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티아누스
1. 개요
서기 375년 11월부터 383년 8월 25일까지 로마 제국 서방을 통치한 황제. 풀네임은 플라비우스 그라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장남으로, 367년 주니어 아우구스투스로 지명되어 일찌감치 후계자 교육을 받았고 375년 아버지가 급사하자 제국 서방의 황제로 즉위했다. 즉위 당시 나이는 16세에 불과했지만 일찌감치 탁월한 역량을 발휘해 제국 서방의 방위를 굳건히 지켜냈고 통치 방면에서도 준수한 능력을 보여줘 자신이 명군이 될 만한 자질을 갖췄음을 입증했다. 또한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삼촌 발렌스 황제가 전사하자 테오도시우스 1세를 동방의 황제로 삼아 혼란에 휩싸이던 동방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다신교 신자들이 여전히 많은 제국 서방에서 기독교 친화 정책을 펼치다가 거센 반발을 야기했고 결국 383년 마그누스 막시무스에게 암살된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그라티아누스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마리나 세베라 황후의 장남으로, 359년 판노니아의 시르미움에서 태어났다. 그라티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딸인 플라비아 막시마 콘스탄티아와 처음 결혼했고, 콘스탄티아가 사망한 후 다른 아내와도 결혼했지만 두 결혼 모두 자식을 보지 못했다. 그는 367년에 주니어 아우구스투스로 지명되어 후계자 교육을 받았고 아버지와 함께 전장을 누볐다. 그라티아누스가 황제가 되기 이전에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대 역사가들은 한 목소리로 그의 탁월한 자질에 찬사를 보냈다. 그는 문인들과 자주 교류하며 시를 잘 짓고 고도의 철학적 지식을 갖췄고 웅변술이 뛰어났다. 그리고 병사들을 잘 대해주고 전술적 능력도 준수해 장군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으며, 창과 활을 잘 다뤄서 동물들을 능숙하게 사냥했다. 또한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었고 성정이 온화해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았다.
2.2. 제국 서방의 황제
서기 375년 11월,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트리어에서 급사했다. 이때 아버지 곁을 따르고 있던 그라티아누스는 곧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런데 판노니아에서 아쿼티우스와 막시미우스 장군들이 그라티아누스의 동생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황제로 추대했다. 그라티아누스는 내란이 발생할 지도 모르는 이 상황을 현명하게 대처했다. 그는 이탈리아, 일리리쿰, 아프리카를 밀라노에 자리잡은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영역으로 삼는 데 동의했고, 자신은 갈리아, 히스파니아, 브리타니아를 맡았다. 그러면서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그가 맡은 영역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16세였지만, 그는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제국 서방을 장악했고 제국 동방의 황제이자 삼촌인 발렌스에게도 인정받았다.
이후 그라티아누스는 라인강을 도하하여 갈리아에 쳐들어온 게르만 족과 전쟁을 벌여 수차례 승전을 거뒀다. 그러던 378년 초 고트족의 반란으로 곤경에 빠진 발렌스로부터 구원 요청이 들어오자 프랑크족 출신의 부하 프리게리두스, 리코메르 등에게 선봉대를 맡겨 동방으로 파견해 고트족을 저지하게 한 후,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뒤따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가 판노니아 일대로 정예부대를 진출시키던 중 라인강 유역에 거주하던 알레만니족이 침공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에 그라티아누스는 군대를 돌려 아르겐타리아 근교에서 프랑크족과 연합해 알레만니족을 격파했다. 이후 그는 라인강 상류를 건너 알레만니족의 영역으로 진입해 촌락을 불태우고 수많은 알레만니족 전사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발렌스를 제 때에 구원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378년 8월 9일, 그라티아누스가 구원하러 오는 걸 기다리지 않고 단독으로 고트족과 싸우기로 결심한 발렌스는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고트족과 맞붙었으나 전 병력의 3분의 2가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고 전사했다. 그라티아누스는 뒤늦게 발칸반도로 군대를 이동했으나 이미 상황은 악화될 대로 악화되었다. 다뉴브 강 남부 일대는 고트족 무리들에게 파괴되었고 로마의 권위와 군사적 위신은 땅바닥에 떨어졌다. 게다가 그가 갈리아를 떠난 직후 게르만 종족들이 또다시 갈리아 침략을 계획하고 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이에 그라티아누스는 혼자서는 이 난국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2.3. 테오도시우스를 공동 황제로 지명하다
서기 379년 1월 19일, 그라티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 장군을 자신의 동료 황제로 지명했다. 이 결정은 다소 뜻밖이었는데, 테오도시우스 장군의 아버지가 그라티아누스의 아버지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반역자로 낙인찍히고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그라티아누스는 모에시아 총독 시절 테오도시우스의 역량을 높이 평가했고 로마군 내 테오도시우스의 명망을 고려해 그만이 혼란에 빠진 동방을 맡길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그라티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와 만나 그의 아버지를 복권시킨 후 자신의 동료 황제로 지명하고 동방을 맡겼다.
테오도시우스는 자신에게 뜻밖의 기회를 준 그라티아누스에게 보답한다. 그는 고트족과 일전을 벌여 미친듯이 날뛰던 그들을 어느정도 저지했고 381년에 고트족의 왕 아타나리크와 평화협정을 체결한 후 트라키아 속주에 고트족을 대거 이주시켰다. 한편 그라티아누스는 라인 강 전선의 경비를 철저하게 강화했고 제국을 침략한 적들을 모조리 격파했다. 그라티아누스의 스승이자 4세기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아우소니우스는 제자에게 다음과 같은 찬사를 바쳤다.
전쟁과 문예에 능하신 황제 폐하께서는 문무에서 모두 높은 명성을 거두셨으니, 이로써 두 겹의 제관을 쓰실 자격이 있다. 페하께서는 뮤즈 여신들의 도움으로 전쟁의 위협을 가라앉히셨고, 아폴로 신의 도움으로 게테족의 횡포를 억누를 수 있었다. 폐하께서는 병장기들이 부딪치는 한가운데서, 은밀히 약탈을 일삼는 위험한 사르마티아족 한 가운데서, 막사에서 보낸 수많은 전쟁의 경험을 가지고 계시며 그로 인한 영광을 뮤즈 여신들께 아낌없이 돌리실 것이다.
폐하께서는 날카로운 시위 소리와 함께 날아가는 화살들을 언제나 손에서 떼어놓지 않으시며, 뮤즈 여신의 갈대 또한 멀리하지 않으신다. 휴식을 모르는 그 고귀한 손은 무기를 바꾸어 쥐시면서도 아름다운 시를 구상하신다. 그러나 그 시들이 평화에 젖어 있는 것들은 아니다. 폐하의 시들은 오드뤼사이[1]
전사들과의 격렬했던 전쟁과 과거 트라키아 여전사들의 용맹함을 노래하고 있다.그러니 기뻐하시오, 아이아키데스[2]
여! 이 고귀한 시인이 당신의 이야기를 다시 노래할 것이며, 이 로마 제국의 호메로스가 당신의 이야기를 시의 주제로 삼았으니 말이오.
출처: #
2.4. 종교 정책
테오도시우스가 제국 동방을 안정시키는 동안, 그라티아누스는 라인강 전선을 안정시킨 후 종교 문제에 관심을 돌렸다. 그는 모든 미신적 관습을 금지하고 마녀 및 마술사들을 처형한다는 칙령을 반포했고 아리우스파를 비롯한 이단 종파들을 금지한다는 칙령도 반포했다. 또한 그는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오의 영향을 받아 로마 다신교 숭배를 억제하기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다. 먼저 379년, 오랜 세월 로마의 신들을 모시던 최고 신관, 즉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책에서 물러났다. 폰티펙스 막시무스는 아우구스투스 이래 역대 로마 확제가 역임하는 직책이었는데 그걸 처음으로 거부한 것이다. 또한 원로원의 반발을 무릅쓰고 원로원에 설치되었던 승리의 제단(Altar of Victory)[3] 을 다시 폐쇄했으며 베스타 신전의 해체를 시작했다.[4]
382년, 그라티아누스는 이교도 사제들이 재산을 물려주는 걸 금지했고 모든 이교도 사제들의 특권과 면책권을 박탈했다. 또한 모든 이교도 사원들과 성소들은 정부에 의해 몰수되며 그들의 수입은 황실 재산으로 전용된다고 선언했다. 오랜 세월 로마 다신교를 신봉했던 사람들은 그의 이 같은 정책에 큰 충격을 받았고, 원로원은 승리의 제단을 재건하고 베스타 신전을 복구시켜 달라고 청했다. 심지어 일부 기독교 관료들도 제국의 분란을 염려해 황제를 만류했다. 그러나 그라티아누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급기야 교회법을 따르지 않는 관료들을 처형한다는 칙령을 반포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그의 급진적인 종교 정책은 다신교 신봉자들을 격분시켰고 자신의 명줄을 옥죄는 결과를 초래한다.
2.5. 최후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그라티아누스는 380년 무렵부터 타락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그는 자신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신료들이 정치적 알력 끝에 축출된 뒤 간신배들에게 둘러싸인 채 향락을 일삼았고 사냥을 지나치게 탐닉해 하루종일 사냥에 몰두하며 정력을 낭비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냥은 고대 사회에서 단순한 오락거리가 아니라 군사 훈련을 병행하기도 하고 친위 세력의 단합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어주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므로 그가 사냥을 즐긴 것을 마냥 비판할 수는 없다. 그리고 당시 제국의 내정이 그럭저럭 돌아가고 있었다는 사실로 볼 때, 그라티아누스가 딱히 정사를 게을리 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그의 급진적인 종교 정책으로 인해 불만을 품은 로마군을 통제하지 못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383년, 다신교 신봉자들이 많은 브라티니아 주둔 로마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황제로 옹립하고 갈리아로 침입했다. 그라티아누스는 이에 맞서 군대를 소집해 파리 인근에서 반란군과 맞붙었다. 그런데 무어인 기병대가 뜻밖에도 그를 배신하고 막시무스에게 돌아섰고, 그라티아누스는 300여 명의 기병대만 이끌고 리옹으로 도주했다. 리옹의 총독은 그를 극진하게 대접했지만 막시무스가 보낸 암살자들과 협상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대가로 그라티아누스를 넘기는 데 동의했다. 결국 그라티아누스는 383년 8월 25일 리옹에서 암살당했다. 이때 그의 나이 2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