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마오쩌둥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



-



-

-

-

-

-

-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주석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초대 주석
마오쩌둥
毛泽东 / 毛澤東 | Mao Zedong
'''
<colbgcolor=#de2910> '''이름'''
간체: 毛泽东 / 정체: 毛澤東
(병음: Máo Zédōng)
한국 한자음: 모택동
'''출생'''
1893년 12월 26일
[image] 청나라 후난성 샹탄 현 사오산 구[1]
'''사망'''
1976년 9월 9일 (향년 82세)
[image]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중난하이
'''국적'''
[image] 청나라 ,(1893~1912),
[image] 중화민국(북) ,(1912~1928),
[image] 중화민국(국) ,(1928~1931, 1937~1949),
[image] 중화소비에트공화국 ,(1931~1937),
[image] 중화인민공화국 ,(1949~),
'''신체'''
178cm→172cm[2], 86kg
'''부모'''
아버지: 마오이창(毛贻昌) ,(1870~1920),
어머니: 원쑤친(文素勤) ,(1867~1919),
'''배우자'''
뤄이슈(罗一秀)
양카이후이(杨开慧)
허쯔전(贺子珍)
장칭(江青)
'''자녀'''
장남: 마오안잉
차남: 마오안칭
삼남: 마오안룽(毛岸龙)
장녀: 양웨화(杨月花)
차녀: 리민(李敏)
삼녀: 리나(李讷)
사녀: 마오안훙(毛岸红)
'''형제자매'''[3]
넷째 남동생: 마오쩌민
막내 남동생: 마오쩌탄(毛泽覃)
여동생: 마오쩌젠(毛泽建, 양녀)
'''학력'''
후난성 사오산 초등학교 졸업
광둥 성 광저우 둥산 중학교 수료
후난성 창사 샹샹 중학교 수료
후난성 창사 저우청 중학교 수료
후난성 창사 제1중학교 졸업
후난성 창사 제1사범 학교 졸업
'''종교'''
불교[4]무종교 (무신론)
'''정당'''

[ 역임한 지위 ]
<colbgcolor=#de2910>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주석'''
'''임기'''
1945년 6월 19일 ~ 1976년 9월 9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임기'''
1945년 6월 19일 ~ 1976년 9월 9일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임기'''
1954년 9월 8일 ~ 1976년 9월 9일

1. 개요
2. 상세
2.1. 이름의 표기
3.1. 가족
3.2. 마오가 점지한 후계자들
5. 마오쩌둥의 성격
5.1. 지도력
5.2. 권력의 달인
5.3. 군대식 사고
5.4. 전략적 허세
5.5. 대인적 면모
6. 마오의 사생활
7. 사상
7.2. 사상적 뿌리
7.3. 혁명 이론
7.4. 군사 이론
7.5. 네팔, 인도의 마오주의자들, 낙살라이트
8. 어록
9. 관련 서적
9.1. 평전
9.2. 선집, 개인적인 면을 다룬 책들
10. 그 외
12. 참고 문헌
13. 관련 문서
13.1. 인물
13.1.1. 공산당
13.1.2. 국민당
13.1.3. 해외
13.2. 사건

[clearfix]

1. 개요


중국공산주의 혁명가, 정치인. 사상가, 전략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주석이자 국부. 1949년부터 1976년 죽을 때까지 집권한 독재자이자 학살자이다.
천안문 광장에 걸려있는 대형 초상화의 주인공이다.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어 중국 본토를 차지하여 강대국이 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지만, 집권 기간 동안 과도한 학살을 자행했으며, 1958년부터 시행한 대약진운동[5], 1966년부터 시행한 문화대혁명[6]으로 인하여 중국의 발전을 동시에 크게 정체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가장 많이 분석되는 인물들 중 하나로, 중국 내에서는 그를 '공칠과삼'[7] 으로 평가하고 있다.[9]

2. 상세


수백 명의 병력을 거느린 게릴라 부대 지도자로 시작해서 수백만 대군을 거느린 정적을 격파하고 중국 대륙을 손에 넣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집권 이후 여러 실책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들을 여럿 야기했으며, 여러 실책악행을 저질러 중국인 수천만 명이 사망했다. 소련이오시프 스탈린, 1970년대 말 크메르 루주 정권 시기 캄보디아폴 포트, 조선노동당인간말종 김일성 등과 더불어 냉전 시대의 가장 냉혹한 공산주의 독재자로 평가 받는다.
즉 객관적으로 보면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 마오쩌둥은 뛰어난 군사 전략가이자 이론가로서 혁명을 성공시키고 천하를 얻은 대단한 인물이긴 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은 엄청난 악행을 저질러 수억의 인민에게 최악의 고통을 선사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차지할 수는 있으나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라는 중국 격언을 스스로 증명한 사람이며, 지금까지도 극단적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그저 유명한 공산주의 정치가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인물이다. 이념과 진영에 관계 없이 마오쩌둥은 권력의 흐름과 대중의 심리를 정확히 읽어내는 탁월한 감각과 대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 그리고 뛰어난 문장력으로 수많은 이들을 매혹시켰으며, 이렇게 모은 추종자들을 바탕으로 평생동안 권력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또한 현대 게릴라 전술을 완성한 군인이자 중국 대륙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정치 지도자이면서 농민을 혁명의 주력으로 내세운 중국식 공산주의 이론을 창시한 사상가이고, 동시에 뛰어난 문장력을 자랑하는 저술가이자 시인이다.
그래서 이오시프 스탈린을 격하시킨 니키타 흐루쇼프와는 달리, 마오가 죽은 뒤 새로운 중국의 절대자로 등극한 덩샤오핑도 마오와는 정반대의 정책을 실시했지만 "마오쩌둥의 공과는 7:3"이라고 주장하며 그를 신화적 위치에서 끌어내리진 않았다.[10] 소련에는 스탈린이 없어도 블라디미르 레닌이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 가능했으나[11], 마오쩌둥의 위상은 중국에서 다른 인물로는 대체 불가능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그에 대한 비판이 민감하다.[12]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신봉하는 이념을 위해서, 또는 권력을 유지하려고 인간을 서슴없이 도구로 사용하고 어떠한 인명손실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냉혹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신념과 절대권력을 유지하려 한 욕구 때문에 수천만 명이 굶어 죽거나 맞아 죽고, 나머지는 하루 한 끼 먹는데 급급한 최빈국으로 전락하고는 등 중국의 문명은 일시에 후퇴하였다.
이 때문에 현대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에 대해서는 존경과 원망이 섞인,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맨몸을 일으켜서 아편전쟁 이래 100여 년간 계속된 천하 대란을 종식하고 천하통일을 이룬 면으로 보면 유방이나 수문제, 조광윤, 주원장 급의 인물이지만[13] 집권 이후에 과대망상적이고 급진적인 시책으로 대재앙과 혼란을 가져온 것을 보면 왕망이나 동탁, 수양제 급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 중국 역사의 맥락에서만 나올 수 있는 영웅악당의 일면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애증이 엇갈리는 인물이다. 쉽게 말해 '''20세기판 진시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찌하던 공식적으로는 현대 공산중국을 탄생시킨 국부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모든 위안화의 앞면에는 마오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베이징에 있는 천안문 광장에는 초상화가 걸려 있다.

2.1. 이름의 표기


한국식 한자 독음인 '모택동'이라는 표기 역시 널리 쓰이며[14] 연변 자치주와 북한의 경우에는 한국 한자 독음 쪽이 표준이다. 한어병음 방안이 확립된 후에는 성조 부호를 생략하여 Mao Zedong으로 쓰는데, 과거에는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에 따른 표기(Mao² Tsê²-tung¹)에서 성조 번호와 diacritics을 생략하여 Mao Tse-tung이라고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영미권의 문헌 중에는 Mao Tse-tung으로 표기된 문헌이 많다. 여담으로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에서도 이 표기를 쓰고 있다.
한어 병음 철자 dong에 o가 들어가기에 '동(똥)'으로 적어야 옳지 않은가 하는 견해가 있지만, 해당 음절(ㄉㄨㄥ)의 발음은 [tʊŋ]이며 대략 '동(똥)'과 '둥(뚱)'의 중간발음이다. 이 [ʊ] 모음을 한어 병음에서는 o로, 웨이드 - 자일스 표기법에서는 u로,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ㅜ'로 해석하여 표기할 뿐이다.[15] 즉 '마오쩌둥'이라는 표기는 잘못된 게 아니다.
이두호 화백의 머털도사에서 요괴 대장 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이던 요괴 이름이 '못된동'이다.

3. 생애




3.1. 가족


마오쩌둥은 생전 4명의 아내를 만났다. 공교롭게도 아내, 아들, 딸이 죄다 각각 4명씩이다.
  • 첫번째 아내 뤄이씨우(羅一秀(라일수), 1889년 ~ 1910년)와는 1907년에 결혼해서 1910년까지 부부로 지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없었다. 마오쩌둥은 뤄씨를 자신의 아내로 여긴 적이 없기 때문에 성관계도 맺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 두번째 아내 양카이후이와는 1921년에 결혼했으나, 1927년까지 부부로 지내다가 헤어져서 이후 양카이후이는 국민당에게 체포 당했다. 그 후 양카이후이는 창사 폭동 직후인 1930년 10월 호남성 정부주석 허젠에게 체포되어 남편과 의절할 것을 요구받았으나 거절했다가 11월 처형 당했다. 둘 사이에서는 아들이 3명이 태어났는데 장남 마오안잉6.25 전쟁에 중공군으로 참전했다가 UN군의 폭격을 맞고 전사했다. 차남 마오안칭(毛岸靑(모안청), 1923년 ~ 2007년)만 유일하게 천수를 누렸으며, 3남 마오안롱(毛岸龍(모안룡), 1927년 ~ 1931년)은 어린 나이에 국공내전에 말려들어 사망했다.
  • 세번째 아내 허쯔전(賀子珍(하자진), 1910년 ~ 1984년)과는 1928년 5월에 결혼해서 1939년까지 부부로 지냈는데, 사실상 양카이후이와 헤어지자마자 바로 결혼한 것이다. 허쯔전은 단순한 아내로만 끝난 게 아니라 마오쩌둥과 함께 대장정에도 참가한 전우이기도 했다. 둘 사이에서는 4남 마오안홍(毛岸紅(모안홍)1932년 ~ 1971년)과 장녀 양위에화(楊月花(양월화), 1929년 ~ 1973년), 이름을 알 수 없는 차녀, 3녀 리민(李敏(이민), 1936년 ~)이 태어났다. 이혼 20여 년 후 허쯔전과 마오쩌둥이 오랜만에 만나 담소를 나누자 이를 질투한 장칭의 핍박을 받아 오지로 추방되었으나, 마오쩌둥 사망과 장칭 숙청 이후 중앙 정계로 복귀하여 천수를 누렸다.
  • 네번째 아내 장칭(江靑(강청), 1914년 ~ 1991년)과는 1939년에 결혼했으며, 마오쩌둥이 죽을 때까지 마오쩌둥의 아내였다. 둘 사이에서는 4녀 리나(李訥(이눌), 1940년 ~) 한 명만 태어났다.
마오쩌둥은 생에 초반에는 격동의 세월을 살아왔기 때문에 아내가 자주 바뀌긴 했으나, 1940년 이후부터 마오쩌둥이 자리가 잡혀서인지 마지막으로 결혼한 장칭과는 백년해로했다.[16] 슬하에는 총합 4남 4녀를 두었다.
2018년 4월 22일 북한 황해도에서 발생한 대형 교통사고로 마오쩌둥의 차남 마오안칭의 아들 마오신위가 사망하였다는 보도가 나왔다. # 마오신위는 중국인민해방군 군사과학원 전쟁이론과 전략연구부 부부장 등을 역임한 군인으로, 큰아버지 마오안잉도 묻혀있는 평안남도 회창군에 있는 중공군 참전 사망자 묘역을 다녀오던 길에 변을 당했다고. 하지만 홍콩 언론이 마오쩌둥의 당질녀에게 확인한 결과,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
2018년 5월 4일 마오쩌둥 손자 마오신위가 공개석상에 나타났다. 관련 기사.
마오신위의 슬하에는 1남 1녀로 아들이자 마오쩌둥의 증손자인 마오둥둥(모동동, 2003~)과 딸이자 마오쩌둥의 증손녀인 마오티안위(모감의, 2008~)가 있다.

3.2. 마오가 점지한 후계자들


마오가 처음 후계자로 점찍었던 것은 고향 후배 류사오치였다. 류사오치는 대장정 중의 쭌의회의에서 마오를 지지하여 마오가 당권을 되찾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를 신임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류사오치는 점점 떠오르게 된다.
대약진운동 실패 이후 마오쩌둥은 이에 책임지고 사임하고, 1959년 류사오치가 국가 주석 직에 오르자 류는 마오쩌둥의 정책을 뒤집기 시작한다. 이때 마오쩌둥은 한때 자신이 후계자로 내세웠던 류사오치가 자신의 실권을 서서히 배제하려 하자 배신감을 느끼고 그를 타도하려고 술책을 쓴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으로 류사오치는 실각하고 귀양 가서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다.
그 이후 떠오른 것은 린뱌오였다. 사실 린뱌오와 마오쩌둥은 그다지 연분이 깊지 않았다. 그럼에도 린뱌오가 펑더화이와 류사오치의 숙청을 도운 데다가, 국방부장 재임시에 중, 인 분쟁에서 인도군을 대파했기 때문에 린뱌오는 "마오주석의 친밀한 전우"로 떠올랐다. 하지만 린뱌오는 마오쩌둥 사후 권력 후계 문제를 놓고 마오쩌둥과 대립하였고, 결국은 마오쩌둥을 암살하고 권력을 찬탈하려는 쿠데타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하여 도망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그 다음에 떠오른 것이 4인방의 1명이던 왕훙원이다. 초등 중퇴인 일자무식이었던 왕훙원은 문화대혁명 당시 상하이에서 조반 운동을 하며 떠오르고 곧 문화대혁명의 중심 인물이 된다. 그리하여 중앙 정계로 발돋음했고, 마오쩌둥은 그를 눈여겨보다가 후계자로 삼으려고 여러 책임을 맡겼다. 하지만 그릇이 아니었던 왕훙원은 마오의 기대를 저버리고 중앙 정계에서 권력에 탐닉하고 여러 실무에서 무능을 보이는 등의 실책을 보이다가 눈 밖에 났다.
마지막으로 마오쩌둥이 선택한 사람은 후난성 고향 후배인 화궈펑이었다. 당시 후난성 당서기를 맡고 있었고 중앙 정계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인물이었는데, 마오쩌둥은 그가 문화대혁명을 계속하리라고 기대하고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마오 사후에 화궈펑은 사인방을 숙청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는 듯 했으나, 결국 노회하고 당 커리어가 훨씬 높았던 덩샤오핑에게는 역부족이어서 권력을 빼앗기고 만다. 결국 마오쩌둥이 점지한 후계자들은 하나같이 모두 실패한 셈.

4. 평가




5. 마오쩌둥의 성격



5.1. 지도력


[image]
사람을 다루는 데 능했고 지도력이 좋았다. 그리고 성격 자체는 매우 친화력이 뛰어났다.[17] 그의 지도력이나 인망이 이렇게 대단했기 때문에, 건국 후 아무리 잘못된 정책을 들고 나와도 부하들이 반대하지 못해 오히려 참극을 빚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편집광적으로 의심이 많았고 사소한 비판도 용납하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았으며, 관용을 베푸는 것을 "가족주의"라고 하면서 매우 깠다. 일단 그는 한 번 원한을 품으면 잔인하고 비정하게 숙청했다. 이러한 면이 문화대혁명을 불러왔다고 평가된다.
당 내의 그의 전직 라이벌들(장궈타오, 왕밍 등)은 결국 모두 당이나 중국을 떠나 망명했고, 그의 부하였으나 그에게 반대해 밉보였던 펑더화이류사오치, 덩샤오핑, 주더 등은 모두 쫓겨났다. 그래도 생존/재기에 성공했던 주더, 덩샤오핑과는 달리 펑더화이와 류샤오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5.2. 권력의 달인


세기의 독재자답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웬만한 독재자면은 대약진 운동 실패로 책임을 지고 몰락하겠지만, 마오쩌둥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정치에 아주 능했고,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면 부하들에게 덮어씌우는 행동에 능했다. 그래서 대약진 운동 실패에 최대한 교묘하게 책임에서 비껴나와 계속해서 인민들에게 황제와 같은 위치를 계속 점할 수 있었다. 이는 마오쩌둥이 개인 우상화에 얼마나 능한지 보여주는 역사이기도 한데,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을 소재로 우상화 교과서를 만들면서 수많은 학생들과 젊은이들을 사로잡았으니 권력에 관한 능력에서는 의심할 바가 없었다. 문화대혁명 직전 권력을 완전히 회복한 마오쩌둥은 이전보다 더욱 중국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는 그의 무시무시한 정치력을 알 수 있는 일화이기도 하다.
마오쩌둥은 이른바 '2인자 박치기'에 아주 능했다. 그는 어느 한편에 힘을 실어주다가도 너무 힘이 몰린다 싶으면 다른 쪽으로 다시 힘을 몰아주는 식으로 철저하게 권력의 저울을 팽팽하게 유지했다. 류사오치, 덩샤오핑, 린뱌오, 4인방, 저우언라이와 같은 인물들이 이런 식으로 제한된 권력을 가졌다가 몰락을 반복하는 식으로 관료 생활을 했으며, 주류 세력이 바뀔 때마다 계파 세력은 숙청을 당하고는 했다. 이런 권력 유지에 대한 촉은 죽기 직전까지 무척이나 예민해서, 숨이 껄떡껄떡 넘어가는 와중에도 덩샤오핑에게 힘을 실어주었다가 다시 힘을 빼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었을 정도. 그래서 마오쩌둥의 부하들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의 경우에는 국공내전 때까지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만 이후 2인자 경쟁을 하면서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졌을 정도(덩샤오핑 평전 참조).

5.3. 군대식 사고


전문적으로 군사 교육을 받은 바 없지만, 게릴라 지도자로서 사고가 군대식으로 굳어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은 실전에서 총을 쏴본 적이 거의 없으며, 게릴라 시절의 사진 중에서도 군복 차림은 많지만 총을 차고 있거나 들고 있는 사진은 거의 없다.
그래서 부하들이 자신의 명령에 토를 다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항상 정책이든 뭐든 간에 군대식으로 사고했으며, 일단 적으로 간주되면 무조건 섬멸해야 직성이 풀렸다고 한다. 그것이 잘 나타난 일화가 "저 새는 해로운 새다". 마오의 사상에는 못지않은 "정신주의적" 일화가 많은데, 마오주의가 뿌리는 정신주의에 맞닿아 있으므로 비슷한 문제가 나타났다. 대약진운동도 끝까지 "정책이 문제가 아니라 인민의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자신을 옹호했다.
원래 고집이 센 성격이었지만, 중국의 주석으로 확실하게 권력을 잡은 이후에는 더욱 고집이 세졌다고 한다. 원래 고집 없는 독재자는 없다고들 하지만 스탈린이 독소전쟁 시절 장군들의 말을 듣고 또 자신의 정책이나 전략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이며[18] [19]최소한의 융통성이나 유연성을 보여준 반면, 마오쩌둥은 그만큼의 융통성마저도 보여주지 못했다. 대약진 운동 초기 천윈, 저우언라이, 류사오치가 소극적으로 반대의 뜻을 내비치자 불같이 화를 내며 자아비판을 강요했을 정도. 또한 대약진운동의 파멸적인 결과가 차츰차츰 드러났을 때 펑더화이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해임시키는 모습을 보였고, 이 모습을 본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는 찍소리도 못하고 마오쩌둥의 뜻을 따랐다. 본인은 대약진 운동문화대혁명의 실행 도중에 예상치 못한 부작용은 있었을지라도 방향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고 죽을 때까지 믿었다.

5.4. 전략적 허세


'''어떤 이는 미래의 세계대전으로 절반 이상이 죽고 나머지 절반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는 정말 미친 자다.'''

부쿠레슈티에서 개최된 루마니아 공산당 대표 대회에서 흐루쇼프가 마오쩌둥을 겨냥해서 쏟아낸 비판.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첫 번째 일화.

1957년 11월 러시아 혁명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 왔을 때 니키타 흐루쇼프의 도취감은 최고조에 달해있었다. 최초의 ICBM스푸트니크 위성이 막 발사되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이 새로운 지도자를 싫어했고 탈스탈린주의에 대해 반대했지만, 이 감동적인 기술의 위업은 "객관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대의를 진전시켰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따라서 "동풍이 이제 서풍을 압도하고 있다"는 선언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무한한 인력과 "제3세계"에서 솟아나는 혁명적 조류와 합쳐질 때 소련 군사력의 이 새로운 조짐은 "사회주의의 힘이 제국주의의 힘을 압도할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우리는 전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며 모인 동지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회상한다.

"우리는 원자탄과 미사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재래전이든 핵 전쟁이든, 어떠한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중국의 경우, 만일 제국주의자들이 우리에 대해 전쟁을 시작한다면, 아마 3억 명 이상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전쟁은 전쟁이다. 세월은 지나갈 것이고, 우리는 이전보다 더 많은 아기들을 낳으며 일할 것이다."

단, 이것은 좀 더 당시 사정을 감안해야 한다. 이 상황을 잘 모르면 뭔 대륙의 기상 내지 중2병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이 말은 전략적인 계산하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을 한 1950년대 후반은 중국은 핵무기가 없었지만 양대 핵 강국인 미국소련 모두 적대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핵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양 강대국이 유사시 중국에 핵 공격을 하려 할 때 한 번쯤 재고하도록 허풍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저런 대외 발언을 마오쩌둥의 성격이라고 곧이곧대로 생각하는 건 무리다.
마오가 저런 말을 하면서 핵무기가 쓸모 없다고 주장했지만, 뒤로는 핵 개발을 시도했다는 것은 저 말이 전략적인 처지를 고려한 허세라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2차례의 대만 해협 위기와 소련의 중국 지원 중단 이후 중국은 핵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개발을 시작한 지 2년만인 1964년에 핵실험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해에 사정거리 800km짜리 둥팡 로켓에 핵 탄두를 장착하여 발사하는 핵 실험을 실시했다. 참고로 이렇게 직접 미사일에 달아 핵 실험을 한 나라는 중국이 유일하다고 할 만큼 위험한 실험이었다.
이런 허세나 비이성을 내세우는 전략을 미치광이 전략이라고 하며, 국제 정치학 용어로 자리잡을 만큼 유명한 전략이다.[20] 상호확증파괴가 국제 정세의 지배적인 논리로 군림하던 시절에, 마오쩌둥은 핵무기에 의한 완전한 파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미 - 소 양국과 나름 대등한 수준의 협상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심리적 우위로 전략적 열세를 극복하는데 성공한 희귀한 사례. 물론 상호확증파괴 구도를 안정한 세계 정세의 근본으로 여기고 있던 소련의 지도자들은, (비록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도) 마오쩌둥의 이러한 언행이 핵 전쟁을 억지하려는 미소 양국의 노력을 무위로 돌린다고 간주했기 때문에 이에 대단히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이는 마오쩌둥이 평생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 진영과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 진영의 양극 체제를 탈피하고자 하는 의도를 강하게 견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21] 스탈린을 제외한 소련의 역대 지도자들 스스로가 이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말을 듣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도자였던 안토닌 노보트니(Antonín Novotný)는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알고 싶어했다.

"그래, 좋다. 당신네들은 3억이 죽어도 아기를 좀 더 낳으면 된다 치자. 우리는 1천 2백만 명밖에 없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모두 다 죽을 것이다. 다시 시작할 사람들은 1명도 남지 않을 것이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그런 정서에 공감했고, 마오쩌둥의 태도가 아주 불안정하다고 생각했다. 흐루쇼프가 나중에 말하길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아서는 그가 농담을 하는지 아닌지 구별할 수 없었다."[22] 또한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팔미로 톨리아티 역시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물었다.

"마오쩌둥 동지! 핵 전쟁에서 살아남을 이탈리아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에 마오쩌둥은 전혀 웃지도 않고 대답했다.

'''"아무도 없을 것이오. 어쨌거나 이탈리아인들이 인류 발전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보시는 거요?"'''

그리고 마오쩌둥은 또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원자탄이 아주 강력하여, 중국에 투하될 때 지구를 관통하는 구멍을 내거나 아니면 지구를 날려버릴지라도, 이것은 태양계에는 중요한 사건이겠지만 우주 전체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1955년 1월)

이후 마오쩌둥은 중국을 찾은 네루나 소련의 미코얀에게도 비슷한 개드립을 쳐서 그들을 매우 놀라게 했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닉슨에선 닉슨과 만난 브레즈네프가 이 일화를 들먹이며 마오를 천하의 미친놈이라고 까댄다.

5.5. 대인적 면모


역시 한 시대를 풍미해서 그런지 호걸스러운 일화들을 남기기도 했다. 예컨대 공산당 내에서 가장 큰 경쟁자였던 정적인 장궈타오는 후에 전향하여 국민당으로 도주했고, 중국이 공산화 된 후 홍콩으로 도주했지만, 마오쩌둥은 본토에 남겨져서 사로잡힌 장궈타오의 가족들을 그냥 홍콩으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게 아무렇지 않게 보이지만 사실은 마오와 장은 엄청난 악연이 있다. 장궈타오는 한때 마오쩌둥보다 세력이 큰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의 경쟁자이기도 했다.
엄연히 미국과 적성국인 처지였지만 미국과 영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을 크게 반겼고, 에드거 스노우를 비롯해서 옌안 시절에 친하게 지낸 미국인들 이야기를 하면서 미국이 중일전쟁을 비롯해서 중국에 도움을 준 것이 많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칭찬하기도 했다.
마오쩌둥의 이발사인 '털보 왕' 왕후쯔는 1930년대부터 마오쩌둥의 면도와 이발을 도맡아 했는데, 1942년 정풍 운동 도중에 그가 마오쩌둥을 암살하려 한 혐의로 기소된 일이 있었다. 마오쩌둥이 자신을 수 년간 옆에서 지킨 왕후쯔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죽일 수 있었던 순간이 많았음에도, 그가 자신을 암살하려 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아하게 여겨 그를 따로 불러서 자초지종을 물었다. 왕후쯔는 마오쩌둥에게 울면서 면도칼로 그를 죽이려 했었다고 실토했는데, 마오쩌둥이 그간 왜 죽이지 않았느냐고 묻자 왕후쯔는 국민당이 오면 그때 죽이려 했다고 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국민당이 옌안까지 오면 그들 손으로 자신을 죽이려 할 건데 왜 이발사의 손을 빌리겠냐면서 사실대로 털어놓으라고 하자,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했었다고 밝혔다. 이에 마오쩌둥은 관계자들을 불러 사람에게 거짓말을 강요하지 말라고 질책했다. 이후 왕후쯔는 수십 년을 더 마오쩌둥의 이발사로 일하게 되었다.
쉬스유와 관련된 일화도 있는데, 원래 쉬스유는 마오쩌둥의 경쟁자인 장궈타오의 부하였지만 대장정 중에 마오쩌둥에게 붙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배신자라고 믿지 않고 갖은 핍박하였고, 견디다 못한 쉬스유는 자신의 부하들을 데리고 공산당을 배신할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첩보를 들은 캉성 등은 쉬스유를 즉각 체포해 처벌해야 한다고 마오쩌둥에게 건의했으나, 마오쩌둥은 이를 물리치고 직접 쉬스유를 불러 면담했다. 마오쩌둥이 쉬스유에게 자신을 믿느냐, 장궈타오를 믿느냐고 묻자 쉬스유는 당연히 마오쩌둥을 믿는다고 대답했다. 마오쩌둥은 다시 옌안에 남고 싶은가 떠나고 싶은가를 물었다. 그러자 쉬스유는 눈물을 흘리면서 옌안에 남고 싶다고 했고, 마오쩌둥은 그의 죄를 다신 묻지 않아서 쉬스유는 마오쩌둥이 죽은 후까지 그의 충실한 부하로 남게 되었다.
물론 마오쩌둥은 어디까지나 치밀한 정치가였고, 절대 자신에게 손해를 볼 일은 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전후 처리를 위해 비행기를 보내 그를 충칭으로 초빙했으나, 마오쩌둥은 장제스가 비행기 채로 자신을 날려버릴 것을 염려하여 미국 대사 패트릭 헐리가 직접 비행기에 동승하기 전까지 충칭에 가지 않겠다고 했고, 실제로 패트릭 헐리가 옌안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마오쩌둥을 태우고 왔다. 이 때문에 장제스는 마오쩌둥을 겁쟁이라면서 조금 전까지 미국을 제국주의자로 비난하던 마오쩌둥이 이젠 미국인의 보호를 구걸하고 있다면서 엄청나게 경멸했다. 물론 속으로만... 협상장에서 장제스는 마오쩌둥을 최대한 잘 대접해주었고, 소련 대사관에 기거하면서 나름 안전을 보장받고 있다고 여긴 마오쩌둥은 장제스의 비위를 맞춰주는 듯 하면서도 공산당이 원하던 독자적 무장과 화북의 지배권을 요구하여 장제스를 화나게 했다. 결국 쌍십 협정이라 불리는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회담은 다소 두루뭉실한 결과만을 남겼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세력 격차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마오쩌둥은 양자강 이남의 모든 해방구를 포기한다는 내용에 동의해야 했고, 옌안에 돌아온 마오쩌둥은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의 통역사는 마오쩌둥이 '침대에 엎드려 몸을 떨었으며 손과 다리는 발작적으로 경련을 일으켰고, 온 몸에 식은땀을 흘려 수건을 이마에 얹어주었지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라고 회고했다. 덕분에 며칠간 마오쩌둥은 침대에 누워 꼼짝도 못했는데, 장제스 평전의 저자 조너선 펜비는 마오쩌둥이 갑자기 앓아누운 이유가 '훨씬 더 드넓은 영토에 의지해야 할 그의 정당이 봉쇄된 세계에서 건립한 통치가 얼마나 협소하고 그의 맞수는 얼마나 견고한가를 깨달은 결과'라고 평가했다.

6. 마오의 사생활


[image]
마오의 가족. 왼쪽이 막내딸 리나, 가운데 남자가 마오안잉, 그 옆이 며느리 류쓰치.
엄청난 골초였다. 하루 3갑 + 60개비씩 60년을 피웠다는데도 불구하고, 83살까지 장수한 것을 보면 참 대단한 셈.[23]
상술한 아버지가 지정한 결혼에 반대하여 가출한 것을 제외하면 결혼은 총 3번 했다. 첫번째 부인은 스승 양창제 교수인 양카이휘(양개혜)였다. 둘은 호남 사범의 동급생이었고 아이는 3명을 낳았다. 남편의 혁명 운동 뒷바라지를 하다가 국민당군에 잡혔고, 국민당은 전향을 종용했으나 이를 거부, 총살당했다. 이 중 장남 마오안잉6.25 전쟁에서 전사하고 둘째 마오안칭은 2007년까지 살아남았다. 셋째 마오안룽은 양카이휘가 처형된 후 보살핌을 받지 못했는지 4살의 나이로 죽었다.
2번째 처 허쯔전(하자정)은 아직 첫번째 아내가 살아있던 때인 1928년 장시 소비에트에서 결혼했다. 여자이지만 홍군의 명사수였다고 하며, 장정도 같이 했다. 마오와의 사이에서 무려 6명의 아이들을 낳았으나, 너무 어렸던 4명은 장정 중 인근 농가에 맡겼는데 3명은 행방불명되었다. 이렇게 맡긴 아이들 중에서 리민이라는 자는 후에 천하를 통일한 아버지가 찾아내어 베이징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허쯔전과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 1937년 허쯔전은 모스크바로 갔고, 이후 마오는 장칭과 결혼하기 위해 허쯔전과 이혼했다.
이후 심복이었던 캉성의 소개로 배우 출신 이혼녀 장칭과 결혼했다. 여기에 대해서 말이 많고 허쯔전이 모스크바에 가있는 동안 바람 피웠다는 것이 정설이다. 마오와 장칭은 1938년 결혼했고 둘은 딸 하나를 낳았다.
마오쩌둥은 호색한이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성인 여자가 아닌 10대의 소녀들을 좋아했다. 나이 든 여자들은 세상 물정에 너무 밝은 데다 순진한 맛이 없다고 멀리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일설에 의하면 유부녀를 좋아했다고도 한다. 마지막 부인 장칭도 이혼녀 출신. 마오쩌둥은 특히 교육 수준이 낮은 순박한 시골 아낙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70대 늙으막에 현지 지도할 때 눈에 든 20대 초반의 유부녀가 있었는데, 마오쩌둥은 이름을 물어본 후 수첩에 이름을 적으며 좋아했다. 이를 본 심복 왕둥싱이 그 유부녀 남편에게 이혼을 종용하고 마오에게 바쳤다고 한다. 그래서 그 유부녀 사이에 사생아 몇 명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하렘. 또한 마오쩌둥은 남색을 즐겼다. 여색을 즐긴 후엔 항상 양기를 보충한다며 10대 소년들을 방으로 불렀다고 한다.
리즈수이가 쓴 <모택동의 사생활>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평생 자신의 성기를 손수 씻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한 번은 그의 주치의인 리즈수이가 위생 문제를 거론하자 계속 여자의 몸 안에서 씻고 있으니 상관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링크. 또한 마오쩌둥은 몸 자체도 잘 씻지 않았고, 하인들이 에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는 식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단, 이런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그가 샤워를 자주 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실제로는 당대 기준 평균 이상의 위생 관념을 지녔기 때문에 몸을 아예 씻지 않았다는 것은 후대의 과장 섞인 이야기다.[24]
마오쩌둥은 매일 새벽이나 아침마다 찬물에 몸을 담그는 냉수욕을 즐겼다. 이를 새벽 1교시라고 칭하면서 자신의 건강 비결로 삼았고,[25] 수영도 어린 시절부터 매우 즐겨 했고, 나이가 들어서도 수시로 수영을 하는 등 물 자체를 좋아했는데, 문화대혁명을 앞두고 양쯔강을 횡단하는 퍼포먼스를 손수 선보였을 지경이었다.[26] 이런 걸 볼 때 몸을 씻는 걸 거부했던 이유는 성향이 비위생적이라기보단 매일 아침에 이미 씻고, 수영도 자주 하는데 굳이 더 씻을 필요가 없겠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마오쩌둥의 치아 건강은 확실히 엉망이었다. 양치질을 별로 하지 않았고, 중국 차의 한 종류인 고차(苦茶)라는 것을 수시로 마셨으며, 양치질 대신 고차를 입에 머금고 가글하는 걸로 대신했다고 한다. 치아 건강은 꾸준히 나빠져서 치아와 잇몸이 변색되기까지 했다. 사실 이런 차를 이용한 양치는 비단 마오쩌둥 개인의 특성만은 아니고, 당시 물이 부족한 내륙 지방에 살던 중국 농민들 사이의 전통적인 양치법이다. 애초에 마오쩌둥이 한창 나고 자랐을 때는 치약이라는 것이 흔한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에[27] 당연한 일이었다.
하여튼 마오쩌둥의 치아 건강은 좋지 않았는데, 치석이나 음식물 찌꺼기가 많았고, 잇몸에 고름이 차 있었으며, 충치 또한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을 귀찮아해서 치료도 잘 안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1955년에 리즈수이의 권고로 이를 하나 뽑아야만 했다. 리즈수이와 장광옌이 마오쩌둥에게 양치를 권하자 '호랑이는 양치를 하지 않고도 이가 날카로운데 양치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라는 말로 또 거부하였다.[28] 그나마 이를 하나 뽑은 후엔 양치를 잠깐 했는데, 이마저도 며칠 못 가 그만두었다고 한다. 결국 마오쩌둥의 치아 상태는 날이 갈수록 나빠져서 1970년대엔 이가 하도 많이 빠져서 윗어금니는 하나도 남지 않았고, 결국 마오쩌둥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은 치아가 보이지 않게 정교하게 찍혀야만 했다.
마오쩌둥은 성적으로도 왕성했는데 불륜을 저지르기도 했고, 성병의 일종인 트리코모나스 질염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마오쩌둥과 성관계를 맺은 여자들은 모두 그 병에 걸렸다. 그러나 마오의 여자들은 그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당시 중국에서 살아있는 신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숭배되던 마오쩌둥과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이나 자랑거리였던 것이다. 링크. 오히려 마오의 성병에 함께 감염되었다는 사실이 일종의 훈장처럼 여겨졌다고 하니 안습. 마오에게 여자를 조달해 소개시켜주는 채홍사 역할은 그의 심복인 예쯔롱과 왕둥싱이 맡았다. 하지만 마오의 방탕하고 지저분한 성생활에 그들도 가끔씩 "우리가 이런 더러운 짓만 해야 하나?"라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왕둥싱은 마오 사후에 4인방을 실각시키는 데에 일조한다. 마오쩌둥의 주치의 리즈수이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죽는 순간까지 트리코모나스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이런 마오쩌둥의 성 생활은 1970년대 이후로 파킨슨병 혹은 루게릭병으로 추정되는 질환에 시달리면서 끝나게 된다.
마오쩌둥의 호색한 기질과 바람기는 부인들을 굉장히 불행하게 만들었다. 특히 장칭은 툭하면 외도를 하는 남편을 보고 남 몰래 울거나 화를 내는 일이 매우 잦아졌다. 이는 그녀의 히스테릭한 성격에 날개를 달아주었으며, 결국 문화대혁명에서 잔악한 탄압으로 이어지게 된다.
모택동은 자신의 아들인 모안영을 6.25 전쟁 때 중공군으로 참전 시켰다. 펑더화이는 모안영이 전선에서 잘못될 시 자신에게 문제가 생길 거라 생각해 반대하였지만, 모택동과 모안영의 고집으로 어쩔 수 없이 참전시켰다.
그래서 펑더화이는 마오안잉이 소대장이 될 경우 전선에 제일 앞장서게 되고, 그렇게 되면 가장 위험한 위치에 노출이 되는데, 이를 우려해서 일부러 마오안잉을 소대장이 아니라 통역 장교로 배치했다. 하지만 이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당시의 전선 상황이라는 게 연합군이건 공산군이건 간에 어느 쪽 군대든 사령부에 직접 타격을 받을 정도로 많이 위태로웠다. 마오안잉은 펑더화이를 보좌하면서 참모부에 근무했는데 미군기의 공습으로 전사했다. 전선 사령관인 펑더화이는 이 사실을 보고 받고 마오쩌둥에게 전화를 걸어 전사 소식을 알린 뒤 시체를 후송하려 했으나, 마오쩌둥은 다른 인민의 죽은 자식들을 후송해올 수 없는데 자기 자식만 후송할 수는 없다고 그 자리에 묘를 만들라고 했다. 마오쩌둥은 아들이 전사하자 며느리의 개가를 주선해주고 결혼식 때 거액의 축의금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오안잉의 영구는 중화인민공화국북한의 우호의 상징이 되었다.
고추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후난성 일대 자체가 매운 요리로 유명한데, 마오쩌둥도 그 영향을 받은 것이다. 현대 중국의 건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영화 건국대업에서 마오의 전속 취사병이 매 끼니 고추를 준비해야 한다는 장면이 나오는가 하면, 중국의 근현대사를 훑어보는 영화 건당위업에서는 청년기의 마오가 풋고추 반찬을 허겁지겁 즐겨먹는 장면 등, 마오의 고추 사랑은 중국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듯 하다.
마오쩌둥을 탐구하는 서적 '후난, 마오로드-신이 된 마오쩌둥'에서는 마오의 식생활을 소개할 때 "마오쩌둥에게 '붉고 매운 고추'는 권력에 대한 강렬한 욕망뿐만 아니라 혁명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는 끼니 때마다 고추를 먹었고, 매운 고추를 잘 먹는 사람이 혁명적이라고 여겼다. 마오에게 고추는 붉은 욕망의 상징이었다."라는 표현으로 마오는 붉은 고추를 즐겨 먹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래서인지 마오쩌둥은 고추만두를 즐겨먹었다. 또한 혁명적 의지 때문인지 매운 음식을 의사의 경고를 무시한 채로 즐겨먹었다. 이처럼 매운 요리를 즐기다 못해 장려하다 보니 문화대혁명도 고추 사랑 때문에 성격도 매워져서 그런 것이 아니냐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가 나돌 정도이며, 1978년부터 1992년까지 집권한 덩샤오핑도 매운 요리를 즐겨먹었기에 중국 내에서 후난 요리쓰촨 요리 등이 널리 퍼지며 유행하게 되었다. 물론 고추 요리만 즐겨먹지는 않았고, 홍소육이나 취두부나 새끼돼지 통구이 등도 많이 즐겨 먹었다. 그래서 취두부 파는 식당이나 노점에서 취두부를 모주석도 즐겨 먹었던 음식이라며 홍보하고 다닌다. 개혁개방 이후로 자영업이 활성화되면서 현재는 모가채라고 해서 마오쩌둥이 즐겨먹었던 음식들을 파는 식당들도 꽤 있으며, 이 가운데서 모가반점 등이 유명하다.
사실 마오쩌둥은 장쉐량처럼 충분히 더 장수를 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방탕하고 담배를 즐겨하는 안 좋은 생활 습관을 유지하다 보니까 장쉐량보다도 더 빨리 죽은 것이다. 그러나 용케도 폐암에 걸리지 않고도 83세까지 살았으니, 만약 건강 관리만 잘 했으면 100살은 넘게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야말로 타고난 강골이었던 셈이기는 한 것이다. 그러나 성 생활과는 다르게 식생활은 어느 정도 절제하기는 했다. 비록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면서 자극적인 음식을 먹었다는 점과 마오쩌둥이 나이가 들어서 살이 쪘기 때문에 식탐이 많은 대식가일 거 같지만, 의외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소식을 했다. 또한 밥은 백미밥보다는 현미나 보리를 섞은 잡곡밥을 즐겨 먹었고, 자극적인 맛의 요리를 좋아했지만 한 번 먹을 때마다 너무 많이 먹진 않았다. 또 편식도 없어서 채소 요리나 해산물 요리도 자주, 골고루 먹는 식습관을 지녔다. 그리고 귀한 산해진미를 찾기보다는 서민적이고 토속적인 요리를 많이 먹었다.[29] 이렇게 식생활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절제를 했고, 선을 잘 지켰기 때문에 난잡한 생활 습관에도 장수를 할 수 있다고 할 만하다.[30]
또한 의외로 소박한 취미도 있는데, 스탈린이 다차에서 농작물을 기르는 취미가 있듯이 마오쩌둥도 별장에서 채소를 재배했고, 자신이 직접 기른 채소를 먹는 걸 좋아했다.
장제스가 유교 경전을 독파했듯이 마오쩌둥은 고전 역사서, 특히 손자병법을 자주 읽었고, 삼국지덕후여서 삼국지연의를 끼고 살았다고 한다. 또 중증 조조빠여서 연의에서 조조의 팬이라 마오쩌둥 시기에 유비 대신 조조를 주인공으로 한 편집된 연의가 나오기도 했다.
마오쩌둥은 루쉰의 소설을 굉장히 좋아했다. 마오쩌둥은 옌안(延安) 시절에 루쉰의 책을 밤새도록 읽어서 '마오쩌둥의 성서'라고까지 표현할 정도였다. 루쉰을 현대 중국성인#s-2.1이라고 평했을 정도.
일명 중국 최후의 유학자라 볼리는 량수밍과의 일화도 유명하다. 량수밍은 불교유교 양쪽을 공부하면서 향촌건설운동에 참여했고, 사회주의공산주의와는 거리가 한참 먼 인사였다. 그와 연이 있던 인물 가운데서 공산당원이 있었기는 했었고, 마르크스레닌의 서적을 탐독하기는 했지만, 그와 성향이 멀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공산당의 근거지인 옌안을 다녀오면서 마오쩌둥과 중국의 바람직한 미래를 놓고 토론을 나누었는데, 이때 양측의 입장차가 위낙에 컸기 때문에 결론이 난 게 별로 없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마오쩌둥은 량수밍에게 많은 영감을 받은 모양이다. 후에 야당인사로써 입지가 단단했던 인물이었다. 중공 건국 이후로 량수밍이 1953년도 중앙정부 회의 과정에서 도시 노동자의 삶은 나아졌지만 농민들의 삶은 그렇게 나아지지 않았고, 지방 간부들은 호의호식한다며 공산당의 통치를 비판하는 발언을 했다가 마오의 심기를 건드렸다. 다음날에 마오쩌둥이 량수밍을 비판하는 발언을 냈고, 이에 당원들이 량수밍의 발언에 반대하는 표결을 했다. 량수밍은 이에 추가 발언을 하려고 했는데, 이것도 표결에 붙여지면서 추가 발언이 막혔다. 이때 마오쩌둥은 의외로 량수밍의 발언을 더 듣자는 입장이었지만, 여하튼 이때를 계기로 량수밍은 뒷방 늙은이나 마찬가지인 신세로 전락했고, 특히 반우파운동으로 열심히 까이는 처지가 되었다. 문화대혁명 때 류사오치 등 한때 당 동지였던 인물들이 줄줄이 홍위병들에게 수모를 겪거나 강제로 하방 당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량수밍만에게는 특별 지시를 내려서 홍위병들이 행패를 부리지 않았다고 하며[31], 받던 돈이 잠깐 깎이기는 했지만 얼마 안 가 원상복구 되었다. 량수밍은 1972년 마오쩌둥의 생일 때 선물을 보내주자 마오쩌둥이 이때 미칠 듯이 기뻐했다고 하며, 량수밍도 나중에 마오쩌둥과의 관계를 회고하면서 의견이나 사상이 맞지 않았지만 마오쩌둥이 그립기도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7. 사상



7.1. 마오주의



마오주의(마오이즘)라고 불리는 마오쩌둥식 사회주의. 도시의 노동자들이 아닌 농민들을 혁명의 기반으로 파악한 마오쩌둥 특유의 사상이다. 일명 농민들의 맑시즘으로 불리는 사상으로, 한때는 제3세계의 혁명가들에게 "빛나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현재는 사회주의 세력의 전반적인 퇴조 때문에 거의 듣보잡 신세이다.

7.2. 사상적 뿌리


마오쩌둥 사상은 스스로는 유물 변증법을 토대로 했다고 하나, 객관적인 현실보다는 주관적인 의지를 강조했기 때문에 사실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극혐해 마지않는''' 관념론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또한 마르크스주의보다는 중국의 전통 사상에 훨씬 더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중국 철학에서 대가들이 쏟아져나왔을 때 그 대가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생각되고 있다. 철학사적 면만 따져도 마오쩌둥은 주요 인물에 들 만한 인물이다. 중국 현대 철학 교과서에는 꼭 마오쩌둥의 실천 이론이 풍유란 웅십력과 함께 언급된다.
또한 마오주의는 아나키즘 사상가인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애초부터 모택동이 공산당에 가담하기 전에 크게 영향 받은 것도 아나키즘이었고, 그 당시만 해도 "나는 무정부주의자"라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훗날 대약진운동 시대에 만든 인민공사 같은 제도는 아나코 콜렉티비즘(무정부 집산주의)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북한주체사상은 마오쩌둥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북한 스스로는 부정하지만 인간 중심, 수령론 같은 것은 마오주의와 판박이다.

7.3. 혁명 이론


마오쩌둥의 사회주의소련식의 마르크스주의인 레닌주의(사실은 스탈린주의)와는 좀 다르다. 이는 당시 중국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혁명 당시 러시아는 농업 국가이기는 했어도 도시에는 충분한 수의 노동 계급이 형성되어 있었고, 정부 기관이 도시에 몰려있었기 때문에 도시 노동자만 잘 조직해도 혁명을 이룰 수가 있었다. 그래서 레닌주의에서는 도시의 노동 계급을 혁명의 주체로 보았다.
중국은 러시아보다도 훨씬 뒤쳐진 농업 국가였고, 노동자와 도시화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적용해서 사회주의 혁명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실제로 1차 국공 합작이 붕괴된 후 소련 유학생 출신들이 중국 공산당의 당권을 잡고 소련식의 전략을 차용했다가 모두 망하고 만다. 이렇게 되어 마오에게 자연스럽게 당권이 돌아왔다. 반면에 마오쩌둥은 소련의 혁명 이론 대신 중국 고유의 농민 반란의 역사에 주목하여 농민을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로 삼는 전략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마오쩌둥은 도시의 직접 봉기 대신에 농촌에서 세력을 넓혀서 도시를 포위하는 전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전략은 전근대적 사회에 매우 효과적이었고, 한동안 여러 제3세계의 혁명가들이 차용하여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마오쩌둥은 이런 마르크스 - 레닌 - 스탈린주의에 입각한 교조주의를 "(비료로 쓸 수 있는) 똥보다도 못하다"고 경멸했다. 이런 점 때문에 마오쩌둥은 서구의 사상을 도입한 인물이 아니라 멀리는 한고조 유방부터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에 이르기까지, 중국사에서 난세마다 등장하는 농민 반란군의 전통을 잇는 인물로 볼 수 있다. 문화대혁명홍위병이 중국의 전통을 모조리 박살내려고 했던 것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렇게 마오쩌둥의 이론은 소련식의 사회주의와는 영 별개의 것이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국공내전의 말기까지도 신뢰하지 않았고, 오히려 장제스에게 엄청난 원조를 해주기도 했다. 소련측은 마오쩌둥을 "마가린(짜가) 사회주의자"로 공공연히 무시했는데, 결국 이것은 후에 중소결렬중국-소련 국경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7.4. 군사 이론


숙적 장제스와 더불어 군사적 사고를 가졌던 걸로 알려져 있다. 차이점이라면 장제스는 제대로 된 군관학교에서 수학했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정형화된 사관학교 장교 출신이라면, 마오쩌둥은 비록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게릴라, 빨치산 활동을 통한 실전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만든 전략가라고 할 수 있다.
마오쩌둥의 군사 이론은 중국의 고대 병법과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결합한 독특한 것이었다. 클라우제비츠는 "중심의 유린"을 중시했지만, 마오쩌둥은 일단 자신의 역량이 뒤쳐질 때는 중심보다는 주변부를 장악하면서 중심을 포위하여 고립시킨 후, 적의 역량이 감소하고 자신의 역량이 우월해졌을 때 적의 중심을 쳐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때문에 마오쩌둥은 전술 레벨에서든지 전략 레벨에서든지 자신의 역량이 뒤쳐질 때는 적의 주력과 대결하는 것은 피했고, 결정적 순간에 압도적인 병력을 집중시켜 적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마오의 군사 이론은 혁명 이론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마오는 게릴라와 농민의 관계를 물고기와 물의 관계, 수어지교라고 했다. 즉 게릴라는 농민의 지지가 필수적이라는 것. 이러한 이론은 삼대기율 팔항주의에서 드러나지만, '엄정한 군기로 민심을 사로잡았다' 운운은 헛소리고 실제로는 공포 정치로 인민들을 쥐 잡듯 잡아서 저항 못하게 한 거다. 주모군의 계속된 약탈과 학살 때문에 정강산 지역은 이미 초토화되어 근거지로 더 이상 삼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좀 더 넓고 안정적인 강서 소비에트로 옮겨서도 사소한 문제로 국민당 간첩으로 몰아 고문하고 죽이는 일은 비일비재했으며, 초공작전 중에는 대놓고 법치주의를 혁명의 장애물로 선포하고 사람을 죽여댔다. 이때는 마오쩌둥은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후였지만 마오쩌둥은 실각 전이나 실각 후나 부전사변, 정풍운동으로 이런 방법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줬다. 이후 오토 브라운의 기록에도 강제 징병된 사람이 너무 많아서 탈영자가 너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성 군기가 매우 엄정한 것은 장점이었다고.
여튼 이러한 이론 때문에 기계화보다는 보병의 과감한 기동력과 수적 우위를 중시했고, 무기의 성능보다는 인간의 의지와 민중의 각성을 더욱 강조했다. 소련이나 미국과 같은 침략자가 중국에 쳐들어오면 중일전쟁처럼 대규모의 게릴라전을 펼쳐 적을 "인민의 바다"에 빠뜨려 수장시킨다는 것. 이런 유격 전술을 마오쩌둥은 "인민 전쟁"이라 불렀다. 문제는 그동안 퍼져있는 신화와 달리 마오쩌둥의 군사 사상에서 이루어진 것은 적의 주력과 대결하는 것을 회피하는 것뿐이었고, 중일전쟁 내내 공산군은 일본군 보급 부대를 조금 습격하거나 지역적이고 소극적인 방어전만 일부 나오는 수준에 그쳤다. 이 때문에 옌안의 선전용 모습만 보고 홍군을 찬양하던 서구 언론인들과 달리, 공산당 지배 구역 구석구석을 돌아볼 수 있었던 소련 언론인들은 홍군을 보고 "군인인지 농부인지 모르겠다"면서 "홍군의 최대 업무는 가을철 수확"이라고 까댈 정도였다. 그리고 그나마 있던 전투들도 국민당의 지역 정부와 유격대를 소멸시키는 데에 집중되었다(...)
어쨌거나 게릴라와 보병 중심의 기동을 중시하는 이러한 전술은 복잡한 상층 구조를 갖춘 현대 국가를 엎어버리는 혁명군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유용했지만, 거대한 현대 국가를 운용하는 단계에서는 당연히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건국 후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있던 때에 건설된 것을 모두 포기하고 인민 전쟁을 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문적으로 소련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고, 6.25 전쟁에서 중공군을 지휘하여 미국의 힘을 겪어본 국방 부장 펑더화이는 이런 마오쩌둥 이론에 반기를 들었다. 1950년대 말 펑더화이는 이제 "우리도 미국이나 소련처럼 프로페셔널한 장교단이 지휘하고 첨단 무기로 무장한 인민해방군을 건설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마오쩌둥의 군사이론과는 모순되는 것이었고, 결국 이것은 펑더화이 실각의 한 이유가 된다. 마치 1930년대 소련에서 당료들과 투하쳅스키의 충돌이 그의 숙청으로 이어진 것과 비슷하다. 마오쩌둥은 다른 혁명 국가들이었다면 초기에 숙청 당했어야 할 매우 강성한 극좌 계속혁명론자였고, 부르주아적인 안정화에 대해 반대하며 외교를 제외하고는 정치, 경제, 군사를 모두 이상적 혁명이론에 따라 운용하였다. 인민의 무제한적 동원이 기술과 자본을 능가할 것이라 믿었던 대약진 운동이나, 일부 반동 주자파만 때려죽이면 나머지 인민들이 올바른 프롤레타리아 신문화를 설립할 것이라고 믿었던 문화대혁명이나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실무진 입장에서 과격한 혁명 이론에 반대해서 여러 차례 마오쩌둥과 충돌을 빚었던 펑더화이의 숙청은 마오쩌둥이 살아있는 한 예고된 일이었다.
어쨌든 마오의 군사 이론은 정치 이론과는 달리 아직까지도 유용하게 연구되는 분야이다. 이것은 경영 전략에서도 꼭 한 번쯤은 이야기된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월마트애플이 바로 마오쩌둥 이론을 경영 면에서 제대로 응용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7.5. 네팔, 인도의 마오주의자들, 낙살라이트


그러나 농촌 중심의 혁명 전략을 세운 그의 사상은 아직도 많은 추종자를 이끌고 있다. 2012년 현재에도 마오주의자를 자처하는 게릴라가 남미와 같은 저개발 국가에서 활약하고 있고, 특히 네팔에서는 이들이 게릴라전을 벌여 결국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세우는 데 일조했으니. 참고로 중국에서는 이들의 적인 네팔의 왕정을 지원했기 때문에 이들을 마오주의자라고 보도하지 않고 '비적'이라고 보도했다는 웃지 못할 사례가 있다. '비적'은 국민당이 공산당을 부를 때 쓰던 말이다.
인도에서도 마오주의자들이 정부와 전투를 벌이고 있다. 전근대적인 질곡이 워낙 심하여 가난하고 지주 세력의 힘이 세기 때문에 마오주의자들의 선전히 잘 먹혀들혀가고 세력이 크다. 매번 경찰들이 마오주의자들과 교전하다 죽었단 뉴스가 왕왕 뜰 정도. 외국인 관광객들이 오지로 관광 갔다가 마오이스트들에게 피랍당한 적도 있다.
근데 목표를 이루려면 도시로 진입을 해서 선동을 하고 그네들이 말하는 소위 혁명을 일으켜야 되는데, 도시에 진입할 능력도 역량도 없다. 초기에는 어느 정도 감싸주던 인도 공산당, 인도 마르크스주의 공산당 같은 좌파 세력들도 마오주의자들이 사상이 다르다고 자기네들까지 팀킬해대니[32][33] 원수지간으로 돌아서고 아예 정부랑 편 들고 같이 싸우고 있다.[34] 인도 마오주의자들은 인도에서는 완전히 불온 단체로 찍힌 상태다.
마오주의자들이 인도 오지 전역에 넓게 산개해서 게릴라전을 벌이는 형편이라, 정부도 마오주의자들을 억제는 할 수 있지만 완전히 쓸어버리는 것은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마오이스트 입장에서 봐도 경찰도 버거운데[35]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는 건 불가능하고, 도시민들이 선동될 가능성은 없다. 결국 오지에서 교전하거나 도시에서 테러를 저지르는 것밖에 없는데, 그러다 민심은 점점 멀어지고 목표하는 건 이루지도 못하고 망했어요.

8. 어록


마오쩌둥은 시인과 문필가로 유명하다. 이 점에서 조조와 정말 비슷하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조조를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치하에서 조조가 재평가되기도 했다. 전술했다시피 사서로 일한 적도 있고, 독서를 엄청나게 한 걸로도 유명하며, 게릴라 시절에도 공작원이 신간을 구해오면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 관련 서적보다는 중국의 여러 고전 역사책을 탐독했으며,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과거의 예를 찾아 어떻게 할 것인지 연구했다고 한다. 다독(多讀)과 역사로부터 교훈을 배우는 것은 많은 성공한 지도자들의 공통적인 습관이기도 했고, 마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마오식 사회주의는 원산지인 소련의 사회주의와 심각한 차이가 있었고, 또 그랬기에 중국식 사회주의가 그럭저럭이라도 돌아갈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기 전에 자치통감을 17차례나 보고 연구한 것은 유명한 일화. 문화대혁명에서 홍위병들은 과거의 것을 모두 파괴해야 한다고 했는데, 정작 홍위병의 두목인 자신은 옛날 역사책이나 제왕학 서적을 보고 어떻게 할 지 궁리하고 있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홍위병에게는 책을 너무 많이 보면 해롭다면서 정작 자신은 책에 묻혀 지냈으니. 차라리 혁명가가 되지 않았으면 그냥 유명한 인문학자나 고전문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image]
실제 사진을 바탕으로 만든 기록화. 그림에서도 보이지만 저렇게 서재의 책이나 그가 읽던 책들은 공산주의 관련 서적이 아니라 모두 왕조 시대의 사서거나 혹은 그 사서를 읽기 위한 사전이었다.
이렇듯 그는 강렬한 인상을 주는 문장을 만드는 데 매우 능했다. 번역된 문구로는 잘 알 수 없지만, 원문을 보면 중국 특유의 댓구를 잘 이용한 인상적인 문장이 많다.

"'''권력은 구에서 나온다."''' (枪杆子里面出政权)[36]

[37]

"모든 저항에는 이유가 있고 혁명에는 죄가 없다." (조반유리, 혁명무죄 / 造反有理,革命无罪)[38]

"가장 높은 곳에 뜻을 두어라."

"공부를 열심히 하면 나날이 발전한다." (好好学习, 天天向上)

"'''전쟁은 전쟁을 통해서만 종식될 수 있다. 총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총을 드는 수밖에 없다."'''

"남이 나를 범하지 않으면 나도 남을 범하지 않는다. 만약 남이 나를 범하면 나도 반드시 남을 범한다." (人不犯我,我不犯人;人若犯我,我必犯人)

"당대의 인물이 바로 역사의 주인이다." (数风流人物还看今朝)

"독서하는 것은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적용한다는 것 또한 배우는 것이며, 보다 중요한 배움이라 할 수 있다."

"말만 늘어놓지 말고, 실천가가 되어라."

"작은 불씨는 들판을 불사르고(星星之火,可以燎原), 큰 불씨는 물에 기세를 그친다."

"스스로 노동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하라." (自己动手丰衣足食)

"인민, 오직 인민만이 세계 역사를 만드는 원동력이다." (人民,只有人民才是推动历史发展的决定力量!)[39]

"모든 반동파들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 (一切反动派都是纸老虎!)[40]

"이것은 단지 만리장성을 완주하는 첫 걸음일 뿐이다!" (这只是万里长城走完了第一步!)

"하늘은 곧 비가 오려 하고, 어머니는 시집을 가려고 한다. 그렇게 하게 해라!" (天要下雨,娘要嫁人,由它去吧!)[41]

"결심을 했으면 희생을 두려워하지 마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이기는데 집중해라." (下定决心,不怕牺牲,排除万难,去争取胜利)

"나의 영예가 내 자손들에 의해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다리가 없고 배가 없으면 강을 건널 수 없다."

"배우고 또 배워 앞으로 나아가라."

"아무리 큰 우물이라도 하늘보다는 작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평등하지만, 사람마다 능력이나 인격의 우열이 있으니 자기보다 나은 자를 따라야 질서가 잡히는 것이다."

"인민을 위하여 일을 하라." (为人民服务)

"일이란 투쟁이다."

"많은 사람들이 각기 주장을 편다." (백화제방, 백가쟁명 / 百花齊放,百家爭鳴)[42]

[43]

"자기 만족은 학문의 적이다. 우리가 자기 만족을 면하기 전에는, 우리는 실제로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

"정녕 할 수 없는 일은 억지로 하려고 들지 마라."

"정치가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인 반면에 전쟁은 피 흘리는 정치이다.[44]

(政治是不流血的战争,战争是流血的政治)

"법칙의 성격을 띠고 있는 모든 군법과 군사 이론들은 전(前) 시대나 우리 자신의 시대에 산 사람들이 축적한 전쟁 체험의 총화이다. 우리는 피의 대가로 얻은 교훈을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 그 교훈은 과거 여러 전쟁의 유산이다. 그것을 연구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중략) 우리는 그런 유산들을 우리 자신의 체험이라는 시험대에 올려놓아야 한다. 그래서 유용한 것은 소화시키고, 무용한 것은 버리며, 우리 자신의 고유한 체험은 덧붙여야 한다. 그 세 가지는 몹시 중요한데,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전쟁을 지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일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살았을 때 비판받지 않은 자, 죽어서 비판받기 마련이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진지함이다."

"실수와 좌절을 겪고 지혜를 얻는다."

"인간은 죽기 마련인데, 그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거나 깃털보다 가볍다." (人固有一死-惑重于泰山,惑輕于鴻毛)[45]

"빛나는 날로 나아가는 길은 굽이굽이 사연도 많다."[46]

"힘든 일은 눈 앞에 놓인 무거운 짐을 지고 걷는 것과 같다."

"무슨 일이든 움켜쥐고 내 것으로 만들어라."

"분열하지 말고 단결하라."

"세상에는 이유 없는 사랑 없고, 이유 없는 미움 없다."

"아무리 많은 공을 세웠더라도 절대 교만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열정과 냉정, 긴장감과 원칙이다."

"사상은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바뀌고 적응해야 한다."

"한 번 실수는 실수지만, 두 번 실수는 음모다."

"제대로 가려면 멀리 보라."

"한 번 더 생각하라. 고민하고 예측할수록 지혜가 나온다."

"혁명(革命)은 만찬(晩餐)도, 수필(隨筆)도, 그림도, 한 폭의 자수(刺繡)도 아니다. 그것은 조용히, 서서히, 조심스럽게 앞뒤를 가리며 점잖게 순순히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히틀러가 더 잔인하지 않았나? 사람을 더 많이 죽일수록 진정한 혁명가가 되어간다."

"행운에 기대고, 남의 도움으로 이기려는 마음을 버려라."

"참새는 해로운 새이다." (麻雀是害鸟)[47]

"맹목적으로 소련을 따를 수는 없소. 방귀를 뀌면 냄새가 나는 법인데, 소련이 뀌는 방귀가 모두 향기롭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소?"

"동지들! 여러분은 각자 책임을 철저히 분석해야 할 것이오. 똥을 누고 싶다면 누시오! 방귀를 뀌고 싶다면 뀌시오! 그러면 한결 기분이 나아질 것이오."

"먹은 다음에 똥을 눠야 한다는 것 때문에 먹는 것이 쓸데없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오!"

"문예는 국가에 봉사해야 하며, 문예는 중국 공산당이 지도하는 혁명의 대의에 입지해야 한다! 모든 예술과 표현은 낙관적이여야 하며 당에 대한 어떠한 비판 / 폭로 / 비난도 엄격히 금한다!"

"중일의 싸움은 본당 발전의 절호의 기회이며 우리 공산당의 기본 정책은 전력의 70%를 자기 세력 확대에, 20%를 국민 정부와의 대응에, 나머지 10% 항일에 사용한다."

"중공은 일본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일본의 대륙 침략이 없었다면 우리는 국공 합작이 있을 수 없고, 우리는 발전할 수 없고 최후 승리를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면 사죄하고 용서를 비는데, 내가 보건대 일본의 침략이 없었던들 우리가 어찌 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일본에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책을 너무 많이 읽는것은 해롭다."

"부농들만 보아도, 자본주의의 심각한 문제를 알 수 있다."

"공산주의는 사랑이 아니다. 적을 부수는 망치다."

일제의 침략은 중국 공산당에 큰 이익이 됐고, 중국 인민에게 권리를 되찾아줬다. 일제 황군의 힘이 없었다면 공산당이 집권하지 못했을 것이다.” - 1964년 사사키 고조 일본 사회당 의원이 중국을 찾았을 때 한 말.


9. 관련 서적


워낙 다면적인 인물이기에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 어느 한쪽만을 다룬 서적들이 많다. 그래서 한쪽만 보면 전설적인 인물 또는 나라를 후퇴시킨 인물이 된다.

9.1. 평전


  • 제일 오래된 고전 중 하나로는 미국의 좌익 언론인 에드거 스노우가 직접 옌안의 중국 공산당 근거지로 찾아가 마오쩌둥을 인터뷰해서 내놓은 <중국의 붉은 별>이 있다. 마오쩌둥은 이 저작을 자신의 전기로 대신 한다고 공언했고 서구의 중국 전문가, 언론인, 지식인 등에게 마오쩌둥에 대한 이미지를 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언론 플레이를 바탕으로 마오쩌둥은 서구에서 '무능하고 부패한 독재자' 장제스를 대신할 '활력 넘치고 개혁적인 농촌 민주주의자'라는 이미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여기서 나온 마오쩌둥의 인상이 이후 수십 년을 갔고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나 현재는 매우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책으로, 마오쩌둥의 공포 정치와 항일 전쟁에서 태업 등이 모두 은폐되어 있으며, 죽의 장막이 거둬지기 전의 오판을 중심으로 쓰여진 것이 많다. 이런 마오쩌둥의 대미 언론 플레이와 중화민국을 제치고 미국과 직접 협상하여 중국에서의 패권을 차지하려고 한 모습들은 리처드 번스타인의 1945 중국, 미국의 치명적인 선택이 지금까지 나온 책들 중에서는 제일 잘 다루고 있다.
  • 마오쩌둥 사망 직후에 나온 평전으로 로스 테릴의 마오쩌둥 평전이 있다. 로스 테릴의 저서 자체는 마오의 사생활에 큰 관심을 두어 책 자체는 좋지만 가십거리성이 짙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이후에 재평가되었다.[48] 하지만 로스 테릴의 저서 자체는 초판이 1980년의 물건인지라 지금 보면 굉장히 낡은 책으로, 최신 연구와 교차 검증을 해서 볼 필요가 있다. 로스 테릴의 연구는 1990년대 이후 장제스와 국민당 관련 연구나 중일전쟁 연구들의 성과들이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다. 현재는 절판되어 구하기 어려운 책이다.
  • 로마인 이야기의 번역자 김석희가 번역한 앤 포크너의 <마오쩌둥>이 있다.
  •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펴내고 한국에서 번역된 <마오쩌둥: 중국의 혁명을 이끈 반항아>라는 책도 존재한다.
  • <장개석비록>을 내놓아 장제스에 대한 고평가를 내렸던 산케이신문에서 연재한 <모택동비록>이 있다. 현재는 절판되었지만 중고 시장에 물량이 많이 풀려 있다. 주로 문화대혁명 시기의 중화인민공화국의 내부 암투와 궁중정치를 다루고 있다. 대한민국의 김종필 전 총리가 이 책을 매우 인상 깊게 읽고 추천한 바가 있다.
  • 마오쩌둥 평전과 관련해서 짚고 넘어가야할 책 중 하나로 장융의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가 있다. 마오쩌둥을 거짓말장이이자 마약왕, 그리고 무자비한 악당으로 묘사한 이 책은 그간 마오쩌둥에 대한 모든 좋은 평가를 반박하며 그를 바닥까지 끌어내리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장융은 문화대혁명 직후 영국으로 간 망명객으로서, 마오에 대한 논조는 매우 비판적이다. 읽다 보면 개인적 증오심이 묻어날 정도다. 스스로도 마오쩌둥을 괴물로 묘사하려 했다고 한다. 원판으로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마오쩌둥의 신화를 완전히 부수고 일개 군벌에 지나지 않았으며, 마오가 1941년 무렵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농민들을 상대로 아편을 팔아 막대한 수익을 챙겼고 대약진 운동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일과 티베트 침공, 심복이었던 린뱌오의 아들 린리궈가 그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몽골로 달아나다가 비행기 사고로 죽는 내용까지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대중 역사서로는 서구권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서구권 학계에서는 매우 비판적으로 본다. 특히 사료의 검증 없이 결론을 내고 끼워맞추기 식으로 선택된 사료만을 제시한 것은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국민당 측이나 중소 결렬 후에 중국과 적대 관계가 된 소련의 프로파간다를 출처로 받아들여 쓴 부분이 상당수다. 게다가 일부 부분에 있어서는 심각한 오류도 있으니 상당히 가려 봐야 한다. 실제로 중화민국에서 해당 책을 출판 준비하다가 'XXX 장군은 공산당 간첩이었다'는 내용이 문제가 되어 '그 장군의 아들에게서 우리 아버지가 간첩이라는 증거를 내놔!'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결국 장융은 끝까지 증거를 내지 않아 출판이 무산된 일도 있었다.[49]
일단 마오쩌둥의 20년대 잔혹한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건설, 중일 전쟁의 태업[50], 국공 내전 시기의 학살 행위, 마약 거래[51] 등은 다른 연구와도 교차검증되는 부분이고, 국제 혁명가로서의 모습은 굉장히 잘 묘사했다고 일부 호평도 있다. 이 책 자체가 100% 거짓말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다. 마오쩌둥에 대한 매우 비판적인 연구들도 장융의 책에 대해서 장융이 마오쩌둥 격하를 시도했지만 학술적으로 대단히 비판 받았다는 것은 한 번씩 언급한다. 따라서 구하게 된다면 역시 다른 연구들과 교차검증해서 볼 필요가 있다.
  • 한국인이 펴낸 책으로는 2012년 11월에 나온 "중국지" 상하권이 있다. 이 책은 진보 언론인 미디어 오늘에서 원로 언론인인 현이섭이 연재했던 글인데, 삼국지 연의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실제 역사를 각색한 것이다. 마오의 모습은 상권에서는 영웅적인 불굴의 혁명가로 나오지만, 하권에서는 무지막지한 폭군의 모습으로 나온다. 이후 절판되었다가 2017년 상중하로 나뉘어 다시 출판되었다. 일단 중공의 편향되고 편집된 공식 자료의 영향으로 미화의 모습이 많이 보이는 것이 큰 단점이다. 다른 객관적 연구들과의 교차검증을 해서 읽어보는 것이 필수라 하겠다.
  • 2010년대 들어서는 홍콩 대학 교수 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이 높은 평가를 받으며 마오의 신화를 걷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1부 마오의 대기근, 2부 해방의 비극을 시작으로 현재 3부 문화대혁명까지 나와 있다. 중화인민 공화국이 해금한 기밀 문서들을 바탕으로 마오의 악행에 대해서 실증적이면서 노골적으로 밝혀내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2016년 가을 2부 해방의 비극이 정발되었고, 2017년 4월 마오의 대기근이, 동년 6월 문화 대혁명이 정발되었다.[52] 다만 디쾨터의 저서의 경우 본인이 명시하듯이 기본적으로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적이고 주관적인 시각을 기본으로 깔고 연구, 집필된 책이다. 소위 그 시대를 살았던 민중의 1차적 증언이라는 부분도 당시 대다수 중국 인민의 기준에서 분명히 일반적이라 할 수 없는 고등 교육을 받은 중상층 출신이었던 망명객 로버트 로의 증언을 비롯한 편향된 취사 선택이 많다. 그리고 중화민국 시기가 분명 재평가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청 말과 중공에 비해서 지나칠 정도로 낙관적 시각을 깔고 접근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디쾨터의 삼부작이 언어적 접근성과 중공 당국에 의한 사료 열람의 제한 같은 한계에 시달리는 서구 학계 기준에서 치밀한 1차 사료 조사를 통해 집필된 좋은 역사서인 것은 호평과 혹평 모두가 인정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주관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새롭게 마오쩌둥의 체제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도출했다거나,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기 보다는 일종의 고문 포르노를 폭로하는데 집중했기 때문에 자료 수집이 아깝다는 것 역시 호평과 혹평이 모두 인정하는 상황이다. 호평하는 쪽에서는 그래도 마오쩌둥 체제의 악독함에 부정하는 자들에 대한 '최후의 못'이 될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지만, 펠릭스 벰호이어 같은 비판적 학자들의 경우에는 장융의 마오와 수준이 다르지 않다는 입장을 보인다. 이렇듯 전문 중국 근현대사 학자들 사이에는 의견이 엇갈리는 책이니 주관성에 대하여 감안하고 읽을 필요가 있다. 어쨌든 마오란 인물 자체가 중국 근현대사라는 거대한 역사적 무대에 남긴 족적이 엄청나게 큰 만큼 비판적으로나 호의적으로나 관점이 엇갈린 연구가 지속적으로 쏟아질 수 밖에 없고, 이런 학문적 흐름은 마오쩌둥이 건설한 체제가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만큼 아직 현재 진행형인 논쟁거리이다.
  • 2017년에는 2007년 러시아 기밀 문서들을 바탕으로 알렉산드르 판초프 교수와 스티븐 러빈 교수가 공저한 마오쩌둥 평전이 민음사를 통해 정발되었다. 1044페이지라는 압도적인 분량이 읽는 이를 짓누른다. 정말 두꺼운 책이다. 이 책은 마오의 독자 혁명론을 부정하고 마오를 스탈린의 충실한 후계자로 묘사하고 있다. 충분한 1차 사료들을 바탕으로 내놓은 역작이지만 일부 비판도 있는데, 마오쩌둥의 국제 혁명가적 면모를 잘 포착하지 못하고 너무 중국의 국내적인 상황에서만 설명하였다거나, 러시아 기밀 정보에 의존하여 지나치게 러시아 시각에 경도된 것은 아닌가 하는 비판 등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에 나온 마오쩌둥 평전 중에는 가장 수준 높은 최신 정보를 담고 있는 책이다.[53]
  • 폴 포트 평전 저자로 유명한 필립 쇼트가 집필한 마오쩌둥 평전이 2019년 교양인에서 문제적 인간 시리즈 13번째 인물로 출간되었다. 책은 초기 생애부터 대장정까지를 다룬 1권과 중일전쟁부터 마오의 사망까지를 다룬 2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9.2. 선집, 개인적인 면을 다룬 책들


[image]
  • 정말정말로 원전에 도달하고 싶은 사람은 홍위병의 필수 요소였고 문화대혁명 당시의 베스트셀러였던 모주석 어록(일명 모택동 어록, 영어로는 Little red book)을 읽어보는 것도 괜찮다. 20세기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인 모주석 어록. 총 2억부가 인쇄되었다고 하지만 5억부까지 늘어나기도 한다. 현재도 중국의 헌 책방에 가면 쉽게 구할 수 있다(최근에 인쇄된 중영 대역본도 존재한다). 일설에 의하면 마오쩌둥이 만약에 이 책의 인세를 챙겼다면 수백억대의 부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마오쩌둥이 스스로 한 이야기들을 쭉 적어놓은 책. 물론 한국에서 구하기는 힘들다. 과거에는 이런 걸 읽었다간 코렁탕을 취식하게 되었다. 게다가 민주화 된 이후에 정식 출간이 된 적이 없을 뿐더러, 마오이즘 관련 서적이 출판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을 때는 이미 소련이 붕괴되고 중국이 개방되고 동유럽이 무너지던 시대여서 마오이즘 자체가 이미 한 물 간 사상이 되어버렸다. 단순히 연구 차원에서 도서관이나 여타 정식 경로를 통해서 모주석 어록을 읽어보는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이 아니므로 괜찮다.

모주석 어록을 거론하는 이유는 마오쩌둥의 모순론이 국내에 출판되어있긴 한데, 생각보다 내용이 길고 어렵기 때문. 괜히 홍위병들이 모주석 어록을 하나씩 소지하고 다니면서 읽은 게 아니다. 일반 대중들이 다가가기 쉽게 잠언 형식으로 쉽게 써있기 때문. 다만 조선족 자치주에서 돌아다니던 번역본이 있다고 한다. 베이징에는 민족 출판사라는 베이징 유일의 소수 민족 관련 책을 출간하는 전국 규모의 출판사가 있다. 아마도 이것은 이 민족 출판사에서 1966년에 발간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도 연변 지역 헌 책방에서는 간간히 구입할 수 있는 듯.
  • 마오쩌둥 선집도 한국에 들어와 있다.
  • 개인적 일면을 다룬 책은 마오쩌둥의 아들이 쓴 <나의 아버지 마오쩌둥>이라는 책이 있다.
  • 마오쩌둥의 개인적 일면을 알아보기 위해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책으로는, 24년 동안 마오의 주치의를 하다가 미국으로 망명한 리즈수이가 펴낸 <마오쩌둥의 사생활>이라는 책이 있다. 처음 이 책이 나왔을 땐 그 사실 여부에 관한 큰 논란이 있었으며, 다른 마오의 주치의(주치의가 여러 명이었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들어 이 책의 오류를 지적하는 책을 홍콩에서 펴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마오의 도덕성을 의심하게 한 노골적이고 신랄한 폭로에 중국 쪽에서는 못 믿겠다는 식의 비방이 많이 나왔고, 나무위키에서도 믿기 어려운 야사적인 책이라는 서술이 있었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선 굉장히 신뢰성이 높은 책으로 인정 받고 있으며, 마오쩌둥 평전의 저자 로스 테릴은 이 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바도 있다. 그 외에 홍콩 대학 교수 프랑크 디쾨터의 저서라던가, 미국 언론인 출신의 리처드 번스타인 등의 저서에서도 리즈수이의 책은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다. 당장 리즈수이의 회고는 중국이나 러시아의 해금된 기밀 정보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일치하는 부분도 많다. 현재는 절판되었지만 중고장터에 물량이 많이 풀려있다.
  • 한길사에서 인문 고전 시리즈라는 타이틀을 달고 출간한 '마오쩌둥'이라는 책이 있다. 주로 마오쩌둥의 사상과 글을 정리했다.
  • 마오쩌둥 잠언도 국내에 출판됐다.

10. 그 외


[image]
인민 정치 협상 회의 전국 위원회 위원이 된 선통제와 찍은 사진.
  • 인류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 5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임에도 그의 저서는 성경의 판매 추정량과 맞먹는다. 최소 판매 추정량만 따지면 그의 저서들은 총 14억 5000만 부수, 성경은 25억 부수다.
  • 홍루몽을 중국 고전 소설 중 최고의 책이라고 말했다. 그는 "'홍루몽'은 다섯 번 읽어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 다섯 번 읽어야 한다... 중국 고전소설 중 '홍루몽'이 최고다."라고 말했다.
  • 중국인들이 도박마작을 금지하려고 노력했지만, 마오쩌둥 본인은 "마작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다"면서 GG쳤다. 비슷한 일화로 싱가포르의 총리였던 리콴유도 "중국인들에게 어지간한 것은 다 금지시켰어도 마작만큼은 금지시킬 수가 없더라"라고 GG친 일도 있다.
  • 앤디 워홀이 그린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아시아 경매 최고 금액으로 팔렸다. #
  • 키는 180cm(공식), 또는 172cm라는 설이 있는데, 모두 20세기 초반의 중국 남부인 평균인 160cm 초반보다는 훨씬 큰 키이다. 172cm가 더 신빙성이 있다. 1945년 170cm인 장제스와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키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 장정을 마친 후 옌안에서 50대가 되면서 급격히 몸이 불었는데, 후덕한 몸집과는 달리 목소리는 매우 고음이며 날카롭다. 1949년 개국식에서 행한 연설을 들어보면 후난 사투리가 매우 심함을 알 수 있다.
  • 스탈린과 비슷하게 야행성을 가졌으며, 극심한 불면증 환자였다. 그리하여 옌안 시절부터 수면제를 상용했다.

11. 각종 매체에서




12. 참고 문헌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레빈, 민음사.
  • 마오쩌둥 평전, 로스 테릴, 이룸.
  •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상, 하, 장융, 존 핼러데이, 까치.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베리타스북스.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 모택동의 사생활 1~3권, 리즈수이,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해방의 비극,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마오의 대기근,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1~3권, 조영남, 민음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국공산당역사 1,2권,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중국 인민해방군사, 국방군사전략연구소.
  • 모택동 VS 장개석, 이건일, 도서출판 삼화.
  •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1,2권, 모리스 마이스너, 이산.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망각을 거부하라, 첸리췬, 그린비.

13. 관련 문서



13.1. 인물



13.1.1. 공산당



13.1.2. 국민당



13.1.3. 해외



13.2. 사건



[1]중화인민공화국 후난성 샹탄 시.[2] 180cm 이상이라는 설이 있으나, 이것은 대부분의 공산 국가가 그렇듯이 우상화로 인해 실제보다 키를 부풀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키가 169cm였던 장제스와 키 차이가 적고 리처드 닉슨(182cm), 헨리 키신저(175cm), 체 게바라(173cm) 등과 찍힌 사진을 통해 비교해봐도 180cm은 커녕 173cm도 넘을 수가 없다. 실제로는 청년기에 178cm였고 노년기에는 172cm라고 한다. 물론 1893년생 동양인인 걸 감안하면 상당히 큰 편에 속한다.[3] 마오쩌둥은 셋째로 장남, 차남, 장녀, 차녀가 요절했다.[4] 위키백과에서 과거에 불교 신자였다고 나온다.[5] 문서 참조. 마오쩌둥이 실시한 농업 정책인데, 완전히 폭망해서 대기근으로 '''5000만 명 이상'''이 죽었다. 이는 당시 전체 인구의 약 8% 정도로 현대 대한민국에 대입하면 '''400만 명, 부산광역시 전체 인구를 능가하는 인명이 사망하는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6] 중국의 풍부한 문화 유산들을 전부 때려부숴 없애서 맨 밑바닥부터 모든 것을 시작하자는 운동. 사실상 중국 공산당(정확히는 마오쩌둥)보다 위대한 문화들을 전부 없애버리겠다는 명목 하에, 마오쩌둥을 따르는 홍위병들이 중국의 수많은 문화 유산들을 때려부숴 없애는 것도 모자라 지식인들까지 죄다 숙청해버렸다.[7] 70% 잘했고, 30% 못했다는 말. 70%는 중일전쟁 동안의 항일 활동과 국공내전의 승리로 공산 중국을 건국하고 강대국으로 만들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부여해준 것이고, 30%의 경우 문화대혁명대약진운동으로 나라의 발전을 말아먹었다는 점에서 후임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이 직접 부여해준 것이다.[8] 자세한 것은 대약진 운동 내용 참조. [9] 단, 덩샤오핑의 발언과는 별개로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중국은 마오쩌둥이 아닌 장제스나 다른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더라도 강대국으로 가는 길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마오쩌둥의 30%의 과 때문에 중국이 강대국이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는커녕 중국을 한참 퇴보시켜 한때 한국이 중국의 경제력의 90%를 따라잡게 만든 것이다. 외려, 중국의 경제규모는 '''대약진운동이나 제사해 운동, 문화대혁명 전에도 세계 5위였다. 마오쩌둥의 그 30%의 과 때문에 나름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다음으로 규모가 거대했던[8] 중국의 경제 규모가 세계 13위로 떨어졌고, 아시아 경제 규모 1위 자리를 일본에게 빼앗겼다.''' 중국을 실질적으로 강대국으로 만든 사람은 덩샤오핑 본인이라고 평가받는다. 따라서, 저 평가가 마오쩌둥을 진심으로 좋게 평가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정권 창립자인 전임자 마오쩌둥에게 의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것이라고 봐야한다. 독재자 중 전임자를 격하하고 오랫동안 독재권력을 유지한 사례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정도가 아니면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10] 아이러니하게도 마오쩌둥은 소련에서 벌어지는 스탈린 격하 운동에 대해 '스탈린의 공과는 7:3'이라고 평가하며 흐루쇼프 정권과 각을 세웠다.[11] 1956년 이전에는 주요 관공서에 레닌과 스탈린의 초상화가 함께 걸려 있었으나, 스탈린의 초상화와 동상 등 선전물은 모두 철거되고 레닌이 소련의 절대적인 우상이 되었다. 러시아 내의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레닌과 함께 스탈린이 다시 우상이 된 것은 소련 붕괴 이후의 일이다.[12] 천두슈 등 마오쩌둥 이전 중국 공산당을 창당한 창당 1세대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기 전에 모두 사망했거나, 쑨원 사후 장제스의 등장으로 시작된 중국 공산당에 대한 중화민국 국민당 정권의 정치적 탄압으로 급성장한 마오쩌둥, 주더, 저우언라이, 펑더화이 등을 위시한 신진 세력들에게 정당 내 주도권을 잃고 비공산주의자들로 전향했다.[13] 물론 이는 중국인들의 생각일 뿐이다. 사실 한고조, 수문제, 조광윤, 주원장과 모택동은 격이 다르다. 한고조는 한족의 정체성을 확립했던 전한을 세웠으며, 수문제 역시 개황의 치를 통해 치세 동안 수나라를 부국으로 만들었다. 조광윤 역시 중국 역사상 문화와 학문이 발전했던 송나라를 건국했다. 주원장도 몽골족 원나라를 몰아내고 자력으로 중국을 통일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장제스가 중국을 일시적으로 통일한 뒤에 혼란을 틈타 국민당의 뒤통수나 치며 영토를 무력으로 잠식해나가는 식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결정적으로 하나의 중국 논리대로라면 마오쩌둥은 중국의 통일을 이루어 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14] 과거에는 이렇게만 불렀다. 일본인의 인명 또한 한자음으로 부르는 경향이 강했다. 가령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풍신수길이라고 부른다거나.[15] 사실 음절 구조만 놓고 보면 ㄨ(u, 우)에 ㄥ(eng, 엉)이 합쳐진 발음에서 e(어)가 약화된 발음이므로 '웅'이 오히려 정확하다. 참고로 조선족들이 중국어 발음을 한글로 옮길 필요가 있을 때도 한어병음 ong을 '웅'으로 옮긴다.[16] 다만 부부 관계는 말 그대로 마오쩌둥이 일진이고 장칭이 빵셔틀이었다. 게다가 장칭의 인격도 영 좋지 않았으며, 4명의 아내 중 평판이 가장 안 좋다.[17] 다만 김일성이나 김정일도 마찬가지로 개인적으로 이들을 만나본 사람들, 심지어 서구권 인사들도 이 두 독재자들을 호평하기 때문에, 이 평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 일단 주위의 인망이 없이는 독재자를 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대다수 독재자들이 공유하는 공통분모가 개인적으로 만나면 대단한 호인이라는 평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과 인품이 별개라는 것을 알려면 마피아 보스과 부하들의 관계를 생각하면 된다. 친화력이란 건 사람과 친해지는 능력 자체이지 그 자체가 도덕적 칭송이 아니니, 친화력이 높다는 말에 정색할 필요는 없다. 친화력으로 친해져놓고 배신하더라도 친화력이 좋은 건 좋은 거고, 모택동은 그런 그의 능력을 부정적인 쪽으로 많이 사용했다고 여기면 그만이다.[18] 명장 주코프와 스탈린의 애증 어린 관계는 유명하다. 스탈린이 말을 듣지 않을 때 설득할 만한 인물로 주코프만한 사람도 없었다고[19] 사실 중국의 지도자로 따지면 차라리 장제스스탈린과 비슷한 성격에 가깝다.[20] 미국도 냉전 중 공군참모총장이나 전략공군사령관 등 핵무기 사용권에 가까운 자리에 강경파 또라이인 커티스 르메이 등을 기용해서 미치광이 전략으로 사용했다.[21] 마오쩌둥은 중국의 역사와 전통을 부정하는 동시에 지난 세기 동안 중국이 세계에서 누렸던 지위를 복권시키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여겼다. 그의 모순적인 성향을 잘 보여주는 부분.[22] Gaddis, John Lewis., We Now Know: Rethinking Cold War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1997년, 박건영 역, 『새로 쓰는 냉전의 역사』, 서울: 사회평론, 2002년, pp.419 - 420.[23] 공산당이나 국민당이나 20세기 중국의 격변기 때 한 가닥 하던 인물들은 상당히 장수한 편이다. 마오쩌둥의 숙적이었던 장제스는 마오보다 연상이었지만 딱 1년 전인 1975년 사망했고, 마오쩌둥의 후임인 덩샤오핑도 90살 넘게 산 데다, 비록 마오쩌둥보다 먼저 갔지만 저우언라이도 단명하진 않았다. 하지만 끝판왕은 장쉐량. 1898년생이고 장제스가 노베이스 군바리, 마오쩌둥이 빈농 출신 버러지였을 때부터 거대 군벌의 수뇌부였던 이 양반은 무려 '''104세'''까지 살았고, 국부천대로 대만이 중화민국이 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마오쩌둥의 영도로 건국됐을 때는 물론이고 장쩌민, 천수이볜 시대인 21세기 극초반인 2001년까지 무려 '''3세기'''를 살았다.[24] 당시 중국의 생활 수준이나 수도 환경을 생각하면 이해가 갈 것이다. 전국의 중국인들은 당시엔 수도 시설이 부족하여 씻지도 못했고, 씻어봤자 개울물에서 짧으면 2주, 길면 2달에 한 번씩 종종 씻었다고 한다. 일반인들이 이 정도인데 최고 지도자인 마오쩌둥 정도면 그나마 당대 중국인 평균으론 나름 위생 관리에 신경 썼다는 소리다.[25] 물론 노쇠했거나, 혈관이 약한 사람은 골로 가기 딱 좋은 습관이다. 마오쩌둥도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는 냉수욕 대신 미온욕으로 대체했다.[26] 물론 이때 양쯔강의 수질이 썩 좋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측근들은 말렸지만, 그럼에도 수영이 좋아서 강행했다고 한다.[27] 한국에서도 치약을 이용한 양치질이 보급된 것은 1960년대에 와서였고, 그 이전에는 보통 소금을 이용해서 양치질을 했다.[28] 사실 호랑이는 충치로 사냥 능력이 떨어져 굶어 죽거나 호환을 일으켜 사살 당하는 경우가 많다.[29] 위에 나오는 홍소육이나 취두부도 중국에서 고급 요리로 치지 않는다. 물론 서태후 같이 취두부를 즐겨먹은 케이스도 있지만.[30] 참고로 덩샤오핑도 매운 요리를 즐겨 먹는다는 점에서 마오쩌둥과 비슷한 식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식사를 규칙적으로 하지 않았다면 덩샤오핑은 식사를 규칙적으로 한다는 철칙을 지켰기 때문인지 술과 담배를 즐겼음에도 93세까지 장수했다.[31] 다만 부인까지 패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지 부인은 팼다고 하며 원고는 압수되었다.[32] 위 항목에 나온 것처럼 마오쩌둥주의와 기타 다른 공산당 분파들의 사상이 다르니 서로 투닥댄다. 다른 분파들은 일단 농민들을 교육시키고 도움을 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데, 마오주의자들이 자꾸 총으로 혁명을 일으키자고 설쳐대니(...) 마오주의자들도 자기 계획에 걸리적거리니까 눈엣가시로 본다. 그 예로 공산당이 힘이 있는 데에서는 마오이스트들이 힘을 못 쓴다. 그래서 마오주의자들이 공산당 당사를 습격해서 당원들을 살해하거나 서로 교전하는 일이 잦다.[33] 실제로 농민과 정부와의 토지 문제로 농민들을 공산당과 마오주의자들이 번갈아 만나본 적이 있는데, 공산당은 일단 도와줄 테니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해결하자고 하고, 마오주의자들은 총기를 줄 테니 싸우자고 했는데 농민들이 마오주의자들에게 넘어갔다. 그러자 나중에 경찰이 와서 마을 주민들을 전부 쓸어버렸다고.[34] 인도의 좌파 세력들은 현 체제를 인정하는 상황에서 교육과 복지, 언론를 통해서 농민/노동자 계급을 조직한다는 전략을 오래 전에 채택하였다. 사실상 서구의 중도좌파 정당들과 유사하게 변해서 지방정부를 수십 년째 장악하고 있는 곳도 있을 정도. 이러니 툭하면 무장봉기를 외치는 마오주의자들을 싫어할 수 밖에 없다.[35] 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인도 정부는 경찰로 충분하다고 보고 군대를 안 보내고 있다. 정확히는 카슈미르 지역이 영토 분쟁 지역이라 군대를 보냈다가는 외교적으로 골치 아파져서이다.[36] 실제로 중화인민공화국은 일반 '''국가 주석'''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실세이다.[37]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문명4에서 강선을 개발하면 나오는 어록이다. #[38] 이 문구로 문화대혁명이 촉발된다.[39] 다른 번역으로는 "인민, 인민이야말로 역사의 발전을 촉진하는 결정적인 힘이다."[40] 원문은 1946년 미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미국 기자는 정말 미국이 종이 호랑이로 보이냐고 하니까 "처음에는 진짜 호랑이겠지만 결국 인민들이 미 제국주의를 약화시킬 것이고 궁극적으로 그들은 종이 호랑이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41] 린뱌오소련으로 도망친다는 보고를 듣고 나서 한 말. 비와 과부가 된 어머니의 시집은 막을 수 없다는 의미. 김태호 총리 서리가 총리 인준을 포기하면서 남긴 글이기도 하다.[42] 온갖 꽃이 함께 피고 온갖 새가 울어재낀다 = 많은 사람들이 각기 주장을 편다.[43] 위에서 봤듯이 '백화 제방, 백가 쟁명' 선언 이후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에 돌입했다. 물론 마오쩌둥 자체가 당시의 지식인층들의 불만을 과소평가하고 여유 있게 사상의 자유 정책을 취했다가 호되게 데인 감도 있지만. 여하간 계획대로든 아니든 당한 비판적 지식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낚시 그 자체였을 것이다.[44] 클라우제비츠도 비슷한 말을 했다.[45] 사기 태사공자서에서 가져온 말로, 항일전쟁 도중 숯을 굽다가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말이다. 그런데 아편을 굽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다.[46] 페루마오이즘 반군조직 센데로 루미노소, 즉, '빛나는 길'의 이름은 여기서 따왔다.[47] 대개 알려진 "저 새는 해로운 새다"는 만화 창천항로의 대사이다.[48] 예컨대 마오쩌둥과 비서 장위펑의 애인 관계에 대해서도 조명한 책이 이 책이다. 로스 테릴의 무리한 추정으로 여겨졌으나 현재는 로스 테릴의 주장이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49] 해당 저서는 장즈중, 웨이리황, 후쭝난을 비롯한 국민당의 거물급 장성들이 첩자라고 주장하였다.[50] 앤터니 비버는 2차 세계대전사를 저술하며 중일전쟁 부분을 저술할 때 해당 책의 저자들과 교류하고 장즈중 간첩설 등도 수용했다.[51] 중국 공산당이 아편을 싼 값에 매입하여 되파는 마약 거래를 했다는 사실은 알렉산드르 판초프 교수와 스티븐 러빈 교수가 공저한 마오쩌둥 평전에서도 확인된 내용인데, 이미 1920년대 경에 후난 남부에 주둔하고 있던 주더의 군대가 군량 조달 목적으로 마약 거래를 주도했었다고 한다. 즉 중국 공산당의 마약 거래는 한두 해 정도만 하고 끝낸 정도가 아니었던 것이다.[52] 원래 2016년까지 3부작 전부를 정발한다 했는데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미뤄졌다.[53] 그래도 이 책은 마오쩌둥을 위대한 혁명가이자 학살자로 정의한다. 즉 프랑크 디쾨터가 쓴 책에 비하면 그나마 마오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