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비난

 

1. 개요
2. 상세
2.1. 심리적 원인
2.2. 피해자다움
3. 사례
4. 같이 보기
5. 바깥 고리


1. 개요


Victim blaming
피해자의 인권을 무시하고 피해자를 조롱하며 탓하는 행위.
범죄, 폭력, 학대 등에 있어 책임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떠넘기거나, 피해자의 잘못을 묻는 경우를 의미한다. 국내에서는 '당한 놈 잘못'이라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복수의 피해자가 존재할 경우, 피해자들 사이에서 일방적 혹은 상호적인 비난이 존재하기도 한다. 이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행위로 보통 대상이 약자, 소수자인 경우가 많다.

2. 상세


먼저 언급할 만한 사례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비난'''하면서 사실은 저쪽이 진짜로 가해자이고 자신이야말로 억울하게 몰린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경우이다. 이를 '''경쟁적 피해의식'''(competitive victimhood)이라고 부른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일본 극우에 관련된 피해자 코스프레일본의 피해자 행세를 들 수 있다. 이는 비단 국가관계뿐만 아니라 군사분쟁지역, 젠더 역차별 문제, 인종차별, 지역갈등 등 매우 다양한 작금의 사회문제에 적용이 가능한 용어이다.

심리학자들은 피해자로서의 지위가 사회적 및 공적인 심리적 지지를 얻을 수 있고, 당사자의 내면에서 도덕적 정체성에 우월감을 주는 반면, 가해자로서의 지위는 당사자의 내면에서 도덕적 정체성을 위협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피해자 지위는 양측 모두에게 선망받는 지위'''라고 분석하고 있다. 호주 백인들의 이주자 혐오를 주제로 하는 어떤 연구에 따르면[1] 다수 집단은 소수 집단의 피해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 또한 소수 집단에 의해 피해를 입는다고 항의할 수 있다. 즉 이들은 100% 순수한 피해자란 없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자라고 믿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심리적으로 '''가해와 피해는 제로섬 관계로 인식되지 않는다'''고 한다.

객관적 우열이나 억울함과는 별개로, 경쟁적 피해의식은 갈등 상황을 완화하거나 건설적으로 개선하기는 커녕 도리어 악화시킨다는 점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어 있다. 대중적 의미에서의 피해자 행세(victim playing)라는 단어와도 연결된다. 이와 관련하여 학계에 리뷰 논문도 나와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읽어볼 것.[2]
다음으로, '''사건과 무관한 제3자가 가해자 편을 들면서 피해자를 비난'''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주제의 연구는 사회학, 사회심리학, 범죄학, 법학, 경찰행정학, 여성학, 문화비평 등의 분야들에서 폭넓게 이루어졌으며, 거의 사실상 '''강간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경향'''을 핵심 토픽으로 하여 진행되어 왔다. 사건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조차 피해자를 비난하게 되기 때문에, 피해자는 이러한 비난을 받고 사회에서 고립되며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심해질 경우, 피해자는 자신이 겪은 피해 사실을 밝히기 이전에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의 시나리오를 우려하여 아예 말을 못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 경우, 결과적으로 성범죄 신고율은 범죄율을 따라가지 못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백과사전의 한 단락에서 피해자 비난을 설명하고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읽어볼 것.[3]
피해자에 대한 비난이 사회적으로 피해자를 무력화시키고 탈권력화(disempowerment)한다는 점은, 특히나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피해자들에게는 큰 문제가 된다. 국가와 정부, 법에 호소해보려고 해도 사법기관이 피해자를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본다면 정의의 구현은 어려워지게 되고, 주변 지인들이 또한 자신을 비난하게 된다면 그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재활을 하는 것 역시 힘들어진다. 아무도 피해자 편을 들어주지 않으니,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로부터 벗어나서 사회에 재복귀하는 데 실패하게 되어, '''끝없이 자신의 피해자성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따라서 피해자에 대한 구제와 지원은 피해자로부터 피해자성을 분리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예컨대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 그 피해자의 섹슈얼리티에서 피해자라는 라벨링을 떼어 줄 필요가 있다.[4]
범죄 피해를 공론화하는 것이 피해자 비난으로 인해 힘들어지기는 하지만, 때로는 정반대로 피해자 보호가 너무 극심해져서 거꾸로 무고죄가 발생하게 되기도 한다. 이쯤에서, 이 가능성은 페미니스트인 수전 브라운밀러(S.Brownmiller)가 자신의 저서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에서 인종차별성차별을 엮어 이야기하면서 제기했다는 것을 미리 언급해야 할 것 같다.[5]
브라운밀러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백인 여성은 백인 남성에게 강간을 당하면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말을 꺼내지 못하지만, 흑인 남성에게 강간을 당하거나 강간 위협을 받으면 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어 공론화한다'''는 것이다. 백인 여성들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흑인 남성과 성적으로 접촉한 뒤 강간이라고 주장하면 "우리 귀한 백인이 저 짐승 같은 흑인에게!" 라는 여론이 형성되어서 피해자 보호가 이루어지지만, 성적 접촉 후에 강간을 주장하지 않는다면 "여자가 이렇게나 문란해서야, 쯧쯧!" 하는 여론이 형성되어서 거꾸로 백인 여성을 비난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인종차별이 갖는 사회적 영향'''과 관련하여 미국 사회에 상당히 의미심장한 통찰을 준다. 세상 일이 이분법적으로 볼 정도로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인 틀에 의해 규정됨을 보여주는 예이다.
인종차별, 지역비하 등 특정 집단 전체를 비하하는 언행도 결과적으로 보면 피해자 비난이 될 수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같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데 많은 누리꾼들은 이걸 간과하고, 일단 사건사고가 생기면 해당 집단을 비하하기에 급급하다.[6] 하여 그 집단에 소속된 피해자도 덩달아 비난을 듣게 되는 것이다.
사실 성폭력이나 다른 폭력 이상으로 피해자 비난이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폭력이 있는데, 바로 학교폭력이다. 물리적 폭력과 언어적 폭력, 따돌림 등을 막론하고, 학교폭력의 경우 가해자의 경우 흔하게 그 일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제3자들도 딱히 경멸하지 않는다. (적어도 피해자에 대한 경멸의 감정에 비하면 없는 수준에 가깝고, 오히려 뒤틀린 숭배의 감정까지 깔려있다.)
학교폭력의 피해자에 대한 비하는 아주 일상적이며, 다른 분야의 폭력에 민감하다는 사람들조차 그러한 비하는 별로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격한 언쟁 시에 사용한다. 이러한 비하의 어휘는 학교폭력과 전혀 관계없는 다른 논쟁(이를테면 젠더, 지역 논쟁 등)에서도 주된 비하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찐따, 담당일진, 아싸(가볍게 사용될 때도 있다), 왕따, '친구가 없다' 등등의 표현이 그러한 표현의 예이다. 위의 첫번째 문단에서는 '''선망받는 피해자 지위'''에 대해 논했다면, 여기서는 '''선망받는 가해자 지위'''와 연관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가해자들은 지금은 "아~ 나 이제 옛날처럼 거칠게 안 살거야. 이제 착하게 살고 힘을 함부로 쓰지 않겠어." 같은 말을 하면서 여전히 가오를 부릴 수 있으며, 그들을 동경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은 유튜브 등에만 해도 넘쳐난다. 그들에 대한 비판자들에 대해서는 "너 저 사람 앞에서 무서워서 말도 못할거지?" 같은 약자멸시의 어휘를 통해 어떻게든 끌어내리려는 공격들이 가해진다. 그 공격자들은 가해자들 앞에서는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서 있다. 이는 강약약강에 해당된다고 볼 수있다. 만만한 사람들에게는 막말을 쉽게 내뱉는 경향이 있다. 인터넷상에서 (특히 젊은세대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비하어 중 하나가 '찐따'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약자멸시 및 비굴함이 학교폭력 문제를 피해자 비난으로 만드는 데 어떻게 기여하고 있느냐를 관찰할 수 있다.

2.1. 심리적 원인


피해자 비난이 대체 왜 발생하는 것인지에 대해 '''그 원인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심리학계에서 줄곧 있어 왔다. 확인 가능한 가장 오래 된 과학적 연구 문헌은 1966년의 것이다. 이 논문에 따르면[7], 둘씩 쌍으로 묶여서 과제를 수행해야 했던 참가자들은, 자기 실수 때문에 대신 괜히 전기충격을 받는 피해자를 보거나, 혹은 그 전기충격이 장기간 지속되는 피해자를 접했을 때 뜻밖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 피해자 파트너에게 미안해하고 그들을 안쓰러워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그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그들을 거부했으며 배척했던 것이다. 직접적으로 사회문제와 결합시킨 다른 논문에서는[8], 처녀아내 등 소위 '존중할 만한 여성'(respectable woman)이라면 강간을 당했을 때 가해자에게 범죄의 책임이 있으므로 무거운 선고가 바람직하게 여겨지지만, 만일 이혼녀일 경우에는 가해자에게 책임을 덜 묻고 형량도 가볍게 선고한다고 하였다.
이런 특이한 심리의 원인에 대해서 다양한 설명들이 제시되어 왔다. 사회적 인지(social cognition) 연구자들은 이를 '''후견편향'''(hindsight bias)'''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한 논문에 따르면[9] 참가자들의 절반에게는 어떤 여성이 밤에 헐벗은 옷차림으로 할렘의 골목길을 돌아다니다가 당한다거나 등 특정 행동을 한 후 무난한 결말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소개했고, 나머지 절반에게는 그 여성의 행동까지는 똑같은데 갑자기 강간 사건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러자 강간 결말 조건의 참가자들은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러게 그 행동을 하지 말았어야지!" 라고 생각하는 후견편향이 나타났지만, 무난한 결말 조건의 참가자들은 (똑같은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내 그럴 줄 알았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 후견편향은 피해자에 대한 비난의 경향을 직접적으로 예측했으며, 심지어 이들에게 "...사실 저쪽 집단에서는 이런 평범한 이야기를 봤다던데요?"라고 보여주더라도 이들은 "그래도 나는 강간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했었다"고 초지일관으로 답변했다고.
이후 어떤 연구자들은 교도소에 수감된 성범죄자들 37명을 대상으로 심층면접을 실시하기도 했다.[10] 이 문헌에 따르면, 37명의 성범죄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비난하기 위하여 '''다섯 가지의 암묵적인 기본 전제'''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 전제들은 각각 ① '여성들은 불가사의하다'(Women are unknowable), ② '여성들은 성적 대상이다'(Women are sex objects), ③ '남성의 성욕은 통제 불능이다'(Male sex drives are uncontrollable), ④ '나는 내 욕구를 마땅히 충족시킬 권리가 있다'(Entitlement), 그리고 ⑤ '원래 세상이란 위험한 곳이다'(Dangerous world)로 정리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기본 전제를 미리 깔아놓고 사건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에 "나는 잘못한 게 없고, 잘못한 게 있다면 저쪽이다"라고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연구자들은 개인차(individual difference)에 입각해서 연구를 수행하기도 했다. 인간관계 사회심리학 분야에서 수행한 2011년의 한 연구에 따르면[11] 가상의 성희롱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 남성 참가자들 중 유독 성차별 성향이 높게 나타난 사람들은 그 이야기 속 가해자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더 많이 느꼈으며, 자신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자기방어적(self-defensive)인 태도로 성희롱 사건의 원인을 찾으려 했고, 결과적으로 피해자를 비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가해자에게 공감이 되는 사람들은 자기도 찔리기 때문에 가해자의 편을 들어준다'''는 것. 물론 반대로 말하자면, 매사 성차별을 거의 하지 않는 평등한 의식을 지닌 남성들은 이런 비난에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점 역시 성립한다.
무엇보다도, 피해자 비난에 관련된 현대의 대개의 심리학적 연구들은 멜빈 러너(M.Lerner)가 주창한 '''공정한 세상 신념'''(Just-world hypothesis)이라는 이론적 조망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공정한 세상 신념은 한국어의 '사필귀정' 이라는 표현과도 뜻이 상당 부분 통하는데, 이것은 "결국에는 선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 것이 세상의 순리이다"라고 굳게 믿는 신념을 의미한다. 즉,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강간이나 폭력 등의 피해자가 되었다면, 그 사람이 '뭘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나쁜 사건을 겪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쉬워지게 된다.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 사람이 그런 불행한 일을 겪었다면, 이 세상은 더는 자신이 생각했던 그런 '공정한' 곳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심리적으로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오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좀 더 나아가면, 결국 피해자 비난은 '''인식론적 위협에 대한 회피'''라고도 말할 수 있다. 아론 케이(A.C.Kay)와 같은 이론가들은 인간에게 있어서 혼돈, 무선성(randomness), 무질서, 구조의 부재, 우연성, 불확실성은 매우 불쾌하며 혐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고 설명한다. 갑작스럽게 강간이나 린치 등을 겪게 되었을 때, 그것이 그저 "재수없게 당했다" 라고 설명된다면, 이를 지켜본 제3자들은 엄청난 불안과 두려움을 경험한다. 자신 역시 언젠가 어느 순간에 똑같은 불행을 겪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간에 그 곳에 가면 안 돼, 그 행동을 하면 안 돼, 그 옷차림을 하면 안 돼"라는 식으로 어떻게든 그 '우연해 보이는' 현상을 '''예측 가능하고 예방 가능한 현상으로 바꾸기 위해''' 애를 쓰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피해자를 비난한다는 것은, 그 비난의 한편으로는 "...따라서 적어도 나라면 안전할 수 있겠지?"라는 불확실한 소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12]

2.2. 피해자다움


Victimness
피해자다움은 법학, 경찰행정학, 범죄학, 여성학 등의 분야들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받아 왔으며, '''범죄 피해자가 갖고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속성들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구성된다. 대중적인 표현으로는 "당신 같은 피해자는 처음 봤다"는 표현을 들 수 있으며, 심지어 국내의 한 논문에 따르면[13] 피해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은 때때로 '''성폭력 피해자를 오히려 무고죄로 기소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한다. 예컨대 자신이 범죄를 당했다는 의식이 확고하면서, 그것이 자기 탓이 아니라고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피해자는 고발 과정에서 당당하고 명석한 태도를 견지할 텐데, 이는 수사관들에게 무고의 죄질이 불량하다는 엉뚱한 인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사관들의 머릿속에 막연히 떠다니는 피해자다운 태도는 '울먹이고, 혼란스럽고, 말을 잇지 못하는' 인상이기 때문이라는 것.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피해자답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이미 범죄정책 분야의 연구자인 닐스 크리스티(N.Christie)가 중요한 문헌을 남긴 바 있다.[14] 크리스티는 "피해자로서의 완전성과 적격성의 지위"(the complete and legitimate status of being a victim)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이를 '''이상적 피해자'''(the ideal victim)라고 불렀다. 그리고 피해자가 이상적 이미지에 가까워질수록, 가해자 역시 이상적 이미지에 가까워진다고 하였다. 그의 문헌에서는 이상적 피해자의 다섯 가지 기준이 제시되는데, 이를 나무위키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1. 피해자는 약하다(The victim is weak)
즉, 피해자가 환자, 노인, 어린이 등일 때 좀 더 '피해자답다' 고 여겨진다. 전근대 서구에는 노인 여성일수록 오히려 '마녀' 같은 이미지로 인해 가해자다움에 가까웠지만, 현대사회에 접어들면서 노인 여성들이 거꾸로 '연약함' 같은 이미지가 부각됨에 따라 피해자의 이미지에 잘 부합하게 되었다고 한다.
  • 2. 피해자는 훌륭한 일을 하고 있었다(The victim was carrying out a respectable project)
피해자가 피해를 겪던 당시에 여동생을 돌보고 있었거나, 노모의 병수발을 들고 있었거나, 어머니께 드릴 꽃을 들고 있었거나,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거나, 하여간 도덕적으로 훌륭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면, 그 피해자는 더 '피해자답다' 고 여겨진다.
  • 3. 피해자는 비난받지 않을 만한 곳에 있었다(The victim was where they could not possibly be blamed for being)
예컨대 피해자가 백주대낮에 갑자기 습격을 받았다거나 한다면, 그 피해자는 '피해자답다'는 인정을 받기가 쉽다. 이는 표현을 바꾸면 "피해자는 자기 스스로 범죄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로도 말할 수 있다.
  • 4. 가해자는 크고 악하다(The offender was big and bad)
가해자가 근육질이라거나 동종의 강력범죄 전과 이력이 있다면, 그 가해자에게 당한 피해자 역시 덩달아서 더 무고한 피해자로 존중 받을 수 있다.
  • 5. 가해자는 낯선 사람이며 피해자와 아무런 사적 관계가 없다(The offender was unknown and in no personal relationship to the victim)
즉, 가해자와 친밀한 관계일수록 가해자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는 여론이 생기지만, 피해자에게 원한을 사거나 개인 간의 시시콜콜한 역사가 아예 없었다면 그 피해자는 비로소 '피해자답다'고 여겨진다.
위의 다섯 가지 기준이 무서운 것은, 위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은 '''실제로 피해자인 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피해자 지위를 일방적으로 부정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피해자가 이상적 피해자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입증하는 책임은, 크리스티에 따르면 '''피해자 본인에게 오롯이 지워지게 된다.''' 즉, 피해자 본인이 자신이 얼마나 약하고,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하고 있었고, 얼마나 위험을 회피하려 애를 썼고, 가해자가 얼마나 강하고 무서웠으며, 자신과 가해자는 전혀 모르는 사이라는 것을 전부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 자체가 어려운 일인 것은 아니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만일 피해자가 자신이 이상적 피해자임을 입증하기 위해 입을 열고 자신을 변호하고 사건을 공론화한다면, 이번에는 "드센 성격"이라는 인상을 주어서 거꾸로 1번 기준에서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라고. 결국 피해자에게 '가장 이상적인 피해자다움'이란 쉽게 달성하기 어려운 요구인 셈이다.
그런데 크리스티가 힘주어 강조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이상적인 가해자나 이상적인 피해자는 생각만큼 많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강간 사건들이 늘 '풀숲 속에 도사리고 있다가 덮쳐드는 늑대'에 의해 '할머니의 병수발을 들기 위해 숲길을 홀로 걸어가던 빨간 모자'가 변을 당하는 시나리오를 따르지는 않는다. 강간뿐만 아니라 왕따학교폭력, 가정폭력, 기타 수많은 강력범죄들은 대개 그렇다. 가해자 역시 악한이라고 보기에는 의외로 평범할 뿐이다. 많은 경우는 타인을 해치려는 의도가 불명확하거나, 피해자와 안면이 이미 있었거나, 의외로 왜소한 체격이기도 하다. 여기에 쌍방폭행의 가능성까지 거론되기 시작하면 실로 설상가상이다.
크리스티에 따르면, '''우리 사회가 파편화되고 개인들이 고립되어서 남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관심이 약해질수록, 사람들은 자꾸 '이상적 이미지'에 의존하여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라본다'''고 한다. 예컨대 집에 남자형제만 있고 남중-남고-공대-군대 테크를 따라온 남성일수록 여성들의 '털털한 평소 모습'보다는 '야동도 일절 안 보고, 섹드립도 일절 안 치고, , 이슬만 마실 듯한 유교걸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게 되듯이, 범죄 피해자들이 뭐가 어쩌건 관심이 없는 무심한 사회일수록 그 피해자들이 마치 '순진무구하고 힘 없는 불쌍한 모습' 일 거라고 지레짐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크리스티는 이상적 이미지를 털어내 버리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이 서로를 충분히 이해할 만큼 가까워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해야만 현실이 복잡하다는 것을 느끼고 정형화된 머릿속 피해자상에 현실의 피해자들을 끼워맞추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가해자가 된 피해자/피해자가 된 가해자는 어떨까? 예컨대 막장부모로써 자녀를 학대했다가 그 자녀에 의해 훗날 살해당한 이은석 같은 케이스를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크리스티는 일반 대중이 이은석에 대해서는 가해자답지 않은 가해자, 이은석의 부모에 대해서는 피해자답지 않은 피해자라고 느끼게 될 것이라고 예상할 것이다. 따라서 대중은 이은석의 부모에 대해서 "당할 만한 짓을 하니까 당했지"라고 여기며, 가해자 이은석 씨에게 도리어 안됐다며 동정을 보낼 것이라고 예상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당시 여론이 그랬다.[15] 따라서 이런 사례들조차도 역시 크리스티의 이론적 예측이 어김없이 맞아떨어지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3. 사례



위에서 이미 잔뜩 설명했기에 여기서 다시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강간과 같은 성범죄는 사실상 피해자 비난에 대한 담론과 학술적 논의의 중심부에 있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기한 거의 모든 설명들은 명시적 혹은 암묵적으로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비난 사례를 가정하고 있는 문헌들을 참고한 것이다. 법조계에서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묘한 용어를 도입한 것 역시 성범죄 사건에서의 피해자 비난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다.[16]#관련기사 수십년 전, 즉 1970년대만 하더라도 법원에서 성폭행을 당한 여성의 책임을 부각하기도 했었는데, 최근에는 해당 사례에서 보듯이 재판장이 성폭행 피해자에게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며 강조해 말하는 등 많이 변화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맞을 짓"이라는 표현으로 모든 것을 설명 가능하다. 여기서 폭력이란 위의 성폭력을 제외한 가정폭력이나 학교폭력, 집단 따돌림, 혹은 군 가혹행위 등을 포괄하기 위해 동원한 단어이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군대에서 폭행을 당하거나, 집에서 배우자나 부모에게 몽둥이질을 당하거나 하는 사례들에서 "너도 뭔가 잘못한 게 있겠지" 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 이에 속한다. 특히 가정폭력의 경우, "왜 참고 살고 있어? 얼른 도망쳐야지!"라고 말하는 것 역시, 비록 선의에서 조언한 것일지언정 도망치지 않으면 무슨 일을 겪든 본인 책임이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기에 비난조로 들릴 수 있다.
  • 학교폭력 피해자: 위의 '피해자다움'이란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피해자가 평소 성적이 좋지 않거나 아예 학교 전체의 학력이 낮거나 피해자가 게임 등 폭력적인 오락매체에 자주 노출되거나 등의 요인들이 있을 경우 피해자 비난이 발생하게 된다. 학교폭력/오해 등의 문서를 참조할 것. 특히 피해자를 제외한 제3자인 학생, 교사, 학생의 부모 등의 경우 위에 언급된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제3자의 입장과 대단히 유사하다. 가해자가 피해자 비난을 행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의외로 피해자 비난은 공중보건, 건강, 의료, 헬스케어 분야에서도 연구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어떤 전염병 등에 감염된 환자를 비난하는 경향에 치중하여 논의하고 있는데[17], "그러길래 애초에 감염될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라는 식으로 환자를 비난하게 되는 식이다. 특히 이런 비난이 가장 극심해지는 질병이 바로 에이즈이며, 에이즈 보균자에 대해서는 아직도 "문란하게 놀아서 그래", "동성애를 해서 그래" 라는 식으로 비난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한센병은 역사성을 따져보면 에이즈보다 더 유서깊은(?) 피해자 비난의 사례이다. 특유의 끔찍한 증상과 전염성으로 인해 한센병 환자들은 심각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속는 놈이 잘못이다"로 대표되는 케이스. 만일 주위에 누군가가 보이스 피싱에 속아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멍청하다면서 비웃었다면, 이 역시 그 피해자에 대한 비난이 될지도 모른다. 보이스 피싱 문서에서도 나오지만 현직 경찰관들이나 법조계에 출입하는 기자들마저 속여넘기는 게 바로 사기단의 현실이다. 비단 통신전자금융사기가 아니더라도, "사기는 멍청한 사람들이 당하는 것이다"와 같은 편견 및 고정관념은 그 사기의 종류를 막론하고 폭넓게 퍼져 있다.
'범죄자의 가족이니까, 연관자니까 피해를 당해도 무관하다'라는 인식이 널리 퍼진 케이스. 연좌제 자체는 현대엔 제도상으로는 소멸되었으나 연좌라는 인식은 어딜가든 남아있는지라 신상이 알려지고 주목받은 범죄자의 가족은 설령 범죄자와 무관하게 살고 과거나 현재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연좌에 의해 사회적으로 차별, 혐오, 낙인의 피해자가 되며 심할 경우 직장생활을 비롯한 여러 사회활동에도 대놓고 피해를 보거나 피해자나 피해자의 연관자에게 보복성 범죄행위를 당하거나[18], 연좌에 의해 사회적으로 말살, 거세당하는 걸 견디지 못한 가해자의 가족/연관자이면서 동시에 연좌 피해자가 끝내 자살하는 등의 문제가 나오기도 한다.
특정 국가의 국민 혹은 특정 인종이 단순히 국적/인종을 이유로 차별발언, 혐오발언을 들어도 '평소 해당 국가/인종이 문제를 일으켜서 이미지를 깎아먹으니까 당해서 싸다'는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또 비슷한 경우로, 서구권의 동양인 혐오 범죄에 대하여도 비난의 대상을 인종차별 및 혐오범죄의 당사자가 아니라 다른 국가의 동양인에게 돌리면서 '너희들이 우리 이미지를 깎아먹어서 애꿎은 우리까지 피해를 입는다'는 비난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특정 국가의 동양인을 대상으로는 혐오범죄를 저질러도 좋다는 의미로 되기 때문에 지양해야 할 바이다.
  • 국가 권력에 의한 탄압과 폭력, 차별 행위
위의 인종차별이나 폭력 피해자처럼, '뭔가 맞을 짓을 해서 국가와 국민들에게 해를 끼쳤을 테니 당한 것', 혹은 '억울해도 나라를 위해선 어쩔 수 없다'라는 식의 인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이런 인식이 국가주의처럼 국가 권력을 절대화하는 사상과 결합할 경우 더더욱 합리화가 가능하다.
  • 악성프로그램 피해자
불법 다운로드나 불법 사이트 등을 이용했다가 거기에 있던 바이러스나 렌섬웨어 등의 악성프로그램에 당하는 경우. 이런 상황에 처한 일부 피해자들이 자신의 입장 때문에 (혹여나 같이 털릴까봐) 신고를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과거 가해를 저지른 전적이 있는데 다른 사건에선 자기가 피해자가 된 경우. 보복성 범죄를 당하건 무관한 범죄를 당하건 간에 과거 가해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퍼지면 '당할만 했네' 하는 등의 비난이 따라오는 경우가 있다.
닫힌 사회 특유의 내부 결속력과 자기 합리화 등으로 인해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례가 많다.

4. 같이 보기


  • 2차 가해
  • 강간 신화
  • 강간 문화
  • 꽃뱀
  • 메이와쿠: 싸움 자체를 금기시하는 일본의 관습. 자신이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해 정당하게 이야기해도 오히려 평화를 깨뜨렸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그 피해자들을 역으로 집단으로 비난하는 일이 빈번하며, 한 번은 세계적으로 망신이 된 사례도 있다.
  • 맞을 짓
  • 성선설: 고대, 중세에는 노예, 하층민 등에 대한 지나친 학대를 예방하기 위하는 좋은 취지로 시작된 개념이었지만, 나중에 유교 문화권, 이슬람 문화권에서 “강간범은 원래 착한 사람인데, 사악한 여자가 유혹해서 어쩔 수 없이 강간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뻘논리로 악용되곤 한다. 참고로 초등학교 교사 중에서도 왕따 가해자 문제를 처리하기 귀찮았을 때 왕따 가해자 편을 드는 수단으로 잘 이용되곤 했다.[19]
  • 찐따
  •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 존경성 정치
  • 책임전가
  • 한국인은 때려야 말을 잘 듣는다
  • 유년시절의 성폭행 기억은 억압된다
  • 피해자 코스프레[20]
  • 구타유발죄
  • 인간쓰레기

5. 바깥 고리



[1] Leviston, Z., Dandy, J., & Jetten, J. (2020). ‘They're discriminated against, but so are we’: White Australian‐born perceptions of ingroup and immigrant discrimination over time are not zero sum. British Journal of Social Psychology. doi:10.1111/bjso.12384.[2] Young, I. F., & Sullivan, D. (2016). Competitive victimhood: A review of the theoretical and empirical literature. Current opinion in psychology, 11, 30-34.[3] Maybrey, C. (2004). "Blaming the victim" syndrome. In M. D. Smith (Ed.), Encyclopedia of Rape (pp.26-28). Greenwood Publishing Group.[4] 배상미 (2017). 성폭력 피해자의 섹슈얼리티--제도화된 성폭력 각본을 넘어서. 여/성이론, 36, 12-37.[5] 브라운밀러는 무고죄의 사례로서 미국의 유명한 스캔들인 "스코츠보로 소년들"(Scottsborough boys) 사건을 들고 있다. 물론 이는 흑인 사회와 리버럴들에게 엄청난 반발을 불러온 대목이었다고 한다.[6] 이 경우는 진짜로 가해자의 소행에 분노한다기보다는, 평소 안 좋게 생각했던 집단에 대한 깔거리가 생겼다고 소스로 사용하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7] Lerner, M. J., & Simmons, C. H. (1966). Observer's reaction to the" innocent victim": Compassion or rejection?.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4(2), 203-210.[8] Jones, C., & Aronson, E. (1973). Attribution of fault to a rape victim as a function of respectability of the victim.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26(3), 415-419.[9] Janoff-Bulman, R., Timko, C., & Carli, L. L. (1985). Cognitive biases in blaming the victim. Journal of Experimental Social Psychology, 21(2), 161-177.[10] Polaschek, D. L., & Gannon, T. A. (2004). The implicit theories of rapists: What convicted offenders tell us. Sexual Abuse, 16(4), 299-314.[11] Key, C. W., & Ridge, R. D. (2011). Guys like us: The link between sexual harassment proclivity and blame. Journal of Social and Personal Relationships, 28(8), 1093-1103.[12] 조금 더 간단히 말하자면 우연(논리적으로 납득 불가능한 상황)에 의해 일어나는 불행으로 인해 피해자가 되는 현상을 갖다가 '예방하면 그런 것은 피해갈 수 있다'라고 스스로 논리적으로 납득하며 살아가기 위해 2차 가해 등 피해자 비난을 저지르며 안심한다는 것. 예시를 들어보자면 밤길을 걷던 한 사람이 묻지마 범죄의 가해자에게 당해 이유없이 칼에 찔리는 중상을 입었다. 이 사람은 말 그대로 우연히 이런 일을 당한 것에 불과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제 3자들 입장에서 이건 납득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이를 납득해서 스스로 안심하기 위해 피해의 원인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어떻게든 스스로 지정한다. 그러고서는 피해 원인을 봉쇄할 예방책이 버젓이 있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당해버린 "무지한" 피해자와 나는 달라, 나는 예방책을 숙지했으니까, 하면서 피해에 대한 예방책을 본인 나름대로 수립하고, 본인은 피해자처럼 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조심성 없이 밤길을 걸으니까 그런 일을 당하는거야!' 하고 도리어 피해자를 비난하면서 한편으론 '난 밤길은 걷지 않겠어. 그러면 그런 일은 안 당하겠지?' 하고 안심하기를 추구한다는 것.[13] 허민숙 (2018). 성폭력 피해자를 처벌하다--피해자 전형성 위반 범죄로서의 성폭력 무고. 한국여성학, 34(4), 69-97.[14] Christie, N. (1986). The ideal victim. in E. Fattah (Ed.), From crime policy to victim policy (pp. 17-30). London: The Macmillian Press Ltd.[15] 해당 살인사건을 다룬 책인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 에서는 아예 가해자의 정당방위를 주장한다.[16] 문제는 가해용의자에게 자신의 무고를 밝힐 확실한 증거와 증인이 있고, 피해주장자가 무고한다는 것이 분명함에도 피해주장자의 목소리가 무조건 증거라며 증거주의를 무시해버리는 것이 성인지 감수성의 부작용이다.[17] Crawford, R. (2008). The politics of victim blaming. In S. Earle, & G. Letherby (Eds.), The sociology of healthcare: A reader for health professionals (pp. 123-135). New York, NY: Palgrave MacMillan, Ltd.[18] 드물긴 하지만 수면위로 떠오를 정도로 강력범죄를 저지른 가해자가 국민법감정상 너무 가벼운 처벌로 끝난 경우에는 실제로도 눈돌아간 피해자 가족에게 가해자 본인 또는 가해자의 가족이 살해당하는 케이스도 있으며 세간에선 해당 사건만 따지고 볼 경우 엄연히 피해자인 가해자 가족을 신경쓰기보단 당시 사건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 가해자가 된 피해자 가족이 그럴만도 하다고 넘어가는 경향이 더 크며 이러한 보복성 범죄행위는 2차 가해같은 악랄한 경우가 아니라면 뉴스 등 각종매체에 수면 위로 뜨지 않는 경우가 많다.[19] 냉혹한 현실이지만, 교사 입장에서도 여러 학생들을 상대로 해서 한꺼번에 훈계하다가 학부모 여러명과 싸움 붙는 거 보다는 순하고 만만해보이는 애한테 잘못을 뒤집어 씌우는 편이 훨씬 편하다.[20] 이쪽은 세간에서 생각하는 피해자다움을 충족하지 못한 피해자가 말 그대로 피해자인 척 한다고 비난되는 일도 있다. 피해자인 척 하는 진짜 피해자 코스프레자들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