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1. 소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사상계 통권 61호(1958년 8월)에 투고한 글의 제목.
咸錫憲 (1901년 3월 13일 ~ 1989년 2월 4일 총 32106일.)
대한민국의 언론인, 민중운동가, 사상가, 문필가. 노년에 더 열심히 활동했기 때문에 "겨레의 할아버지"란 호칭도 있다. 대한민국에서 무척 보기 드문 퀘이커 신자였다.[1]
다만 본인의 생전 발언도 있고 해서 퀘이커의 영향을 받았지만, 퀘이커는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함석헌 본인이 도덕경 연구/강의도 하는 등 말년으로 가면 갈수록 특정 종교나 교파의 주장에 얽매이지 않는 성향이 강해진다.
2. 일생
2.1. 유년기
1901년 평안북도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 일명 다사도라고 불리는 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함형택(咸亨澤)은 '''면허는 받지 못한''' 한의사로, '''정규 교육이 아닌 스스로 의술을 공부해''' 인근 마을의 사람들을 치료해주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50살이 넘어서 한글을 배우고 성경을 공부할 정도로 배움에 열정이 있으신 분이었다. 친척 중에서도 '의식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숙부뻘 되는 함일형 씨와 그의 자식들인 함석규 씨, 함석은 씨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916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 1919년 평양에서 3.1운동에 가담하고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는 박차고 나온 학교에 다시 들어가기 싫어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2년여 간 '집에 있다가', 서울에 올라와 우연히 친척인 함석규 목사를 만나 평안북도 정주군의 오산학교[2] 3학년에 편입학한다.
이 때 교장이던 류영모와의 만남을, 함석헌은 "신앙생활의 첫 번째 대사건"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함석헌은 류영모에게서 일본 무교회주의의 지도자인 우치무라 칸조와 야마무로 군페이에 대해 배웠다. 또 그 외에도 이승훈 선생과도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이승훈 선생에 대한 회고를 하고는 했다. 이외에도 H, G 웰스의 글과 그가 이후 자주 언급하게 되는 P. B 셸리의 글도 이때 접하게 된다.
2.2. 일본 유학기
오산학교를 졸업한 이후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고등사범학교[3] 에 입학하였고, 1928년 졸업하였다.
일본 생활에서 함석헌은 2가지 큰 변화를 맞게 되는데, 관동 대지진의 경험과 우치무라 간조와의 만남이었다. 관동대지진은 진도 7.9의 대지진으로, 57만여 가구가 파괴되고 사망자만 10만여 명이 발생한 대재앙이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고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때 6천여 명의 조선인과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무차별 학살되었다.
함석헌은 친구의 집에 가 있어 지진이 일어난 반대편에 있다가 참변을 면하였지만, 친구의 집에서 나오자마자 집이 무너져내렸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나를 그곳에 있게 하여 그 끔찍한 경험을 하고 그 속에서도 아니 죽고 살아남아 오늘까지 있게 한 것은, 그 광경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 전하라고 해서였다고" 말했다. "그곳은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고 그는 회상하고 있다. 그는 며칠 뒤 일본도와 죽창을 든 일본인들에게 쫓기게 되었으나, 경찰에 의해 수감되어 무사했으며, 이후 인생에서 무시로 드나들게 될 유치장 경험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재학하면서 그는 우치무라 간조와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여기서 우치무라의 문하생이 되어 성경 연구회에 들어가게 된다.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는 우치무라가 교회의 형식과 위선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독립 전도를 시작하면서 형식이나 의식 없이 모여서 성경을 읽고 기도했기 때문에, 무교회주의라는 이름이 붙었다.
여기서 함석헌은 평생의 지우 김교신과 만나고, 자신과 신앙 동지들을 모아 1927년 무교회주의적 기독교 동인지 <성서조선(聖書朝鮮)> 창간에 참여하고, 글도 발표한다. 그의 첫 글은 '먼저 그 의를 구하라' 였는데 여기서 함석헌은 마태복음 6장을 인용하며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걱정하기보다는 먼저 의를 구하려는 의지를 표현했다. <성서조선>은 그의 지우들이 귀국하면서 서울에서 계속 발간되었고, 잡지의 책임자는 김교신이 되었다. 함석헌은 여기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시리즈를 연재했다.
2.3. 귀국 후 해방 전까지
1928년 4월 귀국하여 모교인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일제의 감시가 점점 심해지던 시점이었다. 함석헌의 조선사 연재는 일제 관원들의 주시 대상이 되었고 잡지는 회원 외 배포가 금지되었다. 학교에서 그의 별명은 '함도깨비'로, 못하는 것이 없다 하여 그런 별명이 붙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심해지고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자, 1938년 3월 교사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평양 송산리에 있는 송산고등농사학원을 인수하여 학생들을 모아,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러던 중 계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미결수로 1년여를 옥살이를 했다. 이 때 옥중에서 아버지의 부고를 받았고, 그 대신 김교신과 송두용이 상주 노릇을 했다고 한다.
출옥한 이후에도 계속 농사일을 맡아 농사를 지었으나 1942년에 <성서조선> 필화 시비[4] 에 휘말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해방을 맞는다. 이 때 그를 고문하고 구타하던 일본인 검사와도 치열한 논전을 벌였다.
감옥에서 그는 불경을 접했는데, 무량수경을 비롯해 반야경, 법화경, 열반경 등의 경전들을 읽으며 "불교와 기독교는 근본에서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6] 고 한다. 이후 출감하였고, 1945년 광복을 앞두고 친우 김교신의 부고를 듣고 깊은 슬픔에 빠졌다. <성서조선>도 폐간되고 친구도 잃은 상황에서 그는 낮에 농사를 하고 밤이면 책을 읽었다. 이 때 노자를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검사: 너는 하나님을 믿는다지?
함석헌: 그렇다.
검사: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죄라지?
함석헌: 그렇다.
검사: 그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는데 그것도 사실이냐?
함석헌: 잘 들어라. 성경에는 2가지 가르침이 들어 있다. 믿음을 가르칠 때는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 하지만, 또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칠 때는 하나님이 나중에 모든 사람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구원한다는 약속이 있다.
검사: 에이, 그런 협잡 종교가 어디 있느냐?
함석헌: 그게 왜 협잡이냐? 탄력이지.[5]
2.4. 해방 후
해방 후 일시적으로 여기저기에 끌려나가 평안북도 용천군 용암포 임시자치위원회 회장, 용천군 자치위원장 등에 앉혀졌으나 1945년 12월, 소련군정 치하에서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의 사상적 배후로 지목되었고, 감옥에 다시 갇히게 된다. 이 때 소련군에게 둘러싸여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차갑게 바뀌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받은 2만 평의 전답으로 인해 토지개혁 때 반동으로 낙인 찍혀 투옥되거나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해질 절박한 상황에 몰리게 되었고, 그로 인해 1947년 월남한다. 이때 어머니와 장남, 장녀 3명이 내려오지 못해 평생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월남한 이후 그는 YMCA 강당에서 일요 종교집회를 시작했으며 이 무렵에서 한국전쟁을 예감한 듯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그는 부산에서 피란생활을 하며 한국전쟁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이후 이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에서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한편으로 그는 1952년 무렵 <흰 손>이라는 시를 동지들 앞에서 낭송하며 무교회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렇게 밝혔다.
그는 무교회에 머물지 않게 된 이유를 3가지로 들었다.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사실상 <흰 손>은 나의 신앙고백이었다. 나는 그 안에서 이날껏 정통적으로 인정해오는 무교회에서도 그것은 그대로 가르치는, 십자가의 공로로 죄 대속함을 받는다는, 믿기만 하면 된다는 사상에 반대하고 그러기 위하여는 인격의 자주성을 살려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20년대 내 마음속에 싸우고 찾아온 결과였다.[7]
서울로 돌아온 후, 그는 안병무의 권유로 <사상계>의 주필로써 자리잡게 된다. 이 때 그는 장준하와 만나 뗄레야 뗄 수 없는 동지가 되고, 평생동안 그를 아낌없이 지원했다. 그의 사상계 첫 글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였다. 이 글은 1956년 <사상계> 1월호에 실렸으며 전쟁과 전후 기간 동안 기독교의 행보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는 함석헌의 첫 대사회, 대종교 비판 발언으로 앞으로 이어질 그의 발언들의 시초가 되었으며 이후 사상계에 여러 사람들의 반박글과 재반박글이 연재되면서 사상계가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잡지로 자리 매김하게 했다.우리나라 모양이 이미 누가 열어놓은 길을 그저 따라만 가 가지고 되기에는 너무도 독특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만이 당하는, 우리만이 풀어야 하는 문제를 당하고 있다. 백 년을 가다가도, 천 년을 가다가도, 내가, 우리가 하게 생겼지, 어디서 다 된 것을 빌어다 써가지고 될 수는 없다. 물건은 빌릴 수가 있지만 정신이야, 믿음이야, 빌 수 없지 않은가?’(중략) 정치는 암만 해도 일본 혼을 가지고 우리를 다스려 될 수 없고, 신앙도 우치무라의 무교회를 가지고 우리를 살릴 수 없다. 무교회 신앙은 우치무라를 살리는 데 다 쓰고 털끝만큼도 남긴 것이 없다. (중략) 그러므로 나를 살리는 내 신앙은 내게 있다. 내가 발견해내고 내가 남김없이 다 써야 한다. (중략) 그러니 나는 지난날에 배우던 무교회를 찾고 그것을 받들 겨를이 없었다. 나는 오늘 나의 종교, 우리의 종교를 발견해야 했다.(이하 생략) [8]
그 다음에 그가 게재한 글은 1957년 3월호에 수록된 '할 말이 있다.'였다. 이 글은 특이하게도 다른 글과는 달리 함석헌이 직접 써서 사상계로 가져간 글이었다. 중간에 군인과 대통령을 비판하여 장준하와 <사상계>에 의해 편집된 부분이 있는데, 이는 훗날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에 다시 고스란히 실렸으며, 그 때문에 함석헌은 형무소에 끌려가게 되었다.
함석헌은 이 글에서 우리 민중은 입이 없다. 표정이 없다고 말하며 입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을 가슴에 사무치게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말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민중이 무표정일수록 구경하는 격이 되면 될수록 특권자들의 싸움은 점점 더 노골적이 되고 압박은 더욱 더 거리낌 없이 하게 되었으며 비겁한 민중은 점점 더 말을 아니하고, 점점 더 무표정한 구경꾼이 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젊은 민중을 향해 가슴을 터놓고 말할 것을, 외칠 것을 호소하면서 글을 끝맺었다.
이 글에 대한 천주교 서울대교구 윤형중 마태오 신부의 반박문이 사상계에 기고되었으며, 함석헌 역시 재반박문 '윤형중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를 <사상계>에 기고해 사상계에서 설전이 벌어졌다.
<사상계>에서 자신의 글이 편집되었음을 안 함석헌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고, 약 1년여 동안 사상계에 글을 기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준하와 주변 사람들의 끊임없는 설득으로 6.25 전쟁 8주년을 기념하여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기고한다. 이 글에서 그는 6. 25 전쟁의 원인을 단순히 소련과 미국의 갈등에서만 찾지 않고 우리 스스로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주장했다. 그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통일정신, 독립정신, 신앙정신 3가지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는 문제의 원인을 독립하지 못하는, 제노릇 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 독립정신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생각'이었다. 그는 생각이란 위대한 종교, 결국 뜻을 찾음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역사의 문제가 '생각의 가난'에 있음을 역설하였다. 결국 깊은 종교를 낳자는 것, 생각하는 민족이 되자는 것, 철학하는 백성이 되자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주장하면서 마지막으로는 국민들의 반성과 회개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5.16 군사반란 후에는 사상계에 ‘5. 16을 어떻게 볼까?’를 기고하면서 군인들이 어서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고, 이 글로 인해 미국 국무성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그는 퀘이커 교도들과 교류를 가지고 퀘이커 학교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몇 개월간을 체류하다 유럽으로 떠났다. 그러나 군정 연장 선언에 귀국하여, 장준하의 옥중 출마를 도와 당선시켰다.
이후에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 박정희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였으며,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에 연루,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 받았다. 퀘이커 협회 초청으로 미국 종교 대회에 참석한 뒤에는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받았으나 국내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또 YWCA 위장결혼식 사건 연루되어 징역 1년 형 집행 정지를 받았다.
<사상계>가 폐간된 이후 ‘언론의 게릴라전’을 제창하며 새로운 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독재권력과 싸웠다. <씨알의 소리>는 출간하자마자 폐간되고 이에 고소를 진행해 다시 재 발행했으며, 12.12 군사반란 이후 1981년에 폐간되었다가 1988년 이후 재발행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법정 스님도 저서에서 함석헌에 대한 존경을 자주 표현했고 <뜻으로 본 한국사>를 읽으면서 감동 받았던 것을 자주 이야기하였으며,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사후 2002년에 건국포장 수훈을 받았다.
3. 씨알 사상
民 대신 "씨알"[9] 이라는 표현을 쓰자고 주장한 바 있다. 본래 저 "씨알"은 1948년 무렵에 함석헌이 월남한 뒤 YMCA에서 옛 스승[10] 인 다석 류영모(1890.3.13~1981.2.3 위키백과 참고)와 재회하여 그의 대학(大學) 강의를 듣던 중 유영모가 民을 "씨알"로 번역한 것을 참신하게 여겼다.
그는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다"를 "한 배움 길은 밝은 속알 밝힘에 있고, 씨알 어뵘에 있으며, 된 데 머뭄에 있나니라"고 해석했다. 民은 백성을 뜻하는 것인데 이는 한자였기 때문에 백성이니 민초니 하는 한자 대신 순우리말인 "씨알"을 쓰자고 주장한 것. 다만 전통 있는 순우리말인 겨레라는 단어가 이미 있는데 불필요하게 새 낱말을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다. 물론 겨레는 민중과는 결이 다르지만.
또한 이 "씨알"은 그것 자체로 사상이기도 한데, 씨알 생명(=백성, 일반 시민들)이 지니는 다섯 가지 특성이 있다.
- 주체성 - 자신들의 이름을 "씨알"이라고 짓고, 그것을 가짐으로써 주체성을 자각할 수 있다.
- 근본성 - 씨알은 씨앗과 알이며, 모든 생명의 시작과 끝이다. 씨알 역시 인간 사회의 근본이면서도 제대로 취급받지 못했으나, 결국 모든 고난을 견디고 이겼다.
- 순수성 - 알이라는 말이 접두사로 쓰이면 군더더기 없는 순수한 형태를 나타낸다. 씨알 역시 생명의 본질을 오염시키려는 악에 대해 강하게 저항하고 비판하는 의식을 담고 있다.
- 생동성 - 생명은 끊임없이 자라고 변화하며, 이에 따라 씨알(=시민들)을 압제하는 제도주의-형식주의-절대주의에 저항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 관계성 - 나무나 잡초가 여럿이 있으면 태풍과 홍수를 막듯이 씨알 역시 무리를 지어서 삶의 현장에 뿌리를 내리고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4. 연표
- 1901년 -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에서 태어남
- 1914년 - 양시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학
- 1916년 - 4월,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
- 1919년 - 3월 1일, 3.1 운동에 참가한 뒤 학업을 중단하고 2년간 집에서 휴양함
- 1921년 - 민족 사학인 평안북도 정주군의 오산학교에 편입학
- 1924년 - 4월,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문과1부에 입학
- 1928년 - 4월, 귀국하여 모교 오산학교에서 후진 양성에 몰두함
- 1932년 - 동인지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쓰기 시작함
- 1938년 - 3월, 일제의 탄압으로 오산학교를 그만둠
- 1940년
- 1942년 - 5월, 성서조선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미결수로 1년간 복역함
- 1945년
- 1947년 - 3월 17일, 주위의 강권으로 고향을 등지고 남쪽으로 내려옴
- 1948년 - 매주 YMCA 강당에서 일요 종교 집회를 가짐
- 1956년 - 친지들의 도움으로 서울 원효로에 사택을 마련하고, <사상계>에 집필을 시작함
- 1957년 -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씨알 농장'을 경영함
- 1958년 - 8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로, 서대문형무소에 20일간 구금당함
- 1961년 - 6월,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발표하여, 5.16 군사정변을 정면 공격함[11]
- 1962년 - 2월,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 여행. 그 뒤 10개월간 퀘이커 학교에서 공부함
- 1963년 - 6월 23일, 오산학교·대광학교 등에서 강연함. 월남 언론상을 받음
- 1967년 - 장준하가 국회의원에 옥중 출마하는 것을 도와 당선시킴
- 1970년 - '''4월 19일, <씨알의 소리> 창간호를 발행함
- 1974년 - 윤보선, 김대중과 함께 '민주 회복 국민 회의'를 만들고 대표 위원이 됨
- 1976년 -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징역 5년, 자격 정지 5년을 선고받음
- 1979년
- 1981년 - 계엄 당국에 의해 <씨알의 소리>가 폐간당함
- 1987년 - 10월 12일, 제1회 인촌상을 수상, 상금 전액을 남강문화재단에 기탁함
- 1988년 - 9월 12일, 제24회 서울 올림픽 평화 대회 위원장을 맡고, '서울 평화 선언'을 제창함
- 1989년 - 2월 4일 오전 5시 25분, 6개월간의 투병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