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티니아누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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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발렌티니아누스 2세(Valentinian Ⅱ)
'''휘'''
플라비우스 발렌티니아누스(Flavius Valentinianus)
'''생몰 년도'''
371년 - 392년 4월 15일
'''재위 기간'''
375년 11월 17일 - 392년 4월 15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차남. 풀네임은 플라비우스 발렌티니아누스 아우구스투스. 375년 11월 22일 프랑크족 출신 장군 메로바우데스에 의해 추대되어 이탈리아, 아프리카, 일리리쿰의 황제로 등극했지만 당시 겨우 4살이었기 때문에 어머니 유스티나와 메로바우데스가 섭정했다. 383년 그라티아누스를 살해한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387년 이탈리아로 쳐들어오자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달아났다가 테오도시우스가 막시무스를 해치워준 덕분에 복귀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가 파견한 프랑크인 사령관 아르보가스트와 갈등을 빛다가 392년 암살되었다.

2. 생애


발렌티니아누스는 서기 371년경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두번째 아내 유스티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375년 11월 트리어에 있던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급사하자, 당시 판노니아에 있던 발렌티니아누스는 현지 장군 메로바우데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그라티아누스가 트리어에서 서방 황제로 등극했기 때문에, 자칫하면 내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라티아누스는 불과 4살 밖에 안된 이복동생과 쓸데없이 다투기보다는 양보하기로 하고 발렌티니아누스가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일리리쿰의 황제가 되는 걸 용인했다. 이후 발렌티니아누스의 모후 유스티나가 아들을 대신해 기본적인 집무를 맡았고 제국 서방의 전반적인 통치는 그라티아누스가 맡았다.
378년 동방의 황제이자 발렌티니아누스의 삼촌인 발렌스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고트족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에 그라티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 장군을 소환해 379년 1월 동방의 황제로 지명했다. 383년, 그라티아누스가 리옹에서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보낸 암살자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막시무스는 이탈리아로 쳐들어가려 했으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발렌티니아누스의 권리를 인정해준다면 서방의 황제로 인정해주겠다."는 제안을 해오자 이를 수락하고 384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 테오도시우스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로서 막시무스는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의 황제가 되었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일리쿰의 황제 지위를 유지했다.
이 시기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일리리쿰을 담당한 발렌티니아누스의 모후 유스티나는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오와 대립했다. 서기 385년, 암브로시오는 황실의 부활절 기념을 위해 성 포르시아노 성당을 양도하라는 유스티나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격노한 유스티나는 암브로시오를 체포해 황궁으로 소환하려 했다. 그러나 병사들이 밀라노 성당에 침입해 암브로시오를 체포하려 하자 민중이 소동을 일으켰고, 유스티나는 어쩔 수 없이 명령을 철회했다.
얼마 후, 유스티나는 암브로시오를 추방하려 했다. 그러자 암브로시오의 지지자들은 바리케이트를 치고 황제군과 대치했다. 암브로시오는 자신이 고대 순교자들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며 유스티나의 전횡에 저항할 뜻을 표명했다. 이 소식을 접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중재에 나섰고, 결국 유스티나는 암브로시오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조했다. 이후 암브로시오의 정계에서의 영향력은 매우 강력해졌다.
한편, 유스티나는 아들의 명의로 로마에 있는 모든 다신교 사원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모독을 금지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에 고무된 이교도 원로원 의원들은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를 대표로 한 사절단을 구성해 밀라노에 있는 황제에게 보내 그라티아누스가 382년에 철거했던 승리의 제단을 복원해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는 암브로시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그 요청을 거절했고 로마인들의 전통 의식을 유지하자는 심마쿠스의 호소를 거부했다.
387년, 막시무스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에 침입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모후 유스티나와 함께 테살로니카로 달아나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의탁했다. 테오도시우스는 388년 프랑크족 출신의 아르보가스트 장군이 지휘하는 로마군을 파견해 막시무스를 공격했다. 막시무스는 테오도시우스의 강력한 군대에게 패해하고 도망치다가 붙잡혀 처형되었고, 발렌티니아누스는 겨우 위기에서 벗어났다.
발렌티니아누스가 밀라노로 돌아온 후 유스티나가 사망했다. 이에 테오도시우스는 자신이 어린 황제의 후견인임을 자처하며 서방의주요 관리들을 임명하고 동전을 주조했다. 또한 아르보가스트를 발렌티니아누스의 수호자로 임명했다. 게르만족이 갈리아를 침입했을 때 아르보가스트는 군대를 이끌고 라인강으로 가서 그들을 격퇴했다. 이때 어린 황제는 비엔나에 머물렀다. 아르보가스트는 어린 황제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심지어 황제의 친구 하모니우스가 뇌물을 받은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황제가 보는 앞에서 살해하기까지 했다.
이런 아르보가스트의 전횡에 위협을 느낀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아르보가스트에게 갈리아 주둔 로마군을 이탈리아로 인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아르보가스트는 거부했고 발렌티니아누스는 공식적으로 아르보가스트를 해고했다. 그러자 아르보가스트는 콧방귀를 뀌더니 황제가 보는 앞에서 해고 명령장을 찢어버리고 자신은 애초에 발렌티니아누스에게 임명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아르보가스트가 이렇게 나오자 화가 단단히 난 발렌티니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와 암브로시오에게 아르보가스트의 전횡에 대해 불만을 쏟아내는 편지를 보내며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392년 5월 15일, 발렌티니아누스는 비엔나 별장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아르보가스트는 황제가 자살했다고 주장했지만 대부분의 당대 기록은 아르보가스트가 직접 황제를 죽였거나 근위대를 매수해 시해하게 했다고 추정한다. 암브로시오는 장례식에서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추모하는 주례를 맡아 발렌티니아누스를 신앙심 깊은 기독교인의 전형으로 묘사하면서 천국으로 똑바로 올라갔다는 말을 남겼다. 기독교 교리상 자살이라는 죄악을 저지른 자는 천국으로 똑바로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이는 황제가 살해당했다는 공식적인 교회의 입장이었고 사실상 서로마의 실권자였던 아르보가스테스에 반대한다는 의사표명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교회의 아르보가스테스 반대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아르보가스테스 반란을 진압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발렌티니아누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아르보가스트는 기독교인을 가장한 이교도이자 문법 및 수사학 교수였던 에우게니우스를 꼭두각시 황제로 세웠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진압에 나서 아르보가스트를 주살하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