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엄격하고 고지식한 위험인물이었다. 생의 마지막 몇 년 동안은 오로지 가마만 타고 이동했다. 사람들이 이를 근거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하자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사람은 머리로 통치하지, 다리로 통치하지 않는다."
ㅡ 아일리우스 스파르티아누스, 세베루스 18장 11절
세베루스는 키는 작지만 강인했다. 결국에는 통풍 때문에 몸이 매우 쇠약해졌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주 열정적이고 원기 왕성했다. 학식 면에서는 자신이 배운 것 이상을 원했으며 이 때문에 생각은 많아도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무관심하지 않았고 적에게는 아주 가혹했던 그는 이루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주의를 기울였지만 자신에 대해 하는 말들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ㅡ 디오 카시우스, 77. 16
1. 소개
로마 제국의 제20대 황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몰아내고 세베루스 왕조를 연 인물이자 북아프리카 속주 출신으로는 두 번째로 권좌에 오른 황제이다.
군인 출신 황제인 까닭에 한때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서거한 180년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로마 황제로 등극한 285년까지의 시기를 과거의 학자들은 로마사에서 가장 힘겹고 혼란스러운 시기로 정의내릴 때 그와 그의 왕조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이 이 시기를 재평가하고, 이 시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그가 개창한 세베루스 왕조에 대한 연구가 구체화되고, 세베루스 왕조의 황제들이 재평가되었다.
2. 생애
2.1. 즉위 전까지의 삶
북아프리카 출신인 까닭에 이 황제가 흑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백인이며, 이탈리아에서 북아프리카로 건너온 조상을 둔 사람이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북아프리카 속주의 항구도시 렙티스 마그나(Leptis Magna, 오늘날 리비아에 위치)에서 146년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의 사촌들이 집정관직을 맡는 것을 보았으나 세베루스의 집안은 속주[2] 의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집정관을 맡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먼저 조상들이 살던 이탈리아로 건너간 친척들의 도움으로 로마 사회의 최상류층이 되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부유한 기사 계급 출신이었으며, 세베루스의 첫 아내인 파카 마르키아나(Pacca Marciana) 역시 렙티스 출신의 이탈리아 혈통이었다. 세베루스의 가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부계는 일찌기 본국 이탈리아를 떠나 옛 카르타고 지역에 정착한 세베루스 가문이지만 그의 조상 중에는 카르타고 사람도 있었다. 반면 모계의 경우에는 본국 이탈리아 혈통이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오랫동안 이어진 집안이자 고대 로마의 유명한 씨족 가문인 풀비우스 가문이었다. 이런 까닭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외가쪽 친척들이 더 유명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의 외사촌으로는 동향 친구이자 최측근이며 사돈관계를 맺게 된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우스가 있었다.
세베루스는 대개의 북아프리카 속주 태생의 혼혈 로마인들이 그렇듯 라틴어와 헬라어와 페니키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긴 했지만 그가 구사하는 라틴어와 헬라어에는 당시 북아프리카 특유의 페니키아어식 억양이 배어있었고, 출세를 위해 로마에 간 뒤로도 죽을 때까지 이 사투리를 고치지 못해서 평생동안 명문가 출신 원로원 중진들에게 까이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당대 기준으로도 상류층의 고등 교육을 충실히 받아서 수준높은 라틴어와 헬라어를 구사할 수있는, 풍부한 교양과 명석함을 갖춘 인물이었다. 따라서 젊은 시절 세베루스는 17살 무렵 웅변 실력을 갈고 닦아 첫 공개웅변을 하기도 했으며 그 재능을 살려 로마에서는 풍부한 법학 지식과 수사학, 법률학을 바탕으로 법률가로도 활동했다. 또 로마 내 최고 학부였던 아테네에서 문학, 철학을 공부했다. 이런 까닭에 세베루스는 스스로 무인으로서 황제가 되었다고 언플은 했어도 사실은 공화정, 원수정 시대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문무겸비의 엘리트였다.[3] . 즉, 오늘날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젊은 시절부터 그리스 문학과 로마 법률에 대해 지식이 해박했으며, 시인이나 철학자, 법률가들과도 잘 어울리기 좋아한 교양인이었다.
세베루스는 17살때 공개웅변을 하며 자신의 재능을 고향에서 알린 뒤 18번째 생일이 지나자 곧바로 로마로 건너 왔다. 162년 처음으로 공적 경험을 시작했고 이 무렵 이미 이탈리아로 건너온 뒤 재정착했던 일가 친척 가이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후원을 받은 뒤 그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셉티미우스를 추천하면서 마르쿠스 황제에게 원로원 의원에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본국에 있던 세베루스 집안 사람들의 도움 아래 마르쿠스 황제 곁에서 원로원 의원이자 주 검사를 맡아 법정에 출두해 기소 업무를 맡았으며 본국 일대의 도로 관리 업무를 관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160년대 동안 세베루스의 공직 경험은 이후 경력과 달리 평범했고 아직은 그렇게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변호사 일도 병행했는데, 25살 이후 공직 최소연령이 지난 뒤 본격적으로 명예로운 경력을 경험하기 전 하필 로마와 제국 전체를 휩쓴 안토니누스 역병이 퍼졌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어쩔 수 없이 모든 일을 중단하고 안전한 렙티스 마그나로 잠시 피신해야만 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기록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이 무렵, 세베루스는 간음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왜냐하면 세베루스는 전염병이 잠잠해진 뒤 별 문제 없이 공식적으로 회계감사관을 경험하고 정식 원로원 의원이 되었기 때문이다[4] . 아울러 그는 이 시기 전염병으로 인해 타격을 입은 로마 인재풀 내에서 계속해서 군사와 행정의 여러 직위들을 거쳤는데, 이때도 그에게 큰 도움을 주고 밀어준 집안어른은 사촌형 가이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였다. 그는 세베루스가 부친상으로 잠시 고향으로 돌아간 무렵에 아프리카 속주 총독에 임명됐는데, 이때 총독 자격으로 세베루스를 속주 내 군 지휘를 담당하는 고위직에 임명하고 그를 적극 중용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게 해줬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사촌형의 도움으로 히스파니아 속주에서의 군경력과 이때의 경력을 바탕으로 호민관과 법무관을 지냈으며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총독을 맡았다. 그러다가 191년에는 제국 서방 방어와 도나우 방어선에서 중요한 속주인 상 판노니아의 총독을 맡았다. 총독 임명에는 실력보다는 같은 아프리카 출신인 근위대장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의 영향력이 더 컸다는 말도 있지만 그는 제국에서 실력과 경험 모두 평가가 훌륭한 장군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황제였던 콤모두스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삼촌과 사촌형의 소개 아래 동향 출신의 파카 마르키아나(Pacca Marciana)와 결혼했고, 사이에 두 딸을 얻었는데 두 딸 모두 요절했고 아내마저 186년경 병으로 잃었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후계를 얻기 위해 재혼을 결심했는데, 이때 예비신부 후보들이 들어오면 운세를 보고 판단했고 이때 만난 여인이 바로 세베루스 왕조 시대동안 가공할 만한 황후 율리아 돔나였다.
세베루스가 속주 총독으로 판노니아의 수도인 카르눈툼에 있을 때 콤모두스의 사망과 뒤이은 페르티낙스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그때부터 그는 제위를 향한 야망을 드러냈다. 세베루스는 도나우 군단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후 193년 4월에 로마로 진군했다. 원로원은 반대했지만 세베루스의 군대가 로마 외곽에 도착하자 체념하고 그가 황제가 되는 것을 승인했다.
2.2. 황제
2.2.1. 황제 참칭과 로마 진군
세베루스가 황제를 선언한 시기는 폭군 콤모두스가 암살되면서 2세기를 지배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안토니네 왕조)[5] 가 끝나고, 암살범 라이투스와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의 추대로 새로운 황제 페르티낙스가 즉위한 뒤 새황제 페르티낙스마저 근위대장 레토와 근위대에게 암살당한 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돈으로 황제의 자리를 사는 등 극심한 혼란기였다.
이때 그는 도나우 강 중류의 상 판노니아 총독이자 판노니아(도나우) 방면군 사령관으로 지냈는데, 콤모두스 사후 합법적 절차로 즉위한 페르티낙스가 암살되자 본인 스스로 황제를 선언했다. 냉혹하고 명민한 정치인, 장군이며 뛰어난 법률가이기도 한 세베루스는 시리아 속주 총독 페르켄니우스 니게르와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도 각각 황제를 칭하고 야망을 드러낸 이후에야 황제를 선언했으며, 뛰어난 정치감각과 법지식 아래 매우 계획적으로 야망을 드러냈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수도 빈 근처의 카르눈툼에서 휘하의 라인강, 도나우 강 일대 16개 군단에게 자신을 지지케하고, 부하들의 추대로 즉위하는 방식으로 서방 최정예 병력이 자신만을 지지한다는 것을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와 원로원, 다른 두 경쟁자들에게 보여줬다. 이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황제 선언 후, 기민하고 재빠른 속도로 로마 제국 내 최정예 군단인 라인-도나우 군단병들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세베루스의 판노니아 군이 이탈리아로 향할 당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이끄는 판노니아 군단병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생전부터 오랜 전쟁으로 실전 경험이 풍부한 최정예였다.[6] 이런 군단병들이 세베루스의 신속한 결정에 따라 무지막지한 군세로 로마로 진격하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페르티낙스 암살를 주도한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를 반역죄로 처형한 뒤 툴리우스 크리스피누스와 플라비우스 게니알리스를 새 근위대장들로 임명했다. 이는 뒤늦은 민심 수습이기도 했지만, 진짜 이유는 같은 동향 출신으로 세베루스를 콤모두스 시대동안 밀고 끌어준 라이투스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편에 선 뒤, 그와 공모한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후,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세베루스에게 근위대장 중 한명인 크리스피누스를 파견해 공동황제를 제안했다. 하지만 세베루스는 그와 공동황제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율리아누스의 제위 등극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페르티낙스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본인이 황제를 참칭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베루스는 이런 뜻을 확고히 전달한다는 의미로 파견된 크리스피누스를 그 자리에서 죽여, 율리아누스와 원로원에게 공동황제 제안 따위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세는 무력을 앞세운 세베루스 쪽으로 기울었고 193년 6월 1일, 원로원은 결국 세베루스를 새 황제로 인정해야만 했다. 따라서 돈으로 권좌를 산 율리아누스는 디오 카시우스가 기록했듯이 모두에게 버림받은 채 폐위된 뒤 비참하게 처형됐다. 하지만 세베루스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시신을 정중히 유가족들에게 보낸 뒤, 그의 아내와 외동딸이 정식장례식을 거쳐 가족공동무덤에 안치할 수 있게 배려해줬다. 이건 아마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본인 스스로의 정통성을 페르티낙스의 후임이라고 했으며, 그가 문제로 삼은 것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돈으로 제위를 산 행동보다는 이를 먼저 경매형식으로 진행하고 후보를 고른 프라이토리아니였던 것이 컸다. 또는 페르티낙스처럼 젊은시절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신임을 얻었고 여러 게르만족들과 전투를 치루며 공을 세운 장군이며 정치인인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삶과 그가 콤모두스 생전 황제의 폭주를 페르티낙스와 함께 원로원 내에서 견제하면서 얻은 공로를 옛 동료로서 간접적으로 인정했음을 보여준 것으로 추측된다고 견해도 있다. 그리고 원로원과 프라이토리아니를 적대시한 그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겐 큰 악감정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고 한다[7] .
로마 진군 9일 후, 세베루스와 그의 군대는 개가를 울리며 무장한 상태로 로마 시내에 들어왔다. 그는 먼저 돈으로 제위를 팔아 국가의 위신을 떨어트린 근위대에 복수를 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전임자인 페르티낙스 살해에 대한 응징을 명분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칭호의 일부로 취해 계승권을 주장했다. 그러고는 아주 교활한 계획을 실행했다. 먼저 그는 근위병들을 소환해 기념식 관례대로 도시 밖으로 행군하게 한 후, 페르티낙스 암살에 관여한 근위대원들을 관용없이 모조리 처형했다. 남은 근위대는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해산하고 로마 외곽 160km 반경 내에 접근하면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근위대원들의 자리는 그에게 충실한 군사들로 채워졌다. 이는 그동안 본국 이탈리아 출신 근위대가 해산되고, ‘촌놈’ 취급을 받던 판노니아, 일리리아, 트라키아 속주 출신 군단병들로 근위대의 구성이 바뀐 첫 사례가 되었다.
세베루스는 로마에 들어온 이후,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다지는데 주력했다. 위에서 언급했듯 그는 암살당한 선대 황제 페르티낙스를 복권시키고 그에 걸맞은 예우로 장례를 치름으로써 자신의 정통성[8] 과 명분을 공고히 하면서 이탈리아 근위대를 해산시켰다. 이 조치는 이탈리아 내에서 세베루스만이 무력을 쥐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행동이었고, 콤모두스 암살 후 황제 선출이나 제국 원로원에게 무력으로 특권을 누린 본국 이탈리아의 지위와 특권을 빼앗아 버리는 결정이었다.
이어서 그는 각종 기금 창고들을 신속히 장악한 뒤, 콤모두스의 실정과 그가 암살된 뒤 벌어진 혼란으로 고갈된 로마 곡물창고를 다시 채워나갔다. 또한 자신이 경쟁자들과 실력으로 경쟁 중인 상황에서 언제라도 배신을 때릴 수 있다는 것을 이전 사례들로 보여준 원로원을 회유하려고 했다. 따라서 그는 로마에 체류하는 동안 자신이 원로원을 존중하며, 본인 역시 원로원 의원이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군복 대신 토가를 착용했다. 또 원로원 의원들에게 “동료 의원들이 재판을 거치지 않고, 처형되는 일이 단 한 명도 없도록 하겠다”고 맹세하면서, 과거 사례들과 달리 밀고자를 활용해 비열한 방법으로 숙청도 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2.2.2. 첫번째 경쟁자 니게르와 1차 파르티아 전쟁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는 이탈리아의 오래된 기사계급 출신으로 세베루스와 마찬가지로 직계 내에서는 본인대에서야 원로원에 입성한 신참자 출신이다. 그는 탄탄하지만 평범한 군대 경력을 거쳐 189년에 집정관이 되었고 191년에는 시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니게르는 사실 문무 전반에서 오랜 경력을 자랑한 전형적인 2세기 당시의 원로원 신참자 중 한명이었다[9] .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절 황제령 이집트에서 오랜 행정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콤모두스 치세 초기에는 다키아 일대에서 도나우 일대 군단을 이끈 군경력도 가진 베테랑이었다. 이 사람 역시 페르티낙스가 살해되자, 193년 4월 13일 시리아 군단 병사들에 의해 선포됐는데 세베루스보다 먼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세베루스가 4일 전 먼저 제국의 황제 칭호를 참칭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군사 문제에서는 지나치게 원칙주의자였지만, 세베루스와 달리 매사와 인간관계에 있어 남달리 정직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부하들에게 황제로 선포되자 이를 알리는 서한을 로마로 보냈는데, 세베루스는 중간에서 그의 서한을 가로챘고 니게르가 먼저 반란을 일으키는 방법으로 분위기를 바꿔 명분을 내세우며 로마로 진군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인망이 대단한 사람이었고 매우 정직했기 때문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자신에게 수많은 로마 시민들이 "니게르를 로마로 복귀시켜 당장 황제 칭호를 줘라"고 항의를 받았다. 따라서 디디우스는 백인대장 한명을 자객으로 보내 니게르 암살을 명령했고, 실제로 암살범은 안티오키아로 향했다고 한다.
니게르는 시리아 속주 총독 재임 중 193년 4월 13일 황제로 선포된 이후, 동방 일대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일가 칭호로 '정의'를 뜻하는 유스투스를 사용했다. 이후, 서방에서는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시간을 두고 부하들이 자신을 추대하는 모양새로 황제를 자처했는데 세베루스는 로마 최정예를 이끌고 군사행동을 개시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살해된 이후 로마로 입성했다. 이후, 로마에서 황제의 지위를 굳힌 세베루스는 동방 군단들이 황제로 선포한 시리아의 총독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Gaius Pescennius Niger)를 처리하기로 했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동향 렙티스 마그나 출신의 고향친구이며 외가 친척인 가이우스 플비우스 플라우티우스에게 니게르의 아이들을 인질로 붙잡아 두라고 명을 내렸다. 하지만 니게르는 이런 세베루스의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비잔티움을 점령한 아시아 총독 아이밀리아누스를 비롯한 동방 일대의 총독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이윽고 군대를 규합한 니게르는 동방 일대의 군세와 오랫동안 쌓아온 인망을 바탕으로 본국 이탈리아를 장악한 세베루스를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곡물 공급 지역인 이집트를 공격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세베루스는 밀 공급 방어를 위해 이집트 일대의 방어를 강화했으며 자신이 직접 움직일 수 있는 로마 최강의 16개 군단을 가지고 니게르를 압박했다. 왜냐하면 세베루스와 달리 니게르는 이 당시 시리아에 주둔한 3개 군단, 아라비아에 주둔 중인 2개 군단, 말라티아-아라비아 테트라에 있던 1개 군단 등 동방 6개 군단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게르는 시리아의 북부 측면을 막아주는 타우루스 산맥의 고개들과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를 요새화했다. 그는 또한 서쪽으로 군대를 보내 보스포루스의 좁은 교차로를 통제하는 비잔티움을 포위하도록 했다. 그러나 세베루스의 군대는 트라키아에서 소아시아까지 진격해 들어갔고, 193년 말 무렵, 니게르 군대를 상대로 두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첫 번째는 마르마라 해안의 키지쿠스(Cyzicus)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의 승리였고, 두 번째는 동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니케아[10] 에서 벌어진 전투에서의 승리였다. 니게르는 대비했지만 세베루스의 군대는 타우루스 산맥의 고개를 돌파하여 시리아로 진군했다. 마지막 결정적인 전투는 500년 전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를 격퇴한 평원 위 이수스(Issus) 근처에서 194년 3월 또는 4월에 벌어진 전투였다. 니게르의 군사들은 북부 군단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아 패하고 말았다. 달아나는 동안 니게르의 세력은 약화되었고, 니게르는 말을 타고 남쪽으로 달아났지만 안티오키아 근처에서 붙잡혀 참수되었다. 그의 지지자들이 무자비하게 처벌되자, 많은 이들이 세베루스의 무자비한 처벌을 피해 로마의 이웃이며 동방의 오랜 적인 파르티아로 피난하였다.
당시 파르티아 왕 볼로게세스 4세는 세베루스의 경쟁자 니게르를 지원하면서, 메소포타미아에 위치한 로마의 속국 오스로에네에게까지 간섭해 왕과 로마를 이간질시켰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195년 여름 동안 니게르와 도망간 그의 군사들을 지원한 파르티아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대를 이끌고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향했다. 하지만 파르티아를 박살내기 위해 진군한 세베루스의 군사행동은 갑자기 중단됐다. 왜냐하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근거지인 브리타니아에서 힘을 키운 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행동에 나섰기 때문이다.
2.2.3. 단독 황제 등극과 안토니누스 계보 참칭
니게르를 무너뜨렸지만 브리타니아의 총독인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라는 경쟁자가 아직 남아있었다. 세베루스는 일찍이 알비누스의 지원 내지 중립을 바라면서 '카이사르(부황제)'라는 칭호를 주면서 타협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가 이렇게 행동한 이유는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지지하던 원로원을 설득시키면서 가장 큰 경쟁자인 니게르를 먼저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서 세베루스는 알비누스와 실제 권력을 나눌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세베루스의 로마 진군 후, 이탈리아 출신 근위대가 해산되고 새 황재가 원로원에게 유화적 태도를 취할 당시부터 원로원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맹세와 호소 가득한 약속들을 믿지 않았다. 로마에 들어온 뒤, 세베루스가 민간인 복장으로 있었음에도 자신을 지지하던 1만 5천 명의 도나우 방어선 출신 근위대를 등에 업은 채 원로원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로원 의원 대다수는 세베루스가 북아프리카 억양이 섞인 사투리를 사용하는 속주 출신 기사계급 로마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미워하기보다는, 위선적인 태도에 대해 혐오하고 진실성이 없는 세베루스의 이중성을 미워했다. 이런 태도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원로원 의원들이 자신이 북아프리카 출신이라는 이유로 무시한다고 여겼고, 세습귀족 출신 원로원 의원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총애를 받아온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원로원에게 훨씬 인기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연유로 세베루스는 원로원을 탄압할 때 자신의 행동들을 정당화시켰다.
이런 까닭에 195년 말. 세베루스는 자신의 약한 정통성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양자로 입적되었음을 선포했다. 쉽게 말해서 대가 끊긴 안토니누스 왕조에 황제의 정통성과 권위 향상을 위해 셀프 양자입적한 것인데, 이때 원로원과 사이가 더 틀어지게 된 행동은 세베루스 자신의 정통성 강화를 위해 안토니누스 가문의 적통 콤모두스를 신격화시키고 기록말살형을 철회시킨 것이다. 여기에 더해 명망있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후예임을 자처하기 위해서, 훗날 카라칼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장남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Septimius Bassianus)의 이름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로 바꿨다. 그리고 어린 카라칼라가 겨우 7살의 나이임에도 '카이사르'의 칭호도 하사했다.
이것은 세베루스 가문의 세습을 공식화한 선언이었고,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에게는 더이상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선택한 후계자가 아니고 향후 제위를 계승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또한 콤모두스를 단죄한 바 있는 원로원에게 더이상 타협은 없다는 경고였으며 알비누스를 지지한다는 것은 반역이라는 뜻이 담긴 선전포고였다.
세베루스의 안토니누스 계보 참칭 선언을 보고 싸울 수 밖에 없음을 알게 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196년 4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갈리아로 건너갔고, 브리타니아 3개 군단을 주축으로 스페인에 주둔해 있던 제7군단 '게미나'의 지원도 받았다. 그는 리옹에 기지를 두고 추가 병력을 모았으며, 중요한 요새와 주둔군을 중심으로 지금의 라인란트 일대를 점령할 생각이었다. 세베루스는 새 법령들을 통과시키고 권력을 확고히 다지면서 그 해에 많은 시간을 로마에서 보냈지만, 원로원이 아닌 군을 이용해 알비누스를 ‘로마의 공적’으로 선포하는 새로운 방식의 권위 확보에 치중했다.
세베루스는 197년 1월이 되어서야 옛 동지인 알비누스와 마지막 대전을 치르기 위해 길을 떠났다. 결정적인 전투는 197년 2월 19일 루그두눔(지금의 리옹) 외곽에서 많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전투가 벌어졌는데 전투 도중에 세베루스가 말에서 떨어지는 일이 일어났다. 이는 세베루스의 생사가 경각에 달렸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그는 재빨리 황제의 의복을 찢어서 정체를 숨겼다. 세베루스는 때맞춰 기병대가 도착하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알비누스의 군대는 결국 패배하였고 알비누스는 리옹으로 달아났지만 더 이상 도망갈 길이 없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베루스는 벌거벗겨진 알비누스의 시신을 땅에 내려놓고 그 위로 말을 달려 시체를 훼손했다. 세베루스의 잔인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잘린 알비누스의 목은 로마로 보내졌고 시신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의 시신과 함께 론 강에 던져졌다.
2.2.4. 정적 숙청
로마로 돌아온 세베루스는 니게르와 알비누스의 지지자들을 뿌리뽑기 위해 가혹한 보복 조치를 실시하였다. 세베루스는 원로원에 그들의 추종 세력이 많이 있다고 생각했고, 향후 세베루스 가의 안정성을 위해서라도 원로원과 이탈리아 출신 의원들을 제대로 손 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11]
197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원로원이 동료 의원을 직접 재판할 수 있는 특권을 박탈했다. 이어서 세베루스의 숙청 리스트에 오른 29명의 원로원 의원들에게 ‘반역자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지지했다’는 유죄 판결을 내려 사형시켰다. 이어서 그는 자신에게 호의적인 인사들을 새로운 의원들을 임명해 그 자리를 채웠다. 새로 편입된 의원들은 세베루스에게 호의적인 북아프리카 출신이거나 동방 속주 출신들이 많았다. 따라서 본국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 중 상대적으로 우위를 가지고 있던 갈리아, 히스파니아 등 기존 원로원파들은 소수파로 추락했다.[12]
이렇게 원로원을 손 본 세베루스는 행정부에 대해서도 인사조치를 통해 물갈이를 진행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이래 오현제 시대 동안 로마 관료 사회의 중추로 자리잡은 기사계급들을 중용했으며[13] 군 출신 뿐만 아니라 세베루스 왕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법학자들을 주요 관료로 발탁했다.[14] 흔히 세베루스 왕조를 군인의 시대라고 알고 있지만 오히려 로마법을 가장 꽃피운 법학자의 시대였다. 이는 세베루스 사후 알렉산데르 시대에, 섭정인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가 자신의 외손자이자 소년 군주인 알렉산데르를 위하여, 그 측근이자 보좌역으로 법학자 울피아누스를 중용하면서 결실을 맺는다.
205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자신이 국법을 어기고 로마 진군을 할 당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위이자 루키우스 베루스의 친조카인 전직집정관 출신의 옛 원로원 의원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15] 가 그의 불법행동을 강하게 질타한 일을 들추어 낸 뒤 어거지로 안토니누스 황가의 몇 없는 남자황족에게 사형을 언도한 후 살해했다. 그런데 플라우티우스는 과거 처남 콤모두스가 암살된 직후,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보인 일련의 행동에 완전히 질린 상태였고, 단 한 번도 제위에 욕심을 내거나 본인이 앞장서 뭔 일을 꾸미거나 무슨 일이 있던 상황에서 오버한 일이 없던 사람이었다.
또 그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로마 진군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은퇴선언을 한 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경쟁자들인 니게르, 알비누스와 칼을 겨누기 전 가족들과 시골별장에 들어가 수년째 세상과 담을 쌓고 살던 상태였다.[16] 즉, 세베루스에게 억울하게 사형을 언도받고 죽임을 당한 그는 세베루스의 쿠데타 당시 이 일이 국법에 어긋난 행동이라고 하면서 질책하고, 면담요구를 강하게 거부한 원칙만 내세웠을 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같은 세베루스의 경쟁자들과 협력하거나 최소 그들을 심정적으로 지지조차 안 했던 상태였다. 그래서 플라우티우스는 자신의 사형을 세베루스가 명령했다고 한 것을 듣고 죽기 전 죽음을 준비하면서 “나는 세르비아누스[17] 께서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위해 하셨던 일과 같은 기도를 한다네.”라고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렇듯 세베루스가 즉위 당시 신에게 맹세까지 하면서 정적 숙청과 재판없는 처벌이 없을 것이라는 선언들을 무시하고, 자신이 존경한다는 철인황제의 사위까지 죽이는 등 극도로 무자비한 모습을 보여주자, 로마 사람들은 공화정 후기의 내란 시기에 자행되었던 독재관(딕타토르) 술라의 악명 높은 처벌을 떠올려 그를 '푸닉 술라'[18] 라고 부르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냉정함과 잔인함을 질타했다.
그러나 공포 정치를 펼치고 자신의 경쟁자들을 모조리 굴복시켰음에도 기원전 1세기의 술라와는 달리 세베루스는 한때 동료였던 기존 원로원과 옛 안토니누스 왕조 지지자들의 신임을 끝내 얻지 못했다.[19][20]
2.2.5. 원로원의 위상 하락과 커지는 군대의 힘
세베루스의 원로원 보복 착수 이후, 더이상 원로원에게 지원을 기대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도미티아누스처럼 원로원의 지지가 아니라 군대의 지원에 기대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자신이 군인황제임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조했다. 또한 로마 시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계속해서 갖가지 볼거리를 제공하고 전 세계에서 온 수백 마리의 야수들을 도살했다.
황제가 자신의 권력 기반 창출의 수단으로 군대를 선택하면서 원로원은 완전히 황제 자문회의가 입안한 정책들을 홍보하는 기관으로 전락해버렸다. 반대로 세베루스를 도울 황제 자문회의의 인원과 권한은 창설 이래 가장 커지게 되었다. 이 회의에는 원로원 내 중견 의원들과 관료, 당대 최고의 법률가들인 파피니아누스 등이 포함됐다. 니게르, 알비누스를 비롯한 정적들을 숙청한 까닭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재산들을 몰수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 재산들을 레스 프리바타 프린키피스(황제의 개인 자산)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장악했다. 이어서 그는 평소 관심을 두고 있던 군대에게 시선을 돌렸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막대한 레스 프리비타 프린키피스 내 자금들을 기반으로 선군정치를 펼쳤다. 따라서 군인들의 힘은 커졌고, 황제 곁에서 바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근위대장의 권한 역시 과거보다 막강해졌다. 세베루스 치세 이후 근위대는 장교를 훈련시키는 새로운 사관학교 개념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들을 이끄는 근위대장은 곡물 행정을 감독하는 권한을 부여받았고, 제국 최고 법원이자 정책 입안 기구인 황제 자문회의의 부의장으로 승격됐다. 따라서 197년 근위대장에 임명된,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Gaius Fulvius Plautianus)의 힘은 황제와 대등할 정도로 막강해졌다.
원로원 대신 군인들의 힘을 기반으로 권위를 확립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군대는 자신의 권력 기반이었다. 따라서 그는 아들들에게 죽는 순간까지도 계속 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치세기 동안 군대 개혁을 착실히 진행시켰다. 따라서 로마군과 보조군들을 점점 항구적인 지역 방어군, 농민군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30개 군단 수를 33개로 증설했으며, 군단 자휘관들을 원로원 출신들에서 기사계급이나 전문 군인들로 바꾸기 시작했다. 또한 병영 기지를 쾌적하게 만드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그동안 황제령으로 금지되었지만 사실상 행해지고 있는 몇 가지를 허용해줬다.
먼저 병사들의 가장 큰 소원인 복무 기간내 결혼을 합법화시켜줬으며,[21] 퇴역 후를 위해 돈을 모아 계를 드는 행동을 허락했다. 동시에 초급장교들의 사교클럽 조직 창설을 허용해 군 내 사조직들을 활성화시켜줬다.[22] 이런 복지혜택은 단순히 생활 향상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군단병들의 급여를 375데나리우스에서 500데나리우스로 인상해주고 일반병들이 일반 군단에서 근위대와 근위대장까지 승격시키는 코스를 누구나 갈 수 있도록 인사 시스템을 바꿔줬다.
2.2.6. 제2차 파르티아 전쟁
세베루스는 여러 정적과 외적을 격파하고, 군과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펼쳤으며, 자신과 세베루스 왕조에게 반란을 일으킬 위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위험 인물로 분류된 인사들을 색출하고 일부 속주들을 여러 개로 나눠 힘을 분산시켰다. 동시에 두 번째 결혼으로 맞이한 시리아 출신의 율리아 돔나 사이에게서 얻은 두 아들 카라칼라, 게타를 일찌감치 부제에 앉혀 후계 구도도 명확히 하는 등 얼마간의 안정을 이룩한다. 그 후에 그는 군사 원정을 떠났다, 이번 적은 로마의 주둔 기지를 위협하고 동방 속국들의 왕들을 위협하는 파르티아인들이었다. 앞서 벌인 원정은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세베루스는 그렇게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 원정에서는 진지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들어간 세베루스는 군사를 함선에 싣고 유프라테스 강과 육로를 거쳐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으로 진군했다. 저항은 약했고 도시는 점령되어 로마의 군인들에게 약탈당했다. 남자들은 모조리 살해당했고, 약 10만 명의 여자와 아이들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되었으며 파르티아의 황실 국고에 들어 있던 보석과 귀중품들이 모조리 약탈당했다. 그렇게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방은 트라야누스 재위 후기 이후 다시금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실제로는 195년 첫 원정에서 차지했고 그 지배를 견고하게 만든 것이 2차 원정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는 이후에 로마-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 되며, 당연하게도 이 지역을 차지한 쪽이 유리하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고 방어하기도 용이하였다. 세베루스 황제의 파르티아 원정의 가장 큰 수확.
크테시폰 점령은 197년 말에 이루어졌다. 세베루스는 5년간 동방에 머물렀는데 처음 2년간은 새로운 식민지를 편성하고 중요한 무역 도시인 하트라(Hatra)를 점령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로마군은 하트라는 끝내 점령하지 못했다. 이후 세베루스는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돌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미라를 보고, 나일 강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피라미드와 테베의 신전들을 방문했다.
2.2.7. 후계 문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202년 여름에 로마로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는 56세 정도였다. 로마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도 꽤 고령이었다. 심각한 통풍으로 고통을 겪던 그는 이미 198년 초에 친아들 카라칼라를 아우구스투스 직위로 올려줌으로써 제위 계승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로 돌아오자마자 아들의 결혼 상대로 동향친구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Gaius Fulvius Plautianus)의 딸인 푸블리아 풀비아 플라우틸라(Publia Fulvia Plautilla)를 선택했다. 근위대장인 플라우티아누스는 북아프리카의 렙티스 마그나 출신으로, 동향친구인 황제 세베루스의 지지와 도움으로 막대한 권력과 부를 얻었다. 그는 황실 근위대장 자격으로 모든 전쟁에 황제와 동행했다. 그래서 그와 세베루스가 한때 연인 관계였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그러나 플라우티아누스는 사람들의 신망을 얻지 못했다. 헤로디아누스는 “플라우티아누스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해 모든 일에 온갖 잔인한 행동과 폭력을 써서 역사상 가장 두려운 프라이펙투스(최고 행정관이 임명하는 관리)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평가했으며 심지어 그가 성인 남자를 거세시켜 딸의 시종이 되게 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카라칼라는 이러한 결혼을 반기지 않았고 아내와 장인 모두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내와 식사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려고 했으며, 자신이 정권을 잡으면 둘 다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카라칼라와 플라우티아누스 부녀의 갈등은 3년 후인 205년 1월 22일에 극도로 악화되었다. 사료마다 다르지만 어느 설명에 의하면 카라칼라가 세 명의 백인대장[23] 을 설득하여 플라우티아누스를 음해하는 거짓 정보를 보고하게 했다. 그들은 조상들을 위한 축제가 끝난 후 행동을 개시했다. 그들은 저녁 식사 직전에 세베루스 황제에게 가서 플라우티아누스가 자신들과 다른 일곱 명의 백인대장들에게 세베루스와 카라칼라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헤로디아누스에 의하면 음모는 사실이었고, 플라우티아누스는 그 음모를 통해 카라칼라의 제위 계승을 막고 자신이 제국을 장악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황제와 황태자를 살해하기 위해 고용한 사람이 곧바로 그들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두 이야기 중에서 무엇이 진실이든 간에 플라우티아누스는 즉시 살해되었고 시신은 거리에 내팽개쳐져 민중의 야유를 받게 되었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장인과 아내를 싫어했던 카라칼라에게는 매우 좋은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죽은 플라우티아누스의 딸이자 카라칼라의 아내인 플라우틸라는 처형되지 않고 리파리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카라칼라의 증오는 없어지지 않았다. 결국 카라칼라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추방시킨 아내를 죽여버렸다.
2.2.8. 브리타니아 원정과 말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말년은 우울했다. 플라우티아누스의 죽음으로 그가 죽은 뒤 로마에서 골칫거리가 될 걱정 하나는 해결되었을지 모르지만, 장남 카라칼라와 차남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사이의 반목이 매우 심각했다. 동복형제인 두 사람은 세베루스와 율리아 돔나가 더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사이가 심각하게 나빴고, 두 후계자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사이 나쁜 세베루스의 두 아들의 이러한 적대감을 부추겼다. 추종자들은 각자 두 형제의 비위를 맞춰 아부할 뿐만 아니라, 한쪽을 즐겁게 하고 다른 쪽을 격분시킬 만한 일을 계속 찾아내 그들을 서로 싸우게 만들었다. 브리타니아에서 문제가 발생하자 세베루스가 두 아들을 데리고 원정을 나선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208년 세베루스 황제는 칼레도니아(현재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나섰다. 세베루스는 심각한 통풍으로 움직이기가 어려워 가마를 타고 다녀야 했고, 어느 곳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휴식하는 것을 참지 못했지만 그의 강인했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세베루스는 이참에 브리타니아 섬 전체를 공략함으로써 끊임없는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세베루스는 제국의 내정을 게타에게 맡겨 브리타니아 후방에 남겨두고 자신은 카라칼라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지나 스코틀랜드로 들어갔다. 칼레도니아인들의 끈질긴 게릴라 공격에도 불구하고 2년 뒤인 210년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북쪽으로 멀리 국경선을 넓히며 칼레도니아인들과 협정을 맺는 조건으로 중부 저지대의 권리를 넘겨받았다. 그러나 세베루스는 이제 나이가 들었고 직접 일을 지시하는 것은 점점 힘들어졌다.
카라칼라는 브리타니아 원정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고 원정을 단지 군대의 신임을 얻는 기회로 여겼다. 헤로디아누스에 의하면 카라칼라는 오래 앓기만 하고 빨리 죽지 않는 아버지를 골치 아프고 성가신 존재로 생각했으며, 좀 더 빨리 아버지를 제거하기 위해 의사와 시종들을 설득한 패륜적인 인간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과 아버지가 병사들보다 앞서 말을 달리는 사이 그의 등을 찌르려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세베루스는 위험을 알아차리고 말 안장에서 몸을 돌렸고, 외침 소리에 겁을 먹은 카라칼라는 계획을 포기했다고 한다. 칼레도니아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세베루스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다시 원정을 실시했으나 때마침 중병에 걸려 원정은 중지되었다. 세베루스 황제는 에부라쿰(현재의 요크 시)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은 카라칼라는 원정을 이내 중단하고 로마군은 하드리아누스 방벽 남쪽으로 후퇴했다.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로마군이 칼레도니아에 발을 들여놓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211년 2월 4일에 65세의 나이로, 스코틀랜드 정복 계획을 미완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 군인들을 부유하게 해주고 다른 모든 사람은 무시하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24] 이 유언의 전반부는 지켜지지 못했으나 후반부는 상당히 충실하게 이행되었다. 이어서 '나는 모든 것을 했다. 원로원 의원도 했고 변호사도 했다. 집정관도 했고 대대장도 했다. 장군도 했다. 그리고 황제도 했다. 국가 요직은 모두 거쳤고, 임무를 충실히 했다고 자부한다. 허나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그 모두가 다 헛된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말은 자신의 왕조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깨달은 데서 온 것으로 풀이된다. 두 아들은 군사 작전을 중단하고 아버지의 유골을 가지고 로마로 돌아갔고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했다. 곧이어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했다.
3. 평가
2세기 후반 무렵 숫자가 줄어들고 있던 전통적인 로마엘리트 출신 황제답게 그 능력은 상당히 훌륭했고, 실제로 평가가 훌륭한 명군이다. 먼저 세베루스는 즉위 후 스스로를 군인황제라고 했던 사람답게 정치적 역량과 상황 파악 능력에서 동시대 경쟁자들과 비교해 매우 뛰어났다. 그가 로마 입성 후 정통성을 위해 내세운 페르티낙스가 어떤 이유 때문에 몰락했고, 왜 마키아벨리, 디오 카시우스 등에게 까였는지 생각하면 세베루스는 매우 기민하고 영리한 사람이었다. 또 그는 군인황제를 자처한 원로원 출신 황제 임에도 군사적인 역량이 상당했던걸로 보인다. 제 2 파르티카 군단을 이탈리아의 알바에 주둔시켜 전략적 예비대 및 기동군 역할을 하게 한 것은 상당히 진보적인 군사 배치였으며 이러한 움직임과 아이디어가 모여서 후기 로마의 황제를 따라다니며 적을 격파하는 전문 야전군이 탄생하게 된다. 또한 두 차례의 파르티아 원정을 성공시켜서 전략적 요충지 북부 메소포타미아 속주화를 결정한 것도 세베루스 황제였다.정적들을 상대로 한 내란에서든 이민족들을 상대로 한 외국 땅에서의 전쟁에서든 누구도 그와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18년간 제국을 통치한 뒤 어린 아들들이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고, 그들에게 이전의 어떤 황제보다 큰 부와 무적의 군대를 물려주었다. - '''로마 시대의 역사가 헤로디아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능수능란하게 군을 활용해 권위를 세운 다음, 혼란한 정국을 평화롭게 만든 황제로 인정받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통치 스타일은 통치계급인 원로원 계층에게 비판받았다. 이유는 내전 때 알비누스를 지지하는 원로원과 척을 지게 되면서[25] 도미티아누스가 그랬듯이 자신의 기반인 군대에게 지지를 얻어서 통치하려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26]
하지만 세베루스 황제 통치기간은 길었고 이후 원로원이 자신의 지지자로 채워지자 원로원과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제위 후기는 오히려 원로원 의원들이 황제 정부에 많이 포진했고, 다시 원로원 계급이 고위 행정, 군사직을 독점하게 된다(물론 기사계급의 대두는 철인황제 이후로 시대적 흐름이긴 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기에 벌어진 소득없는 마르코만니 전쟁과 안토니누스 역병, 콤모두스 황제의 실정, 이어진 내란으로 거덜난 제국의 재정을 안정시켰다.[27]
황제로서의 지위가 확고해진 후 전형적인 원수정 황제로 제국을 통치했다. 시민들을 위해서 공공사업과 볼거리를 제공했으며, 특별한 축제가 있는 날이 아니면 법정에 늘 참가하여 시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카라칼라가 병에 걸려서 아플 때도 빠지지 않았다). 낙태 금지를 법으로 제정한 것도 세베루스 황제였다.[28]
따라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냉혹한 성품과 종종 나타난 잔혹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내전에 시달리던 로마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준 명군[29] 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만, 세베루스는 후계자 문제에 있어서는 비판받고 있다. 황제 본인이 오래도록 장남 카라칼라에게만 제위 계승권을 인정하고, 차남 게타는 한 단계 낮게 대우했다가 결국 둘에게 같은 제위 계승권을 인정했기 때문인데, 이런 그의 결정은 그의 바람[30] 을 나타내는 것이었지만 장남 카라칼라가 게타를 살해하면서 세베루스 황제가 왕조의 영속을 위해서 노력했던 이미지가 망가지게 된다.
학자들은 게타를 아우구스투스로 격상시킨 건 게타를 보호하고 가족을 지키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카라칼라가 게타를 살해하기 전까지 황제가 다른 사람에게 살해당한 적은 있어도, 공동 통치자에게 살해당한 경우는 없었기 때문인 전례를 생각한 그의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원수정 시기 황제 시해에 관련되어 있던 근위대, 군인들은 세베루스의 바람대로 카라칼라와 게타 두 명에게 모두 충성서약을 하였다.[31][32]
군인들의 봉급을 올려준 것을 비판하는 시각은 전형적인 시오노 나나미의 시각이며 이 부분에서도 평가가 훌륭하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봉급인상 이후 100년 만의 인상이었고 그 동안 조금이나마 인플레이션은 있었다. 로마군사사의 권위자인 Brian Campbell은 세베루스 황제 이전에 미리 했어야 했던 일이라고 평가하였다.[33]
또 세베루스 왕조에서 근위대장의 전횡은 세베루스 황제의 친구 플라우티아누스뿐이었다는 것도 주목을 받으며, 재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외가 친척이며 사돈관계인 플라우티아누스의 몰락은 황제에게 밉보인 후 몰락하는 모양새가 되긴 했다. 그러나 그동안 3세기 군인황제 시대에 묻힌 나머지 세베루스 왕조 존속 기간동안 세베루스와 그 일가는 플라우티아누스를 사례로 든 이들에게 좋은 소리를 못 들었다. 그렇지만 카라칼라 암살 후 즉위한 근위대장 마크리누스는 로마 제국 역사상 최악의 근위대장 세야누스급도 안되고 마크로, 세쿤두스, 클레안드로스, 레토와 별반 다를 것 없었으며, 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근위대장은 황제에게 충성을 다했다[34] . 따라서 3세기의 위기에서 군대의 대두는 세베루스 황제의 정책보다는 원수정 자체의 문제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세베루스가 유능하다고 평가받은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중 그가 좋게 평가받은 것이 있다면 로마 황제가 원수정 아래에서 얼마나 군대를 잘 장악하고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지 알았던 부분이다. 로마 황제들이 근위대 뿐만 아니라 제국 전역에 주둔 중인 군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할 경우 상당한 부담감을 가져야 했던 것은 원수정의 문제점과 게르만족, 사산 왕조의 성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래서 그는 유언으로 두 아들에게 그토록 군대를 강조하고 그들을 통제하고 장악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세베루스 가의 마지막 후계자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명군이긴 했지만 근위대조차 통제하지 못했고, 군의 지지도 온전히 받지 못한 까닭에 게르마니아에서 병사들 손에 암살됐다. 여기서 고려해야 하는 건 황제의 어린 나이도 있었다. 세베루스 왕조에서 초대 황제 빼고는 어린 시기에 즉위해서 전부 20대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전에 그들과 같은 경우는 가이우스(칼리굴라)와 네로 뿐이었고 그들의 최후가 어땠는지 고려한다면 세베루스 왕조의 불운은 어린 황제들이 연달아 즉위한 것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35] .
이후 순수 군인 출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병사들의 손에 옹립되면서 급기야 악명높은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하고 만다.[36]
4. 여담
- 세베루스 스네이프의 이름이 여기서 따왔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르다는 의미의 Sever나 잔인하다는 Severe가 어원이란 말이... 하지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나름 평균 이상의 군주임에도 잔인함과 비열함, 정적들에 대한 무관용, 자신의 측근들의 비리와 악행을 보호해주는 이중성 등으로 유명한 황제인 점을 생각해본다면, 작가가 세베루스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의외로 어원일지도 모른다.
- 황제가 된 이후, 콤모두스를 언급할 때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자식농사를 실패한 것을 지적하면서 비판했다. 그러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장남 카라칼라 또한 오늘날까지 콤모두스와 함께 부자세습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손꼽히는 폭군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세베루스가 죽고 1여 년도 안 되어서 두 아들이 서로 대립하다가, 형이 동생을 죽이고 동생의 친구와 시민 2만 여명을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학살하듯 무참히 죽였다. 따라서 당대부터 오늘날까지 후세 학자들에게 “본인이 살아생전 후계구도 문제로 형제 간의 대립을 격화시켰고, 이후에도 두 아들의 대립도 중재 못 해서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은 생각도 안 하고 남의 잘못만 지적한다.”라고 비난받고 있다.
[1] 제호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에우세베스 페르티낙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LVCIVS SEPTIMIVS SEVERVS EVSEBES PERTINAX AVGVSTVS)[2] 식민지 지배자.[3] 제정 시대를 기준으로 그와 비슷했던 경우의 로마 엘리트 계층으로는 티베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트라야누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가 있다. 하지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활동한 이 당시에는 세베루스처럼 문무에 모두 능통한 정통 엘리트 로마인들은 수가 줄고 있었다고 한다.[4] 만약 간음 혐의로 기소됐다면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아도 이 문제로 매우 고생했을텐데, 세베루스는 별 문제 없이 명예로운 경력 코스를 밞고 원로원 의원에 공식 임명됐다.[5] 안토니네라는 뜻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개인 칭호이자 이들의 일가인 안토니누스 가문 칭호다.[6] 당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휘하에 있었던 제 10 게미나 군단과 제 14 마르티아 빅트릭스 군단 같은 경우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생전에 3차례나 벌어졌던 마르코만니 전쟁을 겪었고, 승전을 거둔 전적이 있는 최정예 군단이었다.[7]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모두 세베루스 가문 사람이며, 디디우스의 어머니는 북아프리카 속주 출신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집안처럼 일찍이 이 일대로 건너온 집안 태생이었다. 물론 외가는 집정관까지 배출한 원로원 계급이었지만..[8] 페르티낙스의 이름을 계승하여 자신의 이름 뒤에 붙이기까지 했다.[9] 세베루스는 본인 가족 중에서는 원로원에 첫 입성한 케이스였다고 해도, 사촌 가이우스 등이 원로원에 먼저 입성한 집안 출신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분명히 있었다.[10] 지금의 터키 이즈니크.[11] 니게르와 2년 동안의 치열한 내전을 하는 동안 원로원의 행태를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12]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그리스 애호가였기 때문에 그리스 출신을 원로원 의원으로 많이 채웠다. 즉 황제의 성향에 따라 변하는게 일반적인 원로원 의원들이었다.[13] 다만 이는 세베루스가 느닷없이 처음으로 실행 한 것이 아니라, 정책의 방향이 아우구스투스 이후로 쭉 그래왔을 뿐이었다.[14] 애초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그 자신이 총독 직을 수행하기 이전에는 법무관으로써 커리어를 쌓고 있었던데다, 황제로 등극하고 나서도 집무시간 대부분을 송사 처리 및 재판 등 법과 관련된 일들을 전부 수행하기도 했다.[15] 어머니는 루키우스 베루스의 누나 케이오니아 파비아인데, 이 여자가 누구냐하면 하드리아누스의 후계자, 양자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장녀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약혼했던 안토니네 황족이었다. 또 그의 아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딸 파딜라였고, 철인황제 생전 마르쿠스 황제가 성품과 재능 등을 이유로 총애한 사위 중 한명이었다.[16] 다행히 세베루스는 플라우티우스만 사형을 언도해 죽였을 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딸 파딜라와 그녀의 자녀들은 죽이지 않고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행동은 안 했다.[17] 트라야누스의 조카 중 한명으로 136년 사망한 네르바, 트라야누스 시대의 원로원 의원인데 136년 사망했다.[18] 푸닉(Punic)은 북아프리카, 특히 카르타고 지역을 일컫는 말이기에 한마디로 북아프리카의 술라라는 뜻이었다.[19] 술라는 기원전 1~2세기의 로마의 혼란이 그라쿠스 형제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대두로 인해 평민파가 득세하면서 원로원이 주도하는 과두정제가 훼손되었다고 생각하였고, 과두정제를 복원하고 원로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숙청을 도구화하였다. 즉, '''세베루스와 술라의 숙청 목적이 달랐던 것이다.''' 또한 술라는 에퀴타스와 평민계급도 참여 가능하였던 배심원 제도를 원로원만 가능하게 돌려놓았으며, 전직 호민관의 권한을 줄여버렸다. 그리고 원로원의 권위를 키우기 위해 원로원 의원정수를 기존 3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다. 술라의 업적으로 보자면, 원로원이 술라를 싫어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해 보일 정도다.[20] 게다가 세베루스가 원로원과 척을 지게 된 결정적인 사건 중 하나는 세베루스의 로마 입성 후 원로원이 기록말살형을 명한 전임황제 콤모두스에 대해 철회한 사건이다. 원로원 입장으로서는 굴욕.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베루스와 콤모두스 간의 사이가 좋았던 것도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세베루스는 콤모두스의 현역 황제시절이자 세베루스 자신이 군단장이었을 때 콤모두스에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고 그 탓에 평소 콤모두스 하면 이를 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세베루스가 왜 콤모두스에 대한 기록말살형을 철회를 명령했냐 하면, 단순히 정치적인 명분을 쌓고 경쟁자인 알비누스의 지지자가 다수 포진해있는 원로원의 권위를 떨어트리기 위해서였다.[21] 아우구스투스(아마도)가 복무 중 결혼을 금지시킨 후 트라야누스 황제, 하드리아누스 황제들이 점점 혼외자식들의 법적권리를 향상시켜주고 있었다. 제국은 이미 수십년 전부터 복무 기간내 결혼 합법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22] 군인모임은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금지시킨걸로 보고 있지만 이미 하드리아누스 시기에 제국 전역에서 생겨난 흔적이 보여진다. 세배루스 황제 때 군인의 봉급이 오르면서 이런 모임이 더 활성화된 것뿐이다.[23] 켄투리온 군단의 최소 단위인 백인대(켄투리온)의 지휘관.[24] 누구도 황제와 자식들끼리 사적으로 아야기한 것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실제 유언이 아니라 디오가 상황을 바탕으로 창작한 것으로 판단한다(유명인의 명언이나 유언이라 알려진 것이 보통 그렇다).[25] 자신의 적을 더 지지한다는데 사이가 좋을 수 없는게 당연했다. 알비누스 지지자들은 세베루스가 니게르와 싸우러 동방으로 간 틈에 빈집털이를 하라고 알비누스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26] 군단의 정치 개입은 가까이는 원수정 시기, 멀리는 공화정 후기부터 시작된 것이다. 카이사르같은 군벌, 세야누스같은 근위대장은 말할 것도 없고, 네 황제의 해에서 보여준 게르마니아, 도나우 군단의 행보, 네르바 시기 근위대의 준동만 봐도 알 수 있다.[27] 세금을 신설하고, 파르티아 원정으로 금은보화를 가져왔고, 내전에서 반대파의 재산을 몰수했다. 옥타비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의 행보와 상통하는 바가 많다.[28] 태아인권의 존중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가부장제 강화의 목적이었다고 판단된다.[29] 후에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그 유명한 군주론에서 세베루스를 성공한 로마 황제의 예시로 들며, 그가 주장한 짐승의 방법, 곧 사자의 사나움과 여우의 교활함을 가장 잘 활용한 황제라고 평가했다.[30] 세베루스 황제가 내전을 극복하고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내건 슬로건은 화목한 가족이었다. 그래서 율리아 돔나, 카라칼라, 게타와 같이 가족 사진처럼 나와 있는 많은 조각품을 세웠다. 물론 카라칼라가 게타를 죽인 이후에 게타 얼굴을 파버렸지만...[31] 게타 살해후 카라칼라가 제 2파르티카 군단에 찾아갔을 때 "우리는 카라칼라와 게타 모두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면서 기지문을 열어주지 않았다.[32] 이후 사례금을 준다는 약속을 하는 카라칼라를 지지했다. 단순히 사례금 문제는 아닌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내고 있던 군인들에게 남은 세베루스 왕조의 남자는 미워도 카라칼라 뿐이었다.[33] 세베루스의 로마군은 내전을 두 번 치뤘고 큰 해외 원정을 3번이나 했다.[34] 엘라가발루스 황제의 근위대장도 황제와 운명을 같이하였다[35] 네로의 경우에는 그의 시대 대부분을 근위대장으로 있던 티겔리누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는 모두 동시대인들의 기준에도 함량미달이었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무덤을 팠다는 견해에 여지가 없다는 평을 받고 있다. 반면 가이우스(칼리굴라)는 선황 티베리우스 시대 후반동안 힘이 커진 마크로와 그 세력을 제거한 뒤, 역으로 아버지의 옛 측근이자 프라이토리아니의 입장을 대변한 카이레아, 루푸스 등이 황실관료, 일부 원로원과 공모해 암살됐기 때문에 세베루스 왕조의 어린 황제들의 실패사례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36] 그래서 근현대의 로마 역사서 중 높은 평가를 받는 프리츠 하이켈하임의 '로마사'에서는 "세베루스 왕조가 그에 버금가는 황제를 배출하지 못한 것이 로마의 불운이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사실 세베루스 왕조의 일원들 중에 능력이나 업적에서 그나마 가장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버금갈만한 사람은 그의 남자 후손들도 아니고 셉티미우스의 '''처제'''이자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이고, 카라칼라와 게타 형제의 '''이모'''이며 엘라가발루스와 알렉산데르의 '''외할머니'''인 율리아 마이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