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환(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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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진환은 1888년 3월 2일 경상남도 진주부 평안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의병장 유종환이 이끄는 의병진영에 참여해 거창·안의, 전북 무주, 충북 영동·황간 등지로 다니면서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를 모아 의병투쟁을 벌였다.
이듬해 4월 27일 전북 무주군 무풍면 마곡에서 당시 악명이 높았던 ‘야마다(山田) 토벌대’와 3시간 동안 격전을 치르면서 37명의 의병이 전사하고, 유종환 의병장은 큰 부상을 당했다. 부상 치료 후 다시 의병투쟁을 벌였으나 1909년 4월 25일 경북 지례군 예영동 대덕산 골짜기에서 일본군과 거창경찰서 소속 경찰로 구성된 합동부대와 교전하다 의병 4명이 전사하고 유종환 의병장마저 전사했다.
이후 귀향하여 잡화상으로 일하던 그는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만세의거 소식을 듣고, 강달영(姜達永)·김재화(金在華)·권채근·박용근·이강우 등과 함께 진주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구체적인 거사에 대해 논의했다. 이때 박진환은 사회단체 교섭을 맡았다. 이윽고 3월 18일, 그는 2만여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튿날에는 김재화·강달영 등과 조직한 걸인독립단·기생독립단·노동독립단까지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일제 경찰은 중심인물들에게 잉크를 뿌려두었다가 그것을 증거로 관련자들을 검거했다. 그도 이때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받고 공소했으나,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9월 6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돼 형이 확정됐다.
출옥 후 1927년 1월 신간회 창립 발기인대회 때 청년부 간사로 선출된 후 독립사상 고취에 노력했고, 이듬해에는 진주 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8.15 광복 직후인 1946년 3월 5일 진주극장에서 인민당 진주지부 결성식이 거행되었을 때 지부장이 돼 활동하다가 1949년 12월 8일 진주극장에서 전향자, 자수자와 관내 유지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보도연맹 진주연맹 결성 및 선포대회가 열렸을 때 간사장으로 일했다. 1950년 6월 12일 진주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박진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