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화(1895)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박치화
朴致化, 朴致華'''

[image]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5년
평안북도 의주군 송천면
<color=#fff> '''사망'''
1932년 3월
만주 통화현 일본영사관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 생애


박치화는 1895년 평안북도 의주군 송천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마산대(天摩山隊)를 후원하다 1920년경 천마산대를 따라 남만주로 이동한 뒤 1923년경 참의부(參議府) 군대에서 양세봉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1931년 12월 17일부터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간부 30여 명이 신빈현(新賓縣) 하북(河北)에 있던 동포 서세명(徐世明)의 집에서 회동, 회의를 개최하였을 때 그 일원으로 참석하였다.
회의 내용은 중앙집행위원장 현익철(玄益哲) 붙잡힌 후의 내부적인 결속과 임원개선 문제를 비롯하여 조선혁명당과 표리관계에 있던 국민부(國民府)와의 통합문제를 협의하는 것이었다. 이때 그는 중앙집행위원 15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조선혁명당의 핵심인물로 부상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혁명군 사령부의 부관장(副官長)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회의 장소가 통화현의 일본 영사관에 탐지되어 같은 달 19일 회의장을 일경 50명과 중국보안대 100여 명으로 구성된 혼성부대가 포위 공격하였다. 이때 회의에 몰두하고 있던 간부들은 일·중 혼성부대의 기습공격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하고 중앙집행위원장 이호원(李浩源) 이하 10여 명의 간부가 일시에 붙잡히는 등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이때 그도 체포되었고, 통화 영사관으로 이송되어 모진 고문과 악형을 받고 1932년 3월경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박치화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