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넉번 전투
1. 배경
폴커크 전투의 참패 이후 스코틀랜드 독립군은 잉글랜드군과의 전면전을 극단적으로 회피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받은 에드워드 2세는 1309년과 1310년 2차례 스코틀랜드를 공격했지만 청야전술에 막혀 큰 소득 없이 철군해야 했다.
이후 잉글랜드-스코틀랜드의 싸움은 늪에 빠져드는데, 로버트 브루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북부를 휘젓고 다니다가 이를 토벌하기 위해 잉글랜드군이 쳐들어 오면 북부로 도망치는 상황이 1314년까지 반복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스코틀랜드의 지배권은 점차 로버트에게 조금씩 넘어가고 있었다. 1314년 3월 스코틀랜드군은 에든버러 성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스코틀랜드 땅에서 잉글랜드의 손에 남아있는 것은 보즈웰과 스털링 성뿐이었다.
한편 잉글랜드는 당시 에드워드 2세와 귀족간의 대립으로 내전 직전까지 치달은 상황이었다. 허나 1313년 10월 잉글랜드 귀족들이 형식적으로나마 왕에게 사죄함으로써 갈등은 임시봉합되었고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모든 역량을 모아 역대 최강의 스코틀랜드 정벌군을 조직하였다. 허나 계획만큼 병력이 모이는데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 스코틀랜드군이 스털링 성을 포위하고 있다는 소식이 에드워드 2세의 귀에 들어왔다.
그래서 6월 17일 잉글랜드군은 북진을 시작했다. 이때 잉글랜드군은 에드워드 2세가 직접 친정에 나섰고 병력은 스코틀랜드군의 2배가 넘어 압도적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로버트는 고민에 빠졌다.
사실 스코틀랜드군의 게릴라 작전도 이 당시쯤 되면 한계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특히 스코틀랜드 영주들은 잉글랜드군만 쳐들어 오면 도망치는 로버트를 신뢰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서 한번 싸울 필요성이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로버트가 내린 결론은 잉글랜드군과 정면으로 싸우지는 않되 기회가 보이면 언제는 공격할 수 있도록 천천히 조금씩 물러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스코틀랜드군은 배넉번 강이 흐르는 늪지를 앞에 두고 등 뒤에는 뉴 파크 숲 입구를 둔 채로 진을 구축했다. 정면으로는 잉글랜드의 대군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스코틀랜드 독립전쟁 최대의 전투가 다가오고 있었다.
2. 전개
[image]
전투 첫날 스코틀랜드군 전초부대는 잉글랜드군의 접근을 확인하고 퇴각해 본대에 합류했다.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이날은 늦었으니 본격적인 전투는 다음 날부터 시작될 것으로 여겼지만, 스코틀랜드군 전초를 추격해온 잉글랜드군 전위부대(주로 기사대)가 독단적으로 스코틀랜드군 본대를 향해 돌격하면서 갑작스레 전투가 시작됐다. 이 와중에 로버트 1세에게 돌격을 건 헨리 드 보헌이라는 기사가 있었는데, 로버트는 그의 랜스를 피한 뒤 곧장 도끼로 상대의 머리를 찍어버림으로써 손쉽게 승리를 챙겼다. 스코틀랜드군의 사기가 충천했음은 불문가지. 드 보헌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군 기사대가 스코틀랜드군을 향해 두 방향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허나 배넉번은 지형이 습지인 데다가 스코틀랜드군의 빽빽한 밀집장창벽(쉴트론)을 뚫을 수는 없었고 이윽고 잉글랜드 기사대는 패퇴했다. 이런 돌격이 두세 번 걸쳐 연속적으로 일어났으나 끝내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군의 진형을 돌파하는데 실패하였다.
[image]
둘째날 스코틀랜드군은 숲에서 나와 전면공세로 전환했다. 이는 잉글랜드 측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잉글랜드군이 전황을 파악하느라 시간을 헛되이 쓰고 있을 때 스코틀랜드 궁수들이 선공을 펼쳤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장기인 장궁병으로 응수했고 스코틀랜드 궁수들은 이를 당해내지 못하여 후퇴했다. 허나 그 사이 스코틀랜드 보병들이 창끝을 겨누며 잉글랜드군 목전에 도달해 왔다. 이에 잉글랜드 중기병이 스코틀랜드군을 향해 성급히 돌격해 들어갔으나 그들은 모두 스코틀랜드 보병이 만든 빽빽한 창날의 벽 앞에서 무참하게 붕괴했다. 잉글랜드 기병대를 격퇴시킨 로버트는 전군에게 총공세 명령을 내렸다. 당시 잉글랜드군은 개울과 잡목들으로 가득한 배넉번의 지형에 방해를 받아 진형을 구축하지 못한 상태였고 이에 더해 선두의 기병들과 얽혀 대혼란을 겪고 있었다. 로버트는 잉글랜드군이 수적 우세의 이점을 사용하지 못하게 최대한 밀어붙였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에드워드 2세는 장궁병들을 동원, 스코틀랜드군의 머리 위로 화살비를 쏟아붓도록 명령했다. 아마 이 화살비가 지속되었다면 스코틀랜드군은 폴커크의 참패를 반복했을 것이다. 이때 로버트는 지금까지 아끼고 있던 기병들을 투입했다. 그들은 잉글랜드 기사단보다 경무장이었고 수도 적었기에 정면승부는 승산이 없어 그동안 뒤로 빼놓은 것이었다. 곧 스코틀랜드 기병대가 잉글랜드 장궁병들을 덮쳤고 장궁병들이 전장에서 제거되었다.
양군의 싸움은 점차 절정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의 숫자는 여전히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들은 점차 상황을 파악하며 진형을 구축하는 중이었다. 반면 스코틀랜드군은 더 이상 예비대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자 로버트는 마지막 카드를 썼다. 일전에 후퇴해 있던 궁수들이었다. 그들은 곧 잉글랜드군의 머리 위로 죽음의 화살 소나기를 쏟아부었고 동시에 스코틀랜드 기병들이 잉글랜드군의 후미를 강타했다. 이를 예상못한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군의 공격으로 곳곳에서 무너지다가 마침내 패주하기 시작했다.
이후 '''거대한 승리의 함성이 전장을 뒤덮었다. 14년만에 스코틀랜드군이 야전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한 것이었다.'''
2.1. 승리의 원인
보병은 머릿수에서 2배나 열세이고, 궁수와 기병은 잉글랜드와 비교할 수 없이 압도적으로 질과 양이 떨어지는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군을 박살낸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유기적인 협동공세에 있었다.
확실히 스코틀랜드의 밀집 장창벽(쉴트론)은 무적의 방어력을 자랑했고, 클랜 중심의 무장화된 수렵, 목축 사회에서 징발된 하이랜더를 주축으로 한 켈트식 보병들의 충격력은 굉장했지만, 장궁병에게 너무나 취약했다. 이전에도 이후로도 인구나 자원, 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훨씬 우월한 잉글랜드를 상대로 야전에서 스코틀랜드가 열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스코틀랜드 측은 보병의 충격력 하나만 우위인 반면, 잉글랜드는 병력은 물론 장궁병 중심의 사격전이나, 기병대를 동원한 기동력 같은 다른 분야에서 모두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2][3]
로버트 더 브루스는 이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아군에 유리한 전장을 선택하고 가지 자르듯이 영국군의 기병, 장궁병, 보병들을 차례차례 격파해 나갔으며 최종 국면에서는 보병-기병-궁병의 총공세로 잉글랜드군의 숨통을 끊었다. 잉글랜드 측 장궁병의 견제 능력을 무효화시키는 한편, 스코틀랜드측의 우위인 보병의 돌격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밀착시켰고, 또 이 과정에서 주력인 보병의 피해를 최소화시키기 위해 열악한 궁병대를 방패로 내세우는 등, 상대와 자신의 능력을 깊게 파악하고 이에 주도면밀하게 대응한 교과서적인 지피지기 백전불태의 승리였던 것이다. 반면 잉글랜드는 지휘관의 무능 때문에 무작정 공격을 일삼았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잉글랜드군의 참패는 예상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3. 결과
'''스코틀랜드의 독립.'''
패배한 잉글랜드는 참담한 대가를 치뤘다. 기사만 1천여 명 가량 전사했고 보병은 반절을 잃었다. 에드워드 2세는 간신히 전장에서 빠져나와 도망칠 수 있었다. 잉글랜드 역사상 손에 꼽을 만한 큰 패배였다. 반면 스코틀랜드는 모든 것이 열세였던 상황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사실상 독립을 확정지었다. 무엇보다도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군을 평야에서 회전을 벌여 승리한 것은 스털링 전투 이후 14년만이라 군사적 자신감을 회복한 것은 물론 로버트 1세의 불안정했던 왕위도 안정되었다. 잉글랜드가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에 대한 모든 권한을 포기한 것은 1328년에 맺은 에든버러 조약이지만, 이 배넉번 전투 이후 스코틀랜드는 실질적인 독립 상태가 되었다.
4. 대중매체에서
영화 브레이브 하트 마지막 장면에서 "1314년 스코틀랜드는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되었다"라고 나오는 대사는 이 전투의 승리를 의미한다.
2018년 넷플릭스에서 로버트 1세를 주인공으로 하여 제작한 영화 아웃로 킹의 대미를 장식하는 전투인 라우든 언덕 전투는 사실상 배넉번 전투의 압축판이라 할 수 있다. 전투가 하루 안에 벌어지는 점을 제외하면 밀집 장창병진의 위력과 습지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중장기병 등 상당히 전사 고증이 잘 되어 있다.[4]
같은 이름의 칵테일이 존재한다. 스카치 위스키 1oz에 토마토 주스 3oz, 우스터셔 소스 1dash를 셰이크하고 하이볼 글래스에 담아낸 후 슬라이스 레몬으로 장식하면 완성. 블러디 메리와 비슷한 레시피지만 기주가 다르기에 맛도 상당히 다르다. 스카치 위스키는 스코틀랜드인의 영혼, 토마토 주스의 붉은 빛깔은 잉글랜드인의 피를 의미한다고 한다.
[1] 이 시기 잉글랜드는 국토의 대부분이 평지라서 기병의 양성이 쉬웠다. 특히 이 때는 여전히 프랑스 내에 많은 영토를 가지고 있어서 강력한 프랑스 중장갑 기사단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 반면에 스코틀랜드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 먹여살릴 농경지도 부족해 기병 전력 양성의 필수 조건인 풍족한 목초지 자체가 없었다. 거기다 스코틀랜드는 기병들이 말의 체급도 작고, 무장도 가볍게 해서 현대 베릭-어폰-트위드 일대의 국경 지방 노략과 약탈, 게릴라전에 특화된 국경 경기병대나 가끔 동맹국 프랑스에서 보내준 기사대 빼고는 제대로 된 기병 전력이 전무했다.[2] 이러한 중세 스코틀랜드 군대의 딜레마와 잉글랜드와의 비교 열세를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는 수단이 토탈 워 시리즈의 미디벌 2 스코틀랜드이다. 귀족 보병대나 귀족 검병대 같은 충격 보병 하나만은 게임 내 최강급을 다투는데, 제대로 된 궁병이나 기병은 아예 없다(...). 그나마 있는 궁병대인 하이랜더 귀족 궁병대는 본업인 사격보다 닥돌 근접 전투력이 더 강하다는 해괴하면서도 어찌 보면 고증이 틀리다고도 하기 힘든 스탯을 자랑한다. 그리고 이런 닥돌 근접보병 하나만으로 기병과 보병, 색색 장궁병 퍼레이드인 잉글랜드를 상대해야 한다.[3] 사족을 더 달자면 그나마 미디벌은 플레이어가 직접 전투를 조작하니 고수라면 현란한 컨트롤로 잉글랜드를 비교적 일찍 털어먹을 수라도 있지, 진짜 하드코어 플레이로서 잉글랜드를 상대하는 중세 스코틀랜드의 난이도를 느끼고 싶다면 Europa Universalis IV가 있다. 여기선 전투는 AI가 치루고, 게임이나 현실 역사에서도 몇번 있었던 넘사벽의 전력을 극복하고 대승을 이루는 군사적 기적이 거의 터지지 않다 보니 스코틀랜드는 세수나 동원 가능 인력이나 적어도 3~5배나 차이가 나며, 시작부터 스코틀랜드를 먹으려고 드는 잉글랜드를 상대로 진짜 똥줄플레이를 즐길 수 있다.(...)[4] 엄밀히 따지면 실제와는 상당히 다르다. 일단 잉글랜드 측은 장궁병이 등장하지 않고 스코트랜드군이 순차적으로 기병, 장궁병, 보병들을 제압했던 역사와 달리 초반부 기사 돌격을 장창 방진으로 막았던것 비슷하지만 후에는 난전만 지속되다가 스코트랜드군이 이기는 다소 맥빠지는 연출이다. 다만 이 모든 걸 구현해내려면 제작비가 훌쩍 뛰는 것도 사실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