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러셀

 


'''1958년 NBA 정규시즌 MVP'''
밥 쿠지

'''빌 러셀'''

밥 페팃
'''1961년 NBA 정규시즌 MVP'''
윌트 체임벌린

'''빌 러셀'''

'''빌 러셀'''
'''1962년 NBA 정규시즌 MVP'''
'''빌 러셀'''

'''빌 러셀'''

'''빌 러셀'''
'''1963년 NBA 정규시즌 MVP'''
'''빌 러셀'''

'''빌 러셀'''

오스카 로버트슨
'''1965년 NBA 정규시즌 MVP'''
오스카 로버트슨

'''빌 러셀'''

윌트 체임벌린
'''1963년 NBA 올스타 MVP'''
밥 페팃

'''빌 러셀'''

오스카 로버트슨
[image]
'''보스턴 셀틱스 영구결번'''
'''No. 6'''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image]
'''빌 러셀'''
헌액 연도
1975년
'''NBA 파이널 우승 반지'''
'''1957'''
'''1959'''
'''1960'''
'''1961'''
'''1962'''
'''1963'''
'''1964'''
'''1965'''
'''1966'''
'''1968'''
'''1969'''

'''1968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image]
칼 야스트렘스키

'''빌 러셀'''

톰 시버
[image]
'''보스턴 셀틱스 No.6'''
'''윌리엄 펠튼 러셀
William Felton Russell'''
'''생년월일'''
1934년 2월 12일 (90세)
'''국적'''
미국
'''출신지'''
루이지애나 주 먼로
'''신장'''
208cm[1]
'''체중'''
98kg
'''포지션'''
센터
'''드래프트'''
'''1956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
세인트루이스 호크스 지명'''
'''소속팀'''
'''보스턴 셀틱스 (1956~1969)'''
'''지도자 경력'''
보스턴 셀틱스 (1966~1969, 감독)
시애틀 슈퍼소닉스 (1973~1977, 감독)
새크라멘토 킹스 (1987~1988, 감독)
'''수상내역'''
'''NBA 챔피언 11회 (1957, 1959–1966, 1968, 1969)
정규시즌 MVP 5회 (1958, 1961–1963, 1965)'''
NBA 올스타 12회 (1958–1969)
NBA 올스타전 MVP (1963)
'''올-NBA 퍼스트 팀 3회[2] (1959, 1963, 1965)'''
올-NBA 세컨드 팀 8회 (1958, 1960–1962, 1964, 1966–1968)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1회 (1969)'''[3]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75)'''
NCAA 챔피언 2회 (1955, 1956)
NCAA Tournament Most Outstanding Player (1955)
'''등번호'''
6번
1. 개요
2. NBA Career Statistics
3. 플레이 스타일
4. 체임벌린과의 라이벌리
5. 역대 최고의 수비수
6. 과대평가론? 그리고 반박
7. 여담

[clearfix]

1. 개요


'''THE LORD OF THE RINGS '''
전직 NBA 농구 선수이자 감독. 명문 구단 보스턴 셀틱스에 '''11번의 우승과 NBA 8연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과 어마어마한 영광을 안겨준 전설 중의 전설.[4] 우승이 최고의 지상과제인 프로스포츠, 그 중에서도 선수 평가에서 우승이 차지하는 위상이 어마어마한 '''NBA의 역사를 통틀어 그보다 더 많은 트로피와 반지를 얻은 선수는 아무도 없다.''' 심지어 '''마이클 조던[5] 마저도.'''
역대 NBA 선수 서열 논쟁에서 마이클 조던 다음에 위치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센터들 중 카림 압둘 자바, 윌트 체임벌린와 함께 필두로 불린다.[6] '센터 놀음'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센터의 비중이 높은 스포츠가 농구이며, 따라서 센터 포지션은 NBA의 모든 포지션을 통틀어서도 가장 두터운 레전드들의 숫자를 자랑한다. 하지만 빌 러셀은 그 모든 위대한 센터들 중에서도 '''역대 최고의 센터''' 중 한명으로 손꼽히며 압둘자바, 체임벌린과 함께 그 지분을 삼분하고 있다. 비록 개인 득점력은 그 둘보다 확연히 떨어지지만, 압도적인 수비력과 팀플레이 능력을 기반으로 '''11개'''라는 독보적인 개수의 우승반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7]
그야말로 위대한 승리자라고 부를 수 있는 전설 중의 전설.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명이다.

2. NBA Career Statistics


[ 정규시즌/펼치기 · 접기 ]
시즌
경기수
시간
필드골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락
턴오버
트루슈팅
PER
56-57
48
35.3
.427
-
.492
14.7
19.6
1.8
-
-
-
.450
20.9
57-58
69
38.3
.442
-
.519
16.6
22.7
2.9
-
-
-
.465
22.8
58-59
70
42.6
.457
-
.598
16.7
23.0
3.2
-
-
-
.493
20.7
59-60
74
42.5
.467
-
.612
18.2
24.0
3.7
-
-
-
.496
20.1
60-61
78
44.3
.426
-
.550
16.9
23.9
3.4
-
-
-
.454
18.1
61-62
76
45.2
.457
-
.595
18.9
23.6
4.5
-
-
-
.489
19.4
62-63
78
44.9
.432
-
.555
16.8
23.6
4.5
-
-
-
.464
18.2
63-64
78
44.6
.433
-
.550
15.0
24.7
4.7
-
-
-
.461
19.3
64-65
78
44.4
.438
-
.573
14.1
24.1
5.3
-
-
-
.472
19.5
65-66
78
43.4
.415
-
.551
12.9
22.8
4.8
-
-
-
.448
17.3
66-67
81
40.7
.454
-
.610
13.3
21.0
5.8
-
-
-
.500
18.6
67-68
78
37.9
.425
-
.537
12.5
18.6
4.6
-
-
-
.461
17.0
68-69
77
42.7
.433
-
.526
9.9
19.3
4.9
-
-
-
.467
15.2

[ 플레이오프/펼치기 · 접기 ]
시즌
경기수
시간
필드골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락
턴오버
트루슈팅
PER
56-57
10
40.9
.365
-
.508
13.9
24.4
3.2
-
-
-
.398
18.9
57-58
9
39.4
.361
-
.606
15.1
24.6
2.7
-
-
-
.420
21.6
58-59
11
45.1
.409
-
.612
15.5
27.7
3.6
-
-
-
.454
18.8
59-60
13
44.0
.456
-
.707
18.5
25.8
2.9
-
-
-
.504
22.1
60-61
10
46.2
.427
-
.523
19.1
29.9
4.8
-
-
-
.457
22.0
61-62
14
48.0
.458
-
.726
22.4
26.4
5.0
-
-
-
.519
22.8
62-63
13
47.5
.453
-
.661
20.3
25.1
5.1
-
-
-
.508
20.5
63-64
10
45.1
.356
-
.552
13.1
27.2
4.4
-
-
-
.406
18.9
64-65
12
46.8
.527
-
.526
16.5
25.2
6.3
-
-
-
.540
20.9
65-66
17
47.9
.475
-
.618
19.1
25.2
5.0
-
-
-
.514
20.2
66-67
9
43.3
.360
-
.635
10.6
22.0
5.6
-
-
-
.436
15.3
67-68
19
45.7
.409
-
.585
14.4
22.8
5.2
-
-
-
.458
16.7
68-69
18
46.1
.433
-
.506
10.8
20.5
5.4
-
-
-
.448
15.3


3. 플레이 스타일


농구에 있어서 센터란 무엇인가라는 걸 전략적으로 정의한 사람중의 한명으로, '''현대 농구에서 센터의 팀 수비에 대한 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쓴 선수라고 볼 수 있다.'''
신체적인 부분을 봤을때 신장은 비교적 평범한 편이지만[8] 윙스팬은 224cm에 육박했으며, 이는 현대농구를 기준으로도 빅맨의 이상적인 신체조건에 해당된다.[9] 또한 하필이면 체임벌린이라는 인외괴수와 동시대의 선수라 부각이 안되었을 뿐, 러셀 또한 NBA 역대 센터 중 최상단에 꼽힐만한 규격 외의 운동능력을 보유한 괴물이었다.관련 내용
즉, 윌트처럼 어느 시대에서나 재앙으로 통할만한 수준의 피지컬까지는 아니지만, 현역 선수들에게 대입하더라도 충분히 극강의 수비수로 군림할 수 있을만한 신체적 능력을 깔고 간다 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비록 환경의 변화로 블록이나 리바운드는 크게 떨어지겠지만, 센터에게 활동량과 기동성, 심지어 퍼리미터 수비까지 요구하는 현 트렌드라면 되려 빛을 볼 수 있는 수비툴을 가진 셈.
특히 정확한 타이밍의 블록 슛이 트레이드 마크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그것보다 무시무시한것은 블록 슛을 팀 전략의 바탕으로 삼아 상대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것. 일명 "수비의 심리학"이라고도 하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도저히 뚫을 수 없어 보이는 블록슛 한번은 상대가 골밑으로 못들어 오게 하고, 그것은 상대의 필드골 성공률을 낮추므로 승리를 불러온다는 것. 그것을 바탕으로 센터가 수비시 무엇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모든 기본기와 움직임은 러셀이 정립했다고 보면 된다. 농구를 모르는 위키러들이 이해를 못하겠다면 슬램덩크를 펼쳐놓고 채치수의 플레이를 다시 보면 된다. 그 플레이를 '''1960년대부터''' 해왔던 것. 당연하지만 한 경기 100점의 사나이 윌트 체임벌린과 라이벌 관계였다.
하지만 그가 NBA에 데뷔한 시기가 하필이면 인종차별이 심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농구계에서도 흑인들은 수비나 리바운드 같이 눈에 띄지 않는 플레이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감독인 레드 아워백이 그의 리바운드 한 개를 2점으로 생각하라는 등 인종차별에 대해서 벽이 되어주고, 그의 능력과 인성을 알고 있는 동료들이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나 기사가 쓰여졌다고 경기를 거부할 정도로 끈끈한 관계를 보여줬으며, 이것은 자연히 팀워크로 이어져 우승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통산 14,552점, 21,620리바운드, 4,100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평균은 '''15.1점 22.5리바운드 4.3어시스트'''... 이건 이미 괴물 수준. 무엇보다 그의 진가인 블록 슛은 은퇴후인 1974년이나 되어야 공식 기록이 되었기 때문에 진가를 제대로 보여준 것도 아닌 셈.[10]
[image]
[image]
'''NBA 최다 우승자의 위엄. 리얼 반지의 제왕.'''
그는 커리어의 대부분을 보스턴 셀틱스에서 보냈기 때문에 보스턴에서는 그의 번호가 영구결번이 되어있다. 미국 4대 메이저 스포츠에서 전무후무한 8연패를 하기도 했으며 NBA에서 보낸 13시즌 중 11시즌을 우승. 그중 2번은 선수 겸 감독의 신분으로 우승했다. 또한 그는 미국 최초의 흑인 감독이기도 하다.
워낙 오래된 플레이어라 경기 전체를 보기는 힘들지만 기록에서 보여지는 단점은 바로 자유투 성공률. 시도 횟수에 비해 성공률은 56.1%로 상당히 저조했다. 야투 성공률은 겉으로 보기에는 낮아보이나 빌 러셀이 뛰던시기인 50~60년대는 리그의 전체적인 평균 야투 성공률이 저조했고(윌트 체임벌린은 공격 부분에 있어서 그냥 괴물이었다) 실제로 앞선 레전드 센터인 조지 마이칸 또한 4할대 초중반에 불과했었다. 빌 러셀은 선수 생활 내내 야투 성공률 시즌 TOP10에 4번이나 선정되었는데, 이는 역대급 센터 공격수인 데이비드 로빈슨과 같고 하킴 올라주원은 2번 패트릭 유잉은 3번으로 오히려 빌 러셀보다 그 수가 적다. 물론 공격 시도 횟수에서 조금 차이나지만 로빈슨, 올라주원, 유잉 등은 센터 포지션에서 최상급의 공격수임을 감안해야한다. 즉 겉으로 보이는 수치만 보고 빌 러셀의 공격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는 것. [11]

4. 체임벌린과의 라이벌리


역대 최강의 스코어러 중 한명이자 인외굇수인 체임벌린을 해당 시대의 콩라인으로 남을 수 밖에 없게 만든 장본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빌 러셀이었다. 실제로 여러 전문가들이 개인기록에서 크게 뒤지는 러셀이 팀적인 측면에서는 체임벌린보다 뛰어난 선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러셀과 체임벌린의 순위는 엎치락뒷치락 하는 양상을 보이고있다.
[image]
1999년 5월 26일 윌트 체임벌린과.
체임벌린과 거의 동시대의 선수였고 1:1 경기에서는 체임벌린에게 많이 졌다고 하는데, 실제로 개인 스탯에서는 체임벌린에게 뒤졌지만 팀 전적에서는 러셀이 더 앞섰다. 둘은 정규시즌에서 94번을 만났고, 러셀이 57승 37패로 우위를 점했고 스탯은 러셀은 체임벌린을 상대로 14.9점을 체임벌린은 러셀을 상대로 29.9점을 넣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49번을 만나 러셀이 29번을 승리했고 러셀은 체임벌린을 상대로 14.9점을 기록했다. 반면 체임벌린은 20번을 승리했고, 러셀을 상대로 25.7점을 득점했다.
그리고 체임벌린의 인간이 아닌 듯한 운동능력에 가려진 바가 있어서 그렇지 이 할배도 운동능력이 ㅎㄷㄷ하다. 자유투 라인에서 떠서 레이업을 하는데 이미 머리가 백보드 높이였다고...[12]
위의 상술한 플레이에서 좀 더 보충을 하자면 그는 리바운드 후 속공 패스를 자주 사용하였고, 블록을 칠 때도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공이 가게 해서 속공 전개를 펼치게 하였다. 즉, 그는 개인 퍼포먼스로는 체임벌린에게 못미칠지언정, 적어도 팀적인 차원에서는 보스턴이 체임벌린 등에게 승리할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궁극의 팀플레이어였다.
이렇듯 팀을 승리로 이끄는 선수로써 11개의 우승반지를 거머쥔 러셀, 여러가지 이유[13] 우승반지는 많이 부족하지만 압도적인 개인기록과 퍼포먼스를 보여준 체임벌린 사이의 고저는 아직까지도 농구팬들의 논쟁거리이다.
68-69 시즌에 러셀은 체임벌린과 20년 넘게 의절한 적이 있었다. 파이널 7차전에서 체임벌린은 무릎 부상 때문에 출전하지 못하였고, 그 경기에서 제리 웨스트트리플 더블을 하며 분투했지만 끝내 2점차로 레이커스는 패배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던 러셀은 체임벌린이 벤치를 지키고 있던 걸 비난하면서 한동안 인연이 끊어졌었다.

5. 역대 최고의 수비수


당연하겠지만, 그의 수비력은 NBA 역사를 통틀어도 압도적인 역대 1위의 수비수이다. NBA에서 수비수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스탯은 MLB와 다르게 아직 없고 빌 러셀은 비교적 초창기 선수이기에 그당시 디펜시브 레이팅도 존재치 않았다. 그나마 1개 있는 디펜시브 윈셰어 수치가 있는데 이 수치에서 비교적 적은 13시즌을 뛰고도 (윈셰어는 비율이 아닌 누적수치, 당연히 커리어가 긴 선수가 높게 나온다.) 정규시즌 133.64로 압도적인 1위[14]를 보이고 있으며 플레이오프 디펜시브 윈셰어 역시 21.76이라는 엄청난 수치로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15] 2차적인 수비수치뿐만 아니라 가장 원초적인 스탯이라고 할만한 블락, 스틸 등이 집계되지 않았음에도 디펜시브만으로 133이라는 엄청난 윈셰어를 보이고 있다.
실제 경기에서의 빌 러셀의 수비는 당시 영상등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고, 워낙 오래전이라 직접 경기를 직관해본 세대들이 대부분 적게 잡아봐야 70대이고 80~90대 세대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식의 표준화가 어렵다. 하지만 얼마 안 되는 영상물과 당시 뉴스와 신문같은 언론매체, 그와 함께 경기를 뛰었던 동시대 다른 레전드 선수들[16]의 증언 등으로 추정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1. 맨투맨 디펜스는 지옥과 같은 수준으로 맘만 먹으면 굳이 블락이나 스틸을 노리지 않고도 찰거머리 같은 수준으로 끈질기게 마크맨을 따라붙는다. 이 또한 매우 영리해서 커리어 중후반기에는 정규시즌의 중요치 않은 경기에서 스코어가 벌어졌을시에는 힘을 비축해 뒀다가 플레이오프나 파이널, 중요한 경기 등에서 엄청난 수비 집중력으로 상대 공격수를 괴롭게 한다.
2. 팀 디펜스 역시 역대급인 BQ를 이용해서 전방위적인 수비를 펼치며 빠른 발과 번개 같은 손속으로 상대의 턴오버를 유발하며, 기본적으로 매우 거칠고 맨투맨 수비가 일상화된 60~70년대에 최초로 초창기의 팀 디펜스의 이론을 정립했다고 할만큼 블루칼라 스타일의 팀수비를 구현했다. 블록을 워낙 전략적으로 사용해서 팀원에게 공이 가도록 유도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 실제로 러셀은 후배들의 블록을 평가하며 호쾌한 블록은 관중들을 신나게 할 수는 있지만, 승리에는 도움이 안된다고 까기도 했다. 블록은 공격을 막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공격의 기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
3. 그의 진정한 무서움은 정규시즌보다 포스트시즌에 있다는것. 실제 플레이했던 상대팀 선수의 증언에 의하면 경기 시작부터 4쿼터 끝날때까지 항상 집중력을 처음같이 유지했으며 클러치 상황에서의 디펜스만으로도 상대 주력 공격수들이 주눅이 들어 보스턴 셀틱스 = 승리라는 방정식이 항상 플레이오프 경쟁팀의 선수들 머릿속에 깊게 각인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미 경기 시작부터 빌 러셀과 셀틱스는 이겨놓고 싸운다는 이야기.
이러한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신장은 평범하지만 긴 팔과 환상적인 운동능력 및 BQ를 기반으로 디켐베 무톰보 이상의 블록 능력에 데니스 로드맨의 맨투맨 디펜스 능력, 벤 월러스급의 팀 디펜스 능력을 보여준 센터라고 본다면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수비력 자체를 떠나서 굳이 비슷한 유형의 선수를 찾아본다면 알론조 모닝과 흡사하며, 빌 러셀의 증언으로도 주로 다른 포지션인 팀 던컨, 케빈 가넷 등의 이름과 함께 동포지션에서는 그나마 모닝의 이름 또한 심심치 않게 거론되는 편이다.
블럭슛이 집계된 게 1973-74시즌부터라 그의 상식 밖의 블럭슛 수치가 숫자로 남아 있지 않다는게 아쉬운 부분인데, 만약 NBA가 60년대부터 블럭 수치를 집계했다면 그가 역대 2위, 라이벌 윌트 체임벌린이 1위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17] 그들을 지켜본 이들은 그들의 블럭이 "평균 7~8개"라는 증언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게 과장이라고 생각해 평균 5개라고 생각해도 윌트는 5,225개, 러셀은 4,815개라는 말도 안되는 수치가 나온다.
사실 "평균 7~8개" 자체가 터무니없다고 보기도 힘든게 한 양덕이 윌트와 러셀의 당시 블럭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는 신문기사를 샅샅히 뒤져서[18] 통계를 내본 결과 윌트는 112개에서 '''평균 8.8블럭''', 러셀은 135경기에서 '''평균 8.1블럭'''이라는 무지막지한 수치가 나왔다고 한다. 참고로 두 선수 모두 마지막 시즌까지 포함된 수치. 윌트의 마지막 시즌은 표본이 21경기로 평균 7.6개, 러셀의 경우 표본이 13경기로 8.3개였다. 게다가 "블럭수치가 높은 것만 기사화됐을 것이다"라고 추정할 수도 없는게 블럭수치가 1개,2개인 경기까지 그대로 집계되어 있다. 참고로 시즌 하이 수치는 윌트는 15블럭, 러셀은 '''21블럭'''이다.[19]
만약 NBA 초창기부터 올해의 수비왕, 올 NBA 디펜시브팀 시상이 있었다면 13년 연속 수비왕(DPOY), 13년 연속 올 NBA 디펜시브 퍼스트팀에 올랐을 것이다.[20] 빌 러셀은 몸이 완전히 망가진 마지막 시즌인 68-69시즌에도 디펜시브 퍼스트팀에 올랐는데, '''빌 러셀의 은퇴 시즌에 처음으로 NBA디펜시브 팀이 생겼다.''' DPOY는 그보다 15년 정도 후에 생겼고.. 당시 센터 포지션 디펜시브팀 경쟁자들은 수비력으로는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고 시대를 지배했던 수비형 센터들인 네이트 서몬드, 폴 사일러스, 윌리스 리드 그리고 수비형 센터로 막 전환을 끝낸 윌트 체임벌린 등이다. 커리어 마지막 해에 이런 기라성같은 수비형 센터들을 제치고 디펜시브 퍼스트팀에 든 것 자체만으로도 그의 위엄을 잘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데, '''심지어 그는 시즌 MVP 수상만 5번'''에 올스타와 NBA팀 셀렉션까지 더하면 우주적인 업적을 달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시대에는 파이널 MVP 시상도 없었으므로, 만약 이런 수치들이 있었다고 가정할시 빌 러셀의 업적은,
시즌 MVP 5회, 올해의 수비왕 13회,올 NBA 디펜시브팀 13회, 올 NBA팀 11회(퍼스트 3회, 세컨드 8회), 12년 연속 올스타(루키시절을 제외하고 전부 올스타 선정),올스타 MVP 1회, 선수생활 13년 중에 우승 11번[21], 파이널 MVP 6회[22]이다.
이 정도만으로도 '''조던 이전의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하나라는 칭호가 결코 조금의 과장도 아님을 알 수 있다.'''

6. 과대평가론? 그리고 반박



먼저 여기서 언급되는 과대평가론은 어디까지나 러셀 시대를 직접 보지 못했던 팬들 사이에서 주로 언급되는 설이며, 전문가들이나 동시대 빌 러셀을 직접 보고 공부하던 후배 선수들 사이에서 나오는 말들이 아니다.
우선 빌 러셀은 분명 의심할 여지 없는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설 중 하나'''이며, 당시 NBA를 지배하던 최고의 선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 러셀은 NBA 과대평가된 선수 중 하나라는 논란을 빚고 있기도 하며, 이는 가장 꾸준한 NBA 논쟁떡밥 중 하나이기도 하다. 사실 이는 빌 러셀 외에도 동시대의 전설적 선수들에게 공통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그 가장 핵심적인 논거는 당시의 NBA가 오늘날과는 너무도 달랐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당시, 그러니까 60년대 NBA에는 팀이 9개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샐러리캡도, 사치세도 없었다.''' 바꿔 말하면, 리그의 최정상급 선수들이 우승을 위해서 한두 팀에 몰리기 마련이고, 그런 팀들은 당연히 다른 팀들에 비해 우승할 가능성이 훨씬 높으며, 결국 들이 리그를 사실상 완전히 지배하며 라이벌 구도를 이루며 우승반지를 나눠 가졌다는 것이다. 30개의 팀들이 챔피언십을 위해 트레이드와 드래프트에 목숨을 걸고, 수 시즌 째 플레이오프 진출조차 못해 허덕이는 팀들이 허다한 오늘날의 NBA에 비하면 당시에는 양대 팀 중 하나에 소속될 수만 있다면 우승하기가 훨씬 쉬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시에는 경기 내 규칙이라던가 코트의 규격 등에 차이가 있어서 오늘날에 비해 훨씬 볼 점유 시간과 빈도가 높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3점 슛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때문에 당시 선수들은 공통적으로 득점도 득점이지만, 리바운드의 스탯이 터무니없이 높다. 이는 윌트 체임벌린의 100득점과도 무관하지 않은 내용인데, 당시의 스탯(기록)들은 분명히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부풀려진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23]
단 한 번의 우승을 위해 말년에 팀을 옮겨가며, 노구를 이끌고 피나는 특훈을 하는 눈물겨운 노력을 했음에도 결국 반지를 끼우지 못하고 통한의 은퇴를 슈퍼스타들이 리그에는 한 둘이 아니다. 한 마디로 전쟁터와 같은 오늘날의 리그와 비교하면 당시의 리그에서 우승하는 것은 분명 훨씬 쉬운 축에 속했을 것이다. 9개의 팀이 속한 리그에서 11번 우승하는 것과 30개의 팀이 속한 리그에서 11번 우승하는 것을 과연 동일선상에서 평가할 수 있을까?
물론 위의 논리는 빌 러셀 뿐 아니라 당시를 보낸 선수들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과대평가론을 언급하는 것이 조금 이상한 것이 빌 러셀의 11번 우승은 이미 '''사실상 시대보정을 적용해서 평가받고 있다'''. 그 증거로 마이클 조던의 우승은 총 6번으로, 러셀보다 우승횟수가 절반 조금 넘는 수준인데도 모든 매체에서 당연한 듯이 러셀보다 높게 평가받고 있다.
즉, 만약 러셀의 11번 우승을 현대의 11번 우승과 동일하게 평가했었다면 그는 스탯이고 뭐고 조던은 비교도 되지 않는 압도적인 넘버원으로 평가되어야 옳다.[24] 그런데 그의 위치는 현재 조던보다는 당연히 아래, 2회 우승인 윌트 체임벌린과 6회 우승인 카림 압둘자바와 비슷하게 묶여서 평가받고 있다. 즉, 러셀시대의 우승이 현대의 우승과 동일선상에 놓이기 어렵다는 사실은 이미 사람들의 평가기준에 충분하리만치 적용이 되어있고, '''그걸 감안하더라도 11회 우승은 어마어마한 대업적'''이며, 그걸 이룩한 그는 역대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하나로 꼽힌다는 소리이다.
결과적으로 "우승하기 쉬웠다"라는 논리가 어느정도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러셀이 그저 쉽게 반지를 쓸어갔다고 일차원적으로 폄하하기 보단 당시 리그의 환경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어쨌건 29팀을 상대하는 것 보단 9팀을 상대하는게 우승반지를 노리기에 더 수월한 것이 사실이고, 보스턴이 샐러리캡 없는 환경 내에서 수준높은 선수들을 비교적 쉽게 끌어모을 수 있었던 몇몇 팀 중 하나였던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러셀과 경쟁한 동시대 라이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례로 러셀의 라이벌격인 윌트 체임벌린의 팀 동료들을 보면 'NBA 위대한 올타임 50인'에 선정된 선수만으로도 폴 어리진, 할 그리어, 빌리 커닝험, 엘진 베일러, 제리 웨스트 등이 있었으며[25] 특히 1969년 윌트 체임벌린-제리 웨스트-엘진 베일러로 이어지는 레이커스 라인업의 경우, 무려 MVP레벨 세 명이 한 팀에서 뛴 어마어마한 슈퍼팀이었다.[26] 근데 러셀과 셀틱스가 레전드가 된 것은 이들이 '''막강한 동시대 다른 라이벌들을 제치고 매번''' 우승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체임벌린이 '커리어 전반적으로 봤을때' 보스턴에게 밀리는 전력의 팀에서 뛰어온 기간이 적지 않지만, 정작 오버롤이 확연히 앞서는 초 슈퍼팀을 꾸리고도 보스턴에게 패한 전적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앞서 언급된 듯이 스타급 선수들이 몰려있던 것은 레이커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들은 셀틱스에게 전패를 기록했고, 그 독보적인 업적을 기록한 셀틱스의 중심엔 러셀이 있었다.
그리고 명심해야할 것은, 보스턴 셀틱스가 당시 선수수급에 비교적 유리했던 팀 중 하나라고는 하나 그렇다고 그들이 스타 군단, 즉 '슈퍼팀'이라고 후려치긴 어렵다는 것이다. 러셀이 커리어 내내 총 8명의 명예의 전당 멤버와 뛴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스타급 플레이어가 아니라 당시 너무나 위대한 팀인 셀틱스의 주요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경우에 속한다.[27]
그리고 보스턴의 라이벌이었던 LA나 필라델피아 등의 빅마켓 팀들은 보스턴과 마찬가지로 선수수급이 수월했다. 샐캡이 없어 유리했던건 딱히 보스턴만은 아니었다는 소리[28][29].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마켓인 필라델피아/샌프란시스코/LA에서만 뛴 윌트보다 더 많은 반지를 쓸어담고, 팀 차원에서 라이벌이었던 레이커스보다 월등한 실적을 낸 것은 반박할 수 없다.[30] 포인트는 러셀의 셀틱스가 5,60년대 팀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어느정도 수혜를 받은 팀 중 하나일지언정, 동시대의 강력한 라이벌 팀들을 시종일관 오버롤에서 압도하던 슈퍼팀이었다고 보긴 어렵다는 것이다. 애초에 셀틱스는 각자 멤버들의 역할이 잘 조화된 역사적인 강팀이었지, 여러명의 스타 플레이어들로 빅3 ~ 판타스틱4 주전 라인업을 꾸리는 팀은 아니었다.[31]
또한 당시 기록들이 다수 부풀려진 것은 맞지만, 중요한 건 러셀과 윌트 체임벌린은 '''이 부풀려진 기록들 사이에서 독보적으로 뛰어난 기록을 냈다는 것이다. (리바운드 측면에서) 당시 기록 몇개만 보자. 62-63시즌에 리바운드 1,2,3위는 윌트 체임벌린 24.3개, 빌 러셀 23.6개, 월트 벨라미 '''16.4개이다.''' 1,2위가 3위의 거의 1.5배 수준이다. 현대로 따지면 1,2위가 각각 15개, 14.5개인데 3위가 10개인 수준.그 전 시즌엔 그나마 차이가 적어서 2위 러셀이 23.6개, 벨라미가 19개이다. 64시즌엔 러셀이 24.7개로 1위, 윌트가 22.3개로 2위, 제리 루카스가 17.4개로 3위이다.
이처럼 당시 러셀은 당시 기준으로 봐도 독보적인 리바운더였다. 기록이 부풀려진 경우가 있다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다 같이 기록이 부풀려진 상태에서 러셀과 윌트의 리바운드 기록이 압도적이었다는게 포인트.
또한 러셀은 애초에 스탯으로 인정받는 선수가 아니라, '''너무나 압도적인 우승기록''' 덕분에 높이 평가받는 선수이다. 스탯으로 따지면 그는 동시대 라이벌 체임벌린에 비교도 안되지만, 모든 선수평가에서 그는 윌트와 엎치락뒤치락한다. '''애초에 스탯으로 평가받지도 않는 선수에게 스탯을 두고 과대평가 운운하는게 무슨 의미인가?'''
과대평가론과 별개로 빌 러셀, 래리 버드를 둘 다 코칭했던 레드 아워백같은 경우 래리 버드를 빌 러셀 위로 쳤다. https://web.archive.org/web/20130930041901/http://sportsillustrated.cnn.com/basketball/nba/1998/bird/flashbacks/1988flash.html

7. 여담


  •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09/10시즌부터 NBA 파이널 MVP에게 수여하는 트로피의 명칭을 그의 이름을 붙인 빌 러셀 트로피라 명명하였다.[32]
  • 러셀은 가까이로는 그와 함께 플레이했던 선수 뿐만 아니라 까마득한 후배들에게까지 엄청난 존경을 받고 있는데, 인종차별의 잔재가 상당수 남아있었던 50~60년대에 선수 생활을 했었고 특히나 그가 선수 생활을 보낸 보스턴은 대학생활을 보낸 자유로운 분위기의 서부 샌프란시스코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종차별이 심했었다.[33] 이런 환경에서 오직 인품 하나로 백인 감독과 백인 위주의 팀원들의 신뢰를 얻었으며 은퇴 이후에도 이는 여전하다. 많은 선수들이 심지어 마이클 조던보다 빌 러셀을 역대 최고의 선수라고 주장하는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 당연하지만 이런 주장을 했던 선수들은[34] 60~70년대 그와 함께 했던 선수들이나 감독, 기자 등 전문가들의 비중이 높으며 조던의 우세를 주장하는 선수, 전문가들은 이보다 후인 90~00년대 현업에 종사했던 경우가 많다.
  • 그의 후배 중에 대표적인 러셀빠로는 저메인 오닐알론조 모닝을 들 수 있다. 저메인은 실제로 공개편지를 통해 빌 러셀을 존경한다고까지 했었고 심심치 않게 그에 대한 존경을 언론에서 밝히기를 주저하지 않는 편이다. 그외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있지만 팀 던컨 역시 인터뷰에서 가장 같이 뛰어보고싶은 선수로 빌 러셀을 언급하기도 했다.
  • 사실 빌 러셀은 60년대에 전성기를 보낸 선수라는 점에서 태생적으로 후대로 갈수록 점점 더 과소평가당할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다.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TV중계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러셀 시대"의 선수들은 경기에 대한 영상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당시를 보낸 사람들의 평가나 기록에만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러셀을 본 사람들이 많은 시기, 특히 러셀 시대와 십수년밖에 차이 나지 않는 1980년에는 무리없이 그가 그때까지 역대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35] 그러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점점 적어질 수록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한 경기 100점의 윌트나 시즌 트리플 더블오스카 로버트슨 같은 경우는 불멸의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시대보정을 놓고 논란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이 동시대에서 압도적이었다는 건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러셀은 그 위대함이 기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리한 입장이다.[36] 과거엔 씨알도 먹히지 않을 "빌 러셀 과대평가론"이 점점 고개를 들고 있는 것도 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 80대 중반의 고령이지만 2018년 현재에도 정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37] 사매년 파이널을 관전하며 빌 러셀 트로피를 직접 수여하고 있으며 사회활동도 활발하고 트위터도 직접 운영한다. 2018년 NBA 서머리그를 관전하다 해설중이던 빈스 카터에게 선물을 전달하기도...
  • 상술되어있는 11번의 우승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프로농구 개인통산 최다 우승기록이다. 2위인 팀 동료 샘존스의 10회도 거의 없는 편으로, 한 종목에서 같은 팀이 5번이상 우승하기도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무리 참가팀이 적은 초창기의 기록이라고 해도 대단한 업적이다.[38]
[1] 과거에는 206cm로 많이 표기되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현지매체에서 맨발 208cm로 변경하고 있다.[2] MVP 수상 횟수보다 퍼스트팀 선정 횟수가 적어서 의아할 수도 있는데, 이는 당시 MVP 투표제가 선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올 NBA 팀은 과거에도 기자들이 투표했다. 비슷한 경우가 1973년의 카림 압둘 자바. 퍼스트팀은 카림이 받았는데 정작 MVP는 세컨드팀 센터였던 데이브 코웬스가 받았다.[3] NBA All-Defensive Team 선정은 1969년부터 시작되었고 러셀은 그 첫번째 선정자 중 한명이다. 그런데 이때가 '''러셀의 커리어 마지막 시즌이었다.'''[4] 그의 라이벌인 윌트 체임벌린도 2번밖에 우승을 못했다.[5] 조던은 쓰리핏 2번으로 총 6회 우승했다.[6] 비록 절대다수의 농구인들과 팬들이 조던을 역대 최고선수라고 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빌 러셀이 조던보다 덜 위대하다"고 섣불리 말하는 사람도 없다. 매직 존슨은 "조던은 역대 최고의 선수(player)지만, 빌 러셀은 역대 최고의 승리자(winner)."라고 말했을 정도. 말장난같지만 그가 얼마나 위대하며 후배 선수들의 존경을 받는지 짐작가능한 부분이다.[7] 물론 이는 러셀 혼자만의 업적이 아니라 밥 쿠지등과 같은 셀틱스의 훌륭한 선수들과 함께 이룬 업적임을 간과해서는 안되지만, 그런 셀틱스의 리더도 결국은 빌 러셀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참고로 밥 쿠지는 러셀 커리어의 절반 좀 넘는 7년을 함께 했고, 러셀은 쿠지와 함께 하지 않은 6년간 5번 우승했다. 당연히 저 7년엔 쿠지의 말년이 포함됐다.[8] 당시 프로필을 맨발신장으로 기재했음을 고려하면 208cm라는 그의 키는 절대 작은편이 아니다. 착화신장 측정으로는 7풋 언저리라는 소리인데, 이는 현 NBA의 5번 평균키(6-11)에 속하는 적절한 신장이다.(40세만 넘어도 키가 줄어들기 시작하는 인체의 특성상 고령인 러셀의 키는 현역시절보다 꽤나 줄었을 것이 분명한데, 그가 착화 213cm인 디르크 노비츠키와 나란히 서있는 장면을 보면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게다가 러셀 시대에는 센터들이 거의 203(초창기)~208 정도였음을 고려하면 당대 기준으로는 오히려 큰 편이었던 셈.[9] 일설에 따르면 러셀과 윌트의 스탠딩리치가 비슷했다고도 하며, 둘이 공중에서 리바운드 경합을 벌이는 사진을 보면 실제로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물론 윌트가 러셀보다 훨씬 큰 맨발 216cm의 신장에 234cm의 윙스팬을 가졌음을 고려하면 제대로 서서 비교했을땐 차이가 꽤나 날 것으로 추정되긴 하나, 해당 사진상으론 스탠딩리치는 확실하게 판단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팔길이만큼은 러셀이 윌트에게 꿇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윌트의 윙스팬이 더 길긴 해도 어깨넓이의 차이가 있으므로, 실제 팔길이는 둘이 비슷하다 해도 이상할게 없다.)[10] 윌트 체임벌린의 문서에도 언급되지만, 그가 활동하던 당시 어시스트 기준은 굉장히 빡빡해서 패스 → 캐치 앤 슛 으로 바로 이어져야만 인정되었다. 반면 현대 nba에서는 패스 → 캐치 트리플쓰렛 → 드리블 앤 슛으로 연결되어도 기록자 주관에 따라 어시스트로 인정될 정도. 만약 빌 러셀이 현대에 경기를 뛰었다면 어시스트 수치가 더 증가했을 것이다.[11] 빌 러셀이 팀 내 득점 2위를 한 것은 단 한 시즌뿐이고, 그 외 절반 정도의 시즌에서는 팀 내 득점 4위였다. 그리고 야투 시도 회수와 팀 내 공격 지분을 떠나 등록선수가 100명 전후인 시대와 300-400명인 시대 사이의 단순 10위권 진입을 비교하는 것부터가 이미 불공평한 기준이다.[12] 사실 체임벌린이 러셀보다 족히 10cm는 크고 훨씬 무거운 걸 감안하면, 운동능력이라도 비슷하지 않으면 막을 수가 없다.[13] 보스턴에게 열세인 팀에서 뛰었던 기간이 아무래도 길었던 점. 체임벌린 본인이 팀을 살리기보단 개인기록에 신경쓰는 경향이 있었던 점. 전력에서 앞서는 시기마저도 준우승으로 날려버린 점 등...[14] 2위가 팀 던컨의 106.11[15] 역시 이부분 2위는 팀 던컨의 17.02[16] 주로 제리 웨스트, 존 하블리첵[17] 왜 수비력이 단연 더 앞섰던 러셀이 2위냐면 1. 러셀은 963경기에 불과해 1,045경기를 뛴 윌트보다 80경기 이상 덜 뛰었고, 2. 윌트는 사기적인 높이와 운동능력으로 블럭능력에서만큼은 러셀과 최소 대등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블럭능력이 동급이라고 수비력이 동급인 것은 아니다. 러셀은 블럭슛은 전략적으로 이용하는데 능했고 속공의 시발점으로 이용하는 선수였기 때문에...[18] 기사에서 "~개 블럭을 했다"라고 언급된 경우. 기록이 상충되는 경우 더 적은 기록을 선택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한 기사에서 7개 블럭, 다른 기사에서 9개 블럭의 경우 7개 블럭이라고 기록하는 식.[19] 공식적으로 NBA 한 경기 최다 블럭슛은 1973년에 엘모어 스미스가 기록한 17개이고, 1990년 이후 최고는 샤킬 오닐이 1993년에 기록한 15개이다.[20] 사실 수비력이 비슷한 센터 두명이 경합하는 경우 디펜스 퍼스트팀과 수비왕이 갈리는 경우가 있어서 "윌트가 몇번 가져갈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둘은 블럭수치만 비슷했지 수비력 자체는 러셀이 단연 앞섰다는 인식이 당대에도 후대에도 확고했기 때문에 이렇게 갈릴 가능성이 거의 없다. 실제로 윌트는 러셀보다 두 살 어리고 데뷔도 늦어서 노화가 늦게 찾아왔기 때문에 러셀의 마지막 시즌인 1968-69시즌에 와서는 두 선수의 실력이 꽤나 벌어졌고 이때 윌트는 이미 수비와 리바운드 위주로 플레이스타일을 바꾼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즌의 디펜스 퍼스트팀 센터는 러셀이었다.[21] 1번은 커리어 2년차때 소포모어 징크스로 밥 페팃의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에게, 또 1번은 미 프로스포츠 역사상 최초 흑인 감독 겸 선수라는 엄청난 중압감에 수비형 센터로 막 전환을 시작한 윌트 체임벌린의 필라델피아에게 우승을 내주었다.[22] 파이널 우승이 11번인데 그중 절반 정도인 6번만 파이널 MVP를 수상했다고 가정할시.. 근데 이정도 가정도 과소평가한 것이 애시당초 파이널 MVP의 명칭이 몇년 전부터 빌 러셀 파이널 MVP로 이름이 바뀌었다. 정규시즌보다 포스트시즌, 그것도 파이널같은 큰 경기에 강한 그의 커리어상 이정도 가정조차 무의미해보인다.[23] 이쪽은 코비 브라이언트의 81득점이 윌트 체임벌린의 100득점보다 훨씬 위대한 기록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24] 농구에서 가장 중요하게 평가받는 것은 우승이다. 이는 같은 팀스포츠인 야구와 다른 점인데, 야구는 우승반지가 없어도 그 선수의 평가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대표적 예로, 역대 최고의 투수라 평가받는 월터 존슨은 커리어 내내 우승이 없다가 말년에 겨우 반지 하나 땄다.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독립적인 타석으로 구성되는 야구와 유기적 플레이로 구성되는 농구의 차이 때문. 야구는 한 명이 팀의 우승을 만드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지만, 농구는 어찌됐건 가능하다. 그렇다보니 MLB는 우승을 중요시하긴 해도 선수의 평가에서 포스트시즌 성적은 부가적 요소일 뿐이나, NBA에서는 정규시즌은 연습게임이고 포스트시즌이 진짜라는 마인드가 있다.[25] 문서 맨위의 틀을 보면된다. 러셀의 동료들이 명전선수가 8명이라면 윌트 체임벌린은 아예 명전을 넘어 NBA올타임 50멤버만 5명과 커리어를 보냈다. 그리고 명전급은 아니더라도 쳇 워커같은 올스타급 조력자들의 존재 또한 무시할 수 없다.[26] 르브론 제임스의 디시전 쇼와 함께 구성된 마이애미 빅3, 스테판 커리를 필두로 하여 정규시즌 73승을 달성한데다 케빈 듀란트라는 또하나의 리그 최강급 선수가 후속 합류한 골든스테이트 등 초 슈퍼팀이 나타나는 2010년대를 제외하면, 저정도 슈퍼팀이 결성되는건 지극히 드물고 어려운 일이었다.[27] 대표적으로 Satch Sanders같은 경우 명예의 전당 멤버이지만 통산기록이 9.6점 6.3리바운드 1.1어시스트에 불과한 지극히 평범한 선수였고 올스타에도 한번도 선정이 된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선수로서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감독으로 뛰어난 커리어를 보낸 K.C. 존스도 커리어 7.4점 3.5리바운드 4.3어시스트에 그쳤고 올스타 경력도 없다. 게다가 종종 언급되는 "명전 멤버 8명"은 러셀의 커리어 초반부터 후반까지 뛴 선수들 전부 포함한 수치이다. 러셀의 멤버 중 가장 뛰어났던 밥 쿠지는 63년에 은퇴해 러셀의 커리어 반밖에 함께하지 않았고, 하블레첵이 러셀과 함께 뛸 때는 "떠오르는 스타" 정도 위치였으며, 빌 샤먼은 러셀이 5년차 때 은퇴했다. 러셀과 십년, 혹은 그 이상 같이 뛴 선수는 새치 샌더스, K.C. 존스, 짐 로스커토프 그리고 샘 존스 뿐인데 이 중 단 한번이라도 올스타에 선정된 선수는 샘 존스 한 명 뿐이다.[28] 게다가 보스턴은 그때나 지금이나 '빅'마켓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그렇다고 작은 마켓은 결코 아니었고, 러셀era에서 최고의 농구 명문으로 발돋움하여 전국구적인 인지도와 명성, 기반을 쌓은 덕에 선수수급에 불리함이 없었던 것.[29] 게다가 보스턴 셀틱스의 첫 우승이 1957년이었고, 이때 러셀은 루키임에도 주전 센터로서 13.3점 22.9리바운드에 기록되지 않은 무수히 많은 블럭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가 오기 전까지 레전드 밥 쿠지는 커리어 절반을 뛰면서 한번도 우승을 못하고 있었고, "명문 보스턴 셀틱스"의 이미지는 사실상 러셀 시대에 다 만든 것이다. 보스턴은 70년 넘는 세월동안 17번 우승했는데, 그 중 11번이 러셀이 뛰던 13년 동안 이뤄진 것.[30] 애초에 프로스포츠에서 "모든 팀이 같은 조건"이란 상황은 존재할 수가 없다. 지금은 샐러리캡이 있어 예전과 달리 스몰마켓팀도 충분히 우승을 노려볼만한 저력을 갖출 수 있지만, 현재도 LA같은 빅마켓은 르브론 제임스같은 초특급 FA를 덜컥 데려오는가 하면, 앤서니 데이비스같은 슈퍼스타들이 아득바득 오기 위해 애쓰는 팀이다. 반면 멤피스 그리즐리스같은 팀들은 좀 못하면 슈퍼스타들이 우수수 빠져나간다.[31] 이는 조던의 불스와도 흡사하다.[32] 재미있는 사실은 이 빌 러셀 트로피 첫 수상자가 보스턴 셀틱스의 최대 라이벌인 LA 레이커스코비 브라이언트이다. 그리고 파이널 상대는 보스턴 셀틱스...[33] 실제로 빌 러셀의 저택에 백인우월주의자가 들어와 그의 침대 한가운데에 똥을 싸놓은 행위는 유명하다. 이외에도 인종차별에 대항해서 셀틱스 백인 동료들은 한데 뭉쳐 러셀을 옹호해서 집단행동이나 성명을 내는 일이 잦았다.[34] 대표적으로 그의 라이벌인 윌트 체임벌린.[35] 물론 이땐 카림 압둘자바의 커리어가 진행중이었다는 것과 조던의 등장 전이란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포인트는 적어도 윌트보단 확실히 위로 인정받았다는 것.[36] 게다가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지금도 스탯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수비력인데다가 주요 무기인 블록슛이 아예 기록이 되지 않는 시대에 뛰었다. 실제로 러셀의 PER은 가장 높을 때조차 23 정도에 불과해 라이벌 윌트는 물론이고 현재의 웬만한 올스타급 수준밖에 안 된다. 러셀이 대단하다는 건 따지고 보면 그와 같이 뛴 선수들, 그를 상대한 선수들의 증언, 그리고 그의 팀이 13년간 11번 우승했고, 그가 심지어 선수 겸 감독으로 2연속 우승을 이뤄냈다는 점 등 모두 "정황증거"들이다. 사실 곰곰이 따져보면 이것만으로도 그의 위대함을 부정하는 게 말이 안 되겠지만...[37] 동년배이자 평생의 라이벌인 윌트가 사망한지 20년이 지났다는걸 생각해보자.[38] 다만 범위를 감독까지 모두 넓힌다면 선수로 2번, 감독으로 11번 우승한 필 잭슨이 가장 우승 횟수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