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효유

 



方孝孺
1357년 ~ 14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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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 개요


중국 명나라 초기의 유학자. 절강성 영해현 대가하진 계상방촌 출신으로 자는 희직(希直) 또는 희고(希古) 이고 호는 손지(遜志)이다. 별칭으로 구성선생(緱城先生), 정학선생(正學先生)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원말명초기에 활동한 송염의 문하로 들어가 뛰어난 재주를 널리 알리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2. 정난의 변 이후


그러나 연왕 주체가 조카인 건문제의 황위를 찬탈하기 위해 정난의 변을 일으켰고, 쿠데타를 성공시킨 주체는 황제로 즉위한다. 정난의 변 이후 거대한 피바람이 몰아쳤는데 건문제의 최측근이던 황자징은 영락제에게 욕을 얻어먹고 책형을 당했고 제태, 철현 등 건문제 편을 들었던 많은 신하들이 사형을 당했다.
방효유도 이 때에 처형될 뻔했지만 영락제의 최측근인 요광효가 만류하면서 방효유를 불러들여 즉위조서를 쓰게 하려고 마음먹고 방효유를 불렀다.[1] 도착한 방효유를 영락제가 달래면서 일을 진행시키려 했지만 올때부터 울상이었던 방효유는 전각의 섬돌을 걷어차 치워버렸다.
영락제는 주나라 주공단의 예를 들며 자신은 어진 정치를 행하겠다고 말했는데, 방효유는 눈물을 그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성왕은 어디에 있습니까(成王安在)?'''

정난의 변 과정을 보면 알다시피 건문제는 남경이 함락된후 궁궐이 불타면서 행방불명(사실상 사망)되었다. 방효유는 주공단의 섭정정치(직접 왕이 되지 않고 성왕을 보좌함)을 비틀면서 영락제를 디스한것. 영락제는 당황했는지 '''불타서 죽었다'''고 대답했다. 훈훈한 일화가 조카를 불태워버린 패륜 일화가 된 순간(...)
이후 방효유는 성왕이 없으니 성왕의 자손, 하다못해 성왕의 형제를 옹립해야한다고 우회적으로 영락제를 디스했고 영락제는 빨리 조서나 쓰라고 방효유를 협박했다. 방효유는 연나라의 도적이 제위를 찬탈하다(燕賊纂位)라는 글만을 적어냈다, 분노한 영락제는 방효유를 책형으로 처형시켰다. 향년 46세.
그리고 방효유의 일족도 이 때 화를 입어 수백명의 방효유 친족들이 방효유가 보는 앞에서 주살당했다고 명사 방효유전에 기록되어 있다. 보통은 구족만을 멸하게 되어 있는데 분노한 영락제는 여기에 친구와 제자, 가까운 사람들을 합쳐 십족을 만들어 멸했다.
영락제는 구족을 멸하겠다고 협박했는데, 방효유는 눈 까닥하지 않고 "구족이 아니라 십족이라도 좋다."라고 되받아쳤다. 그의 친족이 아니면서 가까운 사람들은 순전 방효유의 도발때문에 죽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듯하다.
중국 내에서는 기개와 절개, 충심이 대단한 선비라고 칭찬하거나 혹은 자신의 고집으로 인해 친족과 지인들이 무참히 처형되게 한 고지식한 선비라는 평이 있다.

[1] 요광효는 승려 출신으로, 권모술수에 능하다는 평을 받았다. 승려의 신분임에도 환속을 거부하고 영락제 옆에서 참모로 활약해 흑의재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