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온트댐 붕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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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고 전개 과정


1. 개요


1963년 10월 9일, 이탈리아 북부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 포르데노네(Pordenone)에 위치한 바이온트 댐(Vajont dam)이 붕괴하여 롱가로네 마을 주민 등 약 2천여 명이 사망했다.
댐의 위경도 좌표는 아래와 같으므로, 구글어스에서 검색하면 바로 찾을 수 있다.
'''46.267542°N, 12.329191°E'''

2. 사고 전개 과정


아드리아의 전력회사 Società Adriatica di Elettricità(이하 'SADE')[1]는 이탈리아 북부에 전력을 공급하고자 댐을 세우기로 하고, 1956년 베네치아로부터 북쪽으로 약 100 km 떨어진 알프스 산맥의 바이온트(Vajont) 협곡을 막아 댐 건설을 시작, 59년에 완공하였다. 댐은 높이 262 m, 두께 27 m, 담수량 1억 5천만 톤으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높은 대규모 댐이었다.
바이온트 협곡은 동서로 뻗어 산을 남북으로 나누며, 물은 협곡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렀다. 댐은 협곡 가운데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형태였으며, 사람들 사는 지역은 물길의 하류 쪽(서쪽)에 있었다.
문제는 댐을 건설하는 바이온트 지역 지반이 '''물에 약하다는 것이었다.''' 트라이아스기 기반암 위에 쥐라기의 돌로마이트 암석이 계곡의 양쪽에서 계곡을 향해 경사를 이룬 향사구조였는데, 지층에 점토층을 포함한 약한 석회암층이 있었다. 여기에 물이 많이 닿으면 지층이 물러져 산사태가 발생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댐 주변 과학자와 언론인들은 SADE에 경고했으나, SADE는 무시하면서 댐 건설을 강행하고, 언론, 정부와 결탁하여 방해를 막으려 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댐이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언론인과 마을 주민, 반대 운동을 벌인 사람들을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내란 음모', 혹은 파르티잔(빨치산 혹은 적색분자)으로 몰고 소송을 벌이며 (사고가 나기 전까지) 언론을 통제하였다. 결국 반대의견은 무시된 채로 1959년 댐이 완공되고 1960년 2월부터 담수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 3월엔 수위가 130 m, 이후 170 m까지 올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문제가 발생했다. 댐 주변 지층에 물이 너무 차자 석회암 지층으로 이루어진 산이 기울었다. 결국 1960년 11월 4일, 산사태가 발생해 흙더미 7십만 ㎡가 쏟아지는 사고가 벌어졌다. 그후 바이온트 댐 측은 더 큰 일이 벌어질까 우려하여 댐의 수위를 135 m까지 낮추었다.
댐 측에선 산사태가 저수지 쪽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막기가 불가능함을 알아차리고, 대신 수위를 맞추어 산이 무너지는 속도를 조절하는 방법으로 재해를 피하기로 결정했다. 댐의 수위를 185 m에서 235 m로, 다시 185 m로 낮추면서 산의 흙이 얼마나 움직이는지 확인하였는데, 그 정도는 하루에 몇mm 정도로 미미해 보였다. 이러는 와중에도 소규모 산사태가 간헐적으로 일어났지만 그들이 보기엔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산사태를 무섭게 보기는커녕 인부들을 끌고와 산사태를 구경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댐의 수위가 240 m를 넘자, 흙의 이동속도가 확 뛰더니 점점 속도를 높여 나중에는 1 m에 이르렀다. 댐을 관리하는 기술자들은 댐의 수위를 240 m까지 낮추기로 하였다.
1963년 10월 9일 오후 10시 39분, 댐의 상부 남쪽에 있는 토크(Toc)산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댐으로 인해 생성된) 인공호수로 '''2억 3천8백만 ㎡짜리 흙더미가 덮쳤다.[2]''' 그 충격으로 호수의 물은 협곡의 북쪽 사면으로 쏠리더니, '''높이가 250 m나 되는 파도가 일어났다.'''[3] 파도는 댐을 넘어 협곡을 타고 서쪽으로 6분간 흘러내려 그 아래에 있던 롱가로네(Longarone) 마을을 비롯하여 리발타(Rivalta), 피라고(Pirago), 빌라노바(Villanova) 등 인근 마을들을 쓸어버렸다. 특히 댐에서 가까웠던 롱가로네 마을의 피해가 극심하여 마을이 지워졌다.
추정 사망자 수는 대략 1900~2500명 남짓인데[4], 그중 절반은 댐 바로 앞에 있던 롱가로네 마을 사람이었다. 피해자들 중 350여 가구는 가족이 전원 사망했고, 4천여 명이 생존했다.
안타깝게도 관련 책임자들은 '''이탈리아 정부의 극심한 부정부패'''로 인해 제대로 처벌받지 못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고가 인재(人災)가 아니라 신이 하신 일, 즉 천재(天災)라고 주장하며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고, 결국 SADE와 관련 회사들의 기술자 몇 명이 처벌을 받았다. 법정에 회부된 기술자들 중 마리오 판치니(Mario Pancini)는 1968년 법정 진술 전날 자살하였고, 몇 명은 재판이 끝나기 전에 사망하였다. 정말로 책임져야 할 고위관계자들은 모두 빠지고, 실무진 선에서 독박을 쓴 것이다.
이후 해당 지역은 2002년까지 접근 금지구역으로 지정되었다가 풀렸고, 2008년 유네스코는 '인류 역사상 기억해야 할 사고'라는 명목으로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 의외로 댐 자체는 피해가 거의 없었으므로[5] 2020년 현재까지도 그 자리에 서 있다. 하지만 댐만 있을 뿐 물을 모두 빼내 저수(貯水)하지 않으므로, 지금은 물이 모였던 댐 상부에 풀과 나무가 자란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경적을 울리지 않거나, 잠깐 차에서 내려 추모한다고 한다.
댐의 북쪽에 붙은 도로에서 동쪽으로 150 m쯤 되는 곳에 사고를 추모하는 작은 성당이 있다. 이름은 산타 마리아 임마콜라타 성당(Chiesa di Santa Maria Immacolata)[6]. 본디 1966년에 건설하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논쟁 때문에 건축도 못하고 질질 끌다가 1973년에야 겨우 건축에 착공, 82년에 완공하여 이듬해에 축성하였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건축가 조반니 미켈루치(Giovanni Michelucci, 1891-1990)가 설계하였다.

[1] 현 이탈리아 전기업체 ENEL의 전신.[2] 이때의 충격을 TNT로 환산하면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의 약 2배였다.''' 즉 호수 밑바닥에 원폭 2개를 놓고 터트린 위력이라고 보면 된다.[3] 이는 인간이 만든 메가 쓰나미(megatsunami)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4] 주민들은 5천여 명이라 주장한다고 한다.[5] 대형 산사태 때문에 댐 밖으로 물이 넘쳤을 뿐, 댐 자체가 입은 피해는 미미했다.[6] 한국어로 풀이하면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 마리아 성당'이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