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 공성전
1. 개요
바그다드 공성전(Siege of Baghdad)은 오스만-페르시아 전쟁(1730-1735) 과정에서 일어난 대규모 공성전이자, 나디르 샤에게 처음으로 큰 실패를 안겨준 전투이다. 무엇보다 18세기 유럽과 중동의 기술력의 격차가 숨겨진 전투이기도 하다.
2. 배경
오스만-페르시아 전쟁(1730-1735) 도중 회군하여 길자이 부족들의 반란을 진압한 나디르 샤는 다시 오스만 제국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사파비 왕조의 이름뿐인 샤 타흐마스프 2세가 어설프게 원정을 떠나 오스만 제국에게 패배한 뒤, 조약까지 마음대로 맺으려 하였으며, 이에 나디르 샤는 조약을 무효화 시켰으며, 내적 상황을 어느정도 정리한 뒤 다시금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나디르 샤는 공격의 방향을 대도시 바그다드 지역으로 정하게 된다.
당시 바그다드 지역의 총독이었던 아흐마드 파샤는 과거 나디르 샤와 호타키 왕조와의 싸움에서 호타키 왕조에게 용병을 내어준 사례가 있었으며, 나디르 샤 또한 이를 알고 있었으니 이미 공격할 명분은 충분했다. 물론 나디르 샤가 1730년부터 시작했던 사파비 왕조의 고토를 찾기위해 벌인 전쟁이긴 했지만 말이다.
2.1. 바그다드를 공격하려는 목적
나디르 샤는 바그다드를 점령하거나, 아니면 바그다드 지역을 비롯한 오스만령 이라크 동남부 지역을 압박하여 협상 테이블에서 조지아 지역과 아르메니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보장받으려 하였다. 만약 전자가 성립된다면 오스만 제국의 이라크 지역 방어선이 크게 약화될 것이고, 후자가 성립된다면 이라크 지역을 우회하여 동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침공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이점이 있었다.
3.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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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공성전 배치도. 붉은색이 오스만 제국군의 이동로, 파란색이 페르시아군의 공격로
1732년 10월 19일, 나디르 샤는 서진하여 케르만샤 지역에 도착하였으며, 이후 약 8만대군을 이끌고 12월 한겨울에 국경을 넘는 초강수를 두었다. 부하들이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디르 샤는 불굴의 의지와 함께 국경너머의 험지를 건너 순식간에 조하브(Zohab) 지역을 야습으로 정복하면서 침략의 교두보를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다.
얼마 후 나디르 샤는 바그다드 총독 아흐마드 파샤의 병력을 끌어내기 위해 키르쿠크 지역을 쓸어버렸으나, 아흐마드 파샤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나디르 샤는 결국 키르쿠크 지역에 7000의 병사를 남겨놓고 바그다드를 향해 남하했다.
3.1. 포위망 형성
서기 1733년 1월, 나디르 샤는 바그다드 주변 지역의 마을들과 밭을 전부 초토화시켜 현지 보급을 끊어버리고 포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바그다드 지역 남서쪽 근처에 오스만 제국군이 주둔한 임시 방어선이 있었으며, 이를 격파해야만 바그다드를 완전히 고립시킬수 있었다.
나디르 샤는 남서쪽의 임시 방어선을 공략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우선, 북쪽으로 우회해서 공격하기 위해 강을 건너야 했고, 어느 독일인 기술자가 야자나무와 짐승 가죽을 가지고 만든 부교를 통해 도하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일인의 설계로 만든 부교는 무거운 페르시아산 군마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도중에 무너져버렸다. 무너질 당시 부교를 건넌 병사들은 1500명 정도였으며, 나디르 샤 또한 1500명과 다리를 건너 반쯤 고립된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를 눈치챈 아흐마드 파샤는 즉시 성 안의 병사들을 보내 나디르 샤를 공격하였다. 이에 나디르 샤는 병사들에게 나머지 병사가 합류할때까지 위치를 사수하라고 하였으나, 아프간계 병사들만 사수하였고 투르크계, 쿠르드계 병사들은 밀려나고 말았다. 그래도 어찌어찌 나머지 병력이 합류하여 성에서 나온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하였고, 오스만 제국군은 다시 바그다드로 들어가버렸다.
나디르 샤는 위치를 사수한 아프간족 병사들에게 상을 내렸으며 쿠르드계, 투르크계 병사들에게 벌을 내렸다고 한다. 아프간족이 사파비 왕조 멸망의 주역인 것을 감안하면 지극히 능력 위주의 파격적인 대우라 볼 수 있겠다.
3.2. 길고 지루한 시간들
임시 방어선을 점거한 뒤, 마침내 나디르 샤는 10만대군으로 바그다드를 완전히 포위하는데 성공하였다.[1] 그러나, 당시 바그다드는 유럽식 축성술 설계를 바탕으로 지어진 요새였으며, 한마디로 포격에도 매우 강력한 성벽과 공성하기 심히 까다로운 구조로 되어있었다. 나디르 샤 또한 이를 알고 있었는지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포위만 유지한 채 시간을 질질 끄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공성전은 지루한 포위전이 된 채 6달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이 긴 시간동안 바그다드 내의 식량과 의료품, 물자는 바닥이 나버렸으며, 이에 도시민들과 수비병들이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다 죽거나 고통받아야 했다. 물론 나디르 샤의 페르시아군도 상황이 썩 좋지는 않았으나,[2] 나디르 샤의 기만술로 인해 바그다드 총독 아흐마드 파샤가 보기엔 페르시아군의 상황이 좋게 보이도록 꾸몄다. 특히 나디르 샤가 아흐마드 파샤에게 수박을 대량으로 보내는 여유를 보여주기도...
3.3. 함락이 눈 앞에
바그다드에서 만 단위의 사망자가 속출하자, 결국 아흐마드 파샤는 항복을 고민하였다. 특히 수도 이스탄불에서 술탄이 지원군을 보내주기를 기다리며 어떻게든 최대한 버텨보려 하였다. 그러나, 1733년 7월 19일에 아흐마드 파샤는 버틸 수 없다 여겼는지 나디르 샤에게 협상을 제안하였다. 협상조건은 올해(1733년) 8월 11일까지 외부의 지원군이 오지 않을 시, 바그다드는 항복하겠다는 것이었다. 바그다드가 곧 있으면 함락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3.4. 구원군의 등장과 사마라 전투
토팔 오스만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의 대군이 티그리스 강을 따라 남하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는 바그다드 함락을 목전에 앞둔 나디르 샤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으며, 바그다드 총독 아흐마드 파샤에게는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나디르 샤는 오히려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어버렸다.
병력을 둘로 나누어 바그다드 포위를 유지한 채 나머지 병력으로 북쪽에서 남하하는 오스만 제국 대군을 막기엔 쉽지가 않았고, 그렇다고 남하하는 오스만 제국군을 맞이하기 위해 바그다드의 포위를 풀면 바그다드 내 수비병들의 반격으로 뒤치기를 당하게 된다는게 문제였다.
결국, 나디르 샤는 10만대군에서 7만을 이끌고 북상하여 토팔 오스만 파샤의 군대를 맞이하러 갔으며, 남은 3만명은 장군 무함마드 칸 발루치에게 맡겨 포위를 유지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디르 샤의 7만대군은 오스만 제국군 8만과 전투를 벌였다가 그만...
3.5. 극적으로 구원받은 바그다드
나디르 샤의 주력군이 대패하고 도망친 뒤, 토팔 오스만 파샤의 오스만 제국군은 계속 남하하며 무함마드 칸 발루치 휘하의 페르시아군 3만명을 쫓아버렸다. 그리고 오스만 파샤는 바그다드에 입성하는데 성공하였다. 함락 직전이었던 바그다드는 극적으로 구원받았다. 이는 끈기있게 버티던 바그다드 총독 아흐마드 파샤, 그리고 유능한 백전노장 토팔 오스만 파샤의 노력이 빛나는 오스만 제국의 눈물겨운 승리였다.
4. 결과
바그다드 공성전은 오스만 제국의 극적인 승리이자, 나디르 샤의 아슬아슬한 패배였다. 특히 유럽식 성채가 중동의 공성장비와 기술력으로는 공략하기 힘들다는 암시를 보여주기도 했으며, 이러한 격차는 1년뒤 간자 공성전에서 제대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바그다드는 이미 너무 심하게 파괴되었고 물자가 바닥났으며 도시민들 다수가 죽어버린 상태라 전후복구하기도 벅찬 상태였다. 따라서 토팔 오스만 파샤와 그의 오스만 제국군은 바그다드를 떠나 키르쿠크 지역에 가서 정착해야 했다. 애초에 나디르 샤가 포위전을 하기 이전에 바그다드 주변을 초토화시켜 버렸으니... 그리고 이는 나비효과가 되어 토팔 오스만 파샤에게 재앙을 초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