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문제

 


'''
惠宗
혜종 건문제
'''
'''묘호'''
없음[1] / '''혜종(惠宗)'''[2]
'''시호'''
혜황제(惠皇帝)[3]
사천장도성의연공관문양무극인독효양황제
(嗣天章道誠懿淵功觀文揚武克仁篤孝讓皇帝)[4] /
공민혜황제(恭閔惠皇帝)[5][6]
'''능호'''
없음[7]
'''연호'''
건문(建文)[8]
'''성'''
주(朱)
'''휘'''
윤문(允炆)
'''황후'''
효민양황후(孝愍讓皇后)
'''부황'''
주표
'''모후'''
황태후 여씨 [9]
'''생몰 기간'''
1377년 12월 5일 ~ 1402년?
'''재위 기간'''
1398년 6월 30일 ~ 1402년 7월 13일
1. 소개
2. 생애
3. 정난의 변과 실종
4. 그의 행방에 대한 의문점
5. 조선과의 관계
6. 여담
7. 둘러보기

[clearfix]

1. 소개


명나라의 제2대 황제. 황태손으로 홍무제의 뒤를 이었지만 삼촌에게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실종된 비운의 황제 .
명나라에서 오랫동안 묘호는 없고 시호는 혜황제(惠皇帝), 약칭 혜제로 돼 있었다.[10] 휘는 윤문(允炆). 연호는 건문(建文)인데, 1399년부터 1402년까지 사용됐는데, 사실상 건문제를 쫓아내고 즉위한 영락제가 이 연호를 무효화하여 이 시기의 연도를 이전의 연호인 홍무(洪武)로 표기하도록 했고[11] 그 다음 해인 1403년부터 영락의 연호를 쓰게 하였다. 건문이라는 연호는 훗날 만력제 때인 1595년(만력 23년)에 복구된다. [12] 조선에서는 정종원년부터 태종 2년까지 건문 연호를 사용하였다.
훗날 남명홍광제 때 추존, 묘호를 혜종(惠宗), 시호를 사천장도성의연공관문양무극인독효양황제(嗣天章道誠懿淵功觀文揚武克仁篤孝讓皇帝)[13]로 올렸다. 청나라는 남명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남명 정권에서 정한 묘호와 시호 또한 인정하지 않고, 계속 남명 이전에 쓰였던 '혜제'나 '건문제'로 불렀다. 그러다가 건륭제 때 건문제가 명나라 때 받은 시호 앞에 딱 두 글자를 추가하여 공민혜황제(恭閔惠皇帝)로 높였고[14] 묘호를 따로 올리지는 않았다.

2. 생애


주원장의 장손. 아버지 의문태자 주표[15]가 일찍 죽어 황태손이 되어 제위에 오르게 된다.
주원장은 막판에 어마어마한 숙청을 진행했다. 특히 자신을 도와 싸웠던 공신들과 일족을 대규모로 모조리 숙청하였고, 전한유방처럼 자신의 일족과 황자들을 차례대로 번왕에 봉했다. 이때 각 지역에 보낸 번왕들은 통치권을 갖진 않으나 장수들 대신 각 지역의 군권을 가지는 형태였다. 이것이 실책이었다. 주원장으로서는 왕실 정통성을 위해 적장자 계승 원칙을 지켜 황태손을 후계자로 했다. 황손을 황태손으로 봉할 때 주원장은 65세였고 황손은 10살이었다. 당연히 황자들은 대개 당당한 청년, 심지어 중년이었다. 어린 황태손을 후계자로 하면서 황자들을 번왕으로 보내 군사 지휘권을 준 것은 이후 후계 갈등 문제의 불씨를 만들어놓은 것과 같았다.
즉위 후 건문제는 군사력을 가진 숙부들에게 위협을 느끼게 된다. 주원장에게는 무려 스물여섯 명의 황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전원이 번왕이었으니 이것이 앞날의 화근으로 느껴지게 된다. 특히 연왕 주체는 가장 큰 경계 대상이었다. 연왕 주체는 당시 명나라 최북방 지역에서 몽골족 침입을 막으며 무인으로 성장 중이었고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능력치를 가진 인물이었다. 주원장이 죽은 직후부터 신료들은 각지 제왕의 세력을 진압할 것을 간언하였고 건문제는 몇 차례 망설이다 결국 삭번을 단행하게 되니 이것이 화근이었다.
건문제는 지방에서 각자 큰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일족들의 영지를 삭감해 중앙에 편입시켰다. 정책 자체로는 적절하다고 볼 수 있으나, 문제는 건문제 스스로도 어리고 문약하며 주변 신하들 역시 정치적 역량이 뛰어난 자는 모두 숙청당한 마당이라 이들 모두 번왕들의 반발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정식으로 번왕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지는 못하고, 불시에 번왕들을 습격해서 한 명씩 잡아가두고 번왕에 대한 처분을 사후에 발표하는 식으로 반발할 틈을 주지 않는 방법을 사용했다.
처음 희생자가 연왕 주체의 동복 아우인 주왕 주숙이었다. 이어 민왕 주편, 상황 주백 등 여러 제왕들이 유배를 당하거나 제거된다. 번왕들을 잇따라 투옥하고 평민으로 격하시키거나 추방하니, 황제의 처단이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왕도 있었다. 이런 방법은 당장 한 사람 한 사람의 번왕을 처리하는데는 효과적일 수 있었지만 중앙 정부의 신뢰도를 추락시켰고 반란의 좋은 명분이 되었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습격하려면 마땅히 가장 세력이 큰 (燕王)인 주체부터 제일 먼저 처리해야 했지만, 연왕의 세력이 큰 것이 두렵다는 이유로 우선 세력과 능력이 약한 왕들부터 처리하는 무능함을 보였다. 다른 왕들이 기습당하는 것을 본 연왕은 곧 자기 차례가 온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반란을 준비하게 되었으므로 기습으로 반발할 틈을 주지 않은 것도 의미가 없어졌다. 또한 당시 수도인 남경에는 연왕의 아들들이 체류하고 있다가 서둘러 연경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었는데, 연왕을 기습하려면 연왕이 방심하게 만들어야 한다면서 아들들을 인질로 잡지 않고 무사히 돌아가도록 방치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결국 전부터 황제의 꿈을 가진 연왕이자 숙부인 주체가 황제 주변에 있는 간신들한테서 미숙한 황제를 구출하는 것이 숙부인 자신의 도리라고 선언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정난의 변'''이라 한다.

3. 정난의 변과 실종


건문제의 군대는 초반엔 매우 유리하여 세력으로는 연왕의 군대를 압도했으나, 연왕은 탁월한 군사적 능력과 결단력으로 최단 시간 내에 전력으로 남경으로 직행하여 함락시킨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몇몇 전투에서 패하더라도 위축되지 않고 전략적 목표를 하나하나 달성해 나가고 있었다. 반면 건문제와 그 친위 세력들은 군사적으로 무능해서 어떤 작전으로 연왕을 요격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대한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지 못했다. 특히 건문제 자신의 연왕에 대한 우유부단한 태도 때문에[16]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데 실패했으며 나아가 연왕이 세력을 회복하는 여유를 허용해 버려 점차 수세에 몰렸다.[17]
결국 결정적인 영락제의 남경 진격에서 사전에 내통한 궁정의 환관들[18]이 성문을 열어 수도 남경이 함락되었고 건문제는 불타는 궁궐 속에서 행방불명 되었다. 일설에는 그때 자살했다고 전해지고 또는 난전 중에 불에 타죽었다고 한다. 불을 끈 후 그의 아내 효민양황후 마씨의 시체는 환관에게 확인되었으나, 그의 시체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전설이 나돌게 되었다. 민간 전설 중에는 주원장이 건문제에게 상자 하나를 전해주면서 위기에 처했을 때 열어보라고 했는데, 그 안에서 주원장이 탁발승 때 쓰던 목탁과 바리떼가 나와서 중으로 변장을 하고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외에도 건문제가 실은 살아서 도망쳤다는 전설은 많이 있지만, 살았건 죽었건 간에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생사여부는 도저히 알길이 없다. 그런데 남경에서 1978년, 명 시대의 황궁 자리 근처에서 건물을 신축하려고 공사하던 중에 지하 통로를 발견했다. 때문에 건문제가 여기를 통해 도망쳤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으나 진실은 저 너머에.
참고로 건문제와 효민양황후 마씨 사이에서는 2남이 있었다. 당시 6살이던 장남 화간 태자 주문규#s-1(朱文奎)는 건문제와 함께 실종되었고[19] 1살이던 차남 윤회왕 주문규#s-2(朱文圭)는 영락제가 아기까지 차마 죽일 수는 없어 살려주긴 했지만 이후 56년 동안 유폐되었다.[20] 그는 1457년 그의 칠촌 조카 천순제 덕에 풀려났으나, 갓난아기 때부터 유폐되어 평생을 유폐당해서인지 바깥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유의 몸이 된 지 얼마되지 않아 죽었다.

4. 그의 행방에 대한 의문점


건문제의 행방은 명나라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되었고 영락제는 생전에 만약 혜제(건문제)가 살아있다면 지방의 군대를 이끌고 다시 반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심복들을 곳곳에 파견해 건문제를 찾게 하니 그중 하나가 바로 '''정화의 대원정'''이라는 설이 있다.[21] 또 영락제가 장삼풍을 초빙한 것도 실은 건문제를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22]
반대로 건문제가 이미 죽은 것을 알면서도 못 찾은 척했을 것이라는 음모론도 있다. 건문제를 살려두는 것은 위험하지만 황제이자 조카인 건문제를 대놓고 죽이는 것은 역시 정치적 부담이 상당하므로, 건문제를 비밀리에 죽였거나 건문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숨기고 행방불명으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궁궐 바깥의 삶에 익숙하지 않은 건문제가 마땅히 도와줄 사람도 없이 명나라의 촘촘한 행정체계에 발견되지 않고 도주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으리라는 주장이다.참고

5. 조선과의 관계


원래 주원장 시절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명나라는 조선의 건국과 이성계의 즉위를 승인하면서도 정작 태조 이성계에 대한 고명, 인신은 주지 않아 책봉을 하지 않았다. 고명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국왕 책봉 문서이며 인신은 조선 국왕(朝鮮國王)이라고 새긴 도장이다. 즉 공식적인 책봉의 표시였다. 명나라는 이것을 내리지 않고 그저 새롭게 왕이 된 이성계의 칭호를 권지국사(權知國事)로만 인정하였으며[23], 조선에서 '조선국 권지국사'라고 써보내도 명나라의 답신엔 항상 '고려국 권지국사'라고 써있었다. 왕조를 개창한 조선의 입장에서는 명나라에서 책봉 받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명나라는 이를 피한 것이다. 명나라는 초기만 해도 딱히 조선을 도와주거나 이롭게 해주는 일은 거의 없고 대체로 들들 볶아대는 일이 많았는데 이는 신생국 길들이기 측면도 있었다.
그러다 조선 입장에서 한번 제대로 기회를 얻은 것이 바로 건문제와 이 정난의 변 때다. 연왕보다 표면적으로 군사 수는 많았지만 군사력의 내실이 압도적으로 부족했던 건문제는 조선에 내전에 필요한 전마를 요청한다.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 조정에 인신을 요청했다. 건문제 입장에서 조선은 연왕 후방에 있는 나라였고, 따라서 해당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태종에게 고명과 인신을 주었다. 태종의 즉위에 이르러 드디어 '고려 권지국사'에서 '조선 국왕'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책봉을 받아내고도 어느 한쪽을 지지하지 않았다. 건문제에게 일부러 나쁜 군마를 조송한 관료를 보호하였고, 오히려 건문제가 전쟁에서 패하자 연왕이 영락제로 즉위하는 즉시 등극을 축하하면서 '건문' 연호를 금지하고 고명과 인신을 다시 반납한 다음 고쳐줄 것을 요청했다. 이것은 적장자가 아니어서 제위 계승 정통성에 결함이 있는 영락제를 중국의 정당한 천자로 인정하는 의미가 있었으므로 명나라 또한 수락하였다.

6. 여담


  • 일본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를 '일본 국왕'에 책봉한 황제는 바로 건문제다. 흔히 영락제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요시미츠가 일본 국왕에 책봉된 것은 1401년으로 건문제의 재위기다.
  •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낸 무협 소설이 '황제의 검'이다. 한백무림서에서도 죽었다고 알려진 것과 다르게 생존해 있다. 천잠비룡포에 어떻게 된 것인지 나오는데 그 당시 환관이 미리 준비해 둔 승복을 입고 도주했으나 왼손 손등과 오른발 발등, 등, 오른팔, 양 허벅지에 화상을 입었다. 그리고 자신이 황제로 있을 당시 호위를 맡고 있던 무명[24]이 궁무예에게 공격받고 사망하는 것을 본 후 시신이 떨어진 곳과 자신의 할아버지인 주원장의 묘에 합장한 후 떠나려고 했으나 결국 자신을 위해 목숨도 바치고자 했던 무명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다시 길을 떠나는 것으로 나온다.

7. 둘러보기




[1] 명나라(남명 제외)와 청나라 기준으로는 묘호가 없다.[2] 남명 홍광제가 추증한 묘호.[3] 명나라 영락제가 올린 시호. 혜제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 이후 남명은 새로운 시호를 올렸고, 청나라는 두 글자를 더한 공민혜황제가 됐는데 약칭은 종전과 똑같이 혜황제 또는 혜제였다.[4] 남명 홍광제가 추증한 시호. 약칭은 양황제 또는 양제이다.[5] 청나라 건륭제가 추증한 시호. 약칭은 혜황제 또는 혜제이다.[6] 단, 명사(明史)엔 공민제(恭閔帝)로 서술되어있다.[7]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서 능을 조성할 수 없었으므로 능호도 없다.[8] 영락제 즉위 후 이 연호를 사용했던 것 자체가 취소됐었다가 만력제 때 복구됐다. 자세한 설명은 본문을 참고할 것.[9] 명나라 황태자 주표의 후궁인데, 원래 황태자비가 상우춘의 여식인 '''효강황후 상씨'''인데, 효강황후가 태자비 시절에 죽었기 때문에 태자비 자리가 비었다. 그러나 여씨가 황태자비가 된 적은 없다. 1399년에 황태후로 올랐으나 1402년 정난의 변으로 인해 황태자비 신분으로 격하하였으며, 이후 '''황수의문황태자비(皇嫂懿文太子妃)'''의 호를 받았다.[10] 정난의 변 직후 신종(神宗)의 묘호와 효민황제(孝愍皇帝)를 올리자는 제안이 있었으나 영락제가 거부했다. 태묘에 건문제의 위패를 모시고 묘호를 올리면 태묘에 제사를 지낼 때마다 조카에게 절을 해야 하므로, 영락제로서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금나라해릉양왕이나 조선연산군처럼 황제나 왕이었던 사실 자체를 부정하진 않아서 혜황제라는 시호를 올린 것이다. 참고로 신종은 훗날 만력제의 묘호가 되었다.[11] 이에 따르면 1402년은 홍무 35년이 된다.[12] 건문제라는 호칭은 그가 사용한 연호인 건문을 따서 부르는 것이다.[13] 약칭 양(황)제이다. [14] 물론 약칭으로 부르면 종전과 똑같이 혜(황)제가 된다.[15] 흥종 강황제로 추존되었다.[16] 결정적인 승리 상황에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절대로 숙부를 죽이지 말고 생포하라"던가 하는 식의 애매하고 나약한 명령을 내렸다. 오죽하면 사서에서도 '''"오직 아녀자같은 어짊"'''이라고 돌려 깠을까. 한국과 중국 모두 조선왕조실록을 제외하면 왕조사 자체는 객관성 유지를 이유로 다음 왕조에서 만드는 게 보통이고, 명사 또한 청조에서 출판됐으며 애초에 명말도 아니므로 변명의 여지도 없다.[17] 이 건문제는 제태와 황자징이 항상 의견이 갈려서 두 명중 한 명의 의견을 선택해야 했는데 맨날 (결과적으로는) 좋지 않은 선택지를 고른 데다가 이경륭의 경우 황자징의 추천을 받아 정난군을 진압하러 나섰지만 연전연패하자 결국 황자징이 이놈을 죽여야 한다고 청하는 지경이 이르렀지만 건문제는 살려줬다. 하지만 이 이경륭은 막판에 건문제를 배신한다.[18] 홍무제가 개국 후에 중점적으로 족친 계층이 공신들과 환관이었다. 환관이 글을 아는 게 발각되면 살가죽을 벗겨 죽이는 등 과거 왕조들이 겪은 환관으로 인한 화를 최대한 막고자 한 정책을 폈으나, 당시엔 이러한 정책이 역효과를 부른 것. 반대로 이 일로 정권을 잡은 영락제는 환관에게 많은 혜택을 부여하였고, 이로 인해 '동창'으로 대표되는 환관 세력의 비대화를 초래해 명 왕조 막장의 단초를 제공하였다.[19] 건문제처럼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 어머니 마 황후처럼 불에 타서 죽어 시체가 완전히 불에 탔거나 도망쳤다는 설이 있는 건문제가 데리고 탈출했다는 설도 있다.[20] 잔혹한 행태이지만 영락제 입장에서는 정통성을 유지하자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반란세력들에게 이용당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21] 정화의 대원정을 다룬 중국 드라마 정화하서양에서는 이 설을 채용했다. 정화가 맨 처음 항해에 나섰을때 중국과 동남아시아 사이의 열대 섬에서 건문제의 흔적을 찾았고 항해에 능숙한 건문제의 신하를 잡아서 그를 기용해 대항해를 했다는 스토리로 전개된다.[22] 또는 "절대로 숙부를 죽이지 말고 생포하라"던가 하는 식의 애매하고 나약한 명령을 내린 건문제에게 고마움과 제위를 뺏은 미안함 때문에 살아서 나간 것을 알고도 모른 척 해줬다는 설도 있다.[23] 권지국사의 권지란 임시라는 뜻으로, 임시왕이란 뜻이다.[24] 황제의 호위로 어렸을 때부터 키워져 이름조차 가질 수 없었다고 한다. 황제의 최측근 호위 무장만 입을 수 있는 태천 갑주를 입고 있는 것이나 황제의 도주 때 미리 준비되어 있던 가사가 3벌이라는 것을 볼 때 당시에는 연왕이었던 주체의 자객들이 따라오지 않았더라면 그 후에도 함께 도주하려고 한 것으로 보이며, 마지막까지 함께 한 것을 볼 때 당시 건문제의 측근 무장 중에서는 무공의 경지가 가장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반쯤 미쳐있는 상태에서도 엽단평막야흔을 지법으로 제압하고 도주한 것으로 볼 때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고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