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철장

 



麥鐵杖
(? ~ 612)
수나라의 장수.
시흥 사람으로 걸음이 빨라 하루의 500리를 걸었다고 하며, 해마다 기근이 들자 산에 들어가 도적이 되었지만 광주 관부에 붙잡히면서 진(陳)나라 궁중의 하인이 되었다가 남서주로 달려가 부자의 토성에서 재물을 훔치고 날이 밝기 전에 도성에 돌아와 부역에 나갔다. 이 일이 발각되었지만 맥철장은 제 시간에 돌아왔기에 이 행위를 믿을 수 없다고 여겼으며, 상서 채징이 궁중의 노복들을 불러 남서주로 보내 조회 때 회답을 받기 위해 소임을 감당할 사람을 찾아 황금 100냥을 상으로 주겠다고 하자 맥철장이 이를 맡았다.
맥철장은 2일 후에 제 시간에 도착했고 이로 인해 절도 사건이 밝혀졌음에도 진숙보는 이런 기인을 다시 없을 것이라 여겨 죽이지 않았으며, 진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양소의 군대에 들어갔다. 590년에 강동에서 왕문진, 고지혜, 심현증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수많은 자들이 대도독을 자칭해 반란을 일으켰는데, 양소가 행군총관으로 임명되어 토벌군을 이끌고 장강을 건너려고 했다.
이 때 맥철장은 양소의 명령으로 묶은 볏짚을 머리에 이고 밤 중에 떠다녀서 강을 건너가 반란군들을 엿보다가 다시 갔다가 사로잡혔으며, 양소가 무기를 주어 30명을 파견했지만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맥철장은 적의 칼을 빼앗아 막는 자들의 목을 마구 베었다가 그들의 코를 베어 가슴에 품고 돌아왔다. 양소가 이 일을 기이하게 여겨 맥철장은 양소가 조정에 상주해 의동삼사에 임명되었으며, 602년에는 서돌궐의 사력기근이 동돌궐의 계민가한을 공격하자 거기대장군에 임명되어 양소를 따라 참전했다.
돌아와서는 주국장군으로 임명되어 자사가 되었으며, 조정에서 일부는 그를 학식이 없는 자로 보았고 관리 심사를 맡은 두위가 밀은 무슨 성이냐고 묻자 밀은 콩과 동류이면서 그대 두(竇)씨가 이상하게 여길 것이 뭐냐고 묻자 조정 대신들은 그를 깔보지 못했다. 수양제가 즉위하자 좌둔위대장군으로 승진했고 612년에는 고구려를 정벌하는 원정에 참여했다가 요수에 이르러 수의 군사들이 강가에 가서 크게 벌려놓았다가 고구려의 군사들이 강에서 저지하면서 방어하자 건널 수 없는 상태였다.
맥철장은 죽기를 각오하고 선봉을 요청해 서쪽 기슭 세 길에 부교를 완성하자 마침 대규모로 도착한 고구려의 군사들을 향해 강물에 뛰어들어 맞붙어 싸웠으며, 고구려의 군사들이 높은 곳에 올라 공격하자 수의 군사들은 언덕에 오르지 못했다. 이 때 죽은 사람이 많았고 맥철장도 전사했으며, 그가 죽자 숙공(宿公)으로 추증되었다. 세 아들이 있었으며 장남 맥맹재가 숙국공을 세습하였고 무분낭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수당교체기 시기 강도(江都)의 변란으로 양제 및 황족들과 대신들이 살해되고 우문화급이 정권을 잡자 이를 보다못해 전사웅의 아들인 전걸 등과 함께 복수를 위해 일을 계획하였다가 누설되어 순절하였으며 수서(隋書)에서는 부자로 이어진 충절을 찬하였다.
태평광기에서는 소주 옹원 사람으로 나오고 남해 지방에 있는 맥씨들이 그의 후예라고 한다.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수나라 제일의 장수라는 소리를 듣는 장수였으며, 철퇴를 주무기로 삼는다.
맹차전사웅 등의 자신들의 부장이 강이식에게 패하며 전사하자 수 양제가 말림에도 불구하고 나갔다가 자신들의 부장들보다 더욱 짧은 시간 안에 강이식에게 목이 잘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