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학림 논쟁
1. 개요
무림-학림 논쟁은 5.18 민주화운동 직후인 1980년 후반기부터 1981년 학림 사건까지 1년 남짓 일어났던 운동권들의 사상/노선/조직투쟁. 1974년 민청학련 사건 이후 학생운동을 지도해 온 구 조직(무림[1] )과 '혁명적 민주주의의 선봉'으로서 학생운동의 역할을 중시하는 신 조직(학림)과의 대립이었다.
2. 시대적 배경
1970년대 후반, 변혁운동의 핵심적 청/장년세대 내에선 한국에서의 변혁이 1단계 혁명이 돼야 하는가, 2단계 혁명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논의되고 있었다. 즉 기층민중이 처음부터 주도권을 잡는 철저한 민주주의 혁명인가, 아니면 보수 야당이 1차적 권력을 장악하는 자유 민주주의의 개량인가라는 문제였으며 이는 훗날 1984~85년의 NDR-CDR 논쟁의 핵심 주제가 되기도 하였다.
1979년 10.26 사태에 따른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을 계기로 이 문제는 더 이상 차분히 논쟁의 대상으로 삼고만 있을 주제가 아닌 것으로 되어 버렸다. 기층 민중이 처음부터 주도권을 잡는 철저한 민주주의 혁명을 주장하던 집단인 '학림'은 "10.26 이후 지배세력(미국을 포함함)의 기본적 정치구상은 기만적 개량이다"라고 규정하고 "어떻게 민주화에 대한 대중의 열기를 끌어올려 혁명적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가?"란 걸 실천적 과제로 설정하였다.
반면 보수야당의 집권을 통한 자유민주주의적 개량이 주요한 정치적 고리라고 생각해왔던 집단인 '무림'은 "어떻게 하여 유신잔당의 발호를 억제하고 보수야당을 집권시킬 수 있는가?"란 것을 자신의 정치적 의무로서 설정한 것이다. 이것이 무학논쟁의 뿌리이자 배경이었다.
3. 변천
3.1. 10.26 ~ 5.17까지의 노선대립
1979년 10.26 당시 학생운동은 유력 대학 캠퍼스 내에서만 국한되어 있었고 특히 서울대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말하자면 서울대를 지도하는 집단이 운동 전체의 기조를 설정하는 힘을 지닌 것이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보아 무림노선은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국민대 출신 이태복과 전남대 출신인 윤상원이 주도한 학림은 영향력이 너무 미약하였다. 이런 연유로 노선의 대립이 서울역 회군 이후 달아올라 5.18 이후에야 비로소 본격화된 것이었다. 위에서 나오던 5.17 이전까지의 완숙한 상태에서의 양자간의 모든 특징은 이미 발생기부터 내재된 상태였다.
특히 무림세력의 학생운동에서의 노선은 '캠퍼스 압력론'으로 구체화되었다. 계엄해제와 정치 민주화에 대한 요구나 가두 시위를 자제할 것과 학원 민주화에 대한 요구를 중심으로 교내 시위를 할 것을 강조하였다. 무림이 지도하던 서울대 총학생회가 1980년 5월 1일에야 비로소 계엄 해제와 정치 민주화를 가장 주요한 이슈로 들고 나온 걸 보면[2] 무림의 기본 구상을 알 수 있다.
즉, 이들은 극우반동의 구실을 주지 말되 학원 내에서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압력을 가해 '개헌-선거-보수야당의 집권'이란 정치일정이 무난하게 이루어지게 하는 쪽으로 구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정치적 본능은 무림의 정치구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10.26 이후 5.18까지의 기간은 무림 노선의 동요/파산의 과정이 되고 말았다.
이미 1979년 12월에 일어난 YWCA 위장결혼식 사건 당시 무림은 동원 금지령을 내렸으나, 학림노선을 주장했던 이태복은 학생운동 세력의 적극적 동원을 시도하였다. 이는 기만적 개량을 저지하기 위한 첫 싸움이라 파악했던 것이다. 사실 무림 측이 동원을 금지시킨 것도 앞서 말했듯 극우반동 세력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인 것이다.
3.2. 무력감을 나타낸 무림
이와 같은 무림의 순진성은 그 후 일관되게 나타났다. 1980년 4월 초순경 서울대 무림조직 내부에선 "만약을 대비하여 학생회비를 시중 은행에 50개의 가명 구좌로 분산시키고 50개의 저항조직 소그룹을 만들어 구좌 1개씩을 할당해 주자"는 제안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학생회가 경리 부정의 구실로 탄압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묵살되었다. 변혁 세력들의 특성상 저항의 근거지를 바탕으로 단호하고 지속적인 저항이 필요하나, 그 기지가 공격받았을 시에 대한 저항수단을 강구하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또 5.18에 대해서도 초기부터 끝까지 단호하고 집요하게 저항해온 집단이 바로 윤상원, 박용준, 김영철 등이 속한 '들불야학'이었다는 점도 주목하여야 한다. 결국 무림에겐 '그날' 또는 '그날 이후'의 상황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외에도 무림의 동요와 무기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는 서울의 봄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12일 쿠데타 루머 당시 무림의 대처법이다. 이날 오후 6시경에 "서부전선에서 남북한 간에 대규모 교전이 터졌다. 오늘 밤 안으로 군이 들어온다"는 루머가 조직적으로 유포될 때 무림은 "학교를 비우고 귀가하여 다음 지시를 기다리라"는 명령을 서울 각 대학에 내보냈다.
결국 이런 지도부의 행태는 13일부터 대중의 맹렬한 비판을 받아 14일 새벽부터 '캠퍼스 압력론'을 버린 뒤 가두투쟁에 나섰으나, 막상 거기서 직면해야 할 점은 바로 대규모 시위에 대비해 단 한건의 유인물도, 단 한 분의 연사조차 제대로 준비를 못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이미 4월 초순경 무림조직 내에서 "10만 명이 참여하는 대중집회에 대한 통솔 방법, 유인물 인쇄 방법, 함석헌 옹 급의 연사 초청방법 등의 준비가 시급하다"고 하였으나 결국 묵살된 사실도 있었다.
3.3. 노학연계의 문을 연 학림
또 5.18 민주화운동 당시 예상치 못했던 대중의 에너지와 이에 따른 참혹한 진압은 운동권에서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에 무림은 5.18을 "제어되지 못한 군중의 힘이 좌절된 것"이라 판단하여 패배로 파악했다. 또 학생운동의 우선적 과제를 "시위를 삼가고 조직된 기존 역량을 보존하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반면 기만적 개량을 경계하던 학림조직은 5.18을 새로운 투쟁을 향한 귀중한 자산이요, 발판으로 이해했다. 이는 대중의 정치적 울분과 반항적 분위기가 고조된 향상적 정치위기의 연속, 이것이 새 정권의 운명이라 파악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과감하고 집요한 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전위적 전투조직을 학생/노동운동에서 건설하는 게 시급한 과제로 받아들여졌다.
무림 일변도였던 학생 운동권의 많은 학생들이 학림노선에 서서히 동조하게 되자 무학논쟁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즉, 본격적인 정파투쟁. 그러니까 노선의 차이에 의한 정파투쟁이 성립했던 것이다. 이들은 당시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을 준비해 오던 이태복의 영향을 받아 '전국민주학생연맹'을 결성하게 된다.
한편 무림은 내부의 동요를 막기 위해 "시위를 자제하고 조직 역량을 보존하여야 한다는 우리의 주장은 구속과 처벌이 두려운 것 때문이 아니다"라는 점을 스스로 증명하여야만 했다. 그렇게 하여 그해 12월 11일 서울대생들이 학생식당과 도서관 앞에서 <반파쇼 학생 투쟁 선언문>을 공개 살포하다 9명이 구속되고 이후 80여 명이 연행되기까지 하였다(무림 사건). 이런 식으로 공안 당국은 무림조직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는데, 이는 8월 중순에 신문지상에 발표된 5.18 피검자 공소장에 무림 조직원들의 실명이 모두 거론된 점도 그러하다. 이런 무림의 '조직 보전론'은 이러한 조직보안의 위기의식에서 나온 것이나, '우리 조직 및 우리 조직의 노선이 계속 주도권을 잡아야 된다'는 입장이 전제가 되었기 때문에 정파투쟁으로 번진 것이다.
반면 학림은 (특히 서울대의 경우) '무림으로부터의 개종자'들로 이루어졌으며 수배중인 무림 조직원들을 동원해 1981년 봄 학기에 서울대 시위를 주도했다. 또 이 기간 내에 전국적으로 약 20여 건의 학원시위를 만들어 냈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노동현장 예비팀을 만들어 노동현장에 있는 선배와도 연계시키는 작업을 시도한 것도 있었다. 어쨌건 이들 역시 그해 6~8월에 걸쳐 5공 정권에 의해 집중수사를 받아 학림 쪽 관련자 12명이 구속되어 학림 사건, 부림 사건까지 이어지게 된다.
3.4. 한계점과 의의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겐 '혁명적이어야 한다'는 당위적 주장에 걸맞는 정치적 지도내용의 빈곤이란 한계가 있는데, 민족/남북관계/통일 문제에 대한 조망이 빈약하였고 1986년에 해당 문제가 제기될 때 학림의 후예조차 이를 적극적으로 검토 못한 것도 이 문제와 연관이 있다. 그래도 이들이 주장한 혁명적 민주주의, 전위적 전투조직, 노학연계 등은 1980년대 학생운동의 한 축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두어야 한다.
4. 출처
- 80년대 한국사회 대논쟁집(월간중앙 1990년 신년호 부록): '무학논쟁(박성현 저)'. 중앙일보사. 1990. p241~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