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운서
1. 벽동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운서
박운서는 1890년 10월 28일 평안북도 벽동군 벽동면 동하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만주로 이주한 뒤 봉천성 관전현[2] 에 거주하면서 1921년 4월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가입했다. 이후 1921년 10월 천자구(淺子溝)[3] 에서 초산군 옹암주재소 소속 순사 이시청(李時淸)을 처단했다. 그러나 1928년경 초산경찰서에 체포되었고, 1928년 11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제령 제 7호 위반, 살인 등의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박운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임실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운서
박운서는 1866년 1월 13일 전라북도 임실군 운암면 운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9월 13일 진안 마이산에서 동지 수백 명과 함께 구국운동에 신명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동맹단(同盟團)을 결성하고 의거의 기치를 올렸다. 이후 그는 이석용 의진에 소속되어 적과 교전하였다.
10월에 용담 심원사 부근에서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이어서 임실, 장수에 주둔하고 있던 적을 공격하였다. 전투의 양상은 유격전의 방식을 채택하여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1908년 3월 22일 운현전투에서 전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운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