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더화이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이다. 한국에서는 6.25 전쟁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의 지휘관이었던 '팽덕회'로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마오쩌둥과 같은 후난성 출신이다. 유년기의 삶이 상당히 기구한데, 부모를 잃고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으나 학대가 심하여 어려서부터 광부나 노비 등 막일을 전전했다고 한다.[1][2] 16세에 탕성즈의 사병으로 들어갔다가 그 후 후난군관강무당(군사학교)에 입학하여 국민혁명군의 장교가 되었다. 이후 북벌에 참가하고 1928년 2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국공결렬 이후, 휘하 부대를 이끌고 후난성 핑장에서 봉기했다가 후에 마오쩌둥과 주더의 정강산 해방구에 합류하여 정강산 투쟁을 전개했다.
2.2. 홍군 시절
이후 홍군(공산군)을 지휘하여 창사 봉기에 참여했고 제1차 초공작전에서 린뱌오와 함께 담도원의 병력을 섬멸했다. 이후 제4차 초공작전까지 승리했으나 제5차 초공작전에서는 국민혁명군에게 끝내 밀려났고, 중화소비에트공화국 붕괴 후에는 대장정에 참여했다. 펑더화이는 린뱌오와 함께 홍군에서 가장 유능한 야전 지휘관으로 꼽혔다.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되자 1940년 화북 지역에서 연대 100여 개를 동원한 백단대전을 지휘했다. 이 때 일본군에 어느 정도 피해를 입히기는 했으나 팔로군의 희생도 매우 컸다. 마오쩌둥은 이것을 자신에 대한 항명 행위로 받아들여 격노했고, 팔로군에게 일본군에 대해 철저히 수세로 일관하라고 지시했다.[3] 한편 일본군은 백단대전을 계기로, 그간에는 적대 세력으로 쳐주지도 않고 기껏해야 비적 취급하여 방치해두다시피 하던[4] 중국 공산당을 섬멸하고자 신멸작전을 실시, 화북 지역의 중국 공산당 해방구들을 초토화시켰다. 중국 공산당은 이 때의 큰 타격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대륙타통작전으로 화북 지역의 치안 유지 병력이 대거 차출되면서 이전의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항복 이후 제2차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서북인민해방군(후에 제1야전군)을 맡아 1948년에는 국민당군에 함락되었던 옌안을 수복하였고 이후 계속 서진하여 서부의 국민당군을 소탕했다.
2.3. 6.25 전쟁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펑더화이는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맡았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는데 유엔군이 개입하여 북한군이 위기에 처하자 마오쩌둥은 순망치한(脣亡齒寒)[6] 이라는 사자성어를 들어 출병을 결정하고 펑더화이를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에 임명[7] 하여 1950년 10월, 부사령관 쑹스룬과 함께 북한에 파견했다.[8]"눈이 검다니… 이것이 현대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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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더화이와 김일성. 혈맹국 전쟁 수뇌부인데도 이 두 사람은, 이 사진이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목록에 들어도 좋을 만큼 사이가 나빴다.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을 맡으면서 한반도로 건너 온 펑더화이는 김일성 탓에 많이 고생하게 되었다.
펑더화이는 총사령관을 맡기 전부터 김일성의 오판으로 벌어진 6.25 전쟁의 무모한 앞뒤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북한에 도착해서는 멀쩡한 군단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주제에 중국군을 고기방패 취급하면서 막무가내로 진군하라고 우기는 김일성의 무능에 학을 뗐다. 중국군이 밀어붙이면 미군이 알아서 철수할 거라고 빽빽 우기는 햇병아리 김일성을 상대로 일본군, 국민당군과 숱한 전투를 치르며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펑더화이가 크게 언쟁하면서 주먹다짐하기 직전까지 갔다는 썰도 있다.# 이 때 펑더화이는 김일성을 향하여 '''"당신은 요행만 믿고 전쟁을 일으켰나!"'''라고 맹비난했다고 한다.
펑더화이가 김일성과 갈등한 다른 일화로, 1951년 5월에 춘천 북배산 일대에서 미 제24사단, 미 제7사단, 한국군 제6사단에게 삼각으로 포위당한 중국군 제180사단 총 7,000명이 패잔병 1,000명만 남기고 풍비박산, 대참패한 일이 있다.# 이때 중국군 제180사단의 측면에서 전선을 유지하고 유사시 퇴로를 확보해야 할 북한군 제1군단은 중국군 측에 통보하지도 않고 퇴각해버렸고, 이 일로 병력을 어이없이 잃은 펑더화이가 크게 화냈다고 한다. 광둥성 자오칭도시보, 홍콩 명보의 보도에 따르면, 이 일로 펑더화이가 김일성의 뺨을 두 대 쳤고 얼굴이 퉁퉁 부은 김일성은 일주일간 숟가락을 못 들었다고도 전한다.#
출병 후 펑더화이는 미군이 화력과 물량 면에 강점이 있지만, '''도보 행군을 싫어하고 야간 전투에 취약하고 공중 지원 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약점'''을 통찰하였다.[9][10][11] 이것을 이용하여 펑더화이는 산악지대에 대군을 매복했다가 깊숙이 들어온 미군과 한국군을 시계가 제한되어 포격과 폭격 지원이 용이치 않은 저녁과 새벽 사이 포위하듯 치는 전법을 사용하였다.[12] 양측이 서로의 전술적 강점을 꺼리는 가운데 전쟁은 원점으로 돌아갔고, 이때부터 2년여간 계속 휴전선 부근에서 고지전 중심의 교착된 상태가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평안도에 있던 펑더화이의 사령부에서 러시아어 통역과 행정을 담당하던 마오쩌둥의 큰 아들 마오안잉이 1950년 11월 25일에 미 공군 F-80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전사했다. 펑더화이는 마오안잉의 전사를 (민감한 사항이라 일부러 미뤘는지 아니면 바빠서 못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마오안잉이 죽은 지 3개월이나 지난 후에야 보고했다.''' 마오쩌둥은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는 한동안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히다가 "전쟁은 희생이 따르는 법이지..."라고 한 뒤 "그는 어쨌든 마오쩌둥의 아들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로 인해 펑더화이와 마오쩌둥은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다만 평더화이도 6.25 전쟁에서 아들을 잃었다.[13]
펑더화이는 전선이 교착된 상태에 있던 1952년 귀국하였고 1953년 7월 27일, 지난했던 6.25 전쟁 휴전협정 조인식에 중국 대표 중 한 명으로서 참석하여 휴전협정서에 조인하고 전쟁을 끝낸다. 1954년 국무원 부총리 겸 국방부장에 임명되었다.
휴전협상 중에는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 침착한 모습으로 일관하여 제국주의자의 주구 운운하면서 발광하는 북한 측 대표들과 크게 대비되었고 이에 적인 미군 장성들도 펑더화이에게 호감을 품어 중국어가 가능했던 한국 백선엽에게 간단한 중국어를 배워 중국어로 인사하자 펑더화이가 크게 반색하면서 반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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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시절의 펑더화이와 마오쩌둥.
2.4. 실각 및 숙청
중국에 돌아와 6.25 전쟁을 원점으로 돌린 공로로 국방부장 겸 부총리를 맡았다. 펑더화이는 자신이 국방부장 시절이던 1955년에 군에 계급제를 도입하였고 자신은 군 서열 2위에 중화인민공화국 원수 계급을 부여받았다.[14][15] 펑더화이는 소련군과 미군을 모범으로 삼고 인민해방군을 전문성이 낮은 의용병에서 전문성이 강화된 기술군으로 탈바꿈하게 하려고 이것을 도입했다. 이것은 병사 개개인의 당성을 강조하던 마오쩌둥의 노선과는 모순되는 것이었고 후에 숙청의 빌미가 된다.
루산회의 직전의 중국의 상황은 마오쩌둥이 야심차게 추진하던 대약진운동이 신문과 라디오에서 초과생산 뉴스가 잇따라 나왔던것과는 반대로 질낮은 불량품이 넘쳐나고 일부 지역에서 식량부족 현상이 나타나며 부종환자들이 속출하는 등 파국으로 나타나는 징후가 본격적으로 드러났을때였다. 펑더화이가 1959년 7월에서 8월에 걸쳐 열린 루산 회의에서 한 발언은 펑더화이 자신을 비극처럼 비참한 운명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이 루산 회의를 앞두고 고향인 후난성의 농촌을 시찰한 펑더화이는 선전과는 정반대로 곡물수확량이 급속히 감소하고 이로 인해 농민들이 곤경에 처하는 현실을 직접 살펴보며 루산 회의 기간에 마오쩌둥에게 대약진 운동의 문제점을 전하면서 노선 전환을 건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마오쩌둥의 지도권을 존중하는 정중한 태도로 작성되었지만, 마오쩌둥 노선에 관한 비판이었으니 지도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내용이었다. 마오쩌둥은 이 편지를 회의석상에서 공개하여 토론 의제로 채택하고 펑더화이가 당의 지도에 도전한다면서 비판하였다. 심지어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8월 백단대전에서 마오의 지시를 어기고 일본군을 상대로 허락없이 승리했던 옛날 일까지 끄집어내어 펑더화이를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이러한 마오쩌둥의 몰염치한 행동에 펑더화이도 회의석상에서 반박했지만, 국방부장과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의 지위에서 결국 해임되었고 후임 국방부장으로 린뱌오가 임명되면서 후일 문화대혁명의 단초가 된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이 당시에 계획이 수정되었다면 대약진운동이 일시적인 경기침체 정도로 끝낼수있었겠지만 마오쩌둥 본인도 계획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것을 느끼면서도 끝내 수정을 미뤘고, 펑더화이가 숙청되는걸 본 저우언라이나 덩샤오핑같은 타 지도부급 인사들은 몸보신에 급급하면서 마오의 명령을 거역할 생각을 못하고 대약진운동이 2년 정도 연장되고 말았으며 결국 아사자가 중국 전역에서 속출해버렸는데 이는 펑더화이 개인이나 중국 인민들에게나 커다란 비극이 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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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병에게 조리돌림당하는 펑더화이. 그에게는 생애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1965년, 베이징 부시장이자 명 시대의 전문가인 우한이 쓴 해서파관에서 해서가 펑더화이고 가정제가 마오쩌둥이라는 장칭과 야오원위안의 억지주장으로 해서파관 사건이 일어났고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마오쩌둥에게 반기를 들었던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을 광신적으로 숭배하는 홍위병의 공격 대상이 되어 박해당했다. 1966년 12월 27일 장칭이 파견한 홍위병들이 쓰촨의 펑더화이의 자택으로 몰려들었다. 홍위병은 칠순에 가까운 늙은 펑더화이를 모질게 고문하였고, 그 결과 그는 늑골이 부러지고 얼굴이 완전히 짓이겨졌으며 폐가 못쓰게 될 지경이었다. 홍위병들은 만신창이가 된 펑더화이를 끌고 다니면서 조리돌림했고 펑더화이는 거의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앓았다. 베이징의 감옥에 끌려간 펑더화이는 "마지막으로 경례를 올립니다. 만수무강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마오쩌둥에게 최후의 편지를 썼고 병세가 악화되어 1973년 감옥 의무실로 이송되었다가 1974년 11월 29일 암으로 사망했으니, 향년 76세였다.
이때 펑더화이뿐만 아니라 허룽도 조리돌림당하여 참혹하게 죽었는데 군의 원로가 이렇게 참혹하게 박해받는 것을 본 인민해방군은 크게 격앙되어[16] 난징 군구에서 펑더화이를 구출하겠다고 특공대를 파견하기도 하였고[17] 마오쩌둥은 군부에게 과격한 홍위병들을 진압하라고 지시하여 군부를 달래야 했다. 이에 군부는 각 지방당부와 관청을 점령하고 패싸움하던 홍위병들을 총칼로 짓밟아 어느 정도 화풀이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군부가 정재계를 거의 장악하는 등 군부의 편중이 심해지자 홍위병을 다시 편들어 군부를 숙청하였다(...).
1978년 마오쩌둥 사후, 중국공산당 제11차 중앙군사위원회에서 펑더화이 사건이 재조사되어 사면되었고 1978년 12월 24일 추도회가 열려 덩샤오핑에 의해 모든 명예가 회복되었고 1981년 6월 27일 11기 6중전회는 펑더화이, 황청, 장원톈, 저우샤오저우를 반당 집단으로 결의한 8기 8중전회의 결의를 오류로 평가하면서 펑더화이를 완전히 복권시켰다.
시진핑 현 주석과도 연관이 있는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인 시중쉰[18] 은 제2방면군 시절부터 펑더화이의 정치장교였는데,[19] 당시 펑더화이의 측근이었다는 이유로 가문이 몰락하였다. 그 때문에 시진핑은 태어나기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밑바닥에서부터 자신의 실력으로 차근차근 올라와야 했다.
3. 평가
국공내전 때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6.25 전쟁에서도 '''제해권, 제공권이 없던 상황'''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에 대규모의 병력을 이용한 포위 작전으로 치명적 타격을 가했고, 1.4 후퇴라는 굴욕을 겪은 유엔군사령부와 미국이 비밀리에 한반도 포기와 유엔군 철수를 검토할 지경까지 몰아넣었지만, 전력의 한계로 유엔군의 주력을 끝내 궤멸하는 데에는 실패하면서 전세를 완전히 뒤집지는 못했다. 결국 6.25 전쟁은 2년 여의 지리한 소모전 끝에 휴전이라는 어중간한 결말로 종결되었다.
전장에서 부하들을 늘 걱정하는 덕장이었다. 들것에 실려가는 부상병을 직접 나르는 모습에 부하들이 감동하였을 정도. 또한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월까지 3번의 공세를 펼쳐 심각한 인력 손실과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중국군의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여 마오쩌둥에게 2개월에서 3개월간 전군에 휴식을 명령하고 이듬해 3월쯤에 공세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김일성이나 북한 주재 소련 대사 라자예프는 지금 당장 부산까지 밀고 내려가 달라고 주문했지만, 펑더화이는 그런 무리한 요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실전을 뼈저리게 겪었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것에 관해 독전파들의 요구가 부당하다고 지적하고 펑더화이가 옳게 선택하였다며 치켜세웠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중국군과 대치하던 유엔군의 미8군사령관 매튜 B. 리지웨이의 생각과도 비슷했는데 두 사람은 무리한 진격보다는 충분한 물자와 인력 보충을 도모하고 전략상 요충지를 차근차근 점령해나가는 쪽을 선호했다. 또한 이러한 생각은 8월 15일 광복절까지 종전하겠다고 무리한 남진을 선택한 김일성이나, 마찬가지로 인천 상륙작전 이후 기고만장하여 크리스마스 전까지 종전하겠다고 무리한 북진을 선택한 더글러스 맥아더의 생각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미국의 논픽션 작가 데이비드 핼버스탬의《콜디스트 윈터》에서 글쓴이는 리지웨이를 중국군으로, 펑더화이를 미군으로 옮겨놨어도 두 사람은 실제 역사와 같이 판단했을 것으로 평가했다.
이렇듯 부하를 생각하는 덕장에 능력도 겸비한 인물이기에 중국에서는 한신[20] , 관우와 같은 용장으로서 추앙받는다.
4. 주요 경력
[1] 후에 펑더화이가 장교가 된 뒤 할머니를 다시 찾았는데 그땐 집안의 난 인물이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2] 그의 할머니는 아편 중독자였고 그 냄새가 싫었던 팽덕회는 자다가 일어나 아편그릇을 발로 차버렸다. 할머니는 크게 노하여 친족회의를 소집하여 그를 물에 빠뜨려 죽여야 한다고 했다. 계모는 찬성했고 아버지도 친족회의의 뜻이라면 그리하자고 했다. 당시 중국은 아직 배타적인 농촌 분위기가 있어서 법보다는 친족이나 마을사람들의 결정이 절대적이었다. 쫓겨나면 갈 데도 없으니... 다만 외삼촌이 반대한 덕분에 살아났다고 한다.[3] 팔로군의 세력이 국민당군에 미치지 못했기에 병력 손실을 입으면 국민당군에게 완전히 주도권을 넘겨줄까 우려한 것이다. 마오쩌둥이 항일전보다 국민당군을 상대로 한 세력 확장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증거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국민당군과 팔로군의 차이를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중국군 '''주력'''인 국민당군은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여서 패배를 하더라도 세력이 유지될 수 있었으나 팔로군은 그대로 전멸이다. 전면전이 아닌 삼광작전 때도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또한 만주의 공산군은 40년대 초반 주력 다 중국 본토로 빠진 관동군도 아닌 만주군에 전면전을 하지 않고 게릴라전을 벌였는데도 전멸당한다. 세력확장이 아닌 생존의 문제였던 것이다. 해방구가 주로 일본의 점령지인 화북지역에 설치된 것까지 고려하면 생존>항일>세력확장이란 평가가 옳다. 진짜 세력확장이 우선시되었다면 일본군보다 약한 국민당군의 지역인 사천 등에 해방구가 화북보다 더 많이 세워졌을 것이다. 생존도 쉽고 세력확장도 쉬우니까. 그리고 해방구는 단순히 공산당의 세력확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게릴라전의 근거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일본군이 농촌동원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4] 앞 주석에서 말했듯이 팔로군은 너무 약했다. 또한 팔로군은 중국 농촌이 피폐해져감에 따라 농촌 빈민들이 도주하고 결성한 여러 도적집단, 그리고 종교집단과 결합했다. 만주에서는 일본 제국, 즉 만주국이 종교집단을 이용했기에 도적집단과만 결합했는데 이러한 일본의 경험이 '공비'라는 말을 낳았고 이에 따라 '비적' 취급을 했다.[5] Heixue Chubing Chaoxian Jishi "Black Snow: The Actual Record of the Decision to Send Troops to Korea". Beijing, 1989.[6]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당시 자국을 이(齒), 조선, 즉 한반도를 입술(脣)에 비유하면서 한반도를 중국의 국가안보정책상 최고 요충지로 선언한 셈이다.[7] 원래는 린뱌오가 임명되었으나 린뱌오가 칭병, 불출하는 바람에 한반도 출병에 찬성했던 펑더화이가 맡게 된 것이다. 알고 보면, 평소에 한반도의 정세에 많이 관심하던 펑더화이가 마오쩌둥의 한반도 출병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전황을 비관하던 지도부의 마음을 돌려놓은 것도 크게 작용했다. 어떤 반공주의 한국 작가의 괴서적 《모택동과 임표》에는 린뱌오가 6.25 전쟁에 참전했다는 괴설을 싣고 있으나 린뱌오는 6.25 전쟁 개입에 매우 소극적이었다.[8] 파병된 부대는 모두 인민해방군 부대였으나 중국이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과 직접으로 맞붙는다는 인상을 피하려고 이 부대들을 굳이 '중국 인민지원군'이라고 명명하였다. 즉, '''"이 군대는 우리 중화인민공화국 인민들이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핍박받는 조선 인민들을 가엾게 여겨 스스로 참전한 것임. 그러므로 우리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는 아무런 관계 없음"'''이라면서 전쟁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민지원군이 참가하자마자 유엔군은 이들이 중국 정부에서 보낸 것이라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참전한 공군도 자기네들은 인민해방군 공군과 관계 없다며 기수에 "중국 인민지원군"이라고 한자로 써 붙이고 나왔는데 그럼 '''자기 돈으로 전투기 사서 출전했다'''는 소리니 처음부터 말도 안되는 주장이다. [9] 이것은 당시 미8군사령관이던 매튜 B. 리지웨이가 자신의 저서 《The Korean War》에서 "이놈들은 차만 타고 다니려고 하지 자기 발로 걸어 이동하는 것을 도저히 모른다. 이런 꼴을 선배님들이 보신다면 땅속에서 목놓아 우시겠다"면서 비판한 내용과 일치한다.[10] 보병의 강점 중 하나는 어지간한 험지에도 문제 없이 배치, 거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행군하지 않고 차량에만 의존하는 보병은 이 강점을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다. 지형이 평탄한 곳이라면 큰 문제는 아니지만 한반도와 같은 산악지대에는 차량은 갈 수 없어도 보병은 갈 수 있는 곳이 꽤 된다.[11] 물론 이후의 베트남 전쟁과 걸프 전쟁등을 겪으며 야간전 교리를 꾸준히 연구하고 투자한 미군은, 현재 전 세계에서 야간감시장비와 정찰 자산이 가장 고도로 발달한 군대 중 하나이다. 보병 개개인에게 그 비싼 야간투시경을 보급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통적으로 의지 해왔던 공군기(육.해 항공대의 헬기와 UAV도 포함)들에게 열영상 기능을 탑재하여 야간작전 능력을 대폭 향상 시키는등, 이제는 맵핵 수준으로 전쟁을 수행 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국군의 경우 소총분대 기준 각 분대별로 1~2개가 지급 되고 여건이 좋지 않은 곳은 이마저도 없다. 때문에 아직까지도 일선의 정규 보병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선배 군번들이 써먹었던 청음조를 야간에 운용 해야 하는 실정이다. (현궁이 도입 된 이후로는 보병대대 에서도 현궁의 열영상 기능을 활용, 야간 정찰과 경계 등으로 이용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미군 혹은 그에 준하는 호적수 수준의 국가들이나 소수 정예 군대에 자본을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나라를 제외하면 대부분 군대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12] 한국에는 인해전술로 알려져 있지만, 엄연한 포위 작전(구대전법)이었고 중국군이 단순히 병력으로만 밀어붙인 건 절대로 아니었다. 돌려 말하자면, 해당 전역에 투입한 인원 자체는 중공군이 UN군에 대해 결코 압도적으로 많은 적이 없지만, 개별 전투에서는 기동이던 매복이던 다양한 방법으로 최대한 수적 우세를 확보한 후에야 돌입해서 UN군 입장에서는 인해전술로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웃픈 점은 그런 식으로 부대를 유연하게 운용해서 우세를 달성하라고 있는 것이 미군이 사랑하고 넘치게 갖고 있는 차량인데 이걸 한반도에선 활용할 상황이 당시엔 제대로 못되었다는 점이다.[13] 마오쩌둥은 주석이 본을 보여야 한다며 장남 마오안잉을 참전하게 하되, 펑더화이와 주변 몇몇 사람 외엔 이 사실을 극비리에 붙혔다. 게다가 사령부는 공습에 대비, 동굴과 같은 구조였는데 네이팜의 화염까지 막아주지는 못했다. 야사에 따르면 사령부가 불타는 와중에 펑더화이가 직접 마오안잉을 구하려 하였으나 그 안에 있던 장교가 최고 권력자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다른 장교들이 뜯어말렸다고 한다. 이후 전사 보고를 접한 마오쩌둥은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다."라고 쿨하게 넘기는 듯했지만 훗날 문혁 시기에 펑더화이를 극렬히 조진 것을 보면 이 일에 앙금이 생겼을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다.[14] 군 서열 1위인 주더가 건국 후 거의 퇴역 상태였기에 펑더화이는 현역으로는 군내 최고 서열이었다.[15] 계급 폐지는 '노동자 인민이 스스로 나서서 하는 혁명무력과 평등한 군대'를 꿈꾸던 소련도 시도했던 일이다. 10월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볼세비키는 계급을 폐지했지만, 적백내전이 시작되자 국방장관 트로츠키는 '전쟁 전문가들이 필요하다'면서 러시아제국 군인들을 대거 영입하고 이 군인들의 지휘권을 보장해주었다. 1935년 스탈린 시대에는 아예 계급을 부활시켰다. 다만 이 군인들의 충성심을 믿을 수 없었기에 정치장교를 한 명씩 붙였다.[16] 차마 마오쩌둥에게 대놓고 항의하진 못하고 장칭을 비롯한 4인방에게 죽여 버리겠다고 욕을 퍼부을 정도였다.[17] 마오쩌둥이 난징 군구에게 군정을 허용하면서 달랜 덕에 특공대는 철수하였다.[18] 習仲勳, 1913~2002. 국가부주석까지 지낸 혁명 원로 중 한 명이다.[19] 중국은 소련과는 달리 지휘관이 대부분 중국 공산당에 충성하여서 정치장교라고 해 봤자 감시하는 역할이 아니라 그저 사기 및 사상 교육 담당 참모에 불과했다. 마오쩌둥도 명목상 주더의 정치장교였는데도 실제로는 홍군의 총사령관이었고 명목상 총사령관인 주더가 오히려 마오쩌둥의 참모장 격이었다.[20]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대성공하고서 금의환향했으며 군사상 천재였다가 정권 수립 후 섬기던 주군(유방, 마오쩌둥)에게 토사구팽당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점에서 한신과 공통점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