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 전투

 


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3.2. 오스트리아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7년 9월 7일 슐레지엔의 모이에서 오스트리아군과 프로이센군이 격돌한 전투. 수적으로 2배 이상 우세한 오스트리아군이 승리했다.

2. 배경


1767년 6월 콜린 전투에서 패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라하 공략을 포기하고 프로이센으로 철수했다. 이에 로트링겐 공작 카를 알렉산더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추격에 나서 9월에 작센을 전격 침공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적이 작센을 탈환하는 걸 저지하기 위해 베베른 공작 아우구스트 빌헬름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을 작센에 남겨뒀다. 또한 한스 카를 폰 빈터펠트에게 별동대를 맡겨서 베베른 공작을 지원하게 했다. 하지만 병력과 보급품 부족으로 곤란을 겪은 베베른 공작은 적과 정면 대결하는 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괴를리츠로 철수하면서 빈터펠트의 군단은 모이 근처의 나이세 강 건너편에 남겨뒀다. 한편 카를 알렉산더는 작센에 들어선 뒤 각지에 척후병을 보내 적의 동태를 살펴보게 했다. 그러던 중 모이 근처에 만여 명 가량의 적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한 그는 기병대 지휘관 프란츠 레오폴트 폰 나르다시에게 이들을 격퇴하게 했다. 이리하여 9월 6일, 양측은 모이에서 격돌한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3.2. 오스트리아군



4. 전투 경과


9월 6일 오전 6시, 나르다시의 군단은 경보병대를 전방에 배치하고 그 뒤에 두 개의 대열로 배치되었다. 우익은 헤름스도르프 마을에 주둔했고 좌익은 로스워서에 주둔했다. 그리고 그렌저 경기병대는 3개 부대로 나눠져서 한 부대는 우익에 배치되었고 한 부대는 좌익에 배치되었으며 나머지 한 부대는 최좌익에 배치되어 후사르 2개 연대와 척탄병 분대들과 함께 했다. 한편 베베른 공작은 짙은 안개가 껴 있는 상황에서도 적의 총기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을 보고 나이세 강 우측 둑에서의 적군의 이동을 감지할 수 있었지만 좌측 둑에서의 오스트리아군 이동은 감지하지 못했다. 베베른 공작은 부관 한 명을 보내 빈터펠트에게 그의 관찰을 알리고 나이세 강 좌측 둑에 있는 자신의 부대에게 전투 준비를 지시했다.
이윽고 해가 떠오르자, 후사르 분대와 그렌저 경기병대가 오베르-모이에 주둔하고 있는 적 기병대를 향해 진군했다. 오스트리아군 기병대는 수적 우위를 앞세워 적을 밀어붙였으나 야겔스베르크에 배치된 프로이센 포병대의 포격을 받고 잠시 진격을 중단했다. 이때 빈터펠트는 극 우익의 야겔스베르크에 포진한 군대를 제외하고는 전진 초소를 세워두지 않았다. 그는 프로이센군 병사들이 탈영할까봐 본진에 가까이 주둔하게 했다. 따라서 나르다시의 오스트리아군이 그들의 진지를 향해 진격하기 생각했을 때, 프로이센군은 야겔스베르크에 침입한 일부 오스트리아군을 제외하고는 적의 움직임을 확인하지 못했다. 이렇게 적의 시선이 야겔스베르크에 쏠리는 사이, 오스트리아군은 적을 향해 소리없이 진군했다.
오전 7시, 빈터벨트 장군은 란데스크론 언덕에서 베베른 공작과 접견했다. 베베른은 적이 나이세 강 우측 둑에 공격을 집중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빈터벨트는 오히려 적의 주목적은 베베른의 진지를 공략하는 것이며 우측 둑에서의 공격은 단순한 속임수라고 생각했다. 빈터펠트는 군대의 위치를 재정비하고 레오폴드샤인을 점령해 그의 좌측면을 커버할 게획을 세웠다. 빈터펠트 장군은 장교 및 참모들을 소집해 이러한 대열 변경을 준비하게 했다. 그러던 오전 9시, 프로이센군은 헤름스도르프와 쿠나에서 오스트리아 정규보병대가 진격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후 오전 10시, 오스트리아 정예부대가 마침내 갈겐게르크 부근에 도착해 적과 대치했고 11시에 오스트리아 포병대가 갈겐게르크 평야에 배치되었다.
오스트리아 포병대는 즉각 포격을 개시했고, 나르다시 장군은 척탄병들과 좌익의 그렌저 부대에게 2개 프로이센 보병대대가 방어하고 있는 야겔스베르크를 급습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 척탄병들은 동쪽에서 야겔스베르크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고 예비군단과 정규 5개 보병대대가 뒤따랐다. 이에 동시에 그렌저 경기병대는 남쪽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야겔스베르크 수비를 담당하고 있던 프로이센군은 재빨리 무기를 들고 지정된 위치를 점유한 뒤 언덕 중턱까지 올라온 적에게 일제 사격을 가해 간신히 격퇴했지만 수적으로 워낙 열세라서 곧 밀릴 것이 분명했다. 한편 빈터펠트는 여전히 여전히 나이세강 좌측 둑에서 그의 장교 및 참모들과 의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레오폴드샤인 근처의 프로이센 좌익이 공격받고 있으며 야겔스베르크의 상황도 위태롭다는 보고를 받았다. 마침내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은 빈터펠트는 회의를 취소하고 모든 장교들을 소속 부대로 돌려보내 전투 태세를 갖추게 했다.
빈터펠트는 자신의 진영에 도착한 뒤 전 전선을 남쪽으로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다. 뒤이어 그는 가장 가까운 4개 보병대대를 거느린 칸나허 소장에게 2개의 종대를 편성해 자신을 따라오라고 명령하고 야겔스베르크 방향으로 진격했다. 이무렵 오스트리아 척탄병 부대와 경기병대는 야겔스베르크 언덕에 대한 공격을 다시 시작해 마침내 적을 물리치고 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와 동시에 그렌저 기병대는 모이 마을을 습격했고 좌익의 프로이센군을 교란시켰다. 오스트리아 척탄병 부대는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다가 마침 야겔스베르크 후방에 도달한 치텐의 후사르 기병대와 마주치자 방진을 쳤다. 한스 요아힘 폰 치텐은 적의 전의가 굳건한 것을 보고 함부로 돌격하지 않았다. 뒤이어 야겔스베르크에 도착한 빈터펠트는 이미 고지가 공략당한 것을 보고 흩어진 병력을 수습한 뒤 고지 탈환을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프로이센군의 결사적인 공세에 직면한 오스트리아군은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빈터펠트는 카를 폰 베베른 왕자와 함께 전황을 살펴보면서 앞으로 그들이 어떻게 군대를 통솔할 지를 논의했다. 그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오스트리아군 병사가 쏜 탄환 하나가 빈터펠트의 가슴을 꿰뚫은 것이다. 빈터펠트는 낙마해 치명상을 입었고 병사들은 그 광경을 보고 동요했다. 하지만 왕자는 즉시 지휘권을 장악한 뒤 병사들의 동요를 수습한 후 만테우펠 보병대와 트레스코프 보병 연대에게 3개 척탄병 대대의 지원을 받으며 야겔스베르크 언덕을 공략하게 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적의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야겔스베르크 언덕에서 밀려났다.
얼마 후 오스트리아 중앙의 제1선 보병대가 야겔스베르크에 대한 2차 공세를 개시했다. 이후 격렬한 총격전이 이어졌고, 베베른 공작은 말 한 마리를 잃었으며 척탄병 대대 중 하나를 지휘하고 있던 안할트-데사우 백작은 포로가 되었다. 이무렵 빈터펠트가 이전에 보냈던 부관 한 명이 오베르-모이에 있는 일부 보병대에게 야겔스베르크로 행진하라는 지시를 전달했다. 이에 그들은 야겔스베르크를 향해 행진했고, 그 바람에 오베르-모이의 방비가 허술해졌다. 기회를 포착한 오스트리아 후사르 기병대와 그렌저 경기병대는 프로이센 진영의 남서쪽 측면에 돌격을 개시했다. 이때 후방에 있던 베베른 공작은 괴를리츠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대거 나이세 강을 건너 빈터펠트를 지원하게 한 후 란데스크론 고원으로 가서 오스트리아군의 위치를 관찰했다. 또한 그는 슐츠 장군과 잉거슬벤 장군에게 빈터펠트가 밀릴 경우 추가 대대를 파견해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야겔스베르크 일대의 오스트리아군은 가까스로 북동쪽 언덕에 야전포대 몇 개를 설치했다. 이후 오스트리아의 새로운 대대가 계속해서 야겔스베르크 고원에 도착했고, 프로이센군은 이들과 한 시간 동안 격전을 벌인 끝에 수적 열세로 인해 후퇴했다. 만테우펠 보병대 대열은 오스트리아군의 거센 공세에 직면해 갈수록 가늘어졌고, 트레스코프 보병대는 슐레지엔 북부 출신의 카톨릭 신자로 구성되어 있어서 애초에 개신교 국가인 프로이센에 대한 충성심이 약했기에 탈영자가 속출했다. 여기에 칸나허 소장은 부상을 입고 포로 신세가 되어버렸다. 결국 오후 1시경, 베베른 왕자는 야겔스도르프에서 퇴각했다. 나르다시는 언덕을 점령한 오스트리아군 척탄병 부대를 여러 대열로 배치하고 고지에 야전 포대를 설치했다.
오후 2시경, 프로이센군 증원부대가 야겔스도르프에 도착했다. 마침 야겔스도르프 언덕에서 도주하고 있던 7개 프로이센 대대는 증원군을 만나자 전열을 재정비해 나이세강 우측 둑에 주둔했다. 이무렵 오베르-모이에서의 전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치텐 공작은 좌익의 보병대를 지원하기 위해 35개 기병 분대를 두 개의 대열로 배치한 후 그렌저 경기병대 및 후사르 기병대와 맞서 싸웠다. 이윽고 오스트리아 보병대가 도착해 공격을 개시했지만 포병들의 지원없이 진행된 이들의 공격은 1시간여에 걸친 전투 끝에 실패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예비군단이 오베르-모이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자 상황은 급변했고, 프로이센군은 수적인 열세로 인해 점점 밀려났다.
한편 나이세강 좌측 둑의 데우치-오시그에 포진한 오스트리아군 보병대는 베베른 공작이 추가 병력을 투입하는 걸 막기 위해 레슈비츠에 있는 프로이센 전진기지를 공격해 물리친 후 레슈비츠 마을을 점령한 뒤 레슈비츠 서쪽에서 지타우로 가는 도로를 점거했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은 나이세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수리했고, 오후 4시에 카를 알렉산더가 파견한 척탄병 8개 분대와 보병대가 그 다리를 건너와 나르다시의 군대와 합세했다. 이후 그들은 오후 5시까지 괴들리츠에 포진한 적과 포격을 주고받았다. 이렇듯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프로이센군은 나이세 강을 넘어 괴를리츠로 철수했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은 나이세강을 사이에 두고 적과 대치하다가 자정 무렵에 야영지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모이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프로이센군은 이 전투에서 장교 51명과 병사 1800명(포로 330명 포함)을 잃었고 부대기 7개와 5개의 대포를 상실했다. 또한 392명이 전투 다음날까지 탈영했다. 그리고 치명상을 입은 빈터펠트 중장은 9월 8일 오전 3시경 괴를리츠에서 사망했다. 한편 오스트리아군은 79명의 장교와 1,49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나르다시 장군은 지휘 도중에 경상을 입었다. 며칠 후인 9월 10일, 베베른 공작은 작센을 떠나 슐레지엔으로 퇴각했고 오스트리아군은 작센의 일부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를 장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