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석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문석준은 1894년 8월 2일 함경남도 함주군 삼평면 원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3년 8월 4일 함흥동린구락부(咸興同隣俱樂部)에서 주최한 유학생 대강연회에서 <심성(心性)과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이후 1924년 4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에서 수학하던 중 1925년 동경유학생학우회 편집부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그는 1928년 동경고등사법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방학 등을 이용해 국내로 들어와 수시로 강연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1927년 8월 23일 함흥의 동명극장에서 재외 함음유학생학우회 주치로 열린 강현회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사적(史的)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으며, 1928년 8월 13~14일에도 일제당국의 강좌 불허가를 규탄하는 연설회와 함흥시내 각 학교의 맹휴(盟休) 사건을 비판하는 연설회에 연사로 참여했다.
1928년 3월 동경고등사업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한 문석준은 서울의 사립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의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29년에 일본에서 <무산자신문>,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에서 <레닌주의 초보> 제1권 등을 받은 사실이 적발되었다. 이 일로 일제 당국의 압박을 받은 그는 1931년 8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퇴직하고 잠시 함흥으로 귀환했는데, 1932년 함흥학생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북도 경찰부에서 며칠간 취조받아야 했다.
1933년 2월 조선일보사에 들어간 그는 영업국장 등에서 근무했고, 1932년 12월부터 1933년 1월 사이에 김찬(金燦)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취조를 받고 풀려났다. 이후 조선일보에서 활동하던 그는 1943년 4월 함흥에서 한병도(韓秉道)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후 문석준은 이증림(李增林) 등 여러 인사들에게 조선이 곧 독립될 것이라는 내용의 미국의 소리 방송 내용을 전달했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행적은 일제 경찰에게 적발되었고, 그는 전시에 군사에 관한 조언비어(造言飛語)를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미국에서의 방송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이승만(李承晩) 일파가 미국정부의 원조를 받아 조선임시정부(朝鮮臨時政府)를 조직하고 이승만이 그 대통령이 되어 조선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이번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돌아가면 반드시 조선독립은 실현될 것이므로 재선(在鮮) 조선동포들은 그 준비를 해야 한다. 이번 전쟁이 장기화되면 물자가 풍부한 미국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고 그때 위의 방송과 같이 조선 독립은 실현될 것이다”
1943년 10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육군 형법 및 해군 형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2개월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병보석 석방되었으나 다음날인 1월 22일에 고문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1월 20일 형무소 의무과의 진단서에 따르면, 그는 ‘영양장애·각기병·빈혈로 안면과 다리에 부종이 있으며 보행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문석준은 독립운동 증거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독립유공자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다가 2007년 정진석(鄭晉錫) 한국외대 명예교수에 의해 문석준과 관련된 일제의 수사 기록이 발굴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문석준에 대한 독립운동 사실을 확인한 뒤 201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