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투스
1. 개요
이름의 약칙은 Sex., S. , Sext라고 하며, 일반명사로는 '여섯째'란 뜻이다. 사람 이름으로 쓸 경우에는 '육남'이나 '로쿠로(六郎)' 정도의 뜻이다.[1]
로마남성 역대 개인이름 중에서는 티투스, 아울루스보다는 흔하고 꽤 인기가 많았는데, 어떤 가문들은 장남에게만 이 이름을 물려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고 제정시대에도 건국 이래 등장한 36개의 프라이노멘 중에서도 5~6세기까지 많이 사용된 프라이노멘이기도 했다.
'''흔히 아는 그 의미와는 전혀 무관하다.'''
1.1. 고대 로마의 정치가
풀네임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피우스(Sextus Pompeius Magnus Pius). 대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라고 부른다. 여기서 피우스는 아그노멘(별명)으로 효자라는 뜻이 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피우스'도 이 뜻이다.[2]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자신이 아버지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스스로 이런 아그노멘을 붙였다고 한다.
생몰연도는 기원전 67 ~ 기원전 35.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적인 장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들로,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장을 전전했으나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넘어 로마로 진군하면서 아버지와 형은 그리스로 도피하지만 본인은 계속 로마에 남는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가 연전연패하면서 세력을 거의 상실하자 로마를 빠져나와 아버지와 다시 합류한다.
그러나 이후 아버지가 암살당하자[3] 그의 형 그나이우스가 있는 아프리카로 갔다. 탑수스에서 공화파가 패하고 카토가 자살한 뒤에는 형제가 같이 스페인으로 도망쳤다. 여기서 폼페이우스 씨족은 매우 인기가 있었기에[4] 형제는 열세개의 군단을 조성하여 카이사르에게 맞섰다. 그러나 문다 전투에서 괴멸당하고 그나이우스는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섹스투스는 스페인의 오지로 도주하였고, 카이사르는 그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여 사면해주었다.
그러나 이건 실수였다. 섹스투스는 스페인 부족들과 공화파의 지원하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했다.[5] 이 와중에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공화파는 폼페이우스의 아들이자 스페인에서 독립적인 세력권을 구축한 섹스투스와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기원전 43년 원로원은 그를 해군 및 해안 제독으로 임명했다. 섹스투스는 자신의 세력을 모조리 끌어모아 시칠리아로 갔고, 총독을 구슬려 시칠리아를 넘겨받고 통치했다.
제2차 삼두정치가 성립되어 공화파가 괴멸당하자 섹스투스도 살생부 명단에 올랐으나, 이미 시칠리아를 장악한 섹스투스에게 손 쓸 방법이 없었다. 섹스투스는 로마로의 곡물 수입을 막았고, 로마는 식량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섹스투스는 안토니우스와 동맹을 시도했지만, 옥타비아누스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안토니우스는 이를 거절했다.[6] 거기다 때마침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가 죽자 옥타비아누스와 브룬디시움 협정을 맺고, 그의 누이가 안토니우스와 결혼하여 동맹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안토니우스는 식량난에 분노한 로마인들의 폭동에 옥타비우스가 생명이 위험할때 군대를 이끌고 이를 진압하고 구해주기까지 했다.
이제 안토니우스와 동맹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부하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섹스투스는 옥타비아누스와 강화를 하기로 했다. 그들은 미세눔 조약을[7] 맺었고, 섹스투스의 추종자들과 공화파들은 시민권을 되찾았으며, 섹스투스는 이미 점령하고 있던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시칠리아에 더하여 펠로폰네소스의 반도를 얻었다.[8] 당시에는 섹스투스가 많은 이득을 취한 것처럼 보였으나, 시간이 흐르자 시민권을 되찾은 망명자들이 섹스투스를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가면서 이것이 명백한 실책임이 분명해졌다. 또한 메노도루스가 섹스투스에게 실망하여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하여 코르시카와 사르데냐를 잃게 되었다.
메노도루스의 귀순으로 자신감을 얻은 옥타비아누스는 협정을 깨고 섹스투스에게 전쟁을 일으켰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편지를 써서 전쟁을 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충고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무시했다. 그러나 섹스투스는 메노도루스와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모두 격파했고(메시나 해전) 옥타비아누스는 목숨만 간신히 건져서 달아났다.
그러나 그의 친구였던 아그리파가 갈리아에서의 전쟁을 끝내고 돌아왔고, 그의 구원요청에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가 응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의 함대가 동시에 시칠리아로 향했고,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배를 지원해주었다. 다행히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는 폭풍우를 만나 격파되었지만, 레피두스군은 시칠리아에 상륙해 거점을 확보했다. 아그리파는 밀라이에서 섹스투스 함대를 격파했고, 시칠리아섬의 북쪽 항구들을 장악했다. 그러나 섹스투스는 추가로 상륙하는 레피두스의 군단을 격파했고, 다시 상륙을 시도하는 옥타비아누스의 군단을 격파했다.[9]
그러나 계속해서 상황은 불리해졌다. 아그리파는 북쪽 항구들을 장악했고, 옥타비아누스는 23개 군단을 시칠리아에 상륙시키는데 성공했으며, 레피두스는 섹스투스 최후의 거점이었던 메사나를 함락시키고 8개 군단의 항복을 받아냈다. 섹스투스는 미틸리네로 도망갔다. 이후 아시아에서 3개 군단을 모집했고 파르티아 왕과 손을 잡았다. 그러나 결국 그는 체포되어서 기원전 35년에 처형당하고 말았다.
보다시피 '''이름이 심히 아스트랄해서''' 소재로 꺼내기 좀 민망한 인물. 카이사르 암살 이후의 내전의 한축을 담당하고 옥타비아누스를 애먹인 인물임에도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에 비해 존재감이 미약하며 로마사를 간략히 다룬 서적에서는 무시당할때가 많다.
사후에 쓰인 역사가들의 기록에서는 은근히 해적이라고 폄하하는 경우가 많은데, 동시대의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권리를 찾고자 했던 위대한 로마귀족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군사적 재능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스페인에서 빈손으로 게릴라전을 수행해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한 것,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해군 제독이 되고, 군대를 모조리 끌고 시칠리아로 가는 도박을 해 지중해를 장악하는것은 고작 20대 초반에 이룩한 일이었다. 세력에서 열세였음에도 옥타비아누스를 여러번 격파했고, 심지어 그의 뛰어난 해군제독이었던 메노도루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한 이후에도 승전을 계속했다. 사실 섹스투스는 2차 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다.[10]
그러나 전략적인 시각이 부족했다.[11] 미세눔 조약때 섹스투스는 많은 이득을 얻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망명자들이 로마로 돌아가버리게 하는 크나큰 실책이었다.[12] 펠로폰네소스 반도 역시 거리가 하도 멀었고, 안토니우스가 지배권을 넘겨주길 거부하여 그의 세력권이 되지 못했다. 섹스투스가 받은 유산은 위대했던 아버지의 명성밖에 없었는데, 미세눔 조약으로 카이사르의 후계자들과 타협하게 되면서 공화정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도 희석되었다. 이에 실망한 메노도루스가 샤르데냐와 코르시카를 들고 이탈해버렸고, 그의 세력은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이러한 행동을 조금 변호하자면, 섹스투스 역시 삼두정치의 분열을 노리고 안토니우스와의 동맹을 시도했다. 일각에서는 미세눔 조약을 맺지 않고 계속 로마를 압박했다면 됐을거라고 말하는데, 브룬디시움 협정이 맺어진 시점에서 섹스투스는 안토니우스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시칠리아와 샤르데냐만으로 로마 전세력과 싸우는 것은 가망없는 일이었고, 실지로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협약을 어기고 전쟁을 일으키고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가 그를 도우면서 현실이 되었다. 안토니우스와의 동맹이 실패로 돌아간 시점에서 이미 가망없는 일이었다.
1.2. 로마 왕국 최후의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아들
풀네임은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다. 남의 아내인 루크레티아를 강간하는 바람에 그녀를 자살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민심이 왕정을 떠나 아버지를 실각케 하는 후폭풍을 초래했다. 이후 로마는 공화정 체제로 전이된다.
1.1의 인물보다 인지도가 낮지만 '''역사에 남긴 행적과 이름의 싱크로'''가 워낙 출중해서 존재 자체가 흑역사스런 인물. 참고로 네이버에는 섹스투스만 치면 검색결과가 뜨는데, 섹스투스와 루크레티아를 같이 검색하면 19금 창이 뜬다. 후일의 예술작품이나 설화 등에서는 덜 민망하라고 섹스투스와 루크레티아보다는 타르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라고도 하는 경우도 있다.
1.3.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출신 의사, 철학자
풀네임은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 사상에 있어서는 동시대의 피론과 함께 회의주의자인데, 크게 중요하다고 평가받지는 않는다. 역사가로서는 헬레니즘 이전 시대의 철학자들의 주장을 정리해 그의 문헌은 고대 철학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는 여러 모로 중요한 문헌으로 꼽힌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인용도 많이 남아있지만, 그들의 경우 원문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없고 이러이러하다더라 하는 식으로 자신이 이해한 고대 철학자의 견해를 제시했다. 그에 비해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자신의 학설을 펴기 위해 고대 철학자들을 직접 인용한 다음 그에 대해 비평하거나 반론했다. 이것이 뜻하지 않게 고대 철학자들의 기록을 원전 그대로 옮긴 격이 되었다.
엠피리쿠스의 연구는 철학사에 한 획을 그은 것이다.
1.4. 영화 벤허의 유다 벤허가 신분을 감추기 위해 개명한 이름
풀네임은 섹스투스 아리우스.
[1] 고대 로마 특유의 작명법 때문에 그렇다. 프리무스(첫째), 세쿤두스(둘째), 테르티우스(셋째), 콰르투스(넷째), 퀸투스(다섯째), 섹스투스, 셉티무스(일곱째), 옥타비우스(여덟째) 노누스(아홉째), 데키무스(열째)가 있다. 물론 기원이 그렇다는 것이고, 나중에는 태어난 순서라는 의미는 거의 상실하고 고유명사화되어서 굳이 열째 아들이 아니더라도 데키무스라고 이름 붙일수 있게 되었다.[2] 그 외에 자신의 이름에 충실한, 신에게 충실한, 믿음직스러운 등에 뜻이 있다. 앤서니 에버렛의 저서인 아우구스투스에서 자신의 이름에 충실한 이라고 써놨지만 전후맥락을 볼때 효자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 타당하다.[3] 당시 섹스투스는 이 장면을 가까이에서 직접 보았다.[4] 그의 아버지 大폼페이우스는 스페인에서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총독으로 재직한 바 있었다.[5] 아피아누스는 이렇게 기술했다. "섹스투스는 뛰어난 기동력으로 예기치 않은 순간에 출현했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의 군대는 끊임없이 적을 괴롭혔다. 마침내 크고 작은 수많은 도시들이 그의 수중에 떨어졌다."[6] 특히 이를 강하게 추진했던 것이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와 어머니 율리아였다. 율리아는 섹스투스를 만나서 동맹제안을 가지고 안토니우스에게 전하기까지 했다.[7] 특이하게도 이 협상은 바다위에 두개의 구조물을 설치하여, 바다를 사이에 두고 고함을 쳐가면서 협상을 했다고 한다. 이는 어린시절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섹스투스가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8] 조약이 맺어지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우스가 섹스투스의 기함에 올라와 대접을 받았다. 이때 그의 부하였던 메노도루스가 섹스투스에게 이들을 모두 죽이고 로마 전체의 지배자가 되라고 권유했으나, 섹스투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메노도루스, 그대는 나한테 얘기하지 않고 먼저 그렇게 했어야 했다. 이제는 다 끝났다. 우리는 지금 이 상황에 만족해야 한다. 나는 약속을 어길 수 없다." 이 일화는 윤색의 논란이 있다. 당시 이들은 서로를 믿지 못해 바다에 설치한 구조물에서 협상을 벌이기까지 했는데 이런 일을 했을까 하는 점이다. 그렇기에 당시에 섹스투스의 고지식함에 대한 로마인들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말도 있다.[9]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종자 한명과 함께 간신히 해안에 상륙했다고 한다. 그는 섹스투스의 함대로부터 계속 도망쳐야했고, 그 와중에 살생부때문에 아버지를 잃은 한 참모 장교의 노예가 그를 죽이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산악지대의 사람들이 그를 발견하여 도와주었고, 결국 그를 기다리던 군단에게 돌려다 주었다.[10] 섹스투스와의 싸움에서 적어도 3차례 옥타비아누스는 죽을 위기에 처했다. 구체적으로 로마의 기근으로 인해 민중한테 죽을뻔한 일, 메시나 해전에서 함대가 격파당하고 홀로 도망친 일, 다시 시칠리아 상륙을 시도하다 격파당해 혼자 도망친 일이다. 반면 레피두스는 힘없이 옥타비아누스에게 권력을 뺏겼고, 안토니우스도 자폭만 하다가 스트레이트하게 밀렸다.[11] 아피아누스는 구체적으로 섹스투스는 뚜렷한 전략적 목표가 결여되어 있었고, 성공의 여세를 몰아붙이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12] 다만 다른 한편으로 로마로 돌아간 공화파들이 다시 얼마간 세력을 형성했고, 섹스투스는 이탈리아의 기근으로 잃었던 그의 이미지를 회복하고 어느정도 지지를 받을수는 있었다. 섹스투스 역시 로마 정계에서 거물이 되긴 했다. 다만 카이사르의 내전 이후 이제 권력은 로마 정계의 지지가 아니라 칼과 창에 있었다는 것을 섹스투스는 파악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