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단대전

 

1. 개요
2. 발단
3. 전개
4. 결말

百團大戰

1. 개요


1940년 8월 20일 ~ 1941년 1월 24일까지 허베이성에서 팔로군 대 일본군의 전투, 이 전투는 팔로군이 독자적으로 한 유일한 대규모 공세이며 100개 단(연대)이 참여했다고 해서 백단대전이란 이름이 붙었다.
중일전쟁이 벌어진 이래 공산당은 명목상 항일을 외쳤지만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오히려 세력확장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백단대전은 공산당 지도부가 조직적으로 작전을 세운 게 아니라 류보청과 덩샤오핑의 '진지위루 변구'[1]에서 시작된 국지전에 타 변구와 부대들이 참여하면서 확대된 우발적인 성격이 더 강했다.

2. 발단


일본군이 진지위루 변구를 봉쇄하고 압박을 가하자 1940년 류보청(劉伯承)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화북의 철도 인근의 일본군 거점들을 기습공격하기로 결심하고 팔로군 참모장 펑더화이에게 건의했다. 펑더화이는 류보청 단독으로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어려울 것이라 여겨 7월 22일 진지위루 변구와 진차지 변구가 연합해 22개 연대 4만명으로 정타이(正太) 철도를 공격하기로 한다.

3. 전개


8월 8일 팔로군 총사령부에서 예하부대에 작계가 하달되었고 8월 20일부터 작전이 개시되었다. 주 공격목표는 정타이 철도와 통푸 철도 주요 간선도로 파괴 및, 산시성과 허베이성 일대에서 일본군의 활동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병력 부족으로 소대,중대 단위로 흩어져 있던 일본군은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받자 하나하나 각개격파당하기 시작했고 다른 변구들 또한 참여하면서 공격의 범위가 늘어나 작전종료가 되는 12월 5일까지 화북전역에서 팔로군 115개 연대 40여만명이 참가하였다.

4. 결말


팔로군은 대소 전투 1,824회를 치르는 동안 474 km의 철도 파괴, 2만 명의 일본군과 5천여 명의 친일괴뢰군을 사상했으며 팔로군의 사상자는 2만 2천명이라고 전과를 발표했다. 반면 일본군은 사상자 476 명에 교량파괴 73회, 터널 파괴 3회, 역 20개소 소실 ,철도파괴 44 km라고 피해를 발표했다.
사령관인 펑더화이는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도 마오쩌둥에게 갈굼(...)을 당하고 자아비판까지 해야 했는데 팔로군 전력을 최대한 확장하고 보전해 장제스와의 내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여겼던 마오쩌둥에게 있어서 이러한 공세는 팔로군에 손실만 줬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2]
한편 이 전투에 조선인 독립운동가인 김무정(金武亭 1905~1951)[3][4]도 1천 명의 포병단을 이끌고 참전하여, 팔로군을 도와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여담으로 이 전투를 소재로 해서 2015년에 장옥중 감독과 저해강 연출가가 만든 백단대전 (The Hundred Regiments Offensive)이 개봉하였다. 중국 공산당의 미화가 좀 많이 나오지만 전쟁 역사물로는 아주 잘 만들어진 수작인 작품이다. #

[1] 변구란 변경의 공산당(共産黨) 자치 군정 지구(地區)를 말한다.[2] 실제로 중화권 내의 반공주의자들은 항일전을 이용해 국공내전에서 승리했으면서 국민당군으로 참가했던 노병들을 찬밥대우한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체제선전을 위해서 2000년대 이전까지 항일전에 참전한 팔로군을 제외한 국민당군 노병들은 항일전쟁승전기념식에 참가시키지 않았다. 다만 최근에는 중국공산당에서 이념문제보다 민족문제를 더욱 부각시키는 터라 부대소속과 관련없이 국민당군복을 입혀서 참전노병들을 열병식에 참여시키는 모습을 보이곤 있지만 확실하게 말하자면 항일전의 공은 공산당보단 국민당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3]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에 참가했으며, 그가 거느린 조선의용군은 무려 8천 명의 대병력을 보유한 강력한 조직이었다. 김무정은 뛰어난 포술로 유명했으며, 허형식(許亨植 1909~1942)과 함께 조선인 항일 빨치산 중에서 가히 전설적인 인물로 손꼽혔다. 독립투쟁의 규모로 따진다면, 가장 눈부신 활약을 한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4] 단, 활약상에 비해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데, 이 사람은 한국전쟁때 조선인민군 2군단장으로 침략의 선봉에 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