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1. 개요
2008년~2011년에 걸쳐 벌어진 미국 워싱턴 및 콜로라도주 연쇄 강간 사건을 다룬 프로퍼블리카(ProPublica) 수석 기자 T. 크리스천 밀러, 켄 암스트롱의 2015년 탐사보도 기사 "An Unbelievable Story of Rape"를 바탕으로 집필한 르포르타주. 저자들은 이 기사로 2016년 퓰리처상 탐사보도 부문을 수상했다.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을 경청하기는커녕 지엽적인 부분에서 트집만 잡고 허위 신고로 몰아갔다가 오히려 성폭행 피해자를 범죄자로 만들고 범인이 수 차례 연쇄 강간을 저지르는 동안 수사는커녕 기껏 채취한 증거물이나 파기하는 등 손을 놓고 있던, 평생토록 학대 속에서 자라다가 강간이라는 트라우마마저 겪은 인생을 공권력의 이름으로 부당하게 짓밟은 비극을 다루고 있다.
2. 주요 등장인물
2.1. 마리
마리(Marie)는 18세[2] 였던 2008년 8월 워싱턴주 린우드에서 가택[3] 에 침입한 괴한에 의해 강간당했으나, 서로 다른 경찰관들을 상대로 수없이 반복되는 진술 속에서의 '피해자답지 않은 태도', '일관성 없음' 등을 이유로 수사가 중단되고 오히려 자신이 허위 신고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심지어 기소 절차가 진행 중이던 2008년 10월에 린우드 인근 도시 커클랜드에서 동일 강간범의 2차 범행임이 강하게 의심되는 사건이 터졌음에도, 커클랜드 경찰서에서 두 번이나 린우드 경찰서에 연락을 취했음에도 허위 신고라는 결론은 굳건했다.[4] 결국 법정다툼마저 견딜 여력이 없던 마리는 유죄를 인정하고 정신전문가와의 상담치료 명령과 500불의 벌금형을 받은 채 애써 사건을 잊고 너덜너덜해진 삶을 이어가야 했다. 그러던 2011년, 콜로라도주 경찰이 연쇄 강간범을 검거하고 범인이 범행 당시 촬영한 '기념사진'들을 털어보던 중 워싱턴주 린우드의 주소와 이름이 적혀있는 강간 인증샷을 발견하고 린우드 경찰서에 연락을 취한 덕에 누명을 벗었다. 린우드 경찰서의 한심한 일처리로 인해 '사실무근'의 허위 신고로 처리되어 성폭력 응급 키트[5] 표본을 비롯한 주요 증거물이 죄다 파기(!)된 상태였기에 더욱 기적적인 사면 복권이었다. 이후 린우드시와 담당 수사관, 프로젝트 래더와 코쿤하우스의 간사들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여 15만불의 손해배상을 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운전면허를 따서 자전거와 뚜벅이 신세를 탈출, 린우드를 떠나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는 18륜 트럭(!) 운전기사가 되었다.
책과 넷플릭스 미니시리즈에 소개된 다른 피해자들이 가명으로 소개된 것과 달리 '마리'는 피해자의 실제 미들네임이다. 물론 실생활에선 잘 안 쓰는 이름이라고 한다.
2.2. 마크 오리어리
사건의 주범 마크 오리어리(Marc O'Leary)는 퇴역 군인으로, 여성을 강간하고 싶다는 판타지를 수 차례 현실에 옮긴 연쇄 강간범이다. 주한미군으로 동두천 캠프 케이시에서 복무하며 명예 전역했지만, 한국에서도 유사한 범행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최소 콜로라도주에서 3건[6] , 워싱턴주에서 2건[7] 이 확인된 매 범행마다 모든 흔적을 지우고 공조수사가 어지간해서는 전혀 없는 미국 경찰들의 습성을 이용하여 관할구역을 옮겨다니며 범행을 시도하는등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였지만, 피해자들이 기억해낸 신체적 특징과 차량 조사, 극미량의 터치 DNA 확보 및 가택 압수수색을 통해 모든 것이 까발려지고 끝내 자백, 법정에서 유죄를 인정했다. 최종적으로 콜로라도주에서 327년 6개월, 워싱턴주에서 68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콜로라도주에서 복역 중이다.
오리어리는 검거 당시 여러 개의 포르노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현존 기술로 뚫리지 않는 암호화 기법을 통해 하드 드라이브를 봉인해놓고 있었는데, 수사기관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하드 드라이브의 암호를 유죄 인정 협상 과정에서도 전혀 불지 않았다. 하드를 아직도 못 뚫고 있어서, 거기에 아동 포르노가 숨겨져 있나, 강간을 공유하는 거대 사이트와 남성들의 명단이 들어있는건 아닌가 하는 추측만 할 뿐이다. 만약 마리의 사진이 봉인된 하드 드라이브에만 숨겨져 있었더라면...
여담으로 300년이 넘는 초월적인 형량이 선고될 수 있었던 이유는, 피해자를 강간하다 잠시 멈추고 다시 진행하기를 반복했음이 여러 피해자들의 진술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 점에 착안해 한 텀 한 텀을 1회의 강간으로 계산(!)했기 때문.
2.3. 스테이시 갤브레이스와 에드나 헨더샷
스테이시 갤브레이스(Stacy Galbraith)와 에드나 헨더샷(Edna Hendershot)은 콜로라도주 골든 경찰서와 웨스트민스터 경찰서에서 각각 근무하는 형사로, 각자의 남편들이 서로 함께 근무한 아는 사이이다. 누가 천조국 공무원들 아니랄까봐(...) 서로간에 협동의식 전혀 없는 흔한 형사들이었지만 마침 갤브레이스의 남편이 아내가 맡은 사건에 대해 듣던 중 자신이 웨스트민스터에서 근무하면서 엇비슷한 사건이 있었음을 파악하고 합동수사 해보라고 헨더샷의 연락처를 알려줬다. 갤브레이스는 헨더샷에 비해 많이 젊은 편인데, 헨더샷이 마약반 시절 조직에 잠입해 있다가 조직을 일망타진하는 모습을 마약 조직 검거 현장에 출동한 순경으로서 지켜보며 헨더샷 멋지다고 감탄했던 바 있지만, 정작 헨더샷은 새파란 순경 나부랭이 따위는 기억 못 했다나.(...) 아무튼 서로 공유한 피해자들의 진술과 범행 수법을 토대로 같은 강간범의 범행임을 파악한 후 합동수사를 벌이게 된다.
2.4. 제프리 메이슨과 제리 리트간
제프리 메이슨(Jeffrey Mason) 경사와 제리 리트간(Jerry Rittgarn) 형사는 워싱턴주 린우드 경찰서에서 마리의 사건을 담당한 수사관으로, 마리의 진술을 받으면서 '오락가락하는' 사소한 내용을 진지하게 문제삼으며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마리를 과도하게 압박하여 허위 신고였다는 자백을 이끌어내어 마리가 강간당한 사건을 '사실무근'으로 처리하고 오히려 마리를 허위 신고 혐의로 검찰에 송치하여 전과자로 전락하게 만든다. 미란다 원칙조차 고지하지 않은채 경찰서로 불러서 허위 자백이었다는 진술을 유도하고 진술서를 쓰도록 강요했고, 리트간은 허위 자백이었다는 진술서를 철회하고자 다시 찾아오자 주거를 박탈당하고 징역 1년에 처해질 수 있다면서 협박까지 했다.
메이슨 경사는 경찰을 그만둘까 하는 회의감을 느낄만큼 죄책감을 느껴서 이후 마리에게 사과하지만, 리트간 형사는 경찰을 그만두고 캘리포니아에서 사설 탐정으로 개업한 처지여서인지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이후에도 탐사보도 기자들의 접근에 불쾌감만을 표하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했다.
시애틀 타임스 기사
3. 넷플릭스 미니시리즈
2019년 9월 13일, 넷플릭스에서 이 책을 원작으로 제작한 토니 콜렛, 메릿 웨버, 케이틀린 디버 주연의 8부작 미니시리즈 <믿을 수 없는 이야기(Unbelievable)>가 공개되었다. 마리의 입장에서 성폭력 생존자의 트라우마와 강압적인 진술, 강간 증거물 채집 과정 등이 묘사되는 1부부터가 특히 참담하다.
주인공인 스테이시 갤브레이스와 에드나 헨더샷에 해당하는 캐릭터의 이름은 각각 캐런 듀발, 그레이스 라스무센으로 바뀌었고, 범인의 신상도 육군이 아닌 해병대 출신의 크리스 매카시라는 캐릭터로 바뀌었지만, 원작 르포르타주에 묘사된 디테일한 사항들이 군데군데 잘 배치되어 있다. 그 말인즉슨, 원작을 읽었더라면 뒤통수를 치는 반전에 의한 재미는 딱히 못 느낄거라는 것. 사실 책을 안 읽었더라도 극중에서 반전요소를 찾아볼만한 건덕지는 별로 없다. 대신, 성폭력 피해자들의 트라우마와 땅에 떨어진 자존감을 회복할 길이 없는 삶이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안타까울 정도로 잘 묘사하고 있다. 특히 1화에서 성폭행 신고를 거짓말로 몰아가는 꼰대 형사들의 호통소리에 눈물을 글썽이며 벌벌 떠는 마리의 모습은 시청자들마저 마음 아프게 한다.
극의 시간과 공간은 계속해서 2008년의 워싱턴주와 2011년의 콜로라도주를 오가는 두 갈래로 진행되며, 콜로라도의 형사들과 마리는 직접 만나지 않는다.[8] , 마리가 강간당한 사건을 맡았던 린우드 경찰서의 (실존인물 제프 메이슨 경사에 해당하는 캐릭터인) 로버트 파커 형사만이 2011년 범인이 검거되고 사건이 정리된 웨스트민스터 경찰서에 방문하여 모든 전말을 파악하고 충격과 죄책감에 빠지는 장면, 극의 엔딩에서 마리가 손해배상을 받고 운전면허도 따는등 일상으로 돌아와 바닷가에 놀러갔다가 듀발에게 전화를 걸어 감사를 전하는 장면[9] 정도만이 있을 뿐이다.
4. 기타
- 이 책을 읽고 넷플릭스 시리즈까지 완주했다면 Law&Order: SVU를 시청할 것을 권한다. SVU에 등장하는 20+시즌 460여개(...)의 픽션/논픽션 에피소드들 중에서도 피해자가 이 정도로 억울하게 빨간 줄을 긋게 되는 사건은 드물다. 그야말로 픽션은 현실을 이길 수가 없다는 탄식이 나오지만, 한편으로는 마리의 사건은 차라리 기적적으로 잘 풀린 케이스라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반대로 SVU를 먼저 보고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를 읽는다면,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에서 법봉이 두 번 내리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Law&Order 시리즈는 사건을 수사하고 법정에서 유죄 평결을 받아내는 것까지 목표로 하는 시리즈임을 감안하고 보는 것이 좋다. 오리어리 같이 스스로 유죄를 인정하며 피해자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수사기관에 협조도 하는 강간마는 여기서는 극히 드물다! 참고로 저자가 직접 추천한 이 넷플릭스 시리즈 리뷰에서는 이 시리즈를 SVU의 '해독제'라 평가하고 있다. 말하자면 쓰디쓴 해독제랄까? SVU는 극중 가해자들의 피해자 비난은 예사에 경찰 수사 과정과 형사재판에서의 2차 가해 등 온갖 트라우마 트리거로 점철된 시리즈이므로 마냥 이 책의 결말과 같은 '정의', '힐링'만을 기대하고 쉽게 도전하기는 힘들다.
픽션이 아닌 또다른 다큐멘터리를 찾는다면... 2017년작 다큐멘터리 영화 를 보는 것도 좋다. 이 책에서 미국 법무부와 맨해튼 검찰청이 8천만 달러를 투입했으며 SVU의 주연배우 마리슈카 하기테이가 설립한 Joyful Heart Foundation의 지지가 있었다고 언급되는 미검사 성폭력 응급 키트 전수조사 운동을 다룬다. 피해자의 신체에 남은 증거물을 채취하고도 성폭력 응급 키트가 그냥 방치(!)되느라 증거물이 분실되고 훼손되는 사이 범인이 온 북미 대륙을 활보하며 연쇄강간을 자행하는 꼬라지를 보다 보면 시청자들의 입에서 욕이 절로 나온다.
- 마리의 여러 위탁모 중 하나인 페기는 마리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고 경찰에 알리면서 이런 뇌피셜을 날린다. 마리는 피해자다운 면모가 없다고, 자기가 Law&Order 애청자인데 마리가 하는 말이 꼭 로앤오더 대본마냥 들린다고. 그런데 넷플릭스 시리즈에서 각색된 해당 캐릭터 주디스를 연기한 배우 엘리자베스 마블(Elizabeth Marvel)은 SVU에서 몹시 밥맛인 성폭력 사건 변호사 리타 칼훈 역으로 출연한 바 있다. [10] 이외에 겹치는 배우로는 마리가 주변인들의 냉대와 불신 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마음고생을 겪을 때 유일하게 신뢰를 보여준 법원 지정 정신전문의 역으로 출연한 브룩 스미스(Brooke Smith)가 있는데... 이 양반은 악질 성매매 포주로 출연했다.
5. 둘러보기
[1] 하술할 넷플릭스 시리즈 공개 이후 개정판이 나왔다. 개정판 제목은 Unbelievable: The Story of Two Detectives' Relentless Search for the Truth [2] 3세부터 아동복지국의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온갖 학대 속에서 자란 마리는 미국에서 법적 성년자로 간주되는 18세에도 아직 사회에 나갈 준비가 되지 않아 프로젝트 래더(Project Ladder)라는 위탁가정 출신 사회초년생을 위한 복지 프로그램의 관리를 받으며 살아가던 중이었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남들은 고등학교 때 다 따는 운전면허도 없었다. [3] 프로젝트 래더 산하 청년들에게 지원되는 공동주거시설 '코쿤하우스(Cocoon House)'.[4] 마리의 옛 위탁모 중 하나인 섀넌은 뉴스에서 커클랜드 강간 사건 보도를 듣고 마리에게도 알려주며 경찰서에 다시 가서 진술할 것을 권했으나, 경찰과 어른들의 강압적인 태도에 질려버린 마리는 뉴스를 보며 흐느끼면서도 차마 경찰을 다시 찾아가지 못했다.[5] 미국에서는 이를 흔히 강간 키트(Rape Kit)라고 부르는데, 본서에서는 현장 수사관들이 연쇄 강간범이 범행 때마다 챙겨다니는 흉악한 범행도구들을 일컬어 강간 키트라고 부르고 있으므로 혼동에 유의할 것. [6] 피해자가 급히 피하다 심한 부상을 입었던 강간미수사건 1건도 있다. 또한 이 강간미수 범행 3주 전에 인근에서 혼자 사는 여성의 집 앞에 수상한 차량이 죽치고 있다는 신고가 있었는데, 이 출동에서 차량 번호가 경찰 출동 기록에 남고 수사관들의 신원조회에서 소유주 마크 오리어리가 주요 용의자로 떠올랐다.[7] 마리 사건과 마리가 허위 신고로 기소되었을 때 뉴스에 보도된 커클랜드에서의 범행.[8] 실제 피해자는 가해자를 볼 자신이 없어서 워싱턴에서의 형량 심리에도 가지 않았고 커클랜드 사건의 피해자만이 참석하여 진술했다.[9] 이 장면은 2016년 가을 마리가 펜실베이니아에서 메인으로 물류 배송을 가던 길에 갤브레이스에게 감사의 전화를 걸어 15분 가량 대화했다는 기록에 기반한 묘사인데, 마리 역의 배우 케이틀린 디버가 너무 어려보여서인지(범인의 강간 인증샷을 본 라스무센이 열두살 밖에 안된 것 같다며 혀를 찼을 정도) 극중에서는 면허를 딴지 얼마 안된 시점으로 묘사된다. [10] 어떤 변호사는 의뢰인의 미성년자 자녀를 강간하여 임신시키질 않나, 의뢰인의 비밀을 보호한다는 직업윤리로 인해 억울한 사람이 20년간 감방에 썩는 줄 알면서도 아무 대책 없이 손 놓고 있질 않나, 기독교인의 동성애자 교정강간 사건을 수임하더니 정작 본인은 유대인이면서 종교의 자유 운운하는 변호를 펼치질 않나, 성범죄 전과자인 의뢰인의 범행수법을 모방하고 전과자인 의뢰인에게 덮어씌우려 하질 않나, 인권변호사라면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상상도 못할 2차 가해를 법정 신문의 미명 하에 눈 하나 꿈쩍 않고 행하질 않나... 하도 밥맛인 변호사가 많아서인지 심지어 성폭력 사범 변호하던 변호사가 다른 변호사에게 성폭행당하고 자신이 피해자를 들볶던 시절을 떠올리며 통곡하는 사건마저 나온다. 이런 변호사들에 비하면 리타 칼훈은 차라리 직업 외적으로 별다른 문제 없이 좋은 일 할 때는 좋은 일 하는 착한(?) 변호사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