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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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세기에 웨식스 왕조가 잉글랜드 전역을 통일하고 세운 왕국으로 927년에 웨식스 왕국이라는 국호를 잉글랜드 왕국으로 바꾸었다. 1707년에 스코틀랜드 왕국과 통합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어 사라졌다.
2. 역사
2.1. 잉글랜드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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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튼 섬에 유입된 앵글로색슨인들은 켈트인들을 스코틀랜드나 웨일스 등으로 몰아내고 8~9세기에는 부족마다 왕국을 성립해 최종적으로 칠왕국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서로 반목해 다투고 있었는데 이때 브리튼 섬에 바이킹들이 침략하게 된다. 칠왕국 중 하나인 웨식스의 국왕 알프레드 대왕을 중심으로 칠왕국이 연합해 앵글로색슨은 간신히 멸족을 모면했다.
하지만 바이킹은 계속해서 브리튼 섬을 침략해 브리튼 섬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웨식스는 이들과 전쟁을 벌여 이들을 브리튼 섬에서 몰아내기 시작했다. 앨프레드의 아들이자 웨식스 왕 에아르드웨아드(Ēadweard, 大 에드워드)와 앨프레드의 딸이자 머시아의 여군주 애설플래드(Æthelflæd)는 바이킹인들에 대한 방어를 공세로 전환했고 911년부터 918년까지 머시아의 동부 지방과 동앵글리아를 탈환했다. 918년 애설플래드가 죽자 웨식스가 머시아를 합병했다.
10세기 초 웨식스의 국왕 애설스탠은 바이킹을 몰아내고 칠왕국을 통일해 최초로 통일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에드거 1세 왕에 이르러서도 통일을 유지했다.
2.2. 바이킹과의 대결
이후에도 여전히 덴마크 바이킹의 침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991년 맬둔(Maeldun, Maldon) 전투에서 패한 잉글랜드는 덴마크의 조공국이 되었고 1013년 덴마크의 스벤 1세(스벤 트베스케그)에게 결국 정복당했다. 하지만 스베인이 1014년 2월에 급사하자 추방당했던 에델레드 2세가 그 틈을 타 1015년 다시 잉글랜드의 왕위를 차지했다.
1016년 덴마크의 왕이자 스베인 1세의 아들인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를 다시 정복했으나 당시 왕이던 에아드문드 2세(Ēadmund Isernside, 에드먼드 2세)의 지휘 아래 잉글랜드는 여전히 맞서 싸웠다. 결국 크누트 대왕이 노섬브리아, 머시아, 동앵글리아를 지배하고 나머지를 에아드문드 2세가 통치하기로 했고 에아드문드가 죽고 나서 잉글랜드 전체는 크누트 대왕에게 귀속되었다.
정복 이후 크누트 대왕은 직접 웨식스를 통치했지만 나중에는 고드윈(Godwin)을 백작으로 임명해 통치하도록 했다. 고드윈과 그의 아들 하롤드(해럴드 2세)는 거의 50년간 이 영지를 다스리면서 엄청난 부를 누렸고 당시 왕인 에아르드웨아드(참회왕 에드워드) 다음 가는 막강한 권력자가 되었다. 1066년 에아르드웨아드 왕이 죽자 해럴드가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르면서 웨식스 백작과 잉글랜드 왕이 통합되었다.
2.3. 노르만 왕조
하지만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 윌리엄 1세가 왕위 계승의 부당함을 명분으로 잉글랜드를 공격했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웨식스 왕조의 해럴드 2세가 전사함으로써 잉글랜드는 노르망디 공국에 정복되었고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노르만 정복 이후 잉글랜드는 노르만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예로 잉글랜드의 인구를 조사한 둠즈데이 북을 보면 정복 이전에는 2천명이 넘는 앵글로색슨 영주들이 있었는데 정복 이후에는 오로지 3백 명 내외의 노르만 영주들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노르만 문화는 잉글랜드 곳곳에 새롭게 지어진 성당과 대륙식 성채들을 기반으로 뻗어나갔고 이러한 노르만 문화의 전파는 북유럽 문화권에 속해있던 잉글랜드를 서유럽 문화권에 편입시켜 가기도 했다. 동시에 노르만족은 현지의 앵글로색슨인과 공존하면서 살아갔고 기존의 풍습, 문화, 법을 존중하고 다수 받아들이면서 그들을 지배했다. 학살을 통한 공격적 확장과 포용과 수용을 통한 현지민과의 공존이 동시에 존재하면서 발전해 나갔다.
정복자 윌리엄이 프랑스 왕의 신하였던 탓에 잉글랜드 왕의 위치는 애매한 관계에 놓였다. 노르만 왕조는 프랑스 왕국 내에서 봉토를 늘리는데 열중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잉글랜드 본토를 지배하기 위해 노력했고 아일랜드 섬까지 쳐들어가 지배하기도 했다.
2.4. 플랜태저넷 왕조
노르만 왕조의 헨리 1세는 하나뿐인 적자인 아들 윌리엄이 죽자 유일한 적장녀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5세의 황후인 마틸다를 여왕으로 즉위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잉글랜드에는 여왕이 없었기에 다른 왕족이나 귀족이 반발할 가능성이 컸고 헨리 1세도 그걸 우려해서 자신의 생전에 귀족들에게 마틸다에 대해 충성 서약을 시켰다. 여기에는 스티븐 역시 포함되어 있었으나 헨리 1세가 사망하고 앙주 백작과 재혼한 마틸다가 국외에 있을 때를 틈타 스티븐(스티븐 왕)이 그냥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해버렸다.
왕위를 찬탈당한 마틸다 공주는 남편인 앙주 백작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의 군사를 빌려 이복 형제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와 손잡고 내전을 개시했다. 사촌 간의 내전으로 잉글랜드 국내는 봉건 영주인 힘있는 가신들이 힘의 공백을 틈타 분열되고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침공까지 받았다.
이후 1153년 1월부터는 어머니 마틸다를 돕기 위해 아들 헨리가 군을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해 전쟁이 재개되었다. 내전이 계속되던 중 스티븐은 왕위를 물려주려고 생각했던 아들 외스타슈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자 실의에 빠져 헨리와 윌링포드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조약 내용은 스티븐의 왕위 승계는 인정하되 마틸다의 아들 헨리를 공동왕으로 삼아 다음 왕좌를 물려준다는 것이었다. 이듬해 스티븐은 켄트 주의 도버에서 사망했고 윌링포드 조약에 따라 마틸다의 아들 헨리(헨리 2세)가 단독 통치자로서 즉위해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
헨리 2세는 앙주 백작의 직위를 물려받고 아키텐 공작령의 상속녀 아키텐의 엘레아노르와 결혼함으로서 프랑스 왕국 내에 막대한 봉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후 잉글랜드 왕에 오르자 헨리 플랜태저넷의 영지 역시 잉글랜드 왕실의 영지로 포함되면서 잉글랜드 왕실이 프랑스 내부에 막대한 영토를 거느리게 되었다. 이로서 명목상 프랑스 왕의 신하였던 잉글랜드 왕이 가진 영토가 프랑스와 맞먹을 수준이 되었다.
리처드 1세 시기에는 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맹활약했으나 결국 성지 탈환에 실패한데다가 내정도 어려워졌다. 그 다음 왕이었던 존 왕은 결지왕, 실지왕, 무영토왕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프랑스 왕국 내 플랜태저넷의 영지를 대부분 상실한다. 이런 존 왕의 실정에 귀족들과 국민들이 존 왕을 협박해 마그나카르타(대헌장)를 받아냈다.
이후 에드워드 1세 시기에는 의회가 최초로 소집되고 웨일스를 복속시켰다.[3] 스코트인들의 망치라는 별명답게 스코틀랜드도 정복해 잉글랜드 왕인 그가 스코틀랜드 왕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로버트 1세에게 패배해 결국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서 쫓겨났다.
에드워드 3세 시기가 되면 플랜태저넷이 가진 프랑스 내 잔존 영토에 대한 지배권과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 등이 겹쳐 백년 전쟁이 일어났다. 초반에는 장궁을 앞세워 승리를 거듭했지만 잔 다르크를 앞세운 프랑스의 반격에 밀려나 칼레를 제외한 모든 대륙 영토를 상실하고 쫓겨난다.
백년전쟁이 끝나고 2년 후인 1455년 장미전쟁으로 불리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분파인 랭케스터와 요크의 대결이 30년간 벌어졌고 결국 헨리 튜더가 왕이 되었다.
2.5. 튜더 왕조
헨리 7세는 왕이 되었지만 정통성 문제로 반란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그 반란들을 진압하고 왕실의 땅을 엄청나게 늘렸고 그의 치세에 세무 행정을 엄격하게 집행해 재정적으로 매우 풍족해졌다.
헨리 8세가 즉위하면서 잉글랜드는 큰 변화를 맞게 된다. 헨리 8세의 결혼 문제와 잉글랜드 교회-로마 가톨릭의 대립 등의 문제가 겹쳐 헨리 8세가 가톨릭과 연을 끊고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를 창설해 자기가 그 수장을 하겠다고 한 것이다. 뜬금없이 국교회를 선포한 것은 아니어도 가톨릭에서는 엄청난 반발을 보였지만 헨리 8세는 무력 탄압과 수도원 재산 몰수로 대응했다. 그러나 성공회가 바로 확고한 주류에 올라서는 것은 불가능해 메리 1세가 다시 국교를 가톨릭으로 돌렸다가 엘리자베스 1세가 다시 국교회를 국교로 지정하는 등 종교 문제로 갈등이 심각했다.
그 와중에도 튜더 왕조는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독무대였던 아메리카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엘리자베스 1세는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시켜 스페인의 상선을 약탈하고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했고 본격적으로 북미 개척에 나섰다.
2.6. 스튜어트 왕조
엘리자베스 1세는 후사 없이 죽었고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던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이로써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은 동군연합을 이루었다.
왕이 영향력이 강했던 잉글랜드와 달리 스코틀랜드는 제임스 1세가 직접 '베네치아 도제만도 못하다'고 할 정도로 권력이 보잘것 없었을 뿐더러 네덜란드의 부상으로 해상 제국으로의 팽창에 제동이 걸림에 따라 재정이 악화되어 왕권도 약화되기 시작했다. 헨리 7세가 귀족들을 견제하겠다고 등용한 요먼과 젠트리들은 왕에 맞서기 시작했고 제임스 1세는 비록 이들과 대립을 벌였지만 그럭저럭 타협하면서도 안정적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다스릴 수 있었다.
하지만 찰스 1세에 이르면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찰스 1세도 재정적으로 쪼들리기는 마찬가지였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만큼의 타협 능력이 없었다. 그는 의회를 장악한 요먼, 젠트리 청교도들과 정치적, 종교적, 재정적 이슈로 극심한 대립을 벌였고 결국 잉글랜드 내전이 일어났다. 찰스 1세는 잉글랜드 내전에서 패배했고 결국 목이 잘려 왕의 권위는 큰 타격을 받았다.
찰스 1세를 처형한 올리버 크롬웰은 잉글랜드 왕국(아일랜드 왕국이 병합되어 있었다)과 스코틀랜드 왕국의 왕정을 폐지하고 잉글랜드 연방을 선포했으나 그가 죽자 얼마 못가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즉위했다. 크롬웰의 통치에 질린 영국 백성들은 찰스 2세에 강력한 지지를 보냈고 찰스 2세도 찰스 1세보다는 정치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해 의회와 타협하면서도 의회에 우위를 점하면서 다스릴 수 있었다. 제임스 2세는 찰스 2세만큼 유연하지는 못했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소수파로 밀린 가톨릭 신자였다. 결국 의회는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를 몰아냈고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가 공동 왕으로 즉위했다. 두 왕의 즉위와 함께 권리장전이 승인되어 왕의 권한에 큰 제약이 가해졌다.
한편 크롬웰 시기부터 해상 패권을 장악하는 데 노력했던 덕분에 다시 네덜란드를 밀어내고 해상의 패자로 등극할 수 있었다. 이 때가 되면 유럽에서 강대국으로 인정받아 당시 유럽 최강국이었던 프랑스 왕국을 견제하는 등 유럽의 세력 균형 유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윌리엄 3세 사후 앤 여왕 치세에 스코틀랜드 왕국에서는 잉글랜드 왕국과의 연합 왕국 형성을 제의했고 이것을 수락하면서 두 왕국이 연합해 1701년에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