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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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전투 후 자신의 패배를 곱씹고 있는 프리드리히 대왕. 율리우스 슈레이더(Julius Schrader) 작.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7년 6월 18일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 프라하에서 동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콜린(Kolín)에서 프로이센 왕국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맞붙은 전투. 전쟁 초반 프라하를 점령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등 이전까지 승승장구했던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 전투에서 처음으로 패했고, 이후 프로이센은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합동 공격에 직면한다.
2. 배경
1745년,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대공을 비롯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러 작위를 계승한 것을 인정하는 대가로 슐레지엔을 획득했다.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리드리히 2세를 향한 복수의 칼날을 갈며 대대적인 군비 증강을 시작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단독으로는 프로이센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지난 전쟁 때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않은 영국과의 동맹 관계를 청산하고 프랑스, 러시아와 연합하는 일명 동맹의 역전을 단행했다. 이렇게 되자 프로이센은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라는 강대국들에게 3면이 둘러싸이는 형국이 되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영국과 연합해 이 3국 연합에 맞서고자 했다. 이후 양대 세력간의 갈등은 심화되다가 1756년 프랑스 해군이 영국령 마요르카 섬을 공격하면서 7년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 프리드리히 대왕은 가만히 있다가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에게 협공당할 게 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프리드리히는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하고, 반 프로이센 동맹의 중심이 오스트리아인만큼 오스트리아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고 협상을 이끌어낸다면 동맹이 저절로 와해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다. 만약 오스트리아가 협상에 응하지 않더라도 전력 손실이 커서 당분간 프로이센을 노릴 수 없을 테니, 그 사이에 프랑스와 러시아를 각개 격파한다면 전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1756년 8월 29일 작센을 기습 공격해서 점거한 후 그곳을 기점으로 삼고 오스트리아를 침공하기로 했다. 작센군은 프로이센군이 자신들을 먼저 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전쟁 초반에 큰 피해를 입고 피르나 근교에서 방어진을 형성한 채 오스트리아군의 지원을 기다렸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1일 프로이센군이 로보지츠 전투에서 작센을 구원하러 오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자, 작센군은 2주 후에 항복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작센의 수도인 드레스덴에 입성했다.
작센을 점령하는데 성공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겨울 동안 병력을 보강한 후 1757년 봄 보헤미아를 침공했다. 이때 프리드리히는 전 병력을 4개 종대로 나눠서 신속하게 진군해 적의 방어선을 뚫고 프라하에 집결했다. 이에 오스트리아군은 황급히 병력을 수습해 프라하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펼쳤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의 병력이 11만 5천명에 달했던데 반에 오스트리아군은 아직 병력이 전부 집결하지 못해서 6만명에 불과했다. 이에 막시말리안 율리시즈 브라운 백작은 프라하의 동쪽에 참호를 파 방어태세를 취했고, 뒤늦게 도착한 로트링겐 공작 카를 알렉산더[1] 는 총사령관을 맡으면서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의 부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적이 전 병력을 결집시키기 전에 승부를 보기로 결심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1757년 5월 6일 적을 향한 공세를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먼저 케이스(Keith) 장군에게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오스트리아군의 후방으로 이동해 적의 퇴로를 끊게 했다. 이후 당장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쿠르트 크리스토프 폰 슈베린 장군[2] 이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에 정찰부대를 보내자고 설득하자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정찰대는 근교의 완만한 녹색 초원지대를 둘러보고 오스트리아군 후방을 공격할 기회라고 보고하였다. 프로이센군은 약 오전 7시경 진군하였고, 약 오전 10시 경 오스트리아군의 사령관들이 그들의 움직임을 미처 알아차리기 전에 성공적으로 공격위치를 잡을 수 있었다. 이에 브라운 백작은 6개의 보병 연대를 보내 동남쪽의 거점을 장악하려 했다. 이윽고 군대 배치를 완료한 프로이센군이 공세를 시작했다.먼저 한스 카를 폰 빈터펠트 장군이 지휘하는 보병대가 선두로 나섰다. 그런데 그들은 얼마 안가 앞서 정찰부대가 둘러봤던 초원 지대가 메마른 땅이 아닌 연못가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결국 프로이센 병사들은 질퍽한 진흙더미를 헤쳐나가야 했고, 이 때문에 적의 반격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던 중 병사들을 독려하던 빈터펠트 장군이 적의 머스켓 총탄에 맞고 쓰러졌다. 이에 병사들이 동요하자, 슈베린은 병사들을 재집결시킨 후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그러나 그 역시 오스트리아군이 쏜 산탄에 몇 차례 부상을 입고 결국 전사했다. 이렇듯 지휘관 2명이 잇달아 중상을 입고 쓰러지자, 프로이센군은 크게 동요했다. 브라운 백작은 적이 혼란에 빠졌다는 것을 눈치채고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 프로이센군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역시 앞장서서 돌격하던 중 프로이센군의 총탄에 맞아 후방으로 후송되었으나 며칠 후에 사망했다. 이렇게 되자 오스트리아군은 통제불능의 상태에서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해 버렸고, 그 바람에 여전히 후방에서 대기 중이던 오스트리아군과 프로이센군과 격전을 벌이던 오스트리아군 사이의 공백이 벌어졌다. 이를 눈치챈 프로이센군이 그 사이를 파고들었고, 결국 로트링겐 공작은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프라하 성채로 철수했다.
이 프라하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승리했지만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는 12,000명이었고 포로는 4,500명인데 반에, 프로이센군의 사상자는 14,000명에 달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라하 성채를 에워싸고 포격을 퍼부었으나 1주일만에 포탄이 성벽을 부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를 중지했다. 4만명이 넘는 오스트리아군이 주둔하고 있고 방어 상태가 강력한 성채를 정면 공격하는 것은 막심한 희생을 초래할 것임을 직감한 프리드리히는 성채 공격을 포기했다. 그 대신, 성채를 에워싸고 모든 보급로를 차단해 적을 굶겨죽이기로 했다. 프리드리히는 4만 명이 넘는 병사들과 7만 5천 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모여 있는 성채 내부의 식량이 얼마 안가 고갈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얼마 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프라하 근처에 이르렀다는 급보를 접했다. 이에 프리드리히는 병력의 일부를 차출해 다운 백작을 저지하고자 했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 보병: 18,000명
- 기병: 14,000명
- 대포: 88문
3.2. 오스트리아군
다운 백작의 오스트리아군 병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기록이 엇갈리는 데 최소 44,000명, 최대 65,000명이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다만 콜린 전투에 동원된 오스트리아군이 프리드리히 대왕이 동원한 32,000명의 프로이센군보다 훨씬 많은 것은 분명하다.
4. 전투 경과
1757년 6월 초,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프라하 인근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급보를 받았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일부 병력을 남쪽으로 파견해 적의 진군을 견제하게 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운 백작이 매사에 조심스러운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아군이 조금만 견제해줘도 다운 백작의 진군을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다운 백작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예상과는 달리 진군을 멈추지 않았고 6월 16일 프라하에서 약 47km 떨어진 콜린 근처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되자 역으로 포위당할 위기에 놓인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운 백작을 상대하기 위해 병력을 이동시켜야 했다. 하지만 프라하 성채에 주둔한 4만 오스트리아군을 견제하기 위한 병력을 남겨둬야 했으므로, 프리드리히 대왕은 약 3만 2천 명의 병력을 동원하기로 했다. 그는 병력 대부분을 좌익에 집중시켜서 적군의 우익 측면을 무너뜨린 후 남은 적을 포위섬멸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중군과 좌익에는 오스트리아군을 견제할 수 있을 정도의 병력만 남겼다.
콜린의 전장은 일반적으로 넓게 펼쳐져 있고, 완만하게 구르는 들판으로 덮여있으며, 그 당시는 꽤나 고급 작물이었던 메밀, 호밀, 옥수수 등으로 덮여있었다. 이러한 콜린의 특성을 잘 알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은 많은 수의 비정규 보병을 숨겨두었다. 또한 오스트리아군은 언덕 위에 있었기 때문에 평지에서 올라오는 적을 쉽게 관찰할 수 있었다. 반면 프로이센군은 빼곡히 자란 작물 때문에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고 옥수수 밭에 숨어있다가 자신들을 습격하는 크로아티아 경무장 보병대에게 시달렸다. 이러한 적의 교란과 도발에 시달린 끝에 열받은 프로이센군은 경무장 보병대를 쫓아가다가 대열이 흐트러졌다. 게다가 그들은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바람에 당초 목표로 삼았던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이 아닌 중앙으로 진군해버리는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한편, 다운 백작은 언덕 위에서 망원경을 통해 적의 진군 상황을 면밀히 관찰한 후 군대의 위치를 적절하게 조정해 적의 예상되는 공세에 대응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측면 공격 전술이 성공하려면 신속하고 비밀리에 행해져야 했지만 콜린에서는 적에게 고스란히 노출되었으니 성공할 리 없었다. 심지어 콜린의 지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프로이센군은 그들이 목표로 삼은 위치에 도달할 때까지 거쳐야 할 마을들의 지명도 모르고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다운 백작은 망원경으로 프로이센군의 진군 상황을 살펴보면서 "나는 오늘 왕이 질 것이라 믿는다."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며 오스트리아군의 중앙 대열에 도착한 프로이센군은 오후 1시 30분에 돌격을 감행했지만 이미 적의 진군로를 파악해둔 오스트리아군은 이를 거뜬히 격파하고 오히려 역습에 나섰다.
프로이센군은 적군의 거센 반격에 짓눌러 이내 패주하기 시작했고, 오스트리아군은 다운 백작의 지휘하에 패주하는 적을 맹렬히 추격했다. 이때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자이틀리츠 준장 휘하의 프로이센 중기병 대대가 출격해 크르제르졸 언덕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돌격해 적의 진군을 지연시키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프리드리히 보기슬라프 폰 타우엔치엔 장군 휘하의 제 1근위대대가 프로이센군의 퇴각을 엄호해 프로이센군이 궤멸되는 것을 가까스로 저지했다. 야사에 따르면, 프리드리히 대왕은 패주한 병사들을 재집결시킨 후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고 한다.
Kerls, wollt ihr denn ewig leben?(이놈들아, 네놈들은 영원히 살고 싶은 것이냐?)
5. 결과
콜린 전투는 이때까지 승승장구했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첫번째 패배였다. 프로이센군의 사상자는 8,353명이었고 포로는 5,380명이었으며 대포 45문을 잃었다. 반면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는 6,600명이었고 포로는 1,500명이었다. 이렇게 뼈아픈 패배를 당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라하의 포위를 풀고 본국으로 퇴각했다. 이에 다운 백작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프라하에 주둔했던 병력과 합해 약 10만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이들을 맹렬히 추격했다. 결국 전쟁을 조기에 끝내겠다는 프리드리히의 야심찬 전략은 완전히 실패했고, 프로이센군은 작센으로 퇴각한 뒤 프랑스와 러시아의 전면 개입에 직면해야 했다.
[1] 프란츠 1세의 동생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시동생.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당시 코투지츠와 호엔프리트베르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박살난 전적이 있다. 그리고 7년 전쟁에서는 로이텐에서 다시 한번 박살났고 결국 형수 마리아 테레지아의 압력으로 총사령관직에서 물러난다.[2] 프리드리히 대왕의 데뷔전인 몰비츠 전투에서 대왕이 온갖 삽질을 저지른 끝에 전장에서 도망치는 병크를 저지르자 이를 수습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몰비츠에서의 교훈을 계기로 프리드리히 대왕이 완전한 전쟁기계로 각성했다는 점에서 군사 천재로서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만든 1등공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