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다 전투
1. 개요
폼페이우스의 아들들로 대표되는 원로원파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이에 벌어졌던, 고대 로마의 내란을 종식시킨 전투이다(BC 45).
2. 상세
BC 48년 폼페이우스가 죽은 후 그 아들 그나이우스와 섹스투스가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장악하자 카이사르는 그들을 진입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왔다. 계속 밀리던 폼페이우스 군대가 우르소(지금의 오순) 근처의 있는 문다의 높은 언덕에 진을 치자 카이사르는 진격을 멈추고 적군을 싸움터로 유인해냈다. 노련한 제10레기온(보병군단)의 사기를 복돋우기 위해 카이사르가 직접 전투에 뛰어들었고, 전투는 몇 시간 동안 치열하게 계속되었다. 그나이우스는 로마 기병대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전술상 병력을 이동시켰는데, 그나이우스의 다른 병사들이 후퇴가 시작된 줄로 잘못 알고 뿔뿔이 흩어져 카이사르의 군대가 승리를 거두었다.
이전의 몇차례 전투(파르살루스, 탑수스)에서 승리한 카이사르였지만, 문다 전투에선 예상치 못하게 고전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이전에도 루스피니아 전투에서 데려온 병력의 1/3을 날려먹는 등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승리했다고는 하더라도 숫적 열세 때문에 엄청나게 고전했다. 공화파 병사들이 착각을 하여 무너지지 않았다면 카이사르군의 전열은 엄청난 출혈을 입고 무너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농담이 아닌게, 카이사르 군대는 8개의 군단으로 이뤄졌는데, 폼페이우스의 아들들은 13개의 군단으로 이뤄져 있어서 카이사르의 군대를 숫적으로 압도했다. 게다가 문다 전투 이후에도 폼페이우스의 아들들의 군대는 일소되지 않고, 오히려 아들들 중 한 명인 섹스투스가 거꾸로 스페인 남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카이사르가 괜히 고전한게 아니다.[1]
[1] 카이사르가 고전한 걸 보고 카이사르가 이집트에서 풍토병에 걸려서 판단력이 흐려졌느니 라는 말을 하는데, 카이사르는 파르살루스 이후에도 수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전직 로마 장교들이 이끄는 군단병을 상대로 계속되는 전투를 강요받았다. 파르살루스 전투가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이긴 했지만, 그 뒤에 탑수스, 문다, 루스피니아 전투가 단순한 패잔병 청소는 아니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