.[5] 조금 앞선 시기의 도미티아누스 치세에는 당사자들은 물론이요 주변 인물들까지 방조죄로 생매장형이 집행되었다. 물론 도미티아누스 자체가 법을 엄하게 적용한 것으로 알려진 황제이긴 하지만.[6] 로마 제국 쇠망사의 영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It was expected and socially acceptable for a freeborn Roman man to want sex with both female and male partners, as long as he took the '''penetrative''' role. The morality of the behavior depended on the social standing of the partner, not gender per se. Both women and young men were considered normal objects of desire, but outside marriage a man was supposed to act on his desires only with slaves, prostitutes (who were often slaves), and the infames. Gender did not determine whether a sexual partner was acceptable, as long as a man's enjoyment did not encroach on another man's integrity.[7]율리우스 카이사르도 20대 초반에 불과했을 때 술라숙청을 피해 비티니아에 망명해있으면서 비티니아의 왕 니코메데스 4세와의 섹스 스캔들로 정계활동 내내 약점이 된 적이 있다.[8] 이건 구성원이 전부 로마 시민인 군단병 기준이다.[9] 물론 모든 로마 황제가 동성애를 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오현제였던 하드리아누스도 남자 애인(안티노우스)을 거느리고 있었고 하드리아누스의 전임 트라야누스는 남색가로 유명하였다. 티베리우스도 말년에 카프리 섬에 칩거할 때 남색을 즐겼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공 포지션에서 자기보다 나이나 사회적 지위가 턱없이 낮은 남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기독교화 이전의 로마 성문화는 동성애를 권장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엄격하게 금기시한 것도 아니고, 중요한 건 사회적 권위에 따른 '''박는 쪽이냐 박히는 쪽이냐'''였다. 사실 이건 동성애(자)라고 보기에도 애매하다.[10] 전임 카라칼라의 이모의 외손자였으며, 그렇기에 창업자 격의 전전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는 처갓집 사람이었기에 그와는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였다. 그렇다고 그 처갓집, 즉 율리아 돔나 / 율리아 마이사의 집안이 대단하냐 하면, 저 동쪽 구석 시리아의 신관(지방귀족 격) 집안이라, 시리아 현지에서라면 모를까 수도의 로마인 및 본국 이탈리아인 입장에서는 그렇지도 않다.[11] 혈통, 세습과 상관 없이 본인 대에서 본인이 찬탈하거나 쟁취하거나 했어도 이곳저곳에서 총독과 사령관을 지낸 백전노장인 경우.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헤라클리우스, 알렉시오스 1세 등이 여기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