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회

 



'''주요인물'''
존 웨슬리, 찰스 웨슬리
'''형성 연도'''
1730년
'''대표인'''
박종천 목사
세계감리교협의회(WMC)회장
(2016~2021)
'''교세'''
대략 8,500만 명[1]
'''계통'''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종교'''
기독교
'''종파'''
개신교
'''교파'''
감리회
'''언어별
명칭'''

한국어
감리회
영어
Methodist Church
한자
監理會
에스페란토
Metodista preĝejo
1. 개요
2. 명칭
3. 특징
3.1. 조직 특성
3.2. 신학적 특성
4. 감리교회의 역사
4.1. 신성회(Holy Club)
4.2. 학문
4.3. 아메리카 식민지 선교
4.4.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 회심
4.5. 야외 설교의 시작
4.6. 메도디스트 신도회(Methodist Society)의 조직
4.7. 아메리카 메도디스트 교회의 설립
4.8. 영국 감리교회의 분립
5. 한국의 감리회
5.1. 역사
5.1.1. 미 감리회 선교 시대(1884~1930)
5.1.2. 자치시대(1930~1945)
5.1.3. 현대(자립시대, 1945~현재)
5.2. 특징
5.3. 조직 및 교세
5.3.1. 산하 신학교
5.4. 교육
5.5. 신앙고백
5.5.1. 1930년 조선감리교의 교리적 선언
5.5.2. 1997년 감리회 신앙고백
5.5.3.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신경
5.6. 주요 교회
5.7. 주요 교단 목록
6. 일본 감리회
7. 나무위키에 등록된 인물
7.1. 목회자, 신학자
7.1.1. 해외
7.1.2. 국내
7.2. 평신도
7.2.1. 해외
7.2.2. 국내
7.2.2.1. 독립 운동가
7.2.2.2. 친일 인사
7.2.2.3. 현대 인물
7.3. 감리교인이었던 인물
8. 외부 링크


1. 개요


감리회(監理會)[2]는 18세기 성공회 사제 존 웨슬리(John Wesley)[3]가 이끈 복음주의적 교회 쇄신 운동이었던 메소디스트(Methodist) 운동에 의해 성공회에서 분리되어 만들어진[4] 개신교의 한 교단이다. 현재 전 세계에 교인 7,500만 명 이상이 있다.
메소디즘은 당시 경직되었던 성공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영국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일으킨 운동으로 평가받는다. 신학적으로는 성공회 특유의 '중도의 길'(Via Media)을 이어받되, 칼뱅이중예정론을 배격하고 선행 은총을 전제로 한 자유의지와 만인속죄론을 주장한다.
칼뱅주의자들은 원죄를 물려받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완전히 타락해버려서, 하나님은총이 없이는 누구도 하느님을 믿을 수 없고, 이 하나님을 믿게끔 하는 은총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특별히 택하신 사람들에게만 주어졌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택하신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셨다고 본다. 그러나 감리회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물론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자유의지가 선을 극구 기피할 정도로 완전히 타락한 것이 아니라서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선과 사랑을 추구하는 본능이 깃들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셨다고 가르친다. 이같은 교리상의 차이 때문에 극단적인 칼뱅주의자들은 "감리회가 이단적인 교리를 가르친다"고 비난하고는 한다. 그런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내에 올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교단은 사실상 장로교, 수많은 장로교단 그 중에도 자기가 속한 장로교단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교회 체제는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감독제를 택한다. '감리회'라는 낱말 자체가 '감독이 치리하는 교회'를 뜻한다. 사실 감리회의 감독은 영어로 bishop이라고 하는데, 천주교, 성공회, 정교회와 북유럽 루터교회의 주교도 영어로 bishop이라고 한다.
2018년 12월에 영국 성공회와 영국 감리교가 통합하기로 하고 세부사항을 논의 중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가장 큰 이유는 영국 감리교 신자 수가 많이 줄어서라고 한다.

2. 명칭


감리교회의 영어 명칭인 Methodist Church의 'methodist'란, 존 웨슬리옥스퍼드 대학에서 결성한 신성회(Holy Club)의 신앙 생활이 매우 규칙적이었기 때문에 붙은 별명[5]에서 유래했다. 사실은 조롱조에 가까운 별명이었으나 이후 공식 명칭으로 굳어졌다. 이는 루터교회(The Lutheran Church) 역시 '루터를 추종하는 자들'이란 조롱에서 교단명이 유래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동양권에서 메소디스트 교회가 '감리교회'가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미국 메소디스트 감독 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를 한자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초창기에는 2가지 명칭이 혼용되었다. 첫째는 미이미(美以美) 교회로, 이는 Methodist의 me를 美로, Episcopal의 e를 以로, 美는 아메리카가차(假借)였다. 이는 미국 북감리회에서 옮긴 말이었다. 둘째는 감리교(監理敎)로, 미국 남감리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에서 Bishop을 監으로, Methodist를 理로, 뜻을 번역한 말이었다. 북감리회, 남감리회가 들어와 선교하던 한국에서는 두 명칭이 혼용되다가, 1930년 두 교회가 합쳐질 때, 명칭을 '감리회'라고 하였다. 요약하자면 '감리회'란 메소디스트 감독 교회의 뜻을 번역한 말이며 넓게는 감독이 치리하는 감리회의 교회 구조를 나타내는 명칭이다.

3. 특징



3.1. 조직 특성


장로 중심의 체제에 개교회 자치 성향[6]이 강한 장로회와 달리 감리회는 천주교, 정교회, 성공회, 북유럽 루터교회와 비슷한 '''감독제'''를 채택하고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기준 일정 수 이상의 교회가 모여 지방회를 형성하고, 지방회가 모여 연회를, 연회가 모여 총회를 형성한다. 지방회의 장은 감리사(監理師, The Superintendent), 연회의 장은 감독#s-3.1, 총회의 장은 감독회장이다. 감리사와 감독, 감독회장은 선거에 의하여 선출[7]된다. 감리사와 감독의 임기는 2년이며 감리사와 달리 감독은 연임할 수 없다. 감독회장의 임기는 4년이며 감독처럼 연임이 불가능하다.
이전에 기독교대한감리회의 감독은 연회의 의장이 되는 권한과 목사를 안수하여 세우는 권한과 더불어 목회자를 파송하는 어마어마한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막강한 권한을 지닌 감독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선거가 과열되어 급기야 교단까지 분열되는 등 각종 병폐가 나타나자 교회 쇄신 차원에서 목회자 파송 권한은 제거되어 있다.[8] 그럼에도 원칙상 감독의 파송으로 목회자가 부임하는 것이므로, 개교회가 개별적으로 목회자를 청빙해도 형식상으로나마 감독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9] 그러나 미국 연합감리교회(United Methodist Church)의 감독에게는 여전히 목회자 파송권이 있다. 그래서 연합감리교회 목사들은 일정 시간을 두고 임지를 자주 옮긴다.

그러나 영국 감리교회에는 감독이 없다. 왜냐하면 본래 존 웨슬리가 감독제를 반대하였기 때문이다.[10][11] 존 웨슬리 사후 영국 감리교회가 국교회와 분리되면서, 존 웨슬리의 리더십은 연회로 옮겨지게 되었다. 영국 감리교회에는 지방회에 해당하는 구역회(The Circuit)가 있는데 구역회의 장은 감리사(A Circuit Superintendent)이다. 구역회가 모여서 지방회(The District)를 형성하고, 지방회의 장은 지방회장(The District Chair)이다. 지방회가 모여 연회(The Conference)를 이루고 이 연회가 미국, 한국 감리교회의 총회와 위상이 같다. 연회의 장은 연회장(The President)이다. 연회에는 연회장과 부연회장(The Vice President)가 있는데, 연회장은 목사가, 부연회장은 평신도가 맡으며, 각각의 임기는 1년이다.
감리교회 조직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개교회 안에서도 여러 조직이 있다는 점이다. 개교회의 최하위 조직은 속회(屬會, The Class Meeting)이다. 속회야말로 감리교회가 교회사에 남긴 큰 공헌이라 할 수 있는데, 속회가 소그룹 교육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속회는 보통 10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지만, 개교회 재량껏 속회를 조정한다. 속회의 장은 속장(The Class Leader)이며, 속회의 구성원은 속원이라고 부른다. 속장은 권사가 맡는다.[12] 속회는 일주일에 한 번 씩 속원들의 집에서 돌아가며 모이는 것이 원칙이다. 이는 속회의 기원이 각 가정의 어려움을 살피는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가귀도(가족 전부가 교회에 다니는)가 된 집안이 아닐 경우 부득이 교회에서 모이는 경우도 있다.
속회는 속원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서로 신앙 상담과 고민들을 나눈다. 속장은 속원들의 가정 상황을 살피고, 이를 보고서로 작성하여 담임 목사에게 보고한다. 기독교대한감리회의 경우 속회의 상위 조직으로 '당회(堂會)'가 있다. 당회는 사실 장로회의 제도가 들어온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당회는 개교회의 1년 정산 모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회는 보통 연말인 12월 중에 개최되며, 당회의 장인 당회장은 담임 목사가 맡는 것이 관례이다. 당회에서는 예산의 결산, 인사(人事) 문제 등을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처리한다. 당회원은 입교인[13]이다. 당회와 달리 의결권은 없지만 필요할 때마다 교회의 여러 일을 신속히 처리하기 위한 기구로는 기획위원회라는 것이 있다. 담임 목사와 장로, 소수의 권사 등으로 이루어진다.
당회의 상위 조직은 구역회(Circuit)다. 사실 이 구역회는 영국 감리회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이는 소수의 메도디스트 사제들이 여러 신도회를 순회하며(circuit) 신앙을 지도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영국 감리교회에는 구역회 본래의 기능이 잘 남아 있지만 한국 감리교회에서 구역회는 사실상 당회와 다르지 않다. 원래 구역회에는 1개 이상의 교회가 있는 것이지만, 한국 감리교회에서는 구역이 곧 개교회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다만, 당회와 다른 점은 당회의 의장은 담임 목사가 맡지만 구역회의 의장은 감리사가 맡는다는 점이다. 구역회에서는 교회의 1년 예산안을 감리사의 관리에 의해 처리하며, 목회자의 임면 문제도 맡는다.
이와 같은 감리교회의 조직적 특성을 '연관주의(Connexionism)'라고 한다. 개교회주의가 심하지 않고, 서로 끈끈하게 유대 관계를 형성하여 각종 어려움이나 좋은 것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감리교회의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3.2. 신학적 특성


장 칼뱅의 이중예정론을 주된 교리로 내세우는 장로회와 달리, 감리회는 '선행 은총(The Prevenient Grace)에 의한 선택권의 회복'을 강조한다. 흔히 감리회 신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감리회는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권의 발휘"를 주장한다고 호도하는데 자유의지 운운은 당연히 펠라기우스 이단이고, 감리회 신학에서 말하는 선택권의 발휘는 선행 은총을 전제로 하는 원죄 이전의 선택권의 회복을 말한다. 선행 은총을 전제로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유명한 펠라기우스 논쟁에서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을 이야기했고, 루터교회장로회도 모두 원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이야기한다. 즉 구원에 있어서 전적으로 인간은 수동적인 존재인 노예 의지론을 내세운다. 이를 가지고 루터에라스무스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장로회는 도르트(Dort) 회의에서 정리한 5가지 신조, 일명 튤립(TULIP) 교리[14]의 가장 첫 머리에 오는 것이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of Man)'이다. 감리회도 당연히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의지가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본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알 수도 없으며 알려고 할 수도 없다. 이렇게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먼저 자기를 알려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계시이며, 계시는 곧 말씀(logos)이며, 말씀은 곧 하나님이자 인간이 된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귀결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교회는 2천년 동안 자유의지에 의한 자발적 구원을 말하는 이들은 이단으로 정죄해 왔다. 만약 세간의 인식대로 감리회가 은혜가 배제된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구원을 말한다면 감리회는 이단이다. 하지만 감리회는 선행은총을 전제로 한 원죄 이전의 선택권의 회복을 말한다. 선행은총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타락하여서 자의지로는 자범죄를 피할 능력이 없으나 죄의 폐해와 고통을 느낄 할 수있는 양심과 죄를 피하기 간절히 원하는 사랑의 마음을 남기셨으니 이것이 선행은총이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날 때 가죽옷을 지어 입힌 은총이며, 악인이라도 똑같이 해와 비를 주시는 은총이며, 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통해 창조주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은총이다. 비록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행적인 은총 안에 머물러 있으며, 전적 타락으로 인해 자범죄를 면할 능력은 없어도 선행 은총에 의해 양심에 찔리고 사랑에 어긋나는 자범죄로 인하여 스스로 고통받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말씀이 선포될 때 이미 선행 은총으로 죄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은 회개하고 죄의 고통에서 해방될 희망을 품을지 복음을 거부할지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택할 수 있다. 즉 선행은총은 구원을 주는 은총이 아닌 구원으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할 뿐이다.
선행은총으로 어느 정도 하나님을 인식하고 복음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칭해진다. 이것이 바로 칭의이며 여기서의 칭의는 루터, 칼뱅이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의롭다고 칭해진 인간은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중생이다. 다시 태어난 인간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하는데, 이 과정이 성화이며, 이것이 완성된 것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다. 그러나 완전이라는 것은 상태적인 개념이라기 보다 동적인 개념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죄를 완전히 정복하고 죄의 유혹도 받지 않는 그런 초인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죄와 싸우려 하며 경건에 힘 쓰는 모습이 바로 완전이 말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곧 선행은총, 칭의, 중생, 성화, 완전 이 5단계를 '구원에 이르는 5가지 문'이라고 흔히 이야기하며, 감리회 교리의 특징으로 일컬어진다.
이러한 신학적 배경에서 감리회는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며, 신앙의 실천도 개인적인 영역만이 아닌 사회적인 영역까지도 확장해서 이야기한다. 그래서 초창기부터 감리회는 빈민 구제, 죄수 교화 활동 등을 활발히 하였고, 이를 더욱 강조하여 분리된 교파가 바로 구세군이다.[15]
이러한 특성에 따라, 개혁교회(장로회)에 비해 조직신학 및 기독교 사상, 성경학 등에서 진보적인 입장도 곧잘 받아들이는 편이다.[16] 하지만 급진적인 변화보다는 전통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중도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는 신학적인 흐름은 진보적인 것을 수용하지만 신앙에서는 보수적인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감리교회는 순복음과 똑같거나 아주 유사하다. 오순절교회의 신학의 바탕은 방언과 통성기도를 매우 강조하며,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도 방언기도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신문에 언급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 역시 이 부분을 매우 강조하여 주여 삼창 기도와 방언 기도를 두 교단에서 가장 뜨겁게 하는 이유를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는 세계감리교대회에서도 대한민국 대표로 나온 적도 있었기에 순복음교회와 감리교는 한 가족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유관순 역시 감리교도였고 방언 기도를 통해 많은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감리교의 세례 방식은 장로교회와 동일한 약식 세례로 순복음교회침례교처럼 물에 잠겨서 침례를 받지 않는다. 존 웨슬리는 약식 세례와 물로 붓는 세례, 그리고 침례까지 모두 정당한 세례로 인정했다. 그래서 최근의 감리교회에서는 침례를 행하는 교회도 있지만. 다시 세례를 받는 것은 거부한다.
에큐메니컬 운동에 적극 동참하는 편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회력과 예전에 대하여 많이 도입하고 있는 편이여서, 강단에 강단보와 예전이 있는 교회도 많은 편이다. 성공회에서 갈라진 교단이기에 목사님의 가운이 장로교의 검정색이 아니라 흰색을 입는 경우가 많다.

4. 감리교회의 역사



4.1. 신성회(Holy Club)


존 웨슬리는 1729년 11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동생 찰스 웨슬리가 몇몇 친구와 결성한 신성회의 리더가 되었다. 신성회는 규칙적으로 모여 고전을 공부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모임이었다. 존 웨슬리는 아버지이자 영국 성공회 사제인 사무엘 웨슬리 사제의 엡워스 교구 목회를 돕다가 옥스포드로 돌아와 이 모임의 리더가 되었고, 신성회는 더욱 활력을 얻었다. 리더가 된 존 웨슬리는 더욱 엄격한 규칙을 제정했다. 일례로 자아성찰을 위한 규칙은 매일 밤 기도, 월, 수, 금은 친구들과 기도, 기도 후에 기도 시의 마음 가짐을 성찰, 정기적으로 중보 기도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신성회원들은 매주일 성만찬을 받았고,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했으며[17] 회원은 각각 공개적으로 다른 회원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했다. 1730년부터는 개인적인 경건 훈련을 넘어서 사회적 경건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감옥 선교로부터 시작된 신성회의 사회적 경건 훈련은 훗날 감리교회의 주요한 특징이 되었다. 신성회는 1735년 즈음까지 꾸준히 모여 활동하다가, 회원들 대부분이 성직의 길에 들어서서 자기 교회에서 목회를 하거나, 일부는 성직의 길을 포기하면서 자연스레 해체되었다.

4.2. 학문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교 재학시절에 신학, 논리학, 음악, 등의 문학에 능통했고, 지식인인 어머니 수산나가 직접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 형제에게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존 웨슬리가 감리교회 운동이라는, 영국의 교회와 사회를 바꾼 일을 한 것은 그만한 실력이 있었기 때문.


4.3. 아메리카 식민지 선교


1735년 존 웨슬리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던 오글도프(J. E. Oglethorpe) 장군의 제안을 받아 동생 찰스와 함께 식민지 사제로 떠났다. 웨슬리 형제는 인디언들이 문명의 때를 타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이라 기대하며 쉽게 회심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교도들을 회심시키며 그 과정 중 자신들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존 웨슬리대서양 항해 중 만난 큰 풍랑에서 죽음을 두려워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반면 큰 풍랑 속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평온을 유지하는 모라비아 교도(독일 경건주의의 일파)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큰 기대와 달리 웨슬리 형제는 철저히 실패한다. 우선 순수한 사람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인디언들을 실제로 만나보니 유럽인들 못지않게 잔인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고, 순순히 기독교인이 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존 웨슬리는 융통성 없는 목회 방식으로 기존 신자인 식민지인들의 큰 불만을 샀다. 더욱이 소피 홉키(Sophy Hopky)라는 소녀와의 얼룩진 사랑은 결정적으로 존 웨슬리의 식민지 선교를 파탄 내었다.
찰스 웨슬리도 다를 바가 없었다. 찰스 웨슬리도 형 존 웨슬리 못지않게 융통성 없는 목회 방식을 식민지인들에게 강요하여 큰 불만을 샀고, 특히 부인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으며, 식민지의 장인 오글도프와도 갈등했다. 결국 찰스 웨슬리가 먼저 아메리카를 떠났고, 소피 홉키와의 장렬한 사랑이 실패한 후 존 웨슬리도 이어서 아메리카를 떠났다. 존 웨슬리는 1738년 초 런던으로 되돌아 왔다.

4.4.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 회심


선교에 실패한 존 웨슬리는 실패 이유를 성찰하면서 모라비아교 목사 피터 뵐러(Peter Boeler)와 교류했다. 수개월 간 피터 뵐러와 교류하면서 존 웨슬리는 종교개혁의 핵심인 '오직 믿음으로'를 깨닫게 되고, 자신의 가장 큰 실패 원인은 형식만 있고 참 믿음이 없다는 데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던 5월 24일, 존 웨슬리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열리던 모라비아교 신도회 모임에 참석했다. 거기서 누군가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들었는데, 저녁 8시 45분 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마음 가운데 역사하여 생기는 변화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 존 웨슬리는 자신의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진짜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4.5. 야외 설교의 시작


회심을 경험한 존 웨슬리는 각 교회를 돌며 자신의 경험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해 설교했다. 그러자 각 교회는 존 웨슬리의 설교를 금지시켰다. 갈 곳 없어진 존 웨슬리 앞에 조지 휫필드가 나타났다. 조지 휫필드는 웨슬리 형제와 함께 신성회 활동을 하다가 아메리카 식민지로 건너가 큰 활약을 하고 돌아온 뒤였다. 조지 휫필드는 존 웨슬리를 야외 설교로 이끌었다. 웨슬리는 야외 설교에 처음 거부감을 가졌지만 이내 적응하였고, 조지 휫필드 못지 않게 큰 부흥을 일으켰다.

4.6. 메도디스트 신도회(Methodist Society)의 조직


존 웨슬리는 영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야외 설교를 했고, 부흥이 일어난 후 부흥을 유지하기 위하여 신도회를 조직했다. 신도회 안에는 속회(Class)와 반회(Band) 등 더 작은 모임을 구성하여 효율적인 신앙훈련이 되게끔 했다.
웨슬리가 영국 성공회의 교구에 상관 없이 종횡무진 활약하자 위기감을 느낀 주교와 사제들은 웨슬리에게 설교 기회를 주지 않으며 더욱 더 경계했다. 특히 브리스톨의 주교 버틀러(Butler)가 자신의 교구를 떠나라고 하자 웨슬리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온 세계를 내 교회로 생각합니다(I look upon the whole world as my parish)." 웨슬리는 각지에서 폭도들의 폭력에도 시달렸다. 반역자라는 조롱과 핍박도 받았다. 웨슬리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각지로 활동 영역을 넓혔고, 신도회가 사용할 건물도 매입하여 든든하게 활동을 다져나갔다. 처음 하층 계층에 큰 호응을 얻던 메도디즘 운동은 상류층에게도 퍼져 나갔다.
1744년 존 웨슬리는 메도디스트 최초의 연회(The Annual Conference)를 소집했다. 무엇을 가르치고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에 대한 주제를 놓고 영국 각지로 흩어져 사역하던 메도디스트 사제들과 설교자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것이 감리교회의 중요한 전통과 교회 조직이 되었다.

4.7. 아메리카 메도디스트 교회의 설립


메도디스트 신도회는 급속도로 부흥했고, 성공회와의 마찰도 커져 갔다. 이에 많은 이들이 새로운 교회를 설립할 것을 종용했지만 존 웨슬리는 성공회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교회이며, 떠나지 않을 것을 거듭 분명히 했다. 하지만 독립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1776년부터 미국독립 전쟁을 벌인다. 미국과 영국사이의 독립전쟁이 벌어지자 아메리카 식민지에 있던 영국 성공회 성직자들은 본국으로 철수했다. 존 웨슬리는 성례전을 받지 못하는 미국 내 메도디스트 신자들을 생각했다. 존 웨슬리는 독립해 나간 미 식민지는 영국과 경우가 다르며, 오랜 기간 동안 고찰한 바에 따라 초대 교회에서 감독과 장로의 직능에 사실상 차이가 없었다는 점에 착안했다. 1784년, 웨슬리는 같은 국교회 사제였던 토마스 콕(Thomas Coke)을 '감리사(Superintendent)'로 안수하고, 평신도 설교자였던 프랜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도 감리사로 세울 것을 명령했다. 독자 안수는 곧 분립이었기에 미국에서 메도디스트 신도회가 국교회와 분리된 것은 기정 사실이 되었다.
토마스 콕은 미국으로 건너가 1784년 11월 3일 뉴욕에 도착했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볼티모어에 모여 이른바 '크리스마스 연회'를 열었다. 콕은 애즈베리에게 3일에 걸쳐 안수를 주어 감리사로 세웠다(첫날은 집사 목사, 곧 부제로, 둘째날은 장로 목사, 곧 사제로, 셋째날은 감리사, 곧 감독으로). 이때 애즈베리는 연회원들의 합의가 없으면 존 웨슬리의 임명을 거부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만장일치로 감리사로 추천 되었다. 연회원들의 합의에 의한 감리사(감독) 임명은 이후 감리교회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다. 이듬해 1월 2일까지 열흘간 계속된 이때 연회에서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결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토마스 콕과 프랜시스 애즈베리는 감리사 대신 '감독(Bishop)'이란 명칭을 썼고, 공식적으로 자신들 교회의 이름을 미 감리교회(The Ame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라고 명명했다. 존 웨슬리는 이에 반발하였으나 효과는 없었다. 미국 감리회 교인들은 존 웨슬리의 리더십은 영국 내에서만 유효하다고 보았으며, 이때 존 웨슬리는 '온 몸이 무너져 가는 늙은이'로서 죽음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4.8. 영국 감리교회의 분립


웨슬리는 끝내 국교회를 떠나지 않았고, 영국 성공회 사제로 생을 마감했다.[18] 그러나 1791년 존 웨슬리가 사망한 이후, 영국에서도 메도디스트 신도회는 성공회와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 1795년 평신도 설교자들의 지위 문제와 성례전의 집례 문제는 메도디스트 신도회가 평화 조약(Plan of Pacification)을 통해 성공회와 공식적으로 결별하여 독립 교회가 되면서 해결되었다.

5. 한국의 감리회



5.1. 역사



5.1.1. 미 감리회 선교 시대(1884~1930)


한국 감리교회는 1884년 북감리회의 매클레이(R. S. Maclay) 선교사[19]가 내한하여 의료선교와 교육사업에 대해 고종의 윤허를 받은 것을 시초로 본다.[20]
당시 조선중국일본에 비해 서양 국가들의 관심이 덜했고, 이는 기독교 선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미국 감리교회에서 조선 선교를 결정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은 수호조약을 맺었고, 이듬해 1883년 5월 초대 미국 공사로 푸트(L. H. Foote)가 내한하기에 이른다. 조선 정부는 이에 민영익을 수반으로 한 '보빙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하여 고종의 친서를 미국의 아서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보빙사는 1883년 7월 한성을 출발, 9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거기서 열차를 타고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으로 향했다. 이때 열차 안에서 볼티모어 러블리레인교회 담임 가우처(J. K. Goucher) 목사가 보빙사 일원을 만났다. 낯선 동양인을 보고 관심이 생긴 가우처는 민영익과 대화를 나눈 후 그해 11월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에 2천 달러를 보내면서 조선 선교를 촉구했고 해외선교부는 여기에 3천 달러를 보태 5천 달러를 한국 선교 개척비로 책정한 후 조선에 가까운 일본에 있던 매클레이를 조선에 파견하여 선교 가능성을 탐색토록 한 것이다. 마침 매클레이는 이전 중국 선교사로 있었을 때부터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고 실제로 교단 본부에 선교를 촉구했던 적이 있었다. 매클레이는 1884년 6월 24일 제물포에 도착하여 같은 날 오후 6시 서울에 들어왔다. 그리고 친분이 있던 김옥균의 도움[21]으로 의료선교 및 교육사업에 대한 고종의 윤허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렇게 매클레이의 활약으로 선교의 길이 열렸고, 이에 힘 입어 미감리회와 미국 북장로회가 적극적으로 선교사 파송에 나섰다. 북장로회는 의사 호러스 뉴턴 알렌(H. N. Allen)을 먼저 보냈다. 그러던 중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터졌고,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알렌이 치료하여 살림으로써 조선 선교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미감리회는 의사 윌리엄 스크랜튼(W. B. Scranton)과 아펜젤러(H. G. Appenzeller)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고, 이듬해에는 스크랜튼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일명 스크랜튼 대부인)을 추가시켰다. 3명의 선교사는 먼저 일본에 도착하여 1달 정도 머물면서 조선에 대해 공부했다. 그리고 갑신정변의 여파로 정세가 불안한 것을 감안하여 매클레이는 선발대로 아펜젤러 부부를 보내기로 하였고, 아펜젤러는 북장로회가 파송한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오후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이날은 마침 부활절이었다.
하지만 아펜젤러는 한성에 바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는 미국공사관 측에서 정세 불안을 이유로 여성인 아펜젤러 부인이 한성에 들어가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펜젤러는 4월 10일 다시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한성은 당시 미혼이었던 언더우드가 먼저 가게 되었다. 매클레이는 스크랜튼을 먼저 조선으로 보내기로 하였고, 스크랜튼은 5월 3일 인천에 도착한 후 알렌과 함께 제중원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스크랜튼은 감리회가 독자적으로 선교할 수 있도록 선교 부지를 확보하였고, 이에 아펜젤러 부부는 스크랜튼 대부인과 함께 다시 조선으로 향하여 6월 20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이후 같은 해 스크랜튼은 시병원을, 헨리 아펜젤러배재학당을, 1886년 메리 스크랜튼이 이화학당을 세워 의료선교와 교육선교를 시작했다. 스크랜튼이 세운 시병원은 제중원과 달리 정부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민간 병원이었으며 가난한 민중을 위한 병원이었다. 제중원과 달리 턱이 낮은 시병원에는 조선 민중들이 몰려들었고, 1887년에는 고종이 시병원(施病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에 반해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은 학생 수가 들쑥날쑥했는데 이는 외국인 선교사에 대한 반감 때문으로 보인다. 당장 고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병과 달리 공부는 당장 배우지 않아도 괜찮은 듯 보였기 때문. 아펜젤러는 조선인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고종에게 청원하여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았다. 그러자 학생들이 몰려들어 1887년에는 건물을 신축해야 했다.
스크랜튼 대부인은 여성교육 사업을 전개하였는데, 상황은 배재학당 초창기보다 더욱 어려웠다. 2명으로 시작한 여학교는 1887년에 7명이 되었고, 같은 해 고종으로부터 '이화학당(梨花學堂)'이란 이름을 하사받았고, 이에 힘입어 여성교육 사업도 활기를 띨 수 있었다. 1887년 10월에는 여성 선교사인 로드와일러(L. C. Rothweiler)와 하워드(M. Howard)가 파송되어 로드와일러는 이화학당에, 하워드는 시병원에서 근무하였다. 하워드는 1887년 여성병원인 '보구녀관(普救女館)'[22]을 세웠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여성전용병원이었으며, 보구녀관이란 이름도 조정에서 하사한 이름이었다.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 사업으로 시작한 간접 선교 방식에서 점점 직접 선교로 방식을 변화시켜 나갔다. 1887년 배재학당 학생 중에서 최초로 세례자와 구도자가 나왔고, 이에 힘입어 아펜젤러는 한옥 한 채를 구입하여 '베델'이라 이름 짓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1889년에는 정식으로 구역회(Circuit)을 열고 교회를 설립하였으니 이는 정동제일교회의 시초이다. 이로써 미감리회의 정식 직접 선교가 시작되었다.
남감리회는 윤치호의 청원으로 1895년 리드(C. F. Reid) 선교사가 내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윤치호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했을 때 남감리회와 접촉하여 교인이 되어 있었다. 복권 후 윤치호는 1895년 2차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였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남감리회의 선교를 요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15년 넘는 베테랑 선교사였던 리드는 중국과 조선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윤치호는 직접적으로 리드 선교사를 지목하여 조선에 오게 했다. 리드는 감독 헨드릭스(E. R. Hendrix)와 함께 조선에 방문하여 선교 가능성을 탐색했고, 남대문 부근에 선교 부지를 구입한 후 리드를 정식 파송하였다. 이로써 남감리회의 조선 선교도 시작되었다. 1897년에는 콜리어(C. T. Collyer)와 과부 캠벨(J. P. Campbell)이 2차 선교사로 들어옴으로써 북감리회처럼 남녀 선교 사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캠벨은 배화학당이라는 여학교를 세웠다. 미국에서 남북 감리교회는 노예제를 이유로 갈라졌던 만큼 다소 소원했으나 한국에서만큼은 서로 협력하였다. 이는 남감리회가 북감리회에 비해 10년 늦게 들어온 만큼 동등하게 경쟁하기엔 여러 모로 어려운 점이 많았기 때문이며, 먼저 들어온 북감리회 선교사들이 남감리회의 선교 개척 시 많은 부분 협력해 주었기 때문이다.
북감리회는 1887년 배재학당을 통해 한국 개신교 최초로 신학 교육을 하였고, 이는 1888년의 영아 소동으로 잠시 주춤했다가 1894년 다시 신학반(후일 신학회로 개칭)으로 재개되었다. 남감리회는 신학교육을 북감리회와 함께 연합하여 실시하기 시작했고, 이 결실이 1907년 협성신학교 개교로 나타났다. 여기서의 협성(協成)은 두 교단이 함께 연합했다는 의미이다. 이 협성신학교가 지금의 감리교신학대학교의 기원이다.
장로회가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이 일어났던 것보다 먼저 감리회는 1903년 원산에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남감리회 선교사 하디(Hardie)의 회개로 시작된 부흥 운동은 삽시간에 주변으로 퍼졌고, 선교사들과 한국인 모두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며 새롭게 사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교회사적으로 1907년 한국 교회 대부흥 운동은 1903년 원산 대부흥 운동이 불을 지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에 동시기에 들어온 장로회와의 과열 경쟁을 피하기 위해, 감리회는 장로회와 선교지 분할 협정을 맺었다.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1. 서울, 평양, 부산 같은 큰 도시는 동일 선교지로 삼는다.

2. 선점되어 있는 지역은 선점한 교단에 양보한다.

이를 통해 감리회 선교지는 경기, 강원, 충청, 황해, 평남, 평북 일부지역으로, 장로회 선교지는 경기, 경북, 경남, 전북, 전남, 제주, 황해, 평남, 평북, 함남, 함북으로 분할되었다.
당시 감리회는 남북 감리회 2개의 선교부만 들어와 있었고 장로회는 미 남/북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호주 장로회 총 4개의 선교부가 들어와 있어서 처음부터 양 교단은 교세 차이를 보였다. 그래서 장로회가 보다 넓은 지역에 선교지를 할당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현재 북한 지역에 우세했던 교단은 감리회가 아니라 장로회였다. 선교지 분할이 의미가 없어진 현재까지도 감리회가 중부지역에 강세를 보이고 장로회가 전라도, 경상도를 포함한 남부지역까지 강세를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존 웨슬리 시절부터 낙오지 지역에 중점적인 선교를 하던 관례대로, 섬이나 해안지역에 감리회의 교세가 강한 편이다. 현재 감리회는 처음 들어온 인천을 비롯, 서울, 경기도, 충청도(서해안) 쪽이 강세를 보인다. 또 강원도 지역에서도 굉장한 강세를 보인다.[23] 다만, 경상도[24]전라도[25] 쪽은 장로회 교단이 압도적이라 감리회는 좀 생소하게 받아들이는 듯 하다.

5.1.2. 자치시대(1930~1945)


남북 감리회는 한국에서 다방면에 걸쳐 협력하였고,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부흥하여 1916년부터 본격적으로 통합 논의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3.1운동 이후에는 독립에 대한 갈망이 높아지면서 교회도 독립 교회를 설립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23년부터 통합 절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우선 전도 사업, 교육 사업, 출판 사업 등을 공동으로 추진하고, 예문을 통일, 연회원 입회 규칙, 교회 임원 명칭을 통일하고 선교기념예배당 건축 사업에 합의하였다. 1926년에는 '조선남북감리교회 통합방침연구연합위원회'가 조직되어 합동 5원칙을 정했다. 1928년과 1930년에는 북감리회와 남감리회 총회에서 각각 합동이 승인되었고 1930년 12월 2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창립 총회가 개최됨으로써 한국 감리회는 자치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연회는 중부, 서부, 동부, 만주 네 연회를 두었고[26], 총리사(후일 감독으로 개칭)는 북감리회보다 교세가 약했던 남감리회 출신의 양주삼 목사가 선출되었다. 1931년, 연회에서는 미국의 여자 신학생들이 안수를 받았다. 기독교조선감리회의 교리와 장정에서 교직자의 자격에 남녀의 구별은 없다고 명시했기 때문이다. 비록 한국인 여성 목사 안수는 아니었지만, 세계적으로 매우 일찍, 그것도 한국 땅에서 여성 안수가 이루어졌다는 것에도 의의가 있다. 무엇보다 선교국보다 피선교국에서 교단이 합동된 것은 굉장히 큰 의의가 있다.
새로이 출범한 기독교조선감리회는 1930년 '교리선언'을 채택하였는데 당시로서는 굉장히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임을 믿으며..."라고 했다. 1920년대부터 미국 기독교계에 근본주의 바람이 불어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을 생각하면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1930년대부터 시작된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은 한국 감리교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1936년 조선 총독부 학무국장은 양주삼 총리사에게 신사참배종교가 아니며 애국의 표현이라는 요지의 통첩을 보내 압박하였고, 양주삼은 이에 굴복하여 1937년 선교사들과 함께 신사참배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듬해인 1938년 9월 3일에는 목회자들에게 신사참배 참석을 종용하는 통보를 보냈다. 같은 해 개최된 3차 총회에서는 아예 총회 일정 가운데 남산의 조선신궁을 참배하는 일정까지 넣어 철저히 일제의 압력에 순응하는 비굴한 모습을 보였다. 3차 총회에서 총리사로 선출된 김종우 목사는 10개월 뒤 병으로 별세하였고, 후임 감독[27]으로 정춘수가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감리회는 본격적인 친일의 길을 걸었다.
정춘수는 3.1운동 33인의 한 명으로 참석했을 만큼 초창기엔 항일 의지를 지닌 인물이었으나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검속되었다가 전향서를 제출하고 석방되면서부터 친일의 길을 걸었다. 1940년부터 정춘수는 일본 감리교회와 합동을 추진했고, 창씨개명에도 앞장섰다. 정춘수는 같은 해 10월 총리원(지금의 감리회 본부) 이사회를 열어 일본 기독교로 '혁신'하라는 '혁신안'을 발표하였다. 이는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배제시키고 일본 교회처럼 한국 교회를 개조하려는 방안이었다. 구체적으로 혁신안에는 성경에서 구약을 배제시키고 신약에서도 유대교 영향이 강한 책들을 배제시켰다. 이는 유대인들을 핍박하던 동맹국 나치 독일과 궤를 함께 하기 위한 일제의 압력 때문이었다. 게다가 찬송가를 개편하여 '재림', '평화', '그리스도 왕', '구세주' 같은 주제나 단어가 들어간 찬송을 삭제하거나 개작하여 부르게 했다. 이 안은 일본 감리교회 아베 감독이 통보한 걸 동어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총독부가 제안한 혁신안이 얼마나 쓰레기였던지, 전임 감독인 양주삼마저도 혁신안에 반대하는 데 앞장섰다. 심지어는 친일 지식인 하면 떠올리는 대표적인 아이콘 중 하나인 윤치호김활란도 보다못해 이에 반대했을 정도였다.(...) 반대 의견이 더욱 많았던 관계로 1941년에 열린 임시총회에서 혁신안은 부결되었다. 하지만 애국심이든 종교적 양심이든 다 갖다 팔아치운 정춘수는 또 다시 뚝심있게 특별총회를 열었다. 이번에는 일본 경찰을 대동하여 반대파들의 입장을 막고 혁신안을 강제로 통과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기독교조선감리회'는 해산되었고 '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 되어 일본 기독교회 산하에 들어간 모양새가 되었다. 1945년 7월 19일에는 결국 모든 교파와 통폐합되어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 되었다. 이 시기 용어조차도 바뀌었는데 대표적으로 목사라는 호칭을 쓰지 못하고 교사로 불렸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신학교가 온전할 리는 없어서 삐라 사건을 조작하여 1940년 감신을 무기 휴교시켰다. 전쟁이 극에 달하던 시기에는 교정마저 일본군 시설로 접수되었다.
하지만 모든 감리회 교인들이 넋 놓고 시시때때로 선을 넘는 폭주기관차 정춘수의 막장 행각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철원읍교회의 강종근 목사와 회양읍교회의 권원호 전도사, 삼척 천곡교회의 최인규 권사, 신석구 목사 등이 신사 참배에 불응하였다가 옥고를 치르고 대부분 옥사 또는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강종근 목사는 1940년 9월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1년 징역형을 받고 투옥되었고, 이때 받은 고문으로 사경을 헤매다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후유증으로 1942년 사망하였다. 권원호 전도사는 일제에 순응하는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제에 반대하는 설교를 했고, 일제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가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고문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최인규 권사는 정춘수의 혁신안에 반대하다가 투옥되었으나 형무소에서도 전향과 신사참배궁성요배, 일장기 경례까지 거부하여 심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2년 옥사하였다. 신석구 목사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으나 북한이 적화될 때에도 끝까지 남았다가 한국전쟁 시에 처형되었다. 한편 한국 감리회의 역사에 먹칠을 한 정춘수는 해방 후 과거 자신이 저지른 치부가 그대로 돌아와 감리교내 입지가 불안전해지자 냉큼 개신교 신앙을 버리고 천주교에 입교하여 생존을 이어나갔다.

5.1.3. 현대(자립시대, 1945~현재)


해방이 되자 한국 기독교계는 대회를 열어 교회의 앞날에 대해 논의했다. 본래 남북 교회 모두를 아우르는 대회를 개최하였으나 이미 소련의 점령 하에 있던 이북 교회는 참석하지 못해 '남부대회'로 불리게 되었다. 이 대회에서 해방 직전 일제에 의해 교단이 모두 통폐합된 것을 그대로 유지하느냐, 다시 환원하느냐 분분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결국 각 교파는 환원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감리회는 이때 최초의 분열을 겪게 되는데, 먼저 정춘수의 막장 행적에 반대하다가 면직, 휴직 처분을 당했던 교역자들을 중심으로 재건파가 등장했다. 재건파는 85명이었는데, 이들은 감리교신학교에서 기독교조선감리회 중부/동부 연회를 소집하고 '1939년 이후의 정책은 부인하고 그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요지의 선언서를 발표하고 1930년의 기독교조선감리회의 법적 상속자임을 천명하였다. 이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감리교 수습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교회 복흥 방침'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서 복흥파라는 용어가 나왔다. 두 파는 따로 총회를 열어 감독을 선출함으로써 분열하였다. 양 파의 분열은 1949년까지 계속되었다가 이해에 양측이 통합에 합의하여 통합 총회와 통합 연회를 개최하였고, 이때부터 교단명을 '기독교대한감리회'로 개칭하였다.
반면 이북의 감리교회는 수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신석구 목사와 이윤영 목사를 중심으로 서부 연회가 재건되고 교역자 양성을 위하여 성화신학교도 세웠지만 소련에 의해 주요 인사들이 연행됨으로써 활동이 빠르게 축소되기 시작했다. 결국 1947년 서부 연회 목회자들이 대거 월남함으로써 서부연회는 사실상 소멸되었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감리회는 위기에 처했지만 미 감리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되려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과 실세였던 이기붕이 각각 감리회 장로, 권사였던 점은 더더욱 감리교회 양적 성장의 계기가 되었다. 정권에 힘입어 노른자위인 광화문에 교단 본부 부지를 할당 받았고, 4.19 전까지 계속 정권의 비호를 받았다.
1950년대에 감리회는 다시 분열하였다. 이는 장정을 어기고 감독 재선에 나선 류형기 목사 때문에 벌어졌다. 류형기 목사는 이미 감독을 역임하였고 1953년 임기 만료로 새로 감독을 선출해야 했다. 하지만 류형기 감독은 미 감리회와 친분이 두터웠고 당시 상황은 미국의 지원이 있어야만 재기가 가능했다. 이를 두고 류형기 감독의 재선을 지지하는 성화파와 장정대로 하자는 호헌파가 분열했다. 성화파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이북에서 활동하다 월남한 이들 중심이었고, 호헌파는 충청도 인사들이 중심이었다. 호헌파는 1955년 독자 연회와 총회를 조직하고 신학교도 따로 세웠다. 두 파는 치열하게 갈등하다가 미국 감리교회와 한국 평신도들의 중재로 류형기 감독이 물러난 1958년 이후 합동 절차에 들어갈 수 있었다. 1959년 정동제일교회에서 합동 연회가 개최됨으로써 분열을 이리 봉합되었으나 각 파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서클정치가 감리회 안에 자리 잡았다. 두 파는 교단의 주요 직책을 놓고 끊임없이 경쟁했다. 1966년에는 정동파가 새로 생기면서 삼파전이 되었고, 1966년 총회에서는 세 파에서 모두 자파 인사를 감독으로 선출하려다가 110번이나 과반 미달로 감독이 선출되지 못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결국 세 파는 합의하여 우선 호헌파 변홍규 목사를 감독으로, 정동파 이병설 목사는 총무국 총무로, 성화파 나사행 목사는 교육국 총무로 선임하면서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한편 1955년,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는 한국 최초의 여성 목사 안수가 이루어졌다. 외국인 여선교사들이 안수된 후 20년도 더 지난 후에 일이지만 한국 최초의 여성목사 안수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크다.
1960년대 교단 분열이 소강 상태를 보이면서 신학 연구가 활발히 일어났다. 유동식 교수와 윤성범 교수를 중심으로 토착화 신학이 감신을 중심으로 활발히 연구되었다. 유동식 교수는 풍류도와 신학의 대화를, 윤성범 교수는 유교와 신학의 대화를 시도하였다.
1970년대에 교단은 양적으로 급성장하는 동시에 또 다시 분열 하였다. 총대 구성을 놓고 세 파의 다툼이 벌어지는 가운데 1970년 11월 총회에서 성화파에서 감독이 나오자 이에 불만을 품은 153개 교회가 따로 경기연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성화파나 호헌파도 아니었고 그간 교단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인사들이었다. 하지만 경기연회는 교단의 승인을 받지 못했고 이에 1975년에는 연합총회라는 독자 총회까지 열었다. 경기연회가 분립된 상태에서 1974년 기존 총회는 감독 자리를 놓고 호헌파와 성화파가 경쟁했다. 이 과정에서 성화파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교단 정화를 선언하고 갱신 총회를 열었다. 이로써 기존 총회와 연합총회, 갱신총회 세 개의 총회가 분열되었다.
이에 충격받은 미 감리회는 분열을 수습하지 않으면 지원을 끊겠다며 압박해 왔고, 중립 교회들을 중심으로 교단 통합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노력으로 1978년 교단 분열을 종용케 한 교단 체제를 개혁하고 통합 총회를 열어 분열이 일단락되었다. 이때부터 감독을 연회별 복수로 만들고, 감독의 파송권을 형식화하여 장로교회처럼 개교회가 목회자 선임권을 가지게 했다.
78년 체제는 2004년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2004년부터 옛 감독의 권한에 비견될 만한 전임 '감독회장' 제도가 신설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78년 체제 하에서 기독교대한감리회의 대표인 감독회장은 연회 감독 중 한 명이 맡아 왔으나 늘어나는 행정을 전담할 전임 감독회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고, 이것이 2004년 전임 감독회장 신설로 이어진 것이다. 전임 감독회장은 막강한 권한이 있어서 경쟁을 촉발시켰다. 결국 2008년 신경하 감독회장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신임 감독회장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터졌다. 임마누엘교회의 김국도 목사의 사회법 위반 혐의를 들어 신경하 감독회장은 후보 자격을 뺏었지만, 김국도 파의 힘이 막강하여 이를 저지하려 했고, 결국 서로 고소하여 수년간 감독회장 자리를 놓고 표류했다. 2010년에는 감독회장 자리가 공석이 되기도 했다. 감독회장 후보자들 간의 자격 요건 문제로 생긴 분쟁 때문이었다(참고). 이것을 '감리교 사태'라고 한다. 결국 법원에서는 2010년 12월에 감독회장 대행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장로를 맡고 있는 변호사를 선임했다(참고). 감리회 내부의 대립이 극심하다보니 법원에서 결국 공석이 된 감독회장을 감리회 목사가 아닌 장로회 장로로 선임하는 지경까지 간 것이다. 2012년에 전임 감독회장이 임시 감독회장을 맡아 이 문제를 수습하고 2013년에 정식 감독회장이 선출이 돼서야 '감리교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된 듯 하다.
2012년 9월 25일 감리회 총회에서 '''목회세습 금지법'''이 통과되었다. 이미 목회세습 문제가 오래된 상황에서 감리회에서 먼저 뒤늦게나마 목회세습을 막아보겠다고 나서 사회적으로도 크게 보도된 상황. 이런 상황에서 김홍도 목사는 '''"다 날 죽이려 든다!"'''라고 미국에서 외쳤대나 뭐래나. 하지만 이런 규정이 생긴 뒤에도 편법[28]을 통해 목회세습을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여 현재는 아들은 아버지가 담임했던 교회를 10년간 담임할 수 없도록 규정을 보완하였다. 직접적인 세습의 길은 거의 막힌 셈이다.[29]
2016년 1월 14일 제 31차 감리회 임시총회에서는 한국 교단 중 처음으로 목회자 이중직을 허용하였다. 물론 장정개정위원회가 올린 개정안에 따라서 기존 이중 직업을 가진 교역자를 불성실한 교역자로 규정안 기존 법안을 재정자립이 어려운 미자립교회[30]에서만 허용하였다. 이에 미자립교회 담임자가 이중직을 허락받으려면 , 해당연회 감독으로부터 근무지, 직종, 근무시간등을 서면으로 신청하고 허락받아야 한다. 이전에도 예장통합에서 목회자 이중직을 막거나 정죄하면 안된다고 보고서를 올렸으나 실제적으로 장정에 채택하지 않은 것을 본다면 최초로 이중직을 허용한 것은 그만큼 현실적으로 미자립 교회에 대한 지원이 전과 같지 않고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1960년대의 신학 흐름을 자유주의 신학으로 보고, 50년대의 지리멸렬했던 교단의 분열과 통합, 서클 정치를 보면서 환멸을 느낀 전 해병대 군종감 전덕성 목사가 1961년 교단을 탈퇴하였다. 전덕성 목사와 17인의 동지들을 중심으로 미국 자유감리교회의 지원을 받아 "한국예수교자유 감리회"가 1962년 설립되었고 전덕성 목사는 초대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1964년에는 교단명을 "예수교대한감리회"로 변경하였다.

5.2. 특징


감리회는 미국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이며 이성을 중시하는 교파로 알려져 있는것과 달리, 한국의 감리회는 한국 개신교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종파인 개혁교회(장로회)의 개혁주의 신앙의 영향을 많이 받아 어느정도 보수적인 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교회와 교단에만 국한될 뿐 신학대에서는 반면 원래의 색깔처럼 굉장히 진보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감리교회 대부분이 보수적이기에 신학생들 또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신학생들이 여럿 있으며 진보적인 신학교수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학생들이 꽤 있는 편이다. 합동보수·고신·재건 등 보수적인 장로교단에서는 감리회에서 신학 공부를 했다고 하면, 좋게 말해서 자유주의자, 나쁘게 말해서 이단으로 치부하기도 한다.[31]
감리교 소속 대학교는 기타 개신교학교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측면이 있다.
이는 굉장히 이상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 감리회의 기본 입장과 장로회의 기본 입장은 완전히 다르며, 교리적 측면으로 보면 오히려 서로를 어느 정도는 이단으로 해석[32][33]할 수도 있는 측면까지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칼뱅주의자들은 실제로 감리회가 이단적인 교리를 가르친다고 주장하고는 한다.[34]
금란교회김홍도 목사 같은 경우엔 근본주의적이며 반이성적인 발언을 남발하여 리처드 도킨스에게 세계구급으로 까이기도 했을 정도. 또한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몇몇 감리회 계통 인사들 역시도 근본주의적인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아서 상당한 차이를 느끼게 한다.
그런데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는 같은 에큐메니컬 교단인 예장통합에 비해서도 좀 더 강경한 입장을 보인다. 예장통합은 동성애에는 기본적으로 반대하면서도 동성애자에 대한 핍박이나 정죄는 지양하자는 입장이라면, 기감회는 동성애를 옹호하는 것만으로도 출교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보일 정도.[35]
축도에서는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가 교단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표준 말미이지만, 목사의 성향에 따라 "함께 하실지어다." 또는 "함께 있을지어다."로 끝맺는 경우도 간혹 있다.[36] 축도의 형식은 2가지인데,,, 사실상 어느 것을 사용해도 상관이 없다.
예배형식의 경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오순절교회처럼 통성기도와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교회도 있고, 한국의 장로교처럼 경건하고 말씀을 강조하는 교회도 있다. 그리고 예전을 중시하는 교회여서 매주 성찬을 하는 교회도 있다. 이는 존 웨슬리가 성공회사제 출신이고 성만찬을 강조했던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을 강조하는 교회와 말씀을 강조한 웨슬리처럼 성경을 강조한 교회와 야외에서 설교를 했을 때 일어난 각종 성령의 역사하심과 체험이 있었는데, 심지어 입신체험까지 나타났다. 이러한 것은 웨슬리의 본인의 일기에 다 기록이 되어있는데... 이러한 전통에 따라서 성령의 체험을 강조하고 통성기도와 자유롭게 기도하는 교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37]
미국 감리교회는 과거에 목사가 부족하여 성만찬을 시행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흥회 스타일 예배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감리교 예배의 특징은 역설적으로 교단만의 특별한 특징이 없는 것이다.
칼뱅과 루터도 강조했지만 존 웨슬리는 성만찬을 강조한 인물인데, 은혜의 방편으로 여겼는데 특별히 열린 성만찬(Open Comunion)을 했던 인물이었다. 즉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그리스도 예수를 행한 믿음과 신실한 사랑이 있다면 성만찬을 허용했다.

5.3. 조직 및 교세



현재 기독교대한감리회가 대한민국 감리회를 대표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의 합동-통합에 이어 3번째로 큰 교단이다. 그리고 예수교대한감리회을 비롯한 감리회를 표방하는 소수의 교단들이 존재한다.# 참고로 JMS 등의 일부 사이비 종교에서 예수교대한감리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이단으로 오해받는 일도 있다[38]. 감리교회를 표방한 소수의 교단들이 존재함에도 한국 감리회는 분열되지 않은 하나의 감리교회로 본다. 왜냐하면 장로회와 달리 총회가 분열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교 대한 감리회는 군목 출신인 어느 감리회 목사가 지나치게 타락한 기독교대한감리회의 현실과 지나치게 진보적인 신학에 반발하여 독자적인 교단을 만들어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장로회처럼 서로 제명처리하고 총회를 따로 열며 자기네가 정통이라고 우기는 경우가 아닌 것이다.
감리회 조직도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총회 - 연회 - 지방회 - 구역회 - 당회의 수직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총회는 본부라고 할 수 있으며, 연회는 천주교교구#s-2와 같이 전국을 각 지역별로 나눈 것이다. 지방회와 구역회는 연회를 더 자잘하게 나눈 것이며, 당회는 각각의 교회를 의미한다.
총회와 연회의 대표자는 각각 감독회장, 감독#s-3.1이라고 하며, 지방회와 구역회는 감리사라고 한다.
[image]
국내 연회는 서울연회(서울 북부), 서울남연회(서울 남부), 중부연회(인천, 경기 서부), 경기연회(경기 남서부), 중앙연회(경기 동부), 동부연회(강원), 충북연회(충북), 충청연회(충남 서부), 남부연회(충남 남부), 삼남연회(영남, 제주), 호남선교연회(호남)가 있으며, 미국의 미주특별연회(미국 한인교회)와 서부연회(북한)가 존재한다.
각 연회 관할구역의 경계는 장로회의 노회 관할구역처럼 느슨하지 않고, 가톨릭·성공회 교구의 관할구역 경계처럼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기준 2016년 현재 교인수는 137만여 명이다.감리회 교세현황
2000년부터 자세한 교세 변화는 기독교 대한감리회 본부선교국(KMCMission)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대략적인 지역별 교세를 살펴보면, 수도권강원권, 충청권에 교세가 강하며, 특히 강화군[39]을 포함한 인천광역시강원도[40]에서는 감리회가 초강세이다. 대전광역시[41], 세종특별자치시, 충청남도에서도 감리회의 교세가 강한 편이다.[42] 전라북도에서는 군산시, 익산시, 전주시·완주군부안군에서 소폭 강세이고 여타 시군은 감리회의 교세가 약하다. 제주특별자치도는 전반적으로 개신교 교세가 약하기는 하지만 관내 개신교 중에서만 집계하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에 이어서 두번째로 교세가 강하며, 전라남도경상북도[43], 경상남도[44]는 교세가 약하다.

5.3.1. 산하 신학교



5.4. 교육


한국의 감리회 관련 4년제 대학으로는 감리교신학대학교(약칭 감신대), 협성대학교, 목원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45], 그리고 배재대학교가 있다. 신학과정이 있는 학교 중 메인인 감리교신학대학교는 신학적으로 상당히 진보적이나 목원대협성대는 보수적인 편이다(이전 문서에는 이렇게 씌어 있으나 감리교회 테두리 안에서 신학과는 보수. 진보로 쉽게 나눌 수 있지 않다. 오히려 교수의 성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 중 감리교신학대학교, 협성대학교, 목원대학교, 연세대학교에 교역자 양성 기능이 있으며, 배재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신학과가 없다. 물론 미션스쿨이다 보니 채플도 있고 배재대에는 복지신학과가, 이화여대에는 기독교학과가 있지만, 교역자양성기능은 없다.[46] 연세대 신학과의 경우 감신대, 협성대, 목원대에서 감리회 필수 강의들을 수강하면 감리회 목사가 될 수 있다.
감리회 전문대학으로는 배화여자대학교 등이 있다.

5.5. 신앙고백



5.5.1. 1930년 조선감리교의 교리적 선언


1. 우리는 만물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시며 모든 선(善)과 미(美)와 애(愛)와 진(眞)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2. 우리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사 우리의 스승이 되시고 모범이 되며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3.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사 우리의 지도와 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신을 믿으며

4. 우리는 사랑기도의 생활을 믿으며 죄를 용서하심과 모든 요구에 넉넉하신 은혜를 믿으며

5.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과 실행의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으며

6. 우리는 살아계신 주 안에서 하나이 된 모든 사람들이 예배와 봉사를 목적하여 단결한 교회를 믿으며

7.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임을 믿으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 모든 사람이 형제됨을 믿으며

8. 우리는 의의 최후 승리와 영생을 믿노라.

아멘


5.5.2. 1997년 감리회 신앙고백


1. 우리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주관하시는 거룩하고 오직 한 분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2.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승천 하심으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3.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며 완전하게 하시며 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4.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도리와 신앙생활에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습니다.

5.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죄사함을 받아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받음을 믿습니다.

6. 우리는 예배와 친교, 교육과 봉사, 전도와 선교를 위해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믿습니다.

7.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나누고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형제됨을 믿습니다.

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우리 몸의 부활영생 그리고 의의 최후 승리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아멘

원한다면 공적 예배 자리에서 사도신경이 아닌 이 신앙고백문으로 신앙을 고백하여도 상관이 없으나, 감리교회 가운데 그렇게 하는 교회는 없다시피 하다.

5.5.3.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신경


감리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의로운 사회구현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온 전통을 가지고 있다. 1930년 제1회 총회에서 사회신경을 채택하고 이를 신앙의 실천적 목표로 삼아,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루는 데 이바지하여 왔다. 우리는 오늘의 시대가 안고 있는 새로운 문제들을 앞에 놓고 우리의 사회적 삶의 새로운 실천 원칙을 받아들여야 할 시점에 도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 감리교인은 우리에게 선한 의지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우리의 가정, 사회, 국가, 세계 그리고 생태적 환경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바이다. 우리는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며,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

1. 하나님의 창조와 생태계의 보존 우리는 하나님의 명하심을 따라 우주 만물을 책임 있게 보존하고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

2. 가정과 성, 인구 정책 우리는 가정과 성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귀한 제도임을 믿는다. 가정을 올바로 보존하며 성의 순결성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구 문제로 인한 세계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책임 있는 인구 정책이 수립되도록 노력한다.

3. 개인의 인권과 민주주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자유와 인권이 있음을 믿는다. 따라서 정권은 민주적 절차와 국민의 위임으로 수립되어야 하며 국민 앞에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정권 유지를 위해 국민을 억압하고 언론의 자유를 위협하는 어떠한 정치 제도도 배격한다.

4. 자유와 평등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기 때문에 성별, 연령, 계급, 지역, 인종 등의 이유로 차별하는 것을 배격하며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 건설에 헌신한다.

5. 노동과 분배 정의 우리는 자기실현을 위한 노동의 존엄성과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귀하게 여긴다. 동시에 우리는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빈부의 격차를 시정하여 분배 정의가 실현되도록 최선을 다한다.

6. 복지 사회 건설 우리는 부를 독점하여 사회의 균형을 깨뜨리는 무간섭 자본주의를 거부하며,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적 사회주의도 배격한다. 우리는 온 국민이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서로 도우며 사는 복지 사회 건설에 매진한다.

7. 인간화와 도덕성 회복 오늘의 지나친 과학 기술주의가 비인간화를 가져오고 물질 만능주의가 도덕적 타락(성도덕, 퇴폐문화, 마약 등)을 초래한다. 따라서 우리는 올바른 인간 교육, 건전한 생활, 절제 운동(금주, 금연 등)을 통하여 새로운 가치관의 형성과 도덕성 회복을 위해 앞장선다.

8. 생명 공학과 의료 윤리 우리는 근래에 급속히 발전한 생명 공학이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과, 근대 의학의 발전이 가져오는 장기 이식 등에 대해 교회의 책임 있는 대책과 올바른 의료 윤리의 확립이 시급함을 강조한다.

9.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정의 사회 실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구주임을 믿는다. 또한 오늘의 현실 속에서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타 종교와 공동 노력한다.

10. 평화적 통일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하나의 민족이 여러 가지 국내외적 문제로 분단되어 온 비극을 뼈아프게 느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화해를 통한 민족, 민주, 자주, 평화의 원칙 아래 조속히 통일되도록 총력을 기울인다.

11. 전쟁 억제와 세계 평화 우리는 재래적 분쟁은 물론,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핵무기 생산과 확산을 반대한다. 동시에 세계의 기아 문제, 식량의 무기화, 민족 분규, 패권주의 등의 해결을 위해 모든 나라와 협력함으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다.


5.6. 주요 교회


  • 기독교대한감리회
    • 정동제일교회 (송기성 목사)[47]
    • 상동교회 (이성조 목사)[48]
    • 아현감리교회 (김형래 목사) [* 미국 북감리회의 스크랜턴 선교사가 세운 애오개 시약소를 모체로 하여 발전한 교회이다. 1885년 내한한 북감리회의 첫 의료선교사 스크랜턴(W. B. Scranton)은 복음전도가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정동에 ‘시병원’을 개설하여 환자들을 진료하였다. 정동을 중심으로 의료활동을 벌이던 스크랜턴은 가난하고 소외된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정동 밖으로 나가 애오개, 동대문 그리고 남대문 시장 등에 진료소를 분산하여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애오개에서 가정 먼저 의료활동을 개시하였다. 스크랜턴은 1888년 12월 애오개 언덕의 한옥에 ‘애오개 시약소’를 열었는데, 서대문 밖 애오개는 어린아이들과 무연고자의 무덤이 많았고, 전염병 환자 진료소인 활인서(活人署)가 있던 곳으로 가난하고 병든 민중을 위한 병원을 개설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학교와 병원사업은 궁극적으로 기독교 선교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언제나 복음전도가 병행되었다. 바로 이 애오개 시약소가 이후 아현교회로 발전하였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아현교회(阿峴敎會))] 김유신, 김지길, 신경하의 3명의 감독회장을 배출했으며, 1987년에는 전국의 목회자가 아현교회에서 민주화항쟁을 준비하는 모임을 가지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교회이다
    • 종교교회 (최이우 목사)[49]
    • 중앙교회 (이형노 목사)[50]
    • 동대문교회 (서기종 목사)[51]
    • 빛가온교회 (서길원 목사)[52]
    • 선한목자교회 (유기성 목사)[53]
    • 광림교회 (김정석 감독)[54]
    • 금란교회 (김정민 목사)[55]
    • 임마누엘교회 (김정국 목사)[56]
    • 수표교교회 (김용성 목사)[57]
    • 석교교회 (황광민 목사)[58]
    • 만리현교회 (김래현 목사)
    • 영등포중앙교회 (최태수 목사)[59]
    • 금호제일교회 (김형석 목사)[60]
    • 일신교회 (윤동규 목사)
    •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61]
    • 서강교회 (여우훈 감독)
    • 창천교회 (구자경 목사)[62]
    • 세신교회 (김종구 목사)
    • 남산교회 (이원재 목사)[63]
    • 베다니교회 (곽주환 목사)[64]
    • 대림교회 (강득환 목사)[65]
    • 대신교회 (황문찬 목사)
    • 서대문교회 (이주익 목사)[66]
    • 꽃재교회 (김성복 목사)[67]
    • 아현중앙교회 (이선균 목사)
    • 큰믿음유신교회 (이홍규 목사)[68]
    • 갈보리교회 (김영생 목사)[69]
    •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70]
    • 불꽃교회 (공성훈 목사)[71]
    • 강릉중앙교회 (박태환 목사(대행))[72]
    • 속초교회 (김동준 목사)[73]
    • 속초 조양교회 (최선길 감독)[74]
    • 수원성교회 (임일우 목사)[75]
    • 수원종로교회 (강성률 목사)
    • 꿈의교회 (김학중 감독)[76]
    • 샘골교회 (진광호 목사)[77]
    • 제암교회 (최용 목사)[78]
    • 철원제일교회 (이상욱 목사)[79]
    • 춘천중앙교회 (심성수 목사)[80]
    • 춘천안디옥교회 (유진형 목사)[81]
    • 부산 제일교회 (정찬석 목사)[82]
    • 부산 동행교회 (김동균 목사)[83]
    • 부산 동래온천교회 (정동준 목사)
    • 부산 부암교회 (문영환 목사)
    • 인천 내리교회 (김흥규 목사)[84]
    • 이천 중앙교회 (김종필 목사) [85]
    • 인천 대은교회 (전명구 목사) [86][87]
    • 인천 숭의교회 (이선목 목사)[88]
    • 인천 부평교회 (손웅석 목사)[89]
    • 인천 제일교회 (김규열 목사)[90]
    • 인천 하늘꿈교회 (신용대 목사)
    • 대전 제일교회 (이성호 목사)[91]
    • 대전 한빛교회 (백용현 목사)[92]
    • 대전 하늘문교회 (홍한석 목사)[93]
    • 대전 천성교회 (윤백진 목사) [94]
    • 대전 복음천하교회 (곽성영 감독)[95]
    • 대전 보문교회 (김진태 목사)[96]
    • 대전 열방교회 (임제택 감독)
    • 대전 주향교회 (박형민 목사)
    • 안양교회 (임용택 목사) [97]
  • 예수교대한감리회
    • 한강중앙교회(최창규 목사)[98]

5.7. 주요 교단 목록


  • 예수교대한감리회(약칭 예감) : 해병대 군종감을 지낸 전덕성 목사가 1961년 기독교대한감리회를 탈퇴한 후 1962년 미국 자유감리교회와 연합하여 세운 교단. 공식 홈페이지 소개 참조. 교단 분열이 아닌 독립 후 창설이기 때문에 기독교대한감리회 분파가 아닌 독자적인 교단이다. 한기총 회원 교단으로 신앙적으로도 상당히 보수적인 하드코어 웨슬리 신앙을 추구하며 기독교감리회와 다르게 보수적이고 교회 일치(에큐메니컬) 운동에도 소극적인 입장을 보인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문래동에 총회본부를 두고 있으며 기감에 비해서는 교세가 매우 약하고 교단 소속 교회들도 그리 많지 않은 군소 교단이다.[99] 지역적으로는 인천광역시, 경기도충청북도에 주로 분포하며 대전, 세종, 전북은 교세가 매우 약하다. 영남권에는 아직 진출하여 있지 않다.

6. 일본 감리회


2차대전 이후 하나의 다른 교파와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된 일본기독교단 산하의 감리회와 완전히 독립된 교단을 표방한 일본자유감리교단(日本フリーメソジスト教団)이 존재한다.
기독교가 1%도 안되는 일본답게 교회보다는 대학교로 유명한 편이며, 간토에는 시부야에 위치한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이 있고 간사이에는 니시노미야에 위치한 칸세이가쿠인대학이 있다. 이중에서 칸세이가쿠인대학은 현재도 자체적인 신학과를 갖고 있지만, 아오가쿠는 1971년에 신학과를 폐지하고 도쿄신학대학으로 이관시켰다.
과거에는 한국 감리교단과 긴밀한 연관이 있던 편이었고, 현재도 이런 식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편이다.

7. 나무위키에 등록된 인물



7.1. 목회자, 신학자



7.1.1. 해외



7.1.2. 국내


  • 감리회 출신 민족대표
  • 3도(국내는 물론 전세계 감리교회 중에서도 교세면에서 1, 2위를 다투는 광림교회, 금란교회 및 역시 이에 버금가는 대형교회인 임마누엘교회를 개척하거나 크게 성장시킨 3명의 형제 목사들을 가리킨다. 지금은 3명 다 은퇴한 원로목사. ‘도’자 돌림이기에 흔히 3도 라 불리운다. 출처)
  • 손정도: 네이버캐스트
  • 전영택: 소설 화수분의 작가로 유명하지만, 본 직업은 목회자였다.
  • 최용신: 소설 상록수 주인공 채영신의 모티브가 된 인물.
  • 서길원: 빛가온교회(구 상계감리교회) 담임목사. 1963년생이다.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출신이며, 그는 2004년 10월부터 청양감리교회의 부교역자에서 상계감리교회의 담임목사로 재임 중에 있다.
  • 정경옥: 협성신학교[100] 전 교수. 신학자.

7.2. 평신도



7.2.1. 해외



7.2.2. 국내



7.2.2.1. 독립 운동가


7.2.2.2. 친일 인사


7.2.2.3. 현대 인물


7.3. 감리교인이었던 인물


원래는 감리회 신자였으나 훗날 개종[103] 또는 무종교인이 된 인물.

8. 외부 링크


기독교대한감리회 홈페이지
예수교대한감리회 홈페이지

[1] 이 중 미국인만 약 1,600만 명에 이른다.[2] 감독회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감독교회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에서는, 특히 미국 성공회 신부가 집필한 외국 서적을 번역할 때, 미국 성공회(the Episcopal Church)를 미국 감독교회로 칭하는 수가 있어서, 감리회와 미국 성공회를 혼동할 우려가 있다.[3] John이 성경인물 요한영어로 쓴 이름인 관계로 '요한 웨슬레'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존 웨슬리는 영국사람이다 보니 영어 발음대로 존 웨슬리라 해야 맞긴 하다.[4] 존 웨슬리 본인은 메소디스트 신도회가 성공회에서 분리되는 것에 반대했으며, 죽을 때까지 성공회 사제로 남았다. 이 당시 성공회에서 나가지 않고 잔류한 복음주의 일파를 개신교 전통을 존중하는 성공회 신학전통인 '저교회(Low Church)파'라고 한다. 여기서 '저교회'라는 말은 전례와 성사, 교회의 권위를 중시하는 고교회파와 대비되는 단어이다.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면서 교회의 권위는 성서 이하로 간주하는 부류이다.[5] 굳이 번역하자면 '규칙쟁이' 정도[6] 하지만 엄밀히 말해 장로회에도 노회, 총회와 같은 교회 연합 기구가 있으므로 완전한 개교회 중심 체제는 아니다. 완전한 개교회 중심 체제를 택하는 것은 침례회, 회중교회/독립교회이다.[7] 그런데 한국 감리회에서는 감독의 임기가 끝난 전임 감독도 '감독'이란 호칭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잘못이라는 지적도 상당수 있다. 천주교, 성공회, 정교회, 북유럽 루터교회에서는 주교가 되려면 사제 서품을 받고도 주교 서품을 또 따로 받아야 하지만, 감리회 목사는 감독이 된다고 하더라도 안수를 또다시 받지 않는다.[8] 예를 들어, 재정상황이 열악한 개척교회에 능력있고 연줄 없는 목회자를 파송한다. 열심히 선교 활동을 하고 교회 재정을 탄탄하게 갖춰 교회가 부흥할 때쯤, 갑자기 감독의 연줄을 타고 다른 목회자가 파송되고 열심히 사역하던 기존 목회자는 다시 다른 개척교회로 파송되는 병폐가 생긴다.[9] 성공회도 마찬가지다. 각 성당의 신도들이 관할 신부를 청빙할 수는 있지만, 청빙한 신부가 그 성당의 관할 신부로 부임하려면 주교의 인사 명령이 있어야만 한다.[10] 이는 존 웨슬리가 부흥 운동을 하면서 영국 국교회(성공회) 주교들에게 많이 시달린 탓이다. 웨슬리는 감독제의 폐해를 알고 미국 감리교회를 형성하면서 절대 감독 호칭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웨슬리는 토마스 콕(Thomas Coke)에게 안수를 주면서 감독이 아닌 '감리사'로 임명했고, 미국에 가서 프랜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도 감독이 아닌 '감리사'로 안수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콕과 애즈베리는 자신들의 호칭을 슬그머니 '감독'으로 수정하였다. 이에 웨슬리가 격분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미 웨슬리는 너무 쇠약해졌기에, 웨슬리의 의도와 상관 없이 미국 감리교회는 감독제 교회로 자신들의 역사를 이루어 나갔다.[11] 그런데 감리교(監理敎)라는 명칭에 '감독이 치리하는 교회'라는 뜻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영국 메도디스트 교회를 감리교회라 부르기에 애매한 부분이 있다.[12] 본래 소그룹 조직이 없던 장로회는 한국에 들어온 후 속회를 본따 '구역회'를 만들었다. 한국 한정으로 장로회의 교세가 감리회보다 크기 때문에 장로회 교인 대부분은 감리회가 구역회를 모방하여 속회를 만들었다고 알고 있지만 실상은 정반대이다. 하지만 대부분 헌금 봉투에는 '구역(속)'으로 되어 있는 현실.[13] 영유아 세례를 받은 이는 만 18세 이후 입교를 한 후, 성인 세례자는 세례 후 입교를 한 사람[14] 1.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of Man), 2.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4.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5. 성도의 견인(Perservance of Saints). 이 다섯 가지 항목의 앞머리 글자를 따서 흔히 '튤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15] 여담으로 감리회 국제본부와 구세군 국제본부는 모두 런던에 있다.[16] 대표적으로 사회 내 소수자(대표적으로 동성애자)에 대한 포용은 타 교단 측에서 봤을 때 상당히 충공깽한 수준. 그러나 한국의 감리회는 장로회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다른 나라의 감리회에 비해서는 보수적인 편이라 최근에는 목회자가 동성결혼, 동성애를 옹호할 경우 교단에서 퇴출시키겠다는 방침을 세웠다.[17] 초대교회의 관례를 따른 것이다. 초대교회에서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마다 금식했고, 로마교회는 토요일도 추가로 금식일로 간주했다.[18] 단지 성공회의 교리를 충실히 따르면서, 경직된 영국 성공회를 개혁하고자 했다.[19] 당시 일본선교회 관리자, 즉 일본 선교사였다.[20] 1885년 미국 감리회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메리 스크랜튼이 파송된 것을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21] 당시는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약 반년 전이었다. 매클레이의 부인은 김옥균의 부탁으로 일본에 있던 조선 유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친 인연이 있었다.[22]이화여자대학교의료원의 전신[23] 강원도 지역의 약 70~80% 정도 교회가 기감 소속의 교회이다. 심지어 한 군의 한 면 지역에 감리교회만 있는 곳도 있다. 장로교회를 아예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도 매우 많은 지역에 속한다. 영월군 중동면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경기도 가평군도 감리회가 강세 지역이고 장로회가 은근히 약세이다.[24] 특히 대구광역시부산광역시의 경우 합동 교단의 소속 교회가 가장 많다.[25] 전라도의 경우 한국기독교장로회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양 교단이 교세가 상당한 편이다.[26] 만주 연회는 선교 연회였다.[27] 1939년 연합연회 때부터 총리사 호칭을 감독으로 변경[28] 본인과 연결된 다른 목사를 거쳐 아들에게 목회직을 넘기는 방법[29] 이제 남은 방법은 맞바꾸기 뿐이다.[30] 연 1,000~1,500만 원 이하[31] 다만, 교리와는 달리 교회 내의 기본적인 구조는 당연히 감리회의 기본적인 전통을 따르기 때문에 장로회와 다른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감리교회에서는 여성 목회자 안수에 제법 적극적이며, 여성 장로의 천거 또한 개혁교회(장로회)에서는 볼 수 없는 큰 차이점 중의 하나다. 대표적으로 효린의 어머니가 여성 장로이다.[32] 쉽게 정리하자면, 구원론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구원에 대한 입장차이는 이단 여부를 가르는 중요한 잣대이기도 하다.[33] 물론 큰 틀에서 해석하면 같은 개신교적인 해석으로 통합할 수도 있으며 이는 외국에서 두 교파의 기본적인 입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개신교라고 해서 무조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한국과 달리 '장로교인', '감리교인' 등으로 자신이 속한 교파를 정확히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I'm a Methodist." 라고 하면 "나는 감리교인입니다." 라는 뜻이다. 참고로 Evangelical(복음주의)라고 말할 경우 보통 장로회(Presbyterian)이다.[34] 일부 예장고신에 속해 있는 교회나 대부분의 예장총공회의 경우에는 감리회에 대해서 이단적인 교리를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매우 크다. 합신 일부나 합동 일부도 그런 편이나, 예장통합의 경우에는 감리회와 상당히 유사한 입장을 보여 이단적인 교리를 가르친다는 교회는 극히 드문 편이다. 아마 있다면 예장통합에 속해 있으나 일부 개혁교회를 지향하는 교회가 그럴 것이다.[35] 그러나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는 진보적인 성향이 많은 목사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감리회 자체가 아무래도 굉장히 진보적이고 한국기독교장로회 못지않게 상당히 진보적인 교단인 게 사실이나, 한편으로는 보수적인 교회들도 제법 있기 때문에 그 입김이 강경한 입장으로 표명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36] 보통 전자의 경우에는 예장통합과 동일하여 95% 정도의 개교회에서 사용되나, 후자의 경우에는 극히 드문 편이다.[37] 그러나 대체로 보면 방언 기도를 강조하는 교회가 70% 이상 된다. 존 웨슬리는 통성기도만큼 방언 기도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일전에 국민일보의 한 기사에 나온 적이 이것에 언급된 것이 있었다.[38] 예수교대한감리회의 영문 이니셜은 JMC('''J'''esus '''M'''ethodist '''C'''hurch)이므로 JMS와 혼동하지 말자. 자세한 것은 JMS 참고.[39] 대한민국 관내 시군 중 감리회의 교세가 가장 강한 지역이다.[40] 강원도에서는 전체 개신교 교회의 70% 이상이 감리회 소속으로, 이외의 교단들 대부분(심지어 장로회 합동, 통합 등의 메이저 교단들마저도!)이 교세가 매우 약할 정도로 감리회에 심하게 편중되어 있다. 그나마 춘천시, 원주시 등의 영서 지방에서는 장로회도 어느 정도 선전하는 편.[41] 감리회 강세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 장로회, 침례회, 성결교회 등 타 교단의 교세 역시 강한 편이어서 특정 교단에 편중되지 않고 균형을 이루며 공존한다. 국내에서 서울시와 더불어 유이(有二)하게 특정 교단 쏠림 현상이 없는 지역.[42] 충남에서 사실 따지고보면 한국기독교장로회랑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등 장로교 교단들 교세를 합치면 장로교가 감리교랑 맞먹는다. 서천군부여군, 계룡시, 금산군 등 충남 남부는 장로교가 우세이다. 다만, 논산시는 예외. 논산시는 감리회가 강세를 보인다.[43] 강원도에서 1963년 이관된 지역으로 감리회와 침례회의 교세가 강한 울진군은 제외.[44] 다만, 6.25 전쟁 때 피난민들이 대거 정착해 교회를 세웠던 부산광역시는 예외로 감리회 교세가 어느 정도 선전하는 편이다.[45] 연세대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대한감리회, 대한성공회 등이 통합으로 이사회가 구성되어 있었다가 2011년부터 성공회, 기독교장로회는 배제되었다. 감리회보다는 장로회의 영향력이 더 큰 편이다.[46] 배재대는 과거에는 신학과였으나, 지금은 사회복지가 메인인 학과로 변했다.[47] 한국 감리교회의 산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교회. 벧엘예배당은 대한민국 실효지배 지역 내에서 가장 오래된 개신교 교회당이다. 유관순 열사가 이화학당 재학 시절에 다녔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장로로 출석하던 교회이기도 하며, 이문세의 노래 광화문 연가의 가사에 나오는 '눈덮인 조그만 교회당'이 바로 이 교회의 벧엘예배당이다. [48] 1888년 의료선교사 스크랜턴이 설립한 교회로, 1900~1910년대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을사늑약 반대운동, 신민회 조직, 신학문 보급, 한글 보급 등 각종 민족운동 및 독립운동에 앞장선 바 있다. 1976년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현재의 건물을 건축하고 건물 내에 새로나백화점을 설립, 운영하였다. 협성대학교가 속해있는 삼일학원을 운영하는 교회이기도 하다.[49] 1900년 창립된 교회로, 배화여자중학교, 배화여자고등학교, 배화여자대학교의 모체가 되는 교회이다. 윤치호밴더빌트 대학교에 재학한 시절 남감리회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여 설립을 주도했고, 양기탁, 남궁억 등이 초창기에 출석했다. 1930년 조선 남/북감리회의 통합을 주도했던 교회. 통합 감리회의 초대 총리사인 양주삼 목사가 담임을 했던 교회다. 그외에 대한민국 개신교 교회학교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교회이기도 하다.[50] 1890년 헨리 아펜젤러가 창설한, 정동제일교회와 더불어 한국 감리회 역사를 담고 있는 교회. 이 교회에서 설립한 중앙보육학교는 현 중앙대학교의 전신이다. 1983년에 준공한 인사동 하나로빌딩을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바로 옆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사회복지 기관인 태화복지재단 본부가 자리잡고 있다.[51] 1892년 세워진 유서깊은 교회로 원래 흥인지문 바로 앞에 있었다. 서울특별시의 성곽 복원사업 및 광교신도시 이전 사업과 맞물려 예배당이 서울시에 수용, 철거되면서 많은 논란을 빚었고 당시 담임이었던 서기종 목사가 출교당하기까지 했다. 현재는 서기종 목사가 복권되어 정상적으로 담임목사 직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2018년 교회 채무를 해결해주는 조건으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있던 분당새롬교회와 합병, 해당 교회 예배당으로 이전한 상태다.[52] 구 상계감리교회. 서울 노원구 상계5동에 위치한 전형적인 지역교회였으나, 2004년 10월 서길원 목사가 부임한 이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2018년 공모를 통해 교회명칭을 ‘빛가온교회’로 변경하였다.[53] 구 믿음의집교회. 80~90년대에 부흥사로 명성을 떨친 전가화 목사가 개척, 담임했던 교회였으나 무리한 교회건축과 담임목사 재산문제로 갈등을 겪은 바 있음. 2003년 전가화 목사가 사임하고 유기성 목사가 부임한 후 빠르게 혼란을 극복하고 한국 감리교를 대표하는 교회로 성장하였다.[54] 5대 담임목사로 감독회장 및 서울남연회 감독을 지낸 김선도 목사 때 강남으로 이전한 후 아래 금란교회와 교세에서 1, 2위를 다툴 만큼 크게 성장했으나, 2001년 장남 김정석 목사에게 담임목사직을 세습하면서 물의를 빚었다. 이를 계기로 담임목사직 세습 문제가 개신교계를 넘어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현 담임자인 김정석 목사는 2020년 10월 서울남연회 감독으로 당선되어 직무를 감당하고 있다.[55] 전세계 감리교회 중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교회. 바로 위에 언급된 광림교회 김선도 감독의 남동생으로 감독회장 및 서울연회 감독을 지낸 김홍도 목사가 담임했던 교회로, 2006년 아들 김정민 목사에게 세습하였다.[56] 광림교회 김선도 감독, 금란교회 김홍도 감독의 남동생 김국도 목사가 서울 송파구 잠실동에 개척, 담임했던 교회로 두 형이 담임하던 두 교회에 버금가는 대형교회로 성장. 세습의 기미가 보이자 교단 입법의회에서 세습방지법을 통과시켰으나, 사실상 이를 무시하고 '징검다리세습'이란 편법을 통해 2013년 아들 김정국 목사에게 세습을 완료하였다.[57] 감리회에서 몇 안 되는 신사참배 거부 목회자 중 한 명이자 북한에 잔류해 김일성 정권에 저항하다가 순교한 신석구 목사가 담임했던 교회다. 본래 수표동 시그니처타워 자리에 있었으나 1984년 서초동 상문고등학교 인근으로 이전하였다.[58] 1910년대에 건축된 예배당은 현재 서울시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59] 서울 영등포 지역 감리교의 모교회. 2017년 이 교회 담임목사인 김진두 목사가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총장으로 취임한 후, 현재는 최태수 목사가 담임으로 있다.[60] 초기 담임목사는 고 장광영 감독. 2010년대초 담임이던 김지성 목사의 비리 사건으로 교회가 교단 탈퇴를 시도하는등 큰 논란이 있었으나 결국 김지성 목사가 구속, 제명되고 연회에서 채교열 목사를 담임으로 파송하면서 사태가 수습되었다.[61] 신광여자고등학교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기독교대한감리회 내에서도 진보색이 가장 강한 편에 속하는 교회로 지역사회운동 및 환경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62] 박춘화 감독이 과거에 담임이었다. 연세대학교 맞은편 경의선 고가선로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2번째 부인 이희호 여사가 생전에 장로로 시무하였던 교회이기도 하다.[63] 해방 직후 평양 남산현교회 신자들이 김일성의 종교 탄압을 피해 남하하여 설립한 교회. 본래 회현동에 있었으나 남산3호터널 공사로 인해 반포동으로 이전하였다.[64] 구 구로중앙교회. 곽전태 감독이 과거에 담임이었으나 아들에게 세습하였다. 다만, 만나교회와 더불어 아들이 아버지를 답습하기보다 좀더 발전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면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비판은 덜 받는듯. 과거에는 구로4동 남구로시장 인근에 있었으나 2001년 보성운수 종점 옆 현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구 예배당은 현재 구로구시설관리공단 청사로 쓰이고 있다.[65] 길 바로 건너 우성아파트 자리는 1970년대 노동운동으로 유명했던 원풍모방이 있던 자리이다. 영등포지방 감리사와 서울남연회 제12대 감독을 역임한 임준택 목사가 담임자로 있다가 은퇴하였고, 현재는 강득환 목사가 담임목사로 있다.[66] 해방 직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본거지로 하여 설립된 교회. 이곳에서 평동교회, 충정로 광염교회 등이 분립하여 나갔다. 2010년 감리교신학대학교 종합관 바로 뒤에 웰치 감독 기념 예배당을 건축하여 현재에 이른다. 감신대와 인접해 있고 바로 연결되는 통로도 존재한다.[67] 구 왕십리감리교회. 1905년 동대문교회에서 분립하였으며, 왕십리 뉴타운 건설과 함께 예배당을 재건축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개명하였다.[68] 난곡공영차고지 맞은편에 위치한 교회로 1968년 유인상 목사가 철거민 강제이주 지역이었던 난곡동에서 개척하여 빈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고, 2000년대 이후 난곡 지역이 재개발되면서 이 일대에서 손꼽히는 대형교회로 성장하였다. 이단 논란이 있는 변승우 목사의 큰믿음교회(현 사랑하는교회)와는 관련이 없다.[69] 강변북로 잠실대교청담대교 중간, 상암동 방향으로 오른쪽에 보이는 큰 예배당이 갈보리교회이다. 본래 이 건물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교단 소속 교회가 2000년 준공하였으나, 공사대금을 지불하지 못해 다락방 소속 교회에 넘어갔던 것을 갈보리교회가 2007년 매입하였다. 2019.05.05일부로 초대 담임목사인 강문호 목사가 원로목사로 추대, 김영생 담임목사가 2대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70] 1981년, 김우영 목사가 잠실에 개척한 교회. 90년대초 분당으로 이전하며 크게 성장하였다. 2003년 김우영 목사가 건강상의 문제로 사임하면서 아들 김병삼 목사에게 세습. 광림교회 세습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지만,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면서 급하게 담임자를 세운 경우이어서인지 그다지 이슈화되진 않았다.[71] 전용재 목사가 1986년 분당에 개척한 교회. 2013년 전용재 목사가 교단장인 감독회장에 선출되면서 공성훈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72] 원산의 하디 선교사의 순회전도를 계기로 1902년에 세워진 강릉의 모교회. 3.1운동 당시 강릉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던 유서깊은 교회로, 현재도 영동지역을 대표라는 대형교회이다. 2006년부터 담임목사로 섬겼던 이철 감독은 2020년 10월 감리교 감독회장에 당선되면서 이임하였고, 아직은 후임 담임목사가 부임하지 않은 채 박태환 부목사가 담임목사 직무를 대행 중이다.[73] 1927년에 세워진 속초의 모교회이다.[74] 1969년에 세워진 교회이며, 속초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감리교회이다. 현재의 담임목사인 최선길 감독은 1981년에 목원대학교를 졸업한 후 이 교회에 부임하였으며, 2023년에 은퇴 예정이다. [75] 화서역 인근 서호꽃뫼공원 안에 위치한 교회로 장로회 합동 교단의 수원제일교회, 침례회 교단의 수원중앙교회와 더불어 수원에서 가장 대표적인 대형교회이다. 성균관대역 앞에 있는 장로회 통합 교단의 수원성교회와는 다른 교회이다.[76] 구 새안산레포츠교회. 한국 감리교회 최초로 열린 교회를 표방하며 레포츠 시설을 운영한 교회로 유명하다. 이 교회를 개척, 성장시킨 김학중 목사는 2018년~2020년 경기연회 감독을 역임한 바 있다.[77] 일제강점기 브나로드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던 곳 중 하나로 계몽운동가 최용신이 활동했던 교회이며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무대가 되었던 교회이기도 하다. 지금도 교회당 옆에는 최용신의 묘소가 있으며 교회당은 최용신 기념관을 겸하고 있다.[78] 강신범 목사가 과거에 담임이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악명높았던 제암리 학살사건의 현장으로 현재의 예배당은 해방 후 일본 내 양심주의자들이 순교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기금을 출현하여 건축한 것이라고 한다. 서해안고속도로 발안IC 인근에 있으며, 바로 옆에 3.1운동 순국기념관이 있다.[79] 1905년 설립되었으나, 해방 직후 북한군에 의해 종을 빼앗기고 예배당을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6.25 발발 직후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있다가 2013년 복원되었다.[80] 1898년에 강원도 최초의 교회로 세워졌다. 미국 남감리회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강원도 모교회이며, 2020년 5월 기준으로 권오서 목사는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 교회도 화마에 의한 시련이 있었는데, 2016년 7월 18일 17시 26분에 교회에서 화재가 나서 재건 및 복구 비용에 30억 원의 피해를 입게 되었다.[81] 구 남춘천감리교회였다. 1919년에 세워졌으며 남춘천역에서 홍천 방향으로 영서로를 타고 가다 보면 남춘천감리교회 예배당이 보이는데 그곳이 옛날 성전이다. 2005년에 새 성전을 석사동에 지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82] 1948년 대전제일교회에서 분립한 교회로 부산 지역 감리교회의 모교회이다.[83] 구 보수교회. 6.25 전쟁 때인 1951년 서울과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주축이 되어 세워졌다. 본래 부산 구도심인 보수동에 있었으나 2016년 명지국제신도시로 이전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개명하였다.[84] 헨리 아펜젤러 목사가 세운 한반도 최초의 감리교회로 유명하다.[85] 구연영·구정서 순국추모비로 유명하다.[86] 전명구 목사가 감독회장 임기중에는 박영준 목사가 담임목사였는데 전명구 감독회장 선거무효 소송 패소가 확정되어 은퇴가 아닌 담임목회를 할 수 있는 상태여서 임기를 마친 후 전명구 목사가 다시 담임목사가 되고 박영준 목사는 부목사가 되었다.참고[87] 지교회는 인천 검단대은교회, 인천 연수대은교회가 있다.[88] 1917년 내리교회에서 분립 개척된 교회로, 16대 담임자이며 부흥사로 유명한 이호문 감독 때 크게 성장, 금란-광림에 이어 교세면에서 교단 내 3위를 달리고 있다. 2008년 이성해-이호문-이선목 목사로 이어지는 3대 세습을 완료, 국내 최초로 3대째 세습한 교회라는 기록을 남기며 논란이 되기도 했다.[89] 홍창준 목사-홍은파 목사 부자가 70년간 섬긴 교회로, 초대형교회가 아님에도 오랫동안 감리회 교단 부담금 납부 1위를 기록할 만큼 내실있고 정직한 교회로 알려져 있다.[90] 감독회장 직무대행을 지낸 이규학 감독이 담임했던 교회로, 현재는 김규열 목사가 담임목사로 있다.[91] 1908년 미 감리회 선교사 앨리스 샤프 여사에 의해 설립된 교회로, 대전 지역 감리교회의 모태가 되는 교회이다. 샤프 여사는 유관순이화학당으로 유학 보낸 스승이기도 하다.[92] 구 서대전중앙교회. 최재현 목사가 과거에 담임이었으며 현재 원로목사이다. 대전 소재 감리교회 중 가장 규모가 크다. 기도(특히 방언 기도와 통성 기도)를 상당히 중시하는 교회이기도 하다. 현 예배당을 준공하기 이전에 사용하던 유천동 소재 예배당은 현재 예장통합 소속 교회가 사용하고 있다.[93] 월평동 성전이 들어서기 전에는 선화감리교회였으며, 원로 목사는 이준용 감독이었으나, 2013년에 소천하였다. 일전의 담임 목사였던 이기복 감독은 2019년에 은퇴하였다.[94] 감리교신학대학교배재대학교 이사를 지낸 조성근 목사가 과거에 담임이었으며 현재 원로목사로 시무중.[95] 석교교회라는 이름으로 대전시 중구 석교동에서 시작하여 교세가 커지면서 변동의 옛 충남제일교회 자리로 이전하였다. 곽성영 목사는 현재 남부연회 감독으로 재임중이다. 석교동에 현존하는 석교교회는 이 교회와는 전혀 별개의 교회로 이후에 구 석교교회 자리에 새로 설립된 교회이다.[96] 김용우 목사가 과거에 담임이었다. 현재의 예배당은 현 하늘문교회가 월평동으로 이전하기 전 선화교회 시절인 1983년 건축한 예배당을 인수한 것이다.[97]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에 위치한 대형교회. 부흥사로 유명했던 백문현 감독이 오랫동안 담임했던 교회로, 현재는 임용택 목사가 담임목사로 있다.[98] 신신묵 목사가 과거에 담임이었다. 예감 교단의 모교회격인 교회로 용산구 한강대교 북단에서 이촌동 천주교 새남터 순교성지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으며, 교단 총회가 문래동으로 이전하기 전에는 이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한강중앙교회는 기감 소속으로 1973년 정동제일교회에서 분립한 교회이며, 이 교회와는 다른 교회이다.[99] 과거에는 정명석의 신흥종교 교파가 사용한 위장 교단명이며 이재록의 만민중앙교회가 '예수교대한연합성결교회'라는 교단명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글이 있었으나, 정명석이 사용했던 정식 명칭은 '예수교대한감리회(진리)' 혹은 '예수교대한감리회 애천교회'로 이 교단에 소속되었던 교회를 매입한 후 이름을 무단 도용하여 위장한 것이다. 현재 정명석의 신흥종교는 '기독교복음선교회'로 개칭한 지 오래이며, 당연히 예수교대한감리회 자체는 정명석과 관계가 없는 건전한 개신교 교단이다. 다음 백과사전의 예수교대한감리회 항목 참조.[100]감리교신학대학교[101] 남편인 김대중 대통령은 천주교인이었다.[102] 원래는 기쁜소식선교회였다.[103] 기독교 내에서 종파를 옮기는 것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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