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원(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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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尹祥源)[1]
1950년 9월 30일(음력 8월 19일) ~ 1980년 5월 27일
"우리는 오늘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1980년 5월 26일 저녁, 계엄군의 진압을 앞두고[2]
"윤상원은 탁월하게 용감했고 끝까지 투쟁할 것을 계획했습니다. 그는 저에게 말하기를 그의 지지자들에게 말한 것처럼 ‘광주를 탈환하기 위해 군대와 최후의 투쟁 속에 죽을 준비가 돼 있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윤상원은 죽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 그가 계획한 것처럼, 그와 그의 동료들은 마지막까지 굴하지 않았던 순교자였습니다. 그들의 삶과 죽음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군부독재를 7년 후 패망시킬때까지 싸우도록 고무시켰습니다." 출처.
브래들리 마틴(5.18을 취재했던 당시 볼티모어 선 도쿄지국장)
1. 개요
대한민국의 민주운동가.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해파(海坡).
2. 일생
2.1. 유년시절과 청년시절
1950년 전라남도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 천동마을(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천동마을)에서 아버지 윤석동과 어머니 김인숙 사이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광주북성중학교와 살레시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여 재학 중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어 9개월 가량 징역형을 살았던 김상윤을 만나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 서울 주택은행에 입사하여 은행원 생활을 했다. 그러나 6개월만에 퇴사하고 광주로 돌아와 광천공단의 한남플라스틱이라는 회사에 위장취업한다. 이후 한남플라스틱을 그만두고 양동신협에 취업한다. 1979년 박기순의 설득으로 들불야학 강사로 일반사회를 가르쳤다. 10.26 사건 직후 전국 민주노동자연맹 준비위원회에 참여한 바 있다.
2.2. 5.18과 투사회보
계엄군이 광주 시내 대학에 주둔하자 피신한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을 만나 그를 광주 외곽으로 도피하도록 했다. 이후 계엄군에 의해 광주가 고립되고 언론이 통제당하자 5.18의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시민들을 규합하기 위해, 윤상원은 들불야학 강학들과 함께 투사회보를 만들어 배포했다.
2.3. 시민군 대변인과 최후
광주항쟁 후반부(5월 25일)에 그는 학생수습위원회에서 새로 편성된 항쟁지도부(민주투쟁위원회)의 대변인을 맡았다. 5월 26일에 그는 외신기자들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며 끝까지 투쟁할 것을 밝혔다. 얼마 지나지 않은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공격하자 미리 학생들을 대피시키곤 이에 맞서 싸우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후 시신은 망월시립묘역에 관번호 57, 검안번호 4-1, 묘지번호 111로 매장되었다가 1980년 6월 22일 가족들이 망월묘역으로 가 파묘후 봉분하였다. 이때 시신에 3도 화상[3] 과 머리 쪽 외상 및 자상까지 나서 가족들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3. 여담
- 제4공화국에서 최종환이 연기했다. 다만 5.18 관련 내용을 다룬 회차에서만 잠깐 등장해서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후속작인 제5공화국에서는 김정학이 연기했다. 5.18 전체 에피소드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하며, 도청 방어전에서 동료들과 저항하다 장렬히 사망한다.
- 임을 위한 행진곡의 기원이 된 인물이다.
- 5.18유족회가 1991년부터 제정해 시민사회단체에 수여한 '윤상원상'도 있었으나, 2000년부터 5.18시민상과 통합되어 '광주인권상'이 되었다.
- 현재 모교인 살레시오고등학교에서 매년 추모식을 진행한다. 2019년 전남대학교에서는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사회과학대학 1층에 작은 기념관을 마련하였다. 2020년 광산구청은 그를 기리기 위해 7층을 윤상원홀로 명명했으며, 전남대학교에서도 민주의 길을 만들었다.
[1] 본래 윤개원(尹開源)이나 고등학교때 윤개원이란 이름이 총 맞아 죽을 이름이라는 점쟁이의 말에 윤상원으로 개명했다.[2] 이 말은 5.18 사이버 참배 사이트에 글귀로 걸려있다.[3] r20 버전까지만 해도 윤 열사의 화상에 대해 계엄군의 '화염방사기'가 원인이었다고 작성돼있었다. 그러나 당시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과 5.18 전문가들의 연구로 윤 열사의 화상은 계엄군이 투척한 '섬광수류탄'이 폭발해 인근에 불붙은 커튼이 시신에 떨어져서 생긴 흔적이라고 분석했다.(《한겨레21》 1213호, 2018. 5.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