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누스 막시무스

 



[image]
이름
플라비우스 마그누스 막시무스 아우구스투스
(Flavius Magnus Maximus Augustus)
생몰년도
335년 - 388년 8월 28일
재위기간
383년 8월 25일 - 388년 8월 28일
1. 개요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2.2. 황제 즉위
2.3. 세력 확대
2.4. 최후
3. 같이보기


1. 개요


로마 제국의 제51대 황제. 풀네임은 플라비우스 마그누스 막시무스 아우구스투스. 383년 브리타니아에서 군대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참칭하고 그라티아누스를 주살했다. 이후 브리타니아와 갈리아, 히스파니아로 영역을 넓히고 제국 동방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로부터 이탈리아의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건드리지 않는 조건으로 정식 황제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387년 이탈리아를 침공해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축출한 후 테오도시우스와 맞붙었다가 참패하고 388년 테오도시우스에게 항복한 후 처형되었다. 콘스탄티누스 3세의 선배격 되는 인물이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막시무스는 335년 에스파냐의 갈라이키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시 제국의 유명한 장군이었던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유케리우스의 아들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군대에 입대했고 373년 아프리카에서 테오도시우스 총독을 섬겼으며, 376년엔 다뉴브 전선에서 활동했다. 380년에 브리타니아에 파견된 막시무스는 이듬해(381) 픽트족과 스코트족의 침입을 물리쳤다. 웨일스의 전설에 따르면, 막시무스는 브리타니아에서 현지 귀족 여성과 결혼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웨일스 왕가의 선조라고 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고 이를 입증할 역사 기록은 없다.
당시 로마 제국의 서방은 그라티아누스가 통치했고, 동방은 테오도시우스 1세가 다스렸다. 그라티아누스는 20대의 어린 나이에도 영명한 군주로 평가받을 만큼 탁월한 역량을 갖췄다. 그는 점잖고 온유한 기질을 갖춰 세인들의 호감을 샀고 백성들에게 온화하게 대했으며, 문인들을 우대하고 그 자신도 문학적 재능과 웅변술이 뛰어났으며, 전장에서도 탁월한 지휘를 발휘해 승리를 쟁취했다. 그는 10대 시절 아버지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급사한 뒤 제국 서방을 갑자기 떠맡았을 때 순식간에 아버지를 따르던 신하들을 통제했고 게르만족의 침략을 여러 차례 격퇴했다. 또한 삼촌 발렌스 황제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고트족에게 죽임을 당하고 발칸 반도가 혼란에 휩싸이자 테오도시우스 장군을 공동 황제로 지명해 제국 동방을 안정시키게 했으며 그 후에도 테오도시우스와 협력하여 제국의 국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확실히 명군이 될 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라티아누스는 380년 무렵부터 인망을 잃기 시작했다. 그는 로마 제국이 로마 다신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받아들이도록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먼저 최고 제사장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책에서 물러나 신들을 위한 제사 집전을 거부했으며, 원로원의 반발을 무릅쓰고 원로원에 설치되어 있던 승리의 제단을 폐쇄했다. 또한 베스타 신전의 해체를 시작했고 교회법을 위반하는 자는 중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이때 로마 제국에는 아직 다신교를 신봉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라티아누스의 종교 정책은 너무 섣불렀고 당연히 극심한 반발을 샀다.
또한 그라티아누스는 380년 무렵부터 사냥에 탐닉했다. 그는 말타기, 활쏘기, 창 던지기에 몰두했고 대규모 삼림을 사냥터로 삼아 온갖 종류의 야생동물을 그 안에 풀어 놓고 사냥했다. <로마 제국 쇠망사>의 저자 에드워드 기번은 그라티아누스가 하루 종일 사냥에 탐닉하느라 정사를 게을리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고대 사회에서 사냥은 개인의 오락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군대를 단련시키고 친위 세력을 단합시키는 계기로 삼는 기능도 있었으니 그라티아누스가 사냥을 즐긴 것을 마냥 비판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가 사냥에 몰두할 시기에도 제국 서방의 내정은 그럭저럭 돌아간 걸 보면 그가 딱히 정사를 놓았다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그라티아누스가 군대를 통제하는 데 실패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아직도 많은 병사들이 다신교를 신봉했는데, 특히 기독교의 세가 미약한 브리타니아와 갈리아에서 이런 병사들이 많았다. 그들은 기독교를 강요하는 그라티아누스에게 불만을 품었고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할 이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결의한다.

2.2. 황제 즉위


서기 383년, 막시무스는 브리타니아에 주둔한 로마군으로부터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는 독자적으로 동전을 주조해 자신이 로마 제국의 진정한 황제라고 선전했고 지방 관료들에게 브리타니아 통치를 위임한 후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갈리아로 진군했다. 그라티아누스는 막시무스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즉각 군대를 규합해 파리 인근에서 막시무스의 군대와 맞붙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라티아누스 휘하의 무어인 기병대가 막시무스 편을 들었다. 그들 역시 그라티아누스의 종교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막시무스가 그들을 돈으로 매수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렇듯 부하들이 난데없이 배신하자, 그라티아누스는 자신에게 여전히 충성을 바치는 3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리옹으로 도주했다. 리옹의 총독은 그라티아누스를 잘 대해줬지만 막시무스의 기병대가 리옹에 접근하자 그들과 협상한 끝에 그라티아누스를 내주었다. 결국 그라티아누스는 383년 8월 25일 막시무스가 보낸 자객들에게 암살당했다.
막시무스는 여세를 몰아 로마로 진격하려 했으나 동방의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플라비우스 보토를 사절로 보내 이를 저지했다. 그는 막시무스가 이탈리아의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용인해준다면,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막시무스의 지위를 인정해줄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또한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도 막시무스를 설득했다. 이에 막시무스는 384년 평화 조약을 체결해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일리리쿰 서부에서의 종주권을 인정했고, 자신은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의 황제로 공인되었다.

2.3. 세력 확대


막시무스는 갈리아의 트리어에 자신만의 수도를 세우고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를 통치했다. 그는 브리타니아의 현지 귀족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했고, 갈리아의 지방 제도를 재편성했으며 자신만의 주화를 제조했다. 또한 그는 알레만니족 등 게르만 민족들의 침략을 모조리 격퇴해 인기있는 황제가 되었다. 한편, 막시무스는 마술사로 고발된 7명을 이단 혐의로 처형했으며 387년 또는 388년에 로마에서 유대교 회당을 불태운 기독교인들을 비난하는 훈령을 발표했다.
387년, 막시무스는 평화 조약을 위반하고 이탈리아로 침입했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밀라노에서 달아나 테오도시우스에게 의탁했고, 막시무스는 삽시간에 이탈리아 전역을 석권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제국의 서방을 통치하는 권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행위가 파멸을 초래할 거라는 걸 예상치 못했다.

2.4. 최후


388년 7월, 테오도시우스는 아르보가스테스가 이끄는 로마군을 파견해 막시무스를 공격했다. 막시무스는 이에 맞서 사브 강 근처의 사스키아에 진영을 두고 적과 대치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몇 번의 전투에서 모조리 패했고 병사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여기에 프랑크 족이 북부 갈리아를 침략하면서 막시무스의 입지는 더욱 악화되었다. 막시무스는 아퀼레이아로 달아났으나 적에게 포위되자 항복했고 자비를 간청했지만 곧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어머니와 자식들 역시 388년 가을에 트리어에서 처형되었다.

3. 같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