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WCA 위장결혼식 사건
1. 개요
1979년 11월 24일, 서울 명동 YWCA 회관에서 재야 세력이 대통령 간선제 시행 저지를 위하여 결혼식을 가장해 집회를 개최하다가 적발된 시국 사건. [1]
2. 전개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후 후임 대통령을 선출함에 있어, 유신 헌법에 따른 간선제, 즉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체육관 선거로 최규하 당시 국무총리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려 하자 재야인사들은 여기에 반발하면서 대통령 간선을 저지하기 위한 집회를 열기로 한다. 다만 당시가 계엄령 상황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시위를 벌일 경우 군과 경찰 등과 큰 충돌이 빚어질 수 있다고 판단해 나온 아이디어가 YWCA회관에서 결혼식을 위장해서 집회를 여는 것이었다.[2]
이에 따라 연세대 복학생 홍성엽(1953~2005)과 윤정민양의 결혼식을 가장해 청첩장이 만들어졌다. 홍성엽은 실존인물이었으나 윤정민은 그해 세상을 떠난 고 윤형중 신부의 성에 '''민'''주주의 '''정'''부에서 정과 민을 따와 이름을 지어낸 허구의 인물이었다.
공안당국에서는 당연히 의심을 하였으나, 한국 결혼식 문화는 신랑 입장 전까지 신랑만 식장 입구에 서서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신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집회 당일 하객들을 가장한 참가자들이 모이는 단계까지는 차질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이윽고 결혼식이 시작되고 신랑이 입장하는 동시에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성명서가 낭독되고 구호가 제창되었다. 회관에는 박수소리와 함성이 울려퍼졌으나 갑자기 대회장 단상 쪽에서 비명 소리와 의자가 내던져지는 소리가 들렸다. 윤보선과 함석헌을 미행하던 경찰들이 대회장에 들이닥친 것. 대회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곧이어 경찰들이 출동해 대회에 참여한 140여명을 체포했다.
이때 참여한 재야인사들은 윤보선과 함석헌, 전직 국회의원이던 양순직, 박종태와 임채정, 문동환, 김상현, 한명숙, 백기완, 최열, 김경남 등이었다.
윤보선과 함석헌은 고령인 관계로[3] 서면조사로 대체했으나 나머지 핵심 주도인물인 14명은 용산구 국군보안사령부[4]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당시 끌려간 백기완은 고문으로 여러 차례 혼절을 거듭하더니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당시의 고문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3. 평가
이 사건이 신군부의 고의적인 정보조작 및 위장된 방조에 의해 일어났다는 시각도 있다. 전직 공화당 의원이던 모 재야인사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과 박정희 정권 때 친했던 보안사의 장성이 '''"대규모 집회가 일어나야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간선제를 재검토할 것이 아닌가. 보안사는 이를 묵인해줄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 이를 알게 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5] 의 인사들이 집회를 취소하려고 했지만 함석헌에게 이 사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결국 집회가 예정대로 개최되고 사단이 일어났다는 것.
사실 타이밍상으로 볼 때 신군부가 이 사건에 개입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 사건 이후 약 2주 후에 신군부의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볼 때 이 사건과 12.12 쿠데타 사이의 타이밍이 매우 절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각에선 신군부가 12.12 쿠데타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해 재야세력에서 사건이 일어나도록 유도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의 반응이다. 미국 국무부는 윤보선의 민주화 운동 행보를 예의주시했고 윤보선이 참여한 민주화 관련 사건 때마다 논평을 냈었지만 이상하게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이는 '신군부의 고의적 유도설'과 결부되어 묘한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윤보선은 사건 수사에 협력할 테니 동료들의 형량을 낮춰달라고 탄원하여 형량이 감경되었으며, 이후 윤보선은 신군부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쪽으로 돌아선다. 사실 이 때 윤보선의 나이는 이미 80이 넘은 데다가 전두환이 윤보선에게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고 민주화를 이룰테니 협력해 달라고 설득하여 결국 윤보선이 넘어가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 윤보선은 재야인사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어쨌든 이후 김대중 정부 시절 열린 민주화운동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이 사건에 연루되어 기소된 154명을 복권했으며 민주화에 대한 공로를 인정했다.
4. 기타
신랑을 연기(?)한 홍성엽 씨는 이전에도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75년 2.15 조치로 풀려난 적이 있다. 이후 홍성엽은 독신으로 지내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으며, 1988년 이후에는 천도교에 귀의했다. 그러다가 1997년 백혈병이 발병해서 2005년 병사했다.
드라마 제4공화국(드라마) 오프닝을 잘 보면 오프닝이 끝날 무렵에 나오는 장면이 바로 이 사건을 다룬 부분이다. 맨 앞에 선 인물은 외양으로 볼때 함석헌으로 보인다.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에서도 이 사건을 다루었다.
위장 결혼식 아이디어는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으며 5.16 군사정변 직후인 1963년 백조그릴 위장약혼식 사건[6] 이 있었다.
[1] 수많은 책 및 인터넷 문서에서 YWCA를 YMCA로 오인하여 'YM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 사건은 명동성당 정문 앞에 있는 YWCA 회관에서 일어났다. 명동집회 사건이라는 이름 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국 근현대사 사전’ 참조.[2] 사실 이 아이디어는 이미 18년전에 유사 사례가 있었다 아래 기타 항목 참조.[3] 각각 윤보선이 1897년생으로 당시 82세, 함석헌이 1901년생으로 당시 78세.[4] 지금의 군사안보지원사령부[5] 대체로 개혁/진보 성향 개신교계 인사들의 모임으로 1970년대부터 반독재민주화 운동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미국과 서유럽 개신교계(WCC)와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재정권에서도 상당히 껄끄럽게 여겼다. 이들의 사회참여를 비판하면서 결집한 보수성향 교회 단체가 바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다.[6] 결혼식으로 표기한 기사 등이 있으나, 정확히는 '김인오 군-박숙자 양 약혼식장'이라는 위장표지를 붙인 행사였다. 백조그릴은 당시 종로 신신백화점(현재의 SC제일은행 본점) 맞은편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