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카를 폰 빈터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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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로이센의 군인. 프리드리히 대왕의 장성으로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빈터펠트는 1707년 4월 4일 포메른의 반슬로우에서 태어났다. 그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빈터펠트와 크리스틴 엘리사벳 폰 말트찬의 아들이었다. 빈터펠트는 어렸을 때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했고, 이 때문에 장성한 뒤에도 다른 장성들은 잘 구사하는 프랑스어를 제대로 습득하지 못했다. 1723년, 빈터펠트는 삼촌인 카스퍼 디틀로프 폰 빈터펠트 소장이 지휘하고 있는 흉갑기병 연대에 배속되어 2년간 복무했다.
1725년, 빈터펠트는 기병 연대의 기수로 긍격했다. 그의 건장한 신장과 군인다운 담대한 태도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관심을 끌었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국왕의 개인 보좌관이 되었다. 1732년, 빈터펠트는 러시아군의 조직을 돕기 위해 선발된 부사관 일행과 함께 러시아로 보내졌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지내면서 사촌 줄리 폰 말트찬과 사랑에 빠졌고 곧 결혼했다. 이후 1734년 라인강 전선에 보내진 프리드리히 황태자와 친해진 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황태자 사이에서 곤경을 겪곤 했지만 언제나 황태자의 변함없는 친구로 남았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년 프리드리히 황태자가 황위를 계승했다. 빈터펠트는 이 덕분에 소령으로 승진하여 국왕의 참모진에 소속되었다. 같은 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을 때 대왕과 함께 슐레지엔 침공 작전을 이끈 그는 1741년 4월 10일 몰비츠 전투에서 척탄병 대대를 이끌고 전투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5월 17일 로츠클로스 전투에서 프로이센 후사르들을 이끌고 오스트리아 후사르와 맞붙어 승리를 거두었다. 1742년 3월 5일 빈터펠트는 공로를 인정받아 대령으로 진급되었고, 이후 대왕을 대신하여 장군들에게 대왕의 견해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깊은 총애를 받았으나 그만큼 그를 질시하는 정적들도 늘어났다.
이후 대왕과 함께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중요한 조언자로서 활약한 빈터펠트는 1745년 5월 23일 소장으로 승진했다. 또한 1745년 6월 4일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11월 24일 헨넬스도르프 전투에서도 작센, 오스트리아군에 대한 기습 작전을 성사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 후 빈터펠트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 사이 10년 동안 기밀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대왕 곁에 있었다.
2.3. 7년 전쟁
1756년 5월, 빈터펠트는 카케 보병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6월 8일 중장으로 진급되어 검은 독수리 훈장을 수여받았다. 8월 21일, 그는 콜베르크 주지사로 임명되었고 프로이센을 공격하려는 연합군에 관한 정보 수집과 전쟁 준비에 매우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는 대왕에게 선제 공격을 진언했고, 대왕은 그의 의견을 따라 오스트리아를 치기로 결정했다. 빈터펠트는 프로이센군의 작센 침공에 참가했으며 피르나에서 작센군이 항복하는 걸 지켜봤다. 이때 빈터펠트는 대왕에게 작센군을 강제로 편입시키지 말 것을 진언했지만 대왕은 듣지 않고 1만 8천 명에 달하는 작센군을 프로이센군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프랑스로 도주해 신편 작센 군단에 소속되어 프랑스군의 작전에 항상 동원되었다.
1757년 프로이센군이 보헤미아 침공을 진행했을 때, 빈터펠트 역시 대왕과 함께 프라하로 향해 진군했다. 그해 5월 6일 그는 프라하 전투에 참가하여 목에 총상을 입는 중상을 입었으나 목숨을 건졌고, 6월 18일 콜린 전투에서 패한 뒤 군대의 철수를 총지휘했다. 그러나 그는 그 과정에서 대왕의 친동생 아우구스트 빌헬름, 베베른 공작 아우구스트 빌헬름, 한스 요아힘 폰 치텐 등과 갈등을 빚었고, 장군들은 빈터펠트가 대왕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며 헐뜯었다. 급기야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가 그와 갈등을 빚다가 군대를 떠나버리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의 빈터펠트에 대한 지지는 변함 없었다.
이대로 간다면 프로이센군은 내부분열로 와해되었을 수도 있었지만, 운명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했다. 1757년 9월 7일, 빈터펠트는 모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과 맞서 싸웠으나 수적인 열세로 밀리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고 패퇴한 뒤 다음날인 9월 8일에 숨을 거두었다. 향년 50세.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담하며 "나는 다시는 빈터펠트와 같은 이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왕의 친동생 프리드리히 하인리히는 회고록에서 빈터펠트를 부도덕하고 오만하며 부정직하고 무능한 간신이었다고 비난하며 그가 일찍 죽은 것이 프로이센에게 다행이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