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박중한
朴仲漢
'''
<colbgcolor=#0047a0><colcolor=#fff> '''출생'''
1895년 7월 5일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읍 대화정
'''사망'''
1970년 9월 17일
미국 뉴욕
'''상훈'''
건국포장 추서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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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7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중한은 1895년 7월 5일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읍 대화정에서 통제영의 군졸이었던 박대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6년 일본으로 유학가서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재학했다. 그러다 처남 최봉선#s-2으로부터 독립의식을 전수받고 그에게 받은 돈을 가지고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밀사단 본부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후 국내로 귀환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했다.
1926년 말, 경남도평의회에서 남해군 출신 도평의원 윤병호가 1면에 보통학교 1개 정책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통영 출신 도평의원 김기정이 반박했다.

"조선 사람에게는 교육이 필요치 않다. 조선 사람은 보통학교만 나오면 사상이 악화되어 사꾸라 몽둥이를 들고 다니며 불량한 짓을 하고 사회운동의 선봉이 된다. 지난 1919년 소요 이래 당해보지 않았느냐. 조선은 교육으로 망했다. (중략) 도평의회에 조선어 통역을 철폐하자. 황국어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도평의원 자격이 있는가?"

이 소식을 접한 그는 분노하여 이에 대한 진상조사와 시민대회의 개최를 추진하였다. 그는 김기정의 행위를 ‘매국적 행위’로 규정하고, 김기정을 ‘사회적으로 절교’시키고, 공직에서 해임시킬 것 등을 동지들과 결의하고 이와 같은 내용의 결의서를 인쇄·배포하였다. 이에 김기정은 이러한 박중한 등의 행위를 출판법 위반 및 명예훼손이라며 고소했고, 경찰은 박중한 등을 체포했다.
이후 마산지법 법정에 끌려온 그는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우리는 시민들의 토의 결정한 사항을 위임받아 진실을 규명했을 뿐 누구의 명예를 훼손한 사실도 없고 누구를 협박한 사실도 없다.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면 다 명예훼손이 되느냐/ 우리의 진상조사 보고에 허의나 날조가 있으면 대보라."

그러나 그는 1927년 10월 3일 유죄판결을 받았고, 이에 불복해 공소했지만 1928년 5월 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 후 선교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1931년 미국 뉴욕에 있는 콜롬비아 대학 종교 철학과에 입학한 그는 여름 방학을 이용해 미주교회를 통해 한국 시국문제와 일제의 식민지 정책의 부당함을 알리는 강연회를 개최했다.
1934년 부산항을 통해 입국했으나 일본인 경찰로부터 요시찰인으로 낙인찍혀 철저히 감시당했고, 태평양전쟁 발발 후 예비구금 조치되었다. 그러다 8.15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된 그는 1945년 10월 통영 민선군수가 되어 1948년 6월까지 역임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대 미8군 사령부에서 한국 대표 고문을 맡았으며, 전쟁 후 신민당 소속 제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1]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여생을 조용히 보내다 1976년 7월 5일 뉴욕에서 중풍에 의한 숙환으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박중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1] 그러나 임기는 단 5일만 맡았다.(1967년 6월 26일~6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