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쿠지
1. 소개
미국의 전 NBA 농구 선수. 보스턴 셀틱스에서만 13시즌을 활약하며 과거 60년대 보스턴 왕조를 건립한 선수들 중 한 명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쿠지의 가장 기념비적인 면은 '''사상 최초의 위대한 포인트가드'''였다는 점이다. NBA MVP는 1955-56년에 생겨났는데, 초대 MVP는 빅맨인 밥 페팃이었으며, 그 전에 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는 센터 조지 마이칸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농구는 10피트 위에 있는 골대에 득점하는 그 특성상 장신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스포츠였다. 그런데 185cm란, (농구선수로서) 단신이었던 포인트가드 쿠지가 경기를 지배하는 것은 당시로선 상상도 못하던 것이었다.[2] 한 마디로 NBA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선수.[3]
2. 선수 경력
2.1. 홀리 크로스 대학교
밥 쿠지는 가난한 프랑스 이민자 가정의 유일한 아들로 태어나 농구를 연습했다. 그렇게 농구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결국 홀리 크로스 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밥 쿠지는 당시에 슛을 두 손으로 던지는 시대에서 한 손으로 던지고 다양한 볼 핸들링을 보여주는 선수였다.
이런 모습을 별종으로 봤던 대학시절 스승인 도기 줄리안 감독은 이를 싫어했고 출전 시간에 제한을 두었다. 밥 쿠지는 대학을 그만두는 것도 생각을 했지만 팬들은 그걸 원하지 않았고 팬들의 부응에 힘입어 출전 기회를 다시 보장받았다. 그럼으로써 1948, 1949, 1950년 3시즌 동안 차례로 올 아메리칸 서드 팀, 세컨드 팀, 퍼스트 팀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2.2. 보스턴 셀틱스
밥 쿠지는 1950년 NBA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3순위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트라이시티 블랙호크스에 지명이 되었으나 결국엔 보스턴 셀틱스로 가게 된다.
49-50시즌 22승 46패의 졸전을 펼쳤던 보스턴은 밥 쿠지가 온 50-51시즌 39승 30패의 5할 이상의 승률을 기록하게 되었다.
밥 쿠지의 대표적인 경기 중 하나를 말하라고 하면 52-53시즌 NBA 플레이오프 1라운드 2차전 시라큐스 네셔널스와의 경기인데, 이 경기는 4번의 연장까지 가게 된다. 밥 쿠지는 다리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장에서만 25득점을 하면서 총 50득점을 기록하였고 32번의 자유투 중 30개를 성공하는 진기록을 보여주며 팀을 111-105 승리로 이끌며 2-0 승리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는데 기여를 하였다.[4] 하지만 다음 라운드에서 3-1로 뉴욕 닉스에게 지며 플레이오프에서 떨어지게 된다.
1956년 보스턴은 역대 최고의 센터인 빌 러셀을 영입하면서 보스턴 왕조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1957년 밥 페팃의 세인트루이스를 누르며 팀 최초로 NBA 챔피언을 거머지게 되었고, 1959~66년 동안 '''전무후무의 8번 연속 NBA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게 되며 보스턴 왕조가 탄생하게 된다.'''
1963년 밥 쿠지는 은퇴를 결심하게 되고 그의 마지막 시즌 경기는 '''The Boston Tear Party''' 라고 불린다. 마지막 경기에서 밥 쿠지는 평소처럼 기량을 발휘했지만 안타깝게도 중간에 부상을 당하였고 중도 퇴장을 하였다. 하지만 곧 부상을 딛고 경기장에 다시 들어왔는데, 이러한 모습은 동료들에게 의욕을 불어넣었고 레이커스를 상대로 112-109로 승리하면서 우승을 하였고 밥 쿠지에게 최고의 은퇴 선물을 선사했다. 은퇴식에서 밥 쿠지는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묵묵부답했으나 조 딜런이라는 셀틱스 광팬이 'We love ya, Cooz'라고 외쳤고 연이어 터진 팬들의 엄청난 열광으로 침묵이 깨어졌다고 한다.
밥 쿠지는 보스턴에서만 13시즌 활약하며 16955득점, 6945 어시스트, 자유투 성공률 0.803을 기록했다.[5] 이는 셀틱스 역사상 최다 어시스트 기록이다. 그 뿐만 아니라 1953년 부터 8년 연속 어시스트왕을 차지하였고, 13번의 올스타 팀 선정, 그 중 2번을 올스타 MVP를 거머쥐었다. '''그러면서 밥 쿠지의 14번은 보스턴 셀틱스의 영구 결번이 되었다.'''
2.3. 은퇴 후
1963년 은퇴한 밥 쿠지는 6시즌 동안 보스턴 칼리지 감독으로 지냈다. 그러다 1969년 신시내티 로열스로 자리를 옮겼고 당시 부진했던 팀의 성적 향상과 관중 동원을 위해 1969-70시즌 41세의 나이로 NBA에 복귀하며 7경기를 출전했다. 이 때문에 시즌 티켓이 77%나 더 팔렸다고 하며, 1970년에는 네이트 아치볼드를 드래프트에서 뽑기도 했다. 밥 쿠지는 로얄스에서[6] 5시즌 동안 141승 209패의 비교적 실망스러운 성적을 기록한 뒤 1973년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밥 쿠지는 1974년부터 보스턴 셀틱스의 경기를 중계하며 친정팀과의 인연을 다시 이어갔다. '농구의 원리와 기술'이라는 책을 집필했던 밥 쿠지는 '아메리칸 사커 리그'의 커미셔너로 활동하기도 했다. 밥 쿠지는 유럽과 아시아를 순회하며 농구 클리닉을 개최, 농구 저변확대에 이바지했다.
3. 플레이 스타일
당시 밥 쿠지가 등장하기 전만해도 포인트 가드는 그냥 공을 드리블 하며 상대 코트까지 넘어간 뒤 엔트리 패스로 같은 팀 빅맨에게 패스하는 것으로만 역할이 제한되있었다.'''"사람들은 네이스미스 박사가 농구를 발명했다는 것보다 쿠지가 농구를 예술의 경지에 오르게 했다는 사실에 더 공감한다."'''
하지만 밥 쿠지는 당시 선수들이 하지도 않던 노 룩 패스, 비하인드 패스, A 패스 등으로 상대를 속이고 같은 편 선수에게 빠르게 패스하거나 하프라인에서 바로 패스하는 플레이메이커 같은 역할이었다. 당시 초창기에는 24초 룰이 없어 공격 진행이 느슨 했던 그 당시의 NBA에 이런 빠른 속공에 어울리는 밥 쿠지의 플레이는 엄청난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고 이는 54-55시즌 24초 룰이 생기면서 더 두드러지게 된다. 그 덕분에 당시 보스턴은 최고의 속공 팀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패스 뿐만이 아니라 드리블도 화려한 선수였는데 과거 13살 때 나무에 올라타다가 오른팔이 부러져 왼팔로도 드리블하는 연습을 터득했고 그러면서 비하인드 백 드리블 등 당시에는 보기 힘든 여러 드리블 또한 선보였다고 한다.[7]
당시 보스턴 셀틱스의 감독이었던 레드 아워백은 속공 부분만 따지면 매직 존슨보다도 낫다고 언급한적이 있다. 그런 선수가 1980년대가 아니라 50~60년대에 활약하고 그 선수가 패스하는 공을 받는 같은 팀 선수가 빌 러셀 같은 역대 최고의 선수들이니 보스턴 왕조는 어쩌면 만들어지는 게 당연한 셈.
[1] 코트의 마술사[2] 쿠지는 데뷔 7년차이던 57시즌에 빌 러셀이 합류하고 나서야 우승할 수 있었지만 이때 팀의 에이스이자 리그 MVP는 바로 쿠지였다.[3] 여담이지만 60년대 보스턴 왕조가 위대한 것이 이런 식으로 농구의 패러다임 자체를 변화시킨 선수들과 시도가 많았다는 것이다. 큰 선수에게 공을 줘서 경기를 풀어가는 단조로운 방식이 대부분이던 당시에 기량이 뛰어난 단신 선수가 온갖 화려한 기술을 선보이며 경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을 선보인 것, 할렘 글로브트로터스같은 "묘기농구단"에만 보이던 정신없이 빠른 속공농구를 도입한 것, 당시는 통계조차 수집하지 않던 "블럭슛"을 상대팀에 대한 정신적 압박 등 수비 전술적으로 사용한 것, 이를 속공에 연계한 것, 후보지만 주전 못지 않게 중요한 "식스맨"이라는 존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도 다름아닌 보스턴 셀틱스였다. 상징적인 의미긴 하지만 NBA 역사상 최초의 흑인 선수인 척 쿠퍼를 지명한 것도 보스턴이었다.[4] 이 경기는 윌트 체임벌린의 100득점 경기와 맞먹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중요도가 떨어지는 정규시즌에서 초고득점을 하는 것보다 플레이오프에서 강팀들을 상대로 고득점하는게 훨씬 어렵고, 더 높이 평가를 받는다. 윌트의 100점 경기는 당시 꼴찌급이던 닉스를, 승부가 갈린 상황에서 계속 쳐바르며 세운 기록이라 그리 어려운 업적은 아니었다. 다만 역사상 유일무이한 세자리수 득점이란 상징성 때문에 위대한 기록으로 꼽히는 것이다. 반대로 마이클 조던의 플레이오프 역대 최다인 63점 기록은 수치상으론 그리 대단해보이지 않지만, 역사상 가장 강한 팀 중 하나인 셀틱스를 상대로 수비가 빡세지는 플레이오프에서 낸 기록이란 점 때문에 역대 최고의 활약상을 꼽을 때 꼭 들어간다.[5] 추후 신시내티 로열스에서 5득점과 10어시를 더 추가한다.[6] 1972-73시즌에 캔자스시티 킹스로 구단명이 달라진다. 지금의 새크라멘토 킹스.[7] 밥 데이비스가 이 기술의 선구자라면, 밥 쿠지는 이 기술을 상용화한 선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