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시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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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50대 황제이자,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시조. 정식 이름은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테오도시우스 1세, 테오도시우스 대제로도 불린다. 이름부터 비범해서 테오도시우스는 그리스어로 하느님이(ο Θεος), 준(δώ) 사람, 즉 '''하느님이 내린 사람'''이라는 뜻이다.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하고 이교도를 탄압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대제라는 칭호를 얻은 것은 물론 기독교를 이용한 게 크게 작용하긴 하였으나 군사와 내정 모든 면에서 보통 이상의 뛰어난 통치력을 발휘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적극적으로 자기 의사를 관철한 유능한 장군 황제였음은 분명하다. 통일 로마 제국의 실질적 마지막 황제인 셈으로, 로마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사후 이런 황제를 다시 가지려면 마르키아누스[1] 가 즉위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고 바로 그것이 제국의 쇠락을 가져온 여러 결정타들 중 하나였다.
2. 생애
2.1. 내력과 초기
지금의 스페인에 소재한 코카(Coca) - 당시에는 카우카(Cauca)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통칭 테오도시우스 백작(Count Theodosius)으로 불리는 서로마 제국의 장군으로,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최측근 무장이었다.
368년, 브리타니아 일대가 색슨 족과 스콧 족 등의 북방민족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위기에 처하자[2]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장군과 함께 출전, 약관의 나이에 공을 세우고 374년에 모이시아의 장관(Dux)으로 부임하여 도나우 강 북쪽의 고트족과 반달족을 무마하는 등, 순조로운 커리어를 쌓았지만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장군이 시기하는 자들에 의해 반역죄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처형되면서 군에서 물러나 고향 스페인으로 돌아간다.
2.2. 난세에 즉위하다
그러나 378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발렌스가 고트족의 연합군에 대패하고 전사하면서 동로마 제국이 마비상태에 이르자, 서로마 제국을 지키는 데에도 힘이 부쳤던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테오도시우스를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추대하게 된다. 이는 테오도시우스가 모이시아 장관 시절 보여주었던 군사적 역량을 그라티아누스가 중시하였고, 또한 당시 로마 제국군 내에서 테오도시우스 일가가 상당한 명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거의 붕괴 직전의 상태까지 갔던 동로마 제국 야전군의 재편성에 기어코 성공했고 야만족들을 이이제이 전술로 서로 싸우게 만든 다음 상당한 수효를 포이데라티로 만들어 아군으로 부리는 것까지 해냈다. 또한 사산조와의 뜨거운 감자인 아르메니아 문제를 잘 해결하였고, 아르메니아에서 친로마파가 친사산조파에게 탄압받아 구원을 요청했을 때도 그대로 묵살하는 등의 뛰어난 판단력을 보여 동쪽 국경 문제도 해결하였다.
2.3. 외세와의 전쟁
379년에 황제로 즉위한 테오도시우스는 380년까지 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족과의 전쟁에서 착실히 전과를 거두며 381년에 고트족의 대왕 아타나리크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트라키아 속주에 고트족을 대거 이주시킨다. 이때부터 동로마 제국군에 고트족 출신의 장군들이 대거 기용되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후일 "로마 약탈"을 진두 지휘하게 되는 서고트 족의 대왕 알라리크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동쪽의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대립 등, 고트족에 집중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의 선택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이었다.
383년에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중왕 샤푸르 3세와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테오도시우스는 비로소 안정된 통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무렵 서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그라티아누스가 브리타니아의 군사령관이었던 마그누스 막시무스에게 살해당하면서 다시 내전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이때도 테오도시우스는 마그누스 막시무스와의 타협을 선택, 그에게 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의 영유를 인정하고, 대신 그라티아누스의 동생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다스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선에서 개입을 마무리한다.
하지만 이후 387년에 다시 한번 동고트 족을 크게 격파하면서 정세가 안정되고,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하면서 테오도시우스는 마침내 거병, 388년 사바 강 유역에서 막시무스를 격파하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추대한다. 다만,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끝내 무력한 황제로 삶을 마쳤기 때문에 이때부터 395년까지 7년간은 사실상 테오도시우스가 두 로마 제국을 함께 다스린거나 마찬가지다.
2.4. 테오도시우스 칙령
서기 391년, 이미 380년에 테오도시우스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사실상 제국의 국교로 삼았던 테오도시우스는 이를 결정짓게 되고, 이로부터 로마 제국은 명실상부한 기독교 제국으로 변모한다. 이교도의 탄압은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비기독교도의 공직 진출이 금지되고, 이단 종파의 탄압까지 나타나기 시작한 상황에서 이교도가 탄압받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조치에서 나온 이교도들의 불만이 다시 내전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서기 392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테오도시우스가 갈리아 방위를 맡겼던 아르보가스테스 장군에 의해 살해[3] 되자 테오도시우스는 즉각 개입을 천명, 아르보가스테스는 이에 맞서, 기독교인을 가장한 이교도이자 문법 및 수사학 교수였던 에우게니우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기독교 탄압을 천명한다. 이 대립구도는 394년 9월 6일,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테오도시우스의 동로마 제국군이 반란군을 최종적으로 궤멸시키면서 끝난다. 또한 이 반란진압에는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오의 어시스트도 한몫 했다. 암브로시오 항목 참조.
2.5. 내치와 군사
내치에서도 율리아누스 이래로 발렌스도 계승했던 감세 정책을 계속 밀어붙이는 한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가격통제 정책 등을 폐지하여 농민들의 지지를 얻는 등, 당시로서는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펼쳐 경제 상태를 크게 호전시켰다.
대체로 이런 황제들의 경우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별로일 때가 잦지만 테오도시우스는 그렇지가 않았다. 어디까지나 최고 지휘관은 그였고 대부분의 경우 승리로 이끌었던 당당한 장군 황제들 중 하나다. 물론 굳이 말하자면 내정 능력의 경우 디오클레티아누스나 콘스탄티누스 같은 조직력이나 창의력은 보이지 않으며 군사에 있어서도 콘스탄티누스 같은 군사 천재와 비교는 영 무리지만, 직접 내치와 군사 그리고 외교에서 고른 업적을 보인 황제가 과연 로마사에서 그렇게 흔했는지는 의문이다.
2.6. 안티오크 폭동(387년)
영문으론 Riot of the Statues.
안티오크의 대주교가 세 명의 주교로 나뉘어 치열하게 대립하자 테오도시우스가 결론을 내려 판결을 내렸는데, 셋을 따르는 신도중 삼분의 이 정도가 당연히 테오도시우스의 판단에 불만했고 그런 와중에 고트족과의 전쟁 및 평화비용으로 세금까지 늘어나자 불만이 더욱 거세져 버렸다.
따지고 보자면 고트족이 벌이는 유럽전쟁의 비용을 안티오크 및 아시아 지역이 물었으니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이렇게 터지기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 즉위 10주년 기념 축제에 자발적인 헌금을 빙자한 특별세금이 한 차례 더 부과되자 시민들이 해당 관아로 찾아가 탄원했다. 이들의 행동을 범죄적인 문제로 일관하는 관리들의 태도에 불만이 분노가 된 안티오크 시민들은 황제와 가족들의 동상을 산산조각 내고[4] 온 거리를 끌고 다녔다. 폭동은 순식간에 진압되었으나 이 일에 대한 보고서가 황제에게 발송되자 시민은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
테오도시우스는 안티오크의 지위를 격하시키고 따라서 토지, 특권, 세입에 대한 권리를 모두 박탈하고, 목욕탕과 원형경기장, 극장을 폐쇄 관련자들을 잡아들여 고문과 함께 심문했으며 죄인들의 재산을 모두 경매에 붙이고 주교였던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를 처형할 예정이었으나 진행 도중에 테오도시우스가 대사면령을 내린다.
2.7. 테살로니카 폭동과 학살(390년)
이에 비하여 테살로니카에선 정 반대의 행동을 보여줬는데, 일단 원인이 된 것은 보테리크라는 장군이었다.
당시 보테리크는 아름다운 미소년 노예를 가지고 있었는데 콜로세움에서 전차를 모는 전사 중 하나가 이 미소년 노예를 건드렸다 한다. 따라서 보테리크는 이 전사를 투옥하고 심문 했는데 이 전사가 현대의 스포츠 스타였던지라 그대로 폭동이 일어난다. 정확히는 여러 차례 불만이 쌓여왔다가 이 일이 빌미가 되어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탈리아 전쟁으로 병력이 빠져있던 상황인지라 보테리크와 부관들은 민중에게 살해당하고 토막나 온 거리에 끌려 다닌다.
테오도시우스는 여기에 대한 판결을 내렸는데 그 내용이 지금까지 보였던 행보와는 전혀 달랐다.[5] 군중을 기념 공연을 해주겠다 하여 경기장에 모이게 하고 그곳에서 학살을 펼쳤다.[6] 두 아들 중 하나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 한 상인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데 병사는 두 아이를 모두 죽였고, 그 이유에 대해 탄원하자 병사의 답변은 숫자를 맞추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테살로니키 학살의 참상을 듣고 대노한 메디올라눔 주교인 암브로시우스가 메디올라눔을 방문하고 그곳의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러가던 황제를 내쫓아버렸다. 결국 테오도시우스 1세는 남루한 옷을 입은 채로 무릎을 꿇고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을 후대의 카노사의 굴욕에 비견하기에는 어렵다. 주교는 황제의 권력을 넘볼 수 없었고 암브로시우스는 테오도시우스와 가까운 사이였다. 역시학자들은 정말로 교회의 권위가 높아서 일어난 굴욕이라기 보단, 학살로 인기가 추락한 테오도시우스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황제의 신앙심과 겸손한 면모를 부각시킨 행동이였을 거라고 생각한다.[7]
2.8. 사망
하지만 그 직후인 395년 1월, 테오도시우스는 지병인 수종으로 50세도 안 돼서 사망, 그의 뒤는 그의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승계한다. 둘 다 범용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들이어서, 이로부터 제국은 권신들의 시대로 이행한다. 그중에서도 유조를 들으며 '''탁고'''받았다는 점과[8] , 위에서 말했듯이 결혼으로 맺어진 '''혈연''', 실병력을 부릴 수 있는 '''사령관'''[9] 이라는 점들이 시너지를 이룬 '''플라비우스 스틸리코'''가 선두주자로 앞서 나갔고, 향후 한동안 로마 정국은, '''특히 서로마에서는''' 그의 독무대였다.
2.9. 제국 최종 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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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후 로마 제국은 그의 두 아들이 각각 서방황제, 동방황제로 분할 통치제를 계속해서 이어나갔으며 나중에 서방황제가 통치하는 서방지역이 오도아케르가 이끄는 게르만족에게 점령당함으로서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기점을 제국의 최종 분할로 명하고 있다.
3. 평가
군사와 내치 그리고 외교에서 두루두루 업적을 보였다. 흔히 "3대제"로 불리는 콘스탄티누스 1세, 테오도시우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중에서 가장 덜 알려진 인물이고 솔직히 업적도 앞과 뒤의 황제들에 비하면 좀 못하지만, 테오도시우스는 가족과 신하들을 죽이지도 않았고 재정 붕괴나 재정 악화도 초래한 적이 없는 데다가 그 두 황제보다 훨씬 더한 악조건에서 치세를 시작했고, 또한 성급히 화를 터뜨리는 버릇은 있었어도 잘못을 지적하고 직언하는 신하들에게 관대했다. 역사 애호가들에게는 3대제들 중 상대적으로 좀 재미없고 기대에 못 미치는 황제긴 하지만, 적어도 서민들과 주변 인물들에게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나은 황제였다.
물론 그가 서로마 제국 방면 야전군의 재편성과 재건은 끝내 해내지 못한 점, 그리고 그의 두 아들이 뛰어난 군주이기는커녕 가진 권력도 제대로 행사할 능력이 없는 암군들이었다는 점[10] 은 큰 그늘이지만 하필 그런 작업들을 마무리할 때 병이 들어 죽은 것까지 그의 잘못으로 돌리는 건 너무 무리한 해석이다. 그의 후계 정책의 오류가 로마 제국을 영원히 분할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도 잘못된 것으로, 보다시피 서로마의 반란을 진압한 직후에 사망해버렸다.
4. 기타
신탁으로 유명한 델포이 신전을 폐쇄한 인물이기도 하다. 델포이 신전의 예언자는 이때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선언했고, 델포이 신전이 다시 열리는 일은 없었다. 참고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것은 폐쇄 5년 후였으며, 알라리크에 의해 로마 약탈이 일어난 것이 15년 후였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웠다는 얘기도 있는데 사실 이슬람의 칼리프 우마르도 유사한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누가 더 책임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테오도시우스가 파괴했다는 주장에선 이미 몰락할 때로 몰락하여 이집트 정벌군 사령관 아므르 이븐 알 아스와 그의 장교들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대해 아는 바 없었으며 심지에 그에 관련된 소문을 들은 적 조차 없었고 따라서 광신적인 기독교 신자들이 4세기 말에 파괴했을거라고 본다. 우마르가 그랬다는 주장으로는 비록 기독교 시대에 쇠퇴하긴 했지만 이 도서관을 결국 불태워서 상당한 그리스 고전을 소실시킨 건, 642년에 알렉산드리아를 함락한 칼리프 우마르였으며 초기 선출 칼리프 시대의 칼리프들은 전원 호학에 개방적인 마인드를 가진 뛰어난 군주였지만, 우마르만은 예외였다고 주장한다.
사실 도서관은 한번에 드라마틱하게 파괴되었다기보단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파괴되었다고 보는 게 요즘 학계의 의견이다. 일단 도서관의 위치가 호수(마레오티스 호)하고 바다(지중해) 사이에 있어서 누군가 끊임없이 관리해주지 않으면 습기 때문에 문서가 쉽게 상하는 곳인데다, 당시 가지고 있던 문서들은 대부분 화재나 습기에 취약한 파피루스 문서들이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는 동방의 최대 항구이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많은 정복자들의 1순위 공격목표가 되었던 곳이다.
확실한 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겪었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의 알렉산드리아 공성전 때 화재에 불탄 적이 있고, 기원후 3세기 후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치세에 반란군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이후 서기 391년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테오필루스에 의해 폐쇄당하고 장서는 세라페움이라는 별관으로 옮겨졌으며 그 다음은 종교적인 이유로 테오필루스와 키릴루스 형제가 주교로 있던 385~420년의 기간 동안 부도서관이던 세라페움을 불경하다는 이유로 완전히 파괴했다.(유명한 여성 수학자인 히파티아도 이때 잔인하게 살해된다.) 기원후 642년 이슬람의 알렉산드리아 정복 이후 여러 이슬람 사료에서 도서관의 파괴가 기록된다. 이슬람의 장군 암르 이븐 알 아스가 642년, 지하드를 진행하면서 도서관을 끝장내버린 건 사실이지만, 그 이전부터 도서관은 이미 파괴되고 있었다고 5세기의 신학자 오로시우스는 적고 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 중 의외로 체육 교과서에 등장해 이름을 기억시키기도 하는데, 바로 그의 기독교의 국교화로 그리스 성소에서 열리던 올림픽이 이교도의 축제로 간주돼 폐지되었다는 기술로 등장한다.
5. 둘러보기
[1] 450년부터 457년까지 재위한 동로마 황제. 종전까지 훈족에게 바치던 연공을 중단하고, 군사력 증강에 힘썼다. 이 때문에 아틸라는 멀리 서쪽에 위치한 서로마 제국을 건드려 볼까 생각하게 됐고, 그 후 서로마는 망했어요.[2]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대음모(Great Conspiracy)라고 부른다. 소설 "눈 속의 독수리"에서 이 시기를 묘사하고 있다.[3] 자살이라는 말도 있지만 정황상 아르보가스테스가 권력 의지가 강한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죽인 게 거의 확실하다. 자살이었어도 강요된 자살이었을 것이다.[4] 이건 실제 상해를 입힌 것에 준하는 범죄로 취급받았다고 한다.[5] 사실 많은 역사적 인물이 그러하듯이 정확히는 선과악이 혼합된 인물일 것이다. 애초에 아리우스파를 숙청하기 위해 꽤나 잔혹한 음모를 많이 꾸며야 했다.[6] 대략 7천에서 1만 5천이 죽었다고 한다.[7] 한마디로 정치쇼였다.[8] 심마쿠스, 스틸리코, 암브로시오이다.[9] 앞의 심마쿠스는 순수 문민 귀족, 암브로시오는 주교라서, 영향력이 한정될 수밖에 없다.[10] 둘 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데다 여건이 안 좋았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들들은 그들과 비슷한 나이에 치세를 시작했는데도 군사와 내정에서 볼 만한 역량을 과시하였다. 변명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