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battle of hadrianopolis
'''시기'''
서기 378년 8월 9일
'''장소'''
로마 제국 트라키아 속주 하드리아노폴리스 근교
'''원인'''
훈족 침공 이후, 로마와 고트족의 관계악화
'''교전세력'''
'''로마 제국'''
'''고트족'''
알란
'''지휘관'''
'''발렌스'''
트라야누스
세바스티아누스
플라비우스 리코메르
발레리아누스†
포텐티우스
바쿠리우스
빅토르
에퀴티우스
카시오
사투르니누스
<^|1>'''프리티게른'''
알라테우스
사프락스
'''병력'''
15,000 ~ 30,000명
12,000 ~ 20,000명
'''피해'''
10,000 ~ 20,000명[1]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로마군 궤멸, 황제 발렌스 사망.
'''영향'''
'''테오도시우스 1세'''의 등극, 로마와 이민족의 역학관계 급변.
1. 개요
2. 배경
2.1. 훈족의 침공으로 인한 고트족의 동요
2.2. 로마 제국의 자폭과 고트족 궐기
2.3. 발렌스 출정
3. 전개
3.1. 양군 전력
3.1.1. 로마군의 전력
3.1.1.1. 편제
3.1.1.2. 주요 지휘관
3.1.1.3. 규모
3.1.2. 고트족의 전력
3.2. 전투 경과
3.2.1. 전초전
3.2.2. 운명의 날
4. 결과
5. 평가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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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역사상 최소 16번이 있었는데[2], 그중 일단 여기서 다룰 전투는 가장 표제어로서 대표성이 있는[3] 378년 고트족 연합군이 로마 제국의 동방 황제 발렌스가 직접 이끄는 제국군을 격파하고 '''황제 발렌스까지 전사'''시킨 전투로써 지중해 전역을 지배하던 로마 제국 붕괴와 비잔티움 시대의 전조라고도 불리운다.
칸나이 전투, 토이토부르크 전투, 카르헤 전투에 비해 잘 부각되지 않은 편이나 전투 결과는 이 전투들과 비교해도 한 수 위로 로마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2. 배경



2.1. 훈족의 침공으로 인한 고트족의 동요


서기 376년경 훈족의 세력이 팽창하면서 도나우 강 이북에 거주하던 고트족은 훈족의 압력에 못 이겨 로마 제국에 보호를 요청하게 된다. 당시 고트족을 이끌던 알라테우스와 프리티게른 등의 주요 고트족 족장은 로마의 동방 공동황제 발렌스에게 제국이 고트족의 도나우 강 이남 거주를 허락해준다면, 고트족을 이끌고 평화롭게 농사를 지으면서 얌전히 살겠으며, 훈족이 쳐들어오거나 다른 적들이 침공한다면 제국의 외원군(포이데라티foederati)이 되어 열심히 싸우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이때 황제 발렌스는 고트족의 요청을 쾌히 승낙했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고트족이 로마 제국에 주었던 군사적 인상은 상당히 강력한 것이었다. 황제 데키우스가 고트족과 싸우다 전사한 적도 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자신의 조상이라고 칭했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는 고트족을 괴멸시켰다는 이유로 짧은 통치기간에도 불구하고 군인 황제 시기의 손꼽히는 명군으로 알려져 있었다. 또한 이미 당시 로마군에는 상당수의 고트족 병사들이 가담하고 있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절에는 고트족 병사들의 활약으로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에게 승리를 거둔 적도 있었다.
둘째.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대립으로 로마 제국은 더 많은 인적 자원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발렌스는 강력한 군주였던 서방의 형 발렌티니아누스 1세보다는 기량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고 있었으나, 그래도 무난한 지도자였다. 다만 페르시아와의 대립이 이어지면서 군사적 긴장 상태가 고조되고 있었기에, 당시까지 제국 북방 전선의 제1 경계대상이던 고트족이 제국에 종속된다면 동방 전선에 힘을 집중할 수 있을 터였다.
셋째. 발렌스 황제 자신의 개인적인 초조감도 한몫 했다. 가뜩이나 형 발렌티니아누스 1세보다 떨어지는 인물이라는 평을 신경쓰던 그로서는, 형이 죽은 뒤 그 뒤를 이은 조카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영명한 인물이라는 칭송을 받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라티아누스는 로마 제국 전체를 다스렸던 콘스탄티우스 2세의 사위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 또한 동서 로마제국 전체에 주권을 주장할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발렌스로서는 어떻게든 서방에 대해 동방의 황제로서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실적이 필요한 시기였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제국의 가장 큰 적들 중 하나인 고트족을 고스란히 포섭할 수 있다는 건 업적의 필요성을 느끼던 발렌스에게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매력적인 떡밥이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발렌스 황제는 고트족의 도나우 강 도하를 허락했고, 모이시아와 트라키아 등 고트족이 정착할 것으로 예정된 속주의 관리들에게 고트족의 지원을 명했다. 고트족도 별다른 문제 없이 도나우 강을 건너 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2.2. 로마 제국의 자폭과 고트족 궐기


황제 발렌스가 고트족에 대한 대민지원을 맡겼던 속주의 관리들은 극심한 부정부패로 유명한 탐관오리들이었다. 모이시아와 트라키아의 총독이던 루피키누스와 막시무스는 새로 이주해온 고트족을 지원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대로 착취하고 괴롭힐 수 있는 호구로 보아 고트족을 지원하기 위해 발렌스가 보낸 물자와 돈을 착복하고, 고트족의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노예로 팔아치우며, 반항하는 고트족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짓을 저지르고 만다. 결과적으로는 로마 황제군도 갈아버렸던 전력을 가진 고트족에게 삥뜯기를 시전할 정도로 지방관의 탐욕이 심하고, 제 몸 사리는 재주도 없고, 그런 인간을 기용할 정도로 인사체계도 망가지는 등 행정체계의 문란이 보인다. 비슷한 시대와 주제를 다루었던 여러 다큐멘터리의 장면을 적절하게 자막을 달아 합성한 유튜브 채널 'edhaje'[4]Fall of Rome 영상을 보면 0분 50초에서 1분 30초까지의 부분에 로마 지방 관료들이 아이들을 강제로 끌어가 나무창살이 있는 수레에 태우는 등, 고트족을 착취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격노한 고트족의 족장들이 회합을 가지고 제국에 항의하려 했으나, 루피키누스와 막시무스는 연회를 빙자하여 이들을 몰살시키려는[5] 졸렬한 음모나 꾸미다 실패(....), 가장 강력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프리티게른은 제국 관리들의 음모로 죽을 뻔한 뒤 휘하 고트족과 동료 족장들을 설득하여 궐기하게 된다. 이후 루피키누스가 이끄는 약 1만 규모의 제국군을 마르키아노폴리스 전투에서 프리티게른이 5천 명 남짓의 병력으로 격파하면서, 고트족과 로마 제국의 전쟁은 그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
이때 고트족 반란의 규모를 최대 100만 명까지 보는 견해도 있는데, 물론 비전투인원을 모두 포함했거나 고대 역사가들 특유의 과장이 섞인 표현이겠지만 규모가 어느 정도였건 간에 당시 로마 제국으로서는 이는 거대한 자폭이 맞았다. 사산조 페르시아에 신경쓰느라 황제 발렌스와 그가 이끄는 정예부대부터 동방 전선에 상주하고 있었고, 고트족을 비롯한 북방민족 출신들이 계속 늘어나던 당시 제국군으로서는 고트족 반란 진압에 열의를 보일래야 보일 수도 없었다. 약탈과 착취에나 능했지 군사적 수완은 쥐뿔도 없었던 속주 총독들도 한몫했고.

2.3. 발렌스 출정


AD 378년 동방 정제 발렌스가 드디어 페르시아와의 평화조약을 맺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회군하였다. 발렌스가 회군하기 전에 이탈리아의 세바스티아누스가 각 군단으로부터 300명씩 차출하여 조직한 별동대를 이끌고 트라키아 속주 남부의 로도페를 약탈하고 돌아가던 고트족을 괴멸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발렌스는 세바스티아누스의 승전보에 고트족을 과소평가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동방군만으로 고트족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그라티아누스가 알라마니 족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를 시기하여 자신도 단독으로 고트족을 격퇴하고자 하는 공명심에 들뜨게 된다. 발렌스는 그 해 8월 6일 고트족의 군대가 하드리아노폴리스(현재의 에디르네)로부터 20km 서쪽에서 진군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후 하드리아노폴리스에 입성하여 세바스티아누스 군대와 합류하였다. 그라티아누스가 보낸 원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발렌스는 정찰병으로부터 고트족의 병력이 1만명에 불과하다는 보고를 받고는 동방 로마군 단독으로 고트족을 상대하려는 마음을 더욱 굳혔다.

3. 전개



3.1. 양군 전력



3.1.1. 로마군의 전력



3.1.1.1. 편제

발렌스의 군대는 당시 동방 제국이 보유하고 있던 3개 야전군의 대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발렌스 황제를 따라 페르시아 전선에 종군하고 있던 황제 직속의 2개 근위군과, 고트족과의 교전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었던 트라키아 군이 그것이었다.
전체적인 규모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황제 직속군단으로 편성된 약 7개 군단의 보병 전력이 중핵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때의 7개 군단이라면 약 5천에서 7천 정도의 규모였다. 여기에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래로 맹위를 떨쳤던 근위기병대 스콜라이와 기마궁수 부대, 그리고 아라비아 지방에서 징병한 경기병대가 합류했다. 다만 근위기병대를 제외하고 나머지 기병대는 스커미쉬 전술에 특화된 부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대대 규모로 추정되는 바타비아(지금의 네덜란드) 출신 용병대와 조지아(그루지아) 일대의 중무장 기병대와 궁수 부대가 가세했다.

3.1.1.2. 주요 지휘관

  • 발렌스: 동방을 담당하는 로마제국의 공동황제
  • 트라야누스: 로마 제국 동방의 마기스테르 페티툼(보병장관).
  • 빅토르: 로마 제국 동방의 마기스테르 에퀴툼(기병장관).
  • 세바스티아누스: 율리아누스의 사산조 페르시아 원정에서도 중임을 맡았던 용장. 이탈리아 주둔군을 지휘하던 중 로마군에 가세했다. 제국군 수뇌부 중에서도 개전에 가장 적극적인 장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리코메르: 프랑크족 출신의 서방 제국군 장군. 그라티아누스의 근위대를 지휘했다. 개전 직전 스스로 인질역을 자임하여 휴전을 이끌어내려 시도했던만큼,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 에퀴티우스: 발렌스 황제의 친족으로 콘스탄티노플 궁정의 고관. 원래 그가 고트족과의 협상을 맡아야 했으나, 인질이 될 수도 있다는 위험을 의식하여 거부하는 바람에 리코메르가 대신하게 되었다.
  • 포텐티우스: 콘스탄티우스 2세의 맹장 우르시키누스 장군의 아들. 기병대를 지휘했다. 상당히 젊은 나이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능이 뛰어나 인망이 높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약 40명 정도의 대대장을 비롯한 동방 제국의 주요 간부들이 거의 다 참전했다.

3.1.1.3. 규모

역사가 워렌 트레드골드는 서기 395년 트라키아 야전군의 규모가 2만 5천여 명 정도였고, 테오도시우스 1세 휘하의 제1근위군과 제2근위군의 규모가 도합 4만 2천여 명에 달했던 것을 바탕으로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당시 로마군의 규모를 추산해보려고 시도했다.
다만 395년 당시 제국군은 테오도시우스 1세가 고트족과 동맹을 체결하고, 페르시아와의 관계를 안정시키는 등 온갖 노력을 다해 간신히 재건한 것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거듭된 전쟁으로 피해가 컸던 378년 당시 제국군과는 동일시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총병력 7만에 달하는 저 규모를 그대로 신용하더라도, 각지에 수비대를 배치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발렌스가 7만에 육박하는 대군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당시 동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때문에 현대 역사가들 대부분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 동원된 로마군은 보병 1만에 기병 5천, 약 1만 5천 정도를 하한선으로 최대 3만여 명 정도까지 추산하는 편이다. 병력 자체는 황제가 지휘한다고 하면 최대 10만에서 최소 5만 단위 병력을 연속적으로 동원하던 예전 제국군에 비하면 적은 편이라지만, 기병대의 비율이 보병대 대비 50%에 육박하는 등 상당히 높은 편이고, 또한 대부분의 병사들이 고참병이었다는 기록을 보면, 실제로든 어쨌든 간에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충분히 강력한 부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발렌티니아누스 1세 휘하에서 단련되었던 로마 서부군이 원군으로 가세할 예정이었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3.1.2. 고트족의 전력


고트족은 기병보다는 보병을 상대적으로 주력으로 운용했다. 다만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등의 기록을 보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고트족은 최대 5천 기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기병대를 운용했다고 하고 실제 전투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은 기병대가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트족 부대는 크게 2개 부대로 나뉜다고 여겨지는데, 프리티게른이 지휘하는 테르빙기(후에 동고트족으로 발전한다.) 부대와 알라테우스와 사프락스 등이 지휘하는 그레우퉁기(후에 서고트족으로 발전한다) 부대가 그것이다. 다만 숫적으로 프리티게른의 부대가 좀더 많았던 것으로 여겨지며, 알라테우스와 사프락스는 고트족 연합군 기병대 대부분과 소수의 보병대를 지원했다. 고트족 보병대 중에는 알라니족 부대도 소수 가담했다고 전한다.
암미아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개전 직전 로마군 정찰대는 고트족 부대의 규모를 약 1만 정도로 보고했다고 하는데, 이는 알라테우스와 사프락스 등의 원군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현대 역사가들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 참전한 고트족 부대의 총병력을 15,000명 정도로 추정한다. 다만 중간중간 원군이 가세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았을 수도 있고, 규모 자체는 로마군과 대등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암미아누스를 필두로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이 전투에서 고트족 기병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고, 심지어 이후 수천년 동안 이어지게 될 기병대 중심의 군사적 경향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실제로는 보병대의 비중이 결코 적지 않았다는 것이 이후 발견된 기록들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기병대의 활약이 두드러진 것은 기병대와 보병대의 공조가 거의 없었던 고트족 지휘체계의 결함 때문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적지 않다.

3.2. 전투 경과



3.2.1. 전초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군을 정비하던 발렌스 황제는 이탈리아 주둔군을 지휘하던 세바스티아누스 장군을 선발대로 파견하여 트라키아 주둔군을 재편성할 것을 지시했다. 세바스티아누스는 약 2천 규모의 선발된 부대를 지휘하여 고트족을 습격, 하드리아노폴리스로 접근하던 고트족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고, 프리티게른은 니코폴리스 근교로 물러나 전열을 재정비했다.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서부군의 정예부대를 판노니아 일대로 진출시켰으나, 이때 하필이면 라인강 일대에 있던 알레만니 족이 침공을 시도했고, 그라티아누스는 화급히 부대를 소환하여 아르겐타리아(지금의 프랑스 콜마르)근교에서 알레만니 족을 격파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서방 제국의 지원군이 동쪽으로 진군하는데 막대한 차질이 빚어졌고, 설상가상으로 발렌스 황제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세바스티아누스 장군이 승리를 거두고,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알레만니 족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듣고 발렌스 황제가 자기도 이제 공을 세워야겠다면서 교전을 서두른 것이다(......).
마르키아노폴리스로 이미 진군했던 발렌스는 8월경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세바스티아누스의 선발대와 합류한다. 그리고 8월 6일, 정찰을 위해 파견한 수색대가 고트족의 규모가 1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는 첩보를 보내온다. 고트족의 주둔지는 하드리아노폴리스 북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다.
이때 리코메르 장군은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전갈을 발렌스에게 전한다. 자신이 달려갈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동부군의 주요 장군들도 이에 동의했지만, 발렌스 황제는 1)적의 규모가 예상보다 적고, 2)서전에서 다른 놈들이 이겼으니 이제 나도 승수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에 빠져(...), 이들의 요청을 거부하고 개전을 결의한다. 고트족의 실제 규모도 파악하지 못했고, 장거리 행군과 계속된 교전으로 병사들이 지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발렌스는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이었다.
반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였는지는 몰라도, 프리티게른은 로마 측의 정세를 거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8월 8일, 프리티게른은 제국에 강화를 제안하고, 적당한 영토를 보장해준다면 당초 약정했던 협약을 준수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미 공훈에 미쳐있던(...) 발렌스는 이를 단박에 거부해버린다. 전투에 필요한 시간을 벌면서 제국군을 도발하기 위한 프리티게른의 속셈을 전혀 간파하지 못한 그는 결국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3.2.2. 운명의 날


발렌스는 AD 378년 8월 9일 아침 일찍 하드리아노폴리스 외곽에 주둔 중이던 2만여명의 보병대와 1만여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출병하였다. 발렌스도 고트족을 발견하고는 그들이 1만여명이 아님을 깨달았다. 고트족은 둥글게 배치된 짐마차 방벽 뒤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다니는 고트족의 습성상 비전투원들은 짐마차 방벽 뒤에 숨어 있게하고 전투를 담당할 사람들만 짐마차 방벽 밖에 둥글게 포진한 상태였다. 그러나 고트족의 가장 큰 문제는 동맹군으로 이루어진 기병대 대부분이 마초와 식량 보급을 위해 다른 곳으로 가있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로마군이 중앙에 보병대가 포진하고 양익에 기병을 배치하는 전통적인 진형을 취하는 사이에 프리티게른은 사절을 보내 정착할 토지와 필요한 곡식 및 가축을 공급해준다면 무기를 버리고 로마제국 방위를 위해 돕겠다는 의사를 보내왔다. 다른 곳으로 간 동맹군 기병대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끌고자 한 것이었다. 발렌스는 프리티게른이 보내는 사절들에게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이 올 것을 요구하면서 그들의 협상안을 거부했다.
이에 고트족은 로마측에서도 인질과 같은 높은 자격의 인물이 고트족에게 보낼 것을 요구하였고 로마측에서는 리코메레스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협상이 지루하게 진행되는 동안 로마군 병사들은 기온이 40도나 되는 8월의 더위로 인해 지쳐가기 시작했다. 사실 로마군 병사들은 새벽에 출발한 이후로 물도 식량도 지급받지 못한 상태로 수시간이나 방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고트족이 주변의 건초와 나무들에 불을 붙여 로마군 병사들은 열은 물론 연기와 사막의 먼지에 의해 고통에 시달렸다. 리코메레스가 로마군을 출발하여 고트족 진영으로 가는 동안 로마군의 우익이 고트족과 사소한 전투를 벌이다가 발렌스의 공격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교전상태에 들어갔다. 이에 놀란 양측 사령부는 협상을 결렬시켰고 리코메레스는 본진으로 귀환하였다.
전투는 처음에는 로마군의 공격을 고트족 보병이 방어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로마군은 전투단위와 명령체계가 분명한 반면 고트족은 비록 프리티게른이 총지휘를 맡고는 있었으나 사실상 부족단위별로 나뉘어져 개별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개시되자 로마군은 이미 교전상태에 들어갔던 우익 기병에 이어 좌익 기병도 교전상태에 들어갔고 좌익기병은 고트족을 밀어내고 짐마차 방벽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보병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제때에 지원하지 못해 좌익 기병은 밀려나고 만다. 로마는 제대로 진형을 갖추지 못하고 무질서하게 전투에 임하면서 서로 동조할 수 없었고 오히려 보병대의 측면을 보호해야할 기병들이 너무 앞서나가 보병의 측면을 노출시켰다. 이때 갑자기 로마군 배후에 5천여 기병이 출현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갑자기 돌변하였다. 고트족 동맹군 기병대가 프리티게른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돌아온 것이었다. 고트족 기병은 중장기병을 중심으로 경장기병과 궁기병이 섞여있는 상태로 제대로 진형을 갖추지도 못하고 전투에 참가하였다.
비록 고트족 기병은 진형을 정비하지 못했지만 로마군 우익의 기병의 배후를 덮치는 형태로 전투에 임했기에 손쉽게 로마 우익기병을 물리칠 수 있었다. 더구나 로마기병 대부분이 경무장이었기에 중장기병 중심의 고트기병을 감당하지 못하고 로마 좌익기병마저 퇴각하고 만다. 이제 로마군의 중장보병의 가장 취약점인 측면을 노출한 채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둥글게 진을 치고 있던 정면의 고트족 경장보병들이 반월형으로 진을 변형해 로마군을 압박하고 있었고 로마군 양익은 적의 중장기병에게 훤하게 노출된 상태였으며 퇴로는 적의 경장보병이 끊어버렸다. 최악의 상황에 처한 로마군은 마지막까지 저항하였지만 결국 대패하고 말았다. 로마군의 피해는 엄청났다. 황제 발렌스가 전사하였고 대대장 35명과 군단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로마 제국 국경 안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는 점에서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동시대 로마인들에게 일찍이 포에니 전쟁 시절에 겪은 칸나에 전투 이후 최악의 패배로 평가받게 된다.

4. 결과


로마군이 고트족에게 대패하고 황제 발렌스도 죽자 로마인들은 멘붕에 빠졌다. 사실 피해 규모로만 보면 과장 섞어 8만이 죽었다는 아라우시오 전투나 5만이 죽었다는 칸나이 전투 등을 비롯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이상가는 처참한 패전이 수두룩하지만, 동시대 로마인들에게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가 준 충격은 그런 패전들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일개 장군도 아니고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제국군이 기습도 아니고 정면으로 벌인 회전에서 패한 것도 문제지만, 상대가 제대로 된 군대나 게르만족의 연합체도 아니고 난민집단에 가까웠기에 이건 제국군이 사실상 난민집단도 제압 못한다는 걸 인증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동방 지역의 방위선도 이 전투 한방에 붕괴되었는데, 당시 로마군의 규모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으로 60만까지 불어난 병력을 경제난으로 더 유지하지 못해 줄어든 데다 그나마도 대다수가 야전에 부적합한 리미네타이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황제가 1~2만 명의 친위군을 이끌고 리미네타이가 방어전을 하는 동안 침입한 적을 요격하는 것이 4세기 로마군의 패턴이었는데, 그 친위군이 전멸했으니 이건 고트족에게 제국 동방을 마음대로 약탈하라는 허가를 내준 거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그 2만 명의 전멸은 그냥 전멸이 아니었다. 정예병력 2만 명이 전멸한 거고 경제적으로 망해가던 말기 제국에서 정예병 2만의 소멸은 군대의 주력이 소멸한 것과 진배없었다.[6]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발빠르게 테오도시우스 1세를 옹립하였고, 새 황제의 활약으로 혼란은 수습되었지만,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이후 제국군은 고트족을 군사적으로 제압한 적이 거의 없다(....). 결국 고트족 수만 명을 외원군으로 받아들이면서 테오도시우스가 고트 전쟁을 수습하기는 했지만, 376년경 고트족이 로마 제국에 거의 데꿀멍상태였던 것에 비교하면, 이후 고트족과 로마 제국의 역학관계는 제국의 열세가 두드러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등 후기 군인황제들과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래의 황제들의 활약으로 계속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한방에 무너지면서, 명분상으로는 고트족이 제국을 섬긴다고 하지만 사실상 대등한 교섭 관계가 되다시피 했으니까. 결국 설욕에 성공하긴 했지만 그게 가능했던 건 동고트 왕국을 멸망시킨 6세기 중반. 그러니까 1세기도 더 뒤의 일이다.
로마 제국 붕괴의 시작이라는 후대의 평가도 직접적인 피해보다는 이런 장기적인 문제에 기인한 바가 크다.

5. 평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로마 정규군이 난민에 가까웠던 고트족에게 패배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전쟁 사가에게 주목을 받았고 오랫동안 고트족 기병이 로마의 중장보병을 상대로 승리한 것으로 믿어졌다. 이후 중장보병이 전장을 지배하던 시대를 마감하고 중장기병이 새롭게 전장의 주역으로 떠오르며 중세유럽을 지배할 '기사'의 등장배경이 되었다고도 하였고 고트족 기병이 이렇게 뛰어난 위력을 보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등자 사용이 있었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이 최근에 대대적으로 제기되었다. 고고학적 연구에 따라 유럽의 등자 사용은 6세기 이후에나 이루어졌다는 점이 증명되면서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고트족 기병이 등자를 사용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게 되었다. 더욱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보병과 보병이 충돌하고 양익에서 적 기병을 제압한 기병이 보병대열의 취약점인 측면과 배후로 기동하여 포위섬멸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는 고대 그리스와 제2차 포에니 전쟁부터 등장한 고전적인 회전의 전형이었다. 엄청난 정치적 파급력과는 별개로 전술적으로 독창적이거나 새로이 주목할만한 요소는 딱히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고트족 기병이 로마군 기병을 압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예는 로마 전사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미 로마군은 3세기의 위기를 거치면서 갈레리우스와 아우렐리아누스를 통해 중장보병 위주의 편성을 포기하고 게르만족이나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같은 기병 위주의 적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한 기병예비대를 운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를 중장기병의 중장보병에 대한 우월성을 입증한 전투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1세 시절에 로마군 최고위로 "마기스테르 에퀴툼(magister equitum; 기병대장)"을 신설했을 정도로 기병 병과를 매우 중시하고 있었다. 사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군의 패배원인은 바로 로마군 내부에 있었다. 발렌스의 정찰부족에 의한 상대 병력 오판과 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성급히 전투를 벌인 공명심, 그리고 로마군의 무너진 군율에 의한 무질서한 공격이 더해지면서 발렌스의 로마군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6. 기타


고트족 기병대가 사용한 등자가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아이작 아시모프 같은 경우는 고트족이 훈족으로부터 도입한 등자를 사용하여 강력한 기병대를 운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는 현대 역사가들 대부분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7]
기병의 활약이 워낙 쩔어서 이후 보병이 안습한 신세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교전 자체가 등자를 이용한 기병의 활약이 어쩌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고트족이 기회를 잘 잡았고, 로마군은 가지고 있는 이점은 모두 죽이고 약점만 잔뜩 부풀려놓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순수하게 군사적으로 어떤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기도 어렵다.[8][9]

[1] 3분의 2가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 '최소'인 이유는 기록 안 된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 그리고 영어 위키백과에 가면 Siege of Adrianople(378)도 따로 있긴 한데, 그것은 설명할 이 전투의 연장선이라서 하나로 간주한다.[3] 영어 위키백과에도 Battle of Adrianople은 이거고 다른 것들은 Battle of Adrianople (disambiguation)에 나와있거나 연도를 직접 붙여야 나온다.[4] 가 보면 만 단위는 물론, 십만 단위의 조회수를 가진 영상이 정말 많아서 나름 대표성이 있다고 보아 링크한다.[5] 황제 발렌스와 로마 정부가 제대로 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실제로, 율리아누스와 요비아누스가 연이어 죽어 운이 좋게 황제가 된 처지치고는 발렌스는 역량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 회합에서 의견이 모여 황제와 정부에 제대로 전달될 경우, 주인-대리인 관계를 악용한 도덕적 해이가 들켜 총독 둘은 큰 책임을 지게 된다. 커리어가 꼬이거나, 삭탈관직당하거나, 여차하면 죽음을 받거나... [6] 후일 스틸리코가 라다가이수스의 게르만 난민연합체를 막겠다고 동원한 병력이 정예도 아니고 오합지졸 합쳐서 3만이었다.[7] 고대로 편년되는 등자가 발굴된 바도 없고, 훈족이 등자를 사용했는지도 알 수 없다. 애초에 아이작은 작가이자 생화학자지, 역사가가 아니다.[8] 기병의 활약이 크더라도 어느 병종이든 간에 지휘관의 역량에 따라 전황이 바뀌기도 한다. 까디시야 전투를 보더라도 사산 왕조와 이슬람교 세력들 간의 무장면을 보면 사산 왕조는 카타프락토이와 같은 중기병과 코끼리 병종도 이끈 반면에 이슬람 세력의 군대들은 기병은 경장갑이고 보병이 중무장한 측이었다. 무장면에 봐더라도 사산 왕조가 제일인 듯 하지만 이들도 로마의 후기와 같이 몰락하는 형태고 오히려 무장이 후달린 이슬람 세력권 사람들은 응집력이 강해 제 아무리 무너져 가는 사산 왕조라도 제국 내에서 모두 끌고 온 병사들 간의 전투에서 승리한다.[9] 즉, 기병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역사적으로 평가 받기 때문에 현대 역사학자들도 기병을 잘 사용한 지휘관을 뽑자면 꽤 손가락 안에 들기 힘들 정도로 적다. 그만큼 지휘관이 기병이든 뭐든 간에 여러 병종을 잘 조합해 싸우는 것이 승리의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