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비스 전투

 

'''니시비스 전투'''
Battle of Nisibis
[image]
로마군이 미리 뿌려놓은 마름쇠에 당한 파르티아 카타프락토이를 공격하고 있다.
'''시기'''
서기 217년
'''장소'''
메소포타미아 마르딘 주 누사이빈
'''원인'''
카라칼라 황제의 침공에 대한 파르티아의 설욕.
'''교전국'''
[image] '''로마 제국'''
[image] '''파르티아 제국'''
'''지휘관'''
[image] '''마크리누스'''
[image] '''아르타바누스 4세'''
'''병력'''
불명
불명
'''피해'''
사상자 다수
사상자 다수
'''결과'''
로마 제국의 패배.
'''영향'''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의 멸망과 사산 제국의 대두.
1. 개요
2. 배경
3. 전투
4. 이후 경과와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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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시비스메소포타미아 북부에 있는 도시 이름으로, 현 터키의 누사이빈(Nusaybin)이다. 로마 제국파르티아-페르시아 양 제국의 국경지대이며 군사, 교역상의 요충지였으므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적이 몇 번 있다.[1] 다만 본 항목에서는 AD 217년의 전투를 설명하고자 한다.
217년 니시비스 근교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로마 황제 마크리누스가 이끄는 로마군파르티아왕중왕 아르더번/아르타바누스 4세(Artabanus/Ardawan IV)가 이끄는 파르티아군이 맞붙은 싸움이다. 양측 군대가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결국 승패를 가리지 못한 채 평화협상으로 마무리되었다.

2. 배경


210년대 초반, 로마에게 수 차례 패배하고 중앙권력이 약해지면서 국력이 점점 쇠약해지던 파르티아는 왕중왕 발라쉬/볼로가세스 5세(Vologases/Balash V)가 죽은 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전이 한창이었다. 볼로가세스 5세의 장남이었던 볼로가세스 6세가 왕중왕이 되었지만, 그의 아우인 아르타바누스 4세가 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와중에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 혹은 과대망상이 심한 - 로마의 젊은 황제 카라칼라가 파르티아를 공격할 낌새를 보이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친형제에게 점점 밀리고 있는데 강대국인 로마와 맞설 방도가 없었던 볼로가세스 6세는 카라칼라의 이런저런 요구들을 모두 들어주면서 최대한 전쟁을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216년 볼로가세스 6세는 아르타바누스 4세와의 싸움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목숨은 살아 도망쳤지만 제국의 주도권은 아르타바누스 4세에게 넘어갔다. 이를 보고 동방 정벌의 기회(?)를 포착한 카라칼라는 파르티아로 쳐들어가서는 아르타바누스 4세에게 그 딸을 아내로 맞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즉 결혼 동맹을 제의한 것이다. 아르타바누스 4세 입장에서는 의심스러운 일이었으나, 막 권좌에 오른 그 역시 로마와의 전면전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동의했다.
군대를 이끌고 별 저항 없이 국경을 넘어온 카라칼라는 여식을 데리고 온 아르타바누스 4세와 만나 파르티아의 황녀와 결혼식을 올렸지만,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어 파르티아 측 하객들을 공격했다. 새신부를 포함한 수많은 파르티아 왕족과 귀족들이 살해당했으며 , 아르타바누스 4세 역시 간신히 목숨만 건져 탈출했다. 로마군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메소포타미아 서부를 신나게 약탈할 수 있었다. 복수심에 불타는 아르타바누스 4세는 있는 병력을 모두 긁어모아 217년 여름 로마군을 공격해 왔지만, 카라칼라는 봄에 이미 암살당한 뒤라 복수는 의미가 없어졌다. 그래도 카라칼라의 지시로 가족들을 학살한 로마군은 건재했으므로 그들에게 복수를 할 의향으로 공세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 회전이 벌어졌다.

3. 전투


세세한 장비나 편제 따위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로마군과 파르티아군의 기본 개념은 카르헤 전투 이래 수백 년 동안 크게 바뀌지 않았다. 즉 로마군은 군단병을 중심으로 보조병을 활용하는 중보병 위주 군대였고, 파르티아군은 카타프락토이와 다수의 경무장 궁기병을 중심으로 한 기병 군대였다. 니시비스 전투에서 맞붙은 양측 군대 역시 이 원칙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로마군은 기본적 대형, 즉 중앙에 군단병을 배치하고 양익에 기병과 보조병을 배치했다. 대신 중보병 대대 사이에 경보병들을 배치하여 치고 빠지는 전술을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양측 군대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양 제국의 최고 지도자들이 대규모 전면전을 벌인 것이고, 로마 제국은 보통 동방 전선에 8개 군단 48,000명을 배치하고 절반 정도의 군단병이 전쟁이 터지면 출전하는 식이었고 여기에 보조병을 모집하여 지원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최소 3만에서 최대 4만 정도로 추측된다. 파르티아군의 규모는 중장기병만 따지면 얼마 되지 않으나 실제로는 징집된 보병이 엄청난 규모였으므로 그보다 더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전투는 파르티아군의 선공으로 시작되었다. 궁기병들이 화살을 퍼붓는 사이 카타프락토이와 낙타 기병들이 정면 돌격을 위해 접근했고, 로마군은 이에 경무장 보조병들을 전방에 배치하여 응수하였다. 이들은 쏟아지는 화살공격에 피해를 입으면서도 계속 전진하다가 카타프락토이의 돌격이 임박했을 때 재빨리 마름쇠를 뿌리고 경상자들을 데리고 후퇴, 카타프락토이에 큰 피해를 입혔다. 마름쇠에 걸린 파르티아 기병들이 여기저기서 넘어지고 심지어 마름쇠에 찔려 죽기까지 하자, 로마군은 바로 보병들을 투입해서 낙마한 기병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에 파르티아군은 일단 잔존 병력을 후퇴시킨 뒤 우월한 기동력을 활용하여 로마군의 측면을 공격했고, 로마군은 이에 맞서 전통적 보병 대열을 포기하고 궁수와 기병을 동원해서 막고 보병은 전열을 얇고 길게 퍼뜨려 대항하는 한편, 계속 마름쇠를 뿌려서 진격 속도를 늦췄다.
이후 양측 군대는 특별한 전술적 우위 없이 소모전을 반복했다. 파르티아군이 보병까지 투입하여 공세를 이어갔으나 숙련도가 낮은 농민 징집병들은 실질적으로 로마군에 피로와 소수의 사상자만 보탰을 뿐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 못했다. 그러나 로마군도 이미 많이 지친데다 병력 면에서는 확연한 열세였으므로[2]사흘 동안 온 들판에 시체가 즐비했다고 할 정도로 피비린내나는 전투를 반복했으나 좀처럼 서로를 압도하지 못했다. 이처럼 전투가 고착화되자 마크리누스와 아르타바누스 4세는 둘 다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마크리누스는 제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됐으므로 한시바삐 파르티아 문제를 정리하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야 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정적들의 동태도 심상치 않았다. 한편 아르타바누스 4세의 경우 파르티아 자체가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아니라 다수의 봉건 영주들로 이루어진 국가였기 때문에, 아무리 왕중왕이라 해도 소득은 없고 피해만 큰 상황에서 군대를 오래 붙잡아 둘 수가 없었다. 결국 먼저 손을 내민 것은 마크리누스였는데, 그는 아르타바누스 4세에게 카라칼라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며 점령한 영토들을 포기하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4. 이후 경과와 의의


이걸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문제는 마크리누스가 맺은 협정이 사실상 로마의 패배를 알리는 굴욕적인 협상이다 보니 로마 내에서 반발이 심했다.[3] 특히 마크리누스가 맺은 굴욕적인 강화 협상 내용이 알려지자 그의 인기, 특히 군인들 사이에서의 인기가 급락했다. 그 틈을 타 카라칼라의 이모인 율리아 마이사가 자기 손자 엘라가발루스를 카라칼라의 핏줄이며 적법한 후계자라고 내세웠다. 결국 엘라가발루스가 황제로 즉위하자 귀족들과 군인들이 모두 지지하고 나섰고, 마크리누스는 제대로 맞서지도 못한 채 도망치다 붙잡혀 죽음을 맞았다.
그나마 이긴 쪽인 아르타바누스 4세의 운명 역시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우선 이 전투에서 파르티아군도 엄청난 병력을 잃었으며, 게다가 방위선에 배치된 군단의 절반과 보조부대가 건재한 로마군 때문에 로마로 쳐들어가 복수를 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파르티아의 중앙 권력이 왕위 계승과 로마와의 전쟁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사이, 파르스 지방의 아나히타 사제 집안이었던 사산 가문이 점차 주변 지역을 공략하며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아르타바누스 4세는 사산 가문의 바바크(Papak)가 자기 아들 샤푸르(Shapur)를 파르스 지역의 부왕(副王)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자 이를 거절했고, 샤푸르의 형제 아르다시르가 왕위에 오르자 후제스탄의 부왕으로 하여금 그를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아르다시르가 승리하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파르스로 쳐들어갔으나, 세 차례의 격전 끝에 결국 역관광당하고 전사했다. 이로써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는 멸망하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새로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상의 경과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니시비스 전투의 가장 큰 수혜자는 사산 가문과 아르다시르 1세, 엘라가발루스라 봐도 무리가 아니다. 지금까지 로마에 대해 수세적 입장에 있던 파르티아와 달리 사산 왕조의 아르다시르 1세와 그의 아들 샤푸르 1세는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다.[4] 결국 로마군이 이들을 격퇴하긴 했지만, 에데사 전투에서 엄청난 참패를 당하고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로잡히 굴욕을 당하는 등 큰 대가를 치뤄야 했다. 물론 사산 왕조 역시 나중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반격으로 큰 패배를 당하고 점령한 로마의 영토들을 다시 토해낸다. 그러나 사실상 사산조와의 전쟁을 전담했던 동로마의 국력만으로는 사산조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으므로, 결국 이 전쟁은 사막의 초승달 괴물이 등장하기 전까지 계속된다.
하여튼 카라칼라의 공격은 분명 로마의 최대 경쟁자이면서도 공생과 평화적 해결이 가능했던 파르티아에게 큰 타격을 주고, 그 결과 더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는 좋지 못한 것이었다. 이처럼 장기적이고 대국적인 안목 없이 당장의 전과와 승리에만 급급했던 행동이 승리는 고사하고 쌍방 lose-lose의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이 니시비스 전투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의의일 것이다. 한마디로 승자없는 싸움이었던 셈.

[1] 영어 위키백과 기준으로는 5번이다. # 이에 따르면 교전 내지는 회전(battle)이 5개 중 처음이자 본 항목의 이 전투고, 그 뒤의 4번은 모두 본 전투의 로마측 승리로 로마령이 된 니시비스를 사산 왕조 측에서 쳐들어 와 뺏고 막으려 하는 공성전 내지는 포위전(siege)이다.[2] 사료에 기록이 없으나, 실제 파르티아군과 로마군의 전투 양상을 보면 로마군이 병력 3만을 동원하면 파르티아군은 중장기병 등 기병 1~2만에 징집병 6만~8만을 동원하는 식이었다. 니시비스 전투도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3] 특히 로마는 파르티아보다 압도적인 국력을 가졌는데, 이런 협정을 맺은 자체가 정말 자존심 상할 일이다. 특히 파르티아를 상대로 로마가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할 수 있었는데도 정적들 족친다고 그런거 신경 안 쓰고 했으니, 오히려 정적들에게 마크리누스를 족칠 명분을 제대로 준 셈이다. 게다가 로마군이 패했다면 모를까, 카라칼라가 암살당하고 휘하 지휘관들의 수준이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파르티아군에게 끝까지 밀리지 않았으며, 마크리누스가 황제 욕심에 뻘짓만 안 했다면 또 카라칼라가 이미 죽은 뒤이므로 이런 기막힌 협정을 맺을 이유가 없었다.[4] 왜냐하면 봉건제라서 왕권이 매우 약한 파르티아와 달리 사산 왕조는 중앙집권에 꽤 공을 들여 왕권이 파르티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기 때문이다. 즉, 사산조 페르시아는 파르시아보다 장기전에서 싸우기에 더 좋은 정치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