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일(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생애
박승일은 1896년 9월 19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읍 덕흥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감리회 신자로, 1919년 6월 초순 평양 서문밖에 위치한 백동화(白東㦊)의 집에서 이성실(李誠實), 손진실(孫眞實), 최순덕(崔順德) 외 2명과 함께 회합을 가졌다. 이때 그녀는 3.1 운동의 상황과 조선의 현실을 설명한 뒤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후 그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원조해야 한다고 주장해 모두의 찬성을 이끌어내고 “희생을 할지라도 조선 독립을 위해 열심히 활동할 것”을 결의한 뒤 임원을 선출했다. 이후 그해 6월 중순에 평양 남산현 감리교회 유치원에 모여 협의회를 개최했으며, 7월 15일 동 교회에 다시 회집하여 임원개선과 회비제정, 독립활동에 대하여 비밀리 의논하였다. 그 결과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원조를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남자만 독립운동 하도록 하고 부인이라고 수수방관하는 것은 우리 동포에 대한 의무에 상반될 뿐 아니라 남자에 대하여 대치(大治)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우리 여성들도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조선독립을 위해할 수 있는 일을 노력하여 나감이 마땅하다."
1919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원인 김정목(金貞穆)·김순일(金淳一) 등의 권유에 따라 같은 시기에 장로회를 신봉하는 여성들이 결성한 애국부인회와 제휴, 연합을 논의했다. 이윽고 그해 11월 두 결사는 연합에 성공하여 칭을 대한애국부인회라 하며, 평양에 연합회 본부를 두고 주요 지방에 지회를 두는 계통적 비밀 결사를 이루었다. 그 후 박승일은 평양의 기홀병원(紀笏病院) 내에 근무하면서 평양 감리파 지회장으로서, 1920년 4월경까지 수 차례 걸쳐 외국인이 경영하는 기홀병원 등 기타 장소에 모여 임원의 개선이며 회원의 모집, 회비의 징수 등에 관한 협의를 하였다.
또한 군자금 2,400원을 회원 및 동지들로부터 거둬들인 뒤 이 가운데 2107원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하고 나머지 312원은 애국부인회의 경비에 사용했다. 그러나 1920년 일제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드는 바람에 체포되었고, 1920년 10월 15일 송치된 뒤 1921년 2월 2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2년 6월 17일에 출옥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박승일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