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정

 


[image]
'''이름'''
무정(武亭)
'''본명'''
김병희(金炳禧)
'''이명'''
김명석(金明石)
'''출생'''
1904년 5월 16일
함경북도 경성군 용성면 근동[1]#
(현 함경북도 청진시 근동리)
'''사망'''
1951년 7월 10일
'''직업'''
군인
'''국적'''
북한
'''학력'''
나남공립보통학교 (졸업)
중앙학교 (중퇴)
조선중앙기독교청년학관 (중등과 / 졸업)
'''경력'''
사단장 [2]
정치장교
조선의용군 사령관
인민군 포병사령관(☆☆)
민족보위성 포병부상(☆☆)
인민군 제2군단장(☆☆)
1. 개요
2. 생애
2.1. 초기이력
2.2. 중국 시절
2.3. 항일 운동
2.4. 광복 후
3. 기타
4. 관련 문서


1. 개요


한국계 중화민국의 공산주의자이자, 북한의 군인.
본명은 김병희(金炳禧)이며, 흔히 무정이라고 불린다. 김무정보다는 무정이 더 맞는데[3], 당시 항일운동가나 공산주의자들은 가족이나 주변인들의 안전을 위해 아예 성까지도 알 수 없는 가명을 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2. 생애



2.1. 초기이력


1904년 5월 16일 함경북도 경성군 용성면 근동(현재의 청진시 근동리)에서 대지주[4]였던 아버지 김현극(金鉉極)[5]과 어머니 종산(宗山)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성군 오촌면에 있던 나남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이던 1919년, 15세의 나이로 3.1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20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그해 10월 경성부 중앙학교에 진학하였으나 1922년 3월 병으로 중퇴하였다. 같은 해 4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학관 중등과에 편입하여 이듬해인 1923년 4월 졸업하였다.
한편, 조선중앙기독교청년학관 재학 중이던 1923년 2월, 서울청년회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서울청년회 주최의 청년당 대회에 참여하며 간부 이영(李英) 등과 함께 활발히 활동하였다. 또한 동지 현칠종(玄七鍾)과 함께 대립파인 조선청년연합회 및 동아일보 사원 등에 대해 이따금씩 물리적 견제를 하기도 했다. 그 후 강택진과 정우영(鄭又影)의 아내 등이 조직한 경성여자강습학교(京城女子講習學校)에서 교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1923년 9월에는 장적파(張赤波)·강택진 등과 함께 노농대회(勞農大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2.2. 중국 시절


1924년경 중국으로 망명하여 한 군사학교[6][7]를 졸업하였다. 이후 옌시산 군벌군에서 포병장교로 활동하다가, 장제스의 북벌에 호응하여 군벌군을 탈퇴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국민당군의 북벌에 참가했다.
19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장제스의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공산당원 체포령이 떨어지고 우창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국민당의 백색테러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자 장제스는 정치범을 석방하는데, 이때 운좋게 풀려났다. 이후 공산당의 요원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파업과 폭동에 참가한다. 그러다가 영국 조계에서 체포되었고, 이때 2개월형을 받는다. 이후 홍콩으로 갔다가 장시성의 중화소비에트공화국으로 가서 펑더화이 부대에 합류한다. 펑더화이 부대는 국민당군으로부터 노획한 75문의 야포 및 산포를 보유하고 있었고, 무정은 이를 운용하여 큰 전과를 올리면서 공산당 지휘부의 주목을 받는다.
제5차 초공작전 이후 1934년의 공산군은 서쪽으로 패주하게 되었는데, 이 대장정이라고 불리는 도주에 무정도 참여했다. 대장정에 참가한 조선인중 몇 안 되는 생존자.[8] 대장정시에 중장비는 모두 버리고 가야 했고, 홍군은 기껏 박격포를 장비했을 따름이지만, 무정은 이런 빈약한 홍군의 화력이나마 적재 적소에 화력지원을 하여 홍군의 포위망 탈출에 공을 세웠다고 한다.
장정중에 그가 맡았던 직책은 마오쩌둥이 지휘하는 당중앙의 직접 명령을 받는 군단(军委纵队, 군단장 예젠잉) 휘하 제3제대(사단에 해당)의 사령관 및 정치장교(겸임)를 맡았다. 그와 비슷한 레벨(제대장)을 맡았던 인물들은 후에 살아남았으면 중공정권의 장차관급 혹은 인민해방군의 대장급에 이르렀으니 무정의 위상이 홍군 내에서도 꽤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인물중에는 제4제대장 천겅(陈赓)[9], 제2제대장 허장궁(何长工)[10], 그리고 무정의 후임으로[11] 제3제대장을 맡았던 리웨이한[12] 등이 있다. 이후 시안 사변 이후 국공합작이 재개되자, 홍군이 개편된 팔로군의 핵심 간부로서 맹활약했으며, 만주지역의 항일운동에도 개입했다.
팔로군 포병사령관[13]을 맡았으며, 달리는 차를 조준기 없는 박격포로 맞출 정도로 박격포의 귀신으로 알려져 있다. 오죽하면 펑더화이가 자기 자서전에서 "팔로군에서 포를 쏠 수 있는 것은 나(펑더화이)와 김무정 뿐이다."라고 했을 정도. 후에 북한군의 군사고문으로 온 소련군 포병장교들이 "포술에 필요한 고등수학도 모르면서 어떻게 포병을 한담?"이라고 무시하다가, 이런 묘기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또다른 일화로, 박격포 하나를 놓고 주변 간부들에게 '전투 도중에 계산을 일일이 어떻게 하나'라는 투로 얘기를 한 다음 손짓과 눈대중으로만 목표물을 겨냥해서 포를 쐈는데, 쏘는 족족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주더펑더화이의 신임을 돈독히 받았으며, 나중에 중공군 총사령관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펑더화이와는 중매도 서주고, 암호책을 맡길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이 사건은 장정 시절 4방면군을 지휘하던 장궈타오가 당권을 쥔 제1방면군의 마오쩌둥을 체포하여 처형하기 위해 휘하부대의 마오쩌둥 부대와의 교신에 쓰이는 암호책을 회수한 사건인데, 무정은 펑더화이의 명을 받고 따로 만든 암호책을 가지고 혈혈단신으로 감숙성에 있던 마오쩌둥 부대에 전달, 펑더화이 부대와 마오쩌둥 부대의 교신을 연결시켜 결과적으로 마오쩌둥이 장궈타오의 음모로부터 벗어나게 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렇듯 중국공산당에서 20년간 활동했음에도 다른 팔로군의 조선출신 군인들과는 달리, 제2차 국공내전에 참전하지 않았다. 중국측 자료에 의하면 1941년 이후로는 팔로군보다는 조선 항일 운동에만 관여했다고 하며, 1945년 광복이 되자 바로 북한으로 들어왔다.

2.3. 항일 운동


1941년 김두봉과 함께 조선독립동맹을 만들고, "조선의용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조선의용군은 항일전쟁에 적극적으로 중국공산당 팔로군과 합작해 일본군과 여러차례 교전했는데, 대표적으로 활약했던 전투는 타이항산 전투가 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지휘관은 한국인 출신 홍사익이었고, 조선의용군은 김무정이 지휘했다. 이 전투에서 항일 운동가 윤세주가 전사했다. 1944년 일제 말기에는 식민지 조선 국내에 있던 비밀결사 단체 조선건국동맹과 연계하였다.
조선의용군은 후에 국공내전에도 참여하였고, 인민해방군 내에서도 정예부대로 알려져 있었다. 이들은 국공내전이 끝난 후 북한군에 합류하여, 6.25 전쟁 초반의 주력이 되었다. 사실 6.25 전쟁 초기 기준으로 이들이야말로 외국인 부대를 제외하면 남북한 통틀어서 최고 정예 베테랑 부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 전쟁의 실패를 이들이 뒤집어 썼고, 후의 연안파 축출 때 대부분 숙청되었다. 하지만 무정은 이들에 앞서서 1945년 귀국했다. 미군정 때문에 개인자격으로 입국한 임시정부 인사들과와 마찬가지로 무정도 소련군정의 입김 때문에 마찬가지 신세였다.

2.4. 광복 후


광복 후 귀국하여 연안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김일성 이전에도 "장군" 칭호를 달고 다녔다.[14][15]
경력에 비해서는 북한 정권에서 요직에 발돋움하지 못하고 한직으로만 맴돌았다.
북한 정부 수립 초기에는 중국 공산당과의 긴밀한 관계와 독보적인 전투경험으로 광복 이후 힘을 썼을 것 같지만, 본인이 순수한 무인으로, 정치력은 별로였던데다가, 연안파 자체도 지도자 없이 중간보스급만 있는 상태라서 계파로서 권력투쟁에서 단일한 대오를 형성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연안파에서 김두봉이 상징적인 국가수반자리를 맡는 동안 실권에서는 배제되었다.
이렇게 북한 초기에 연안파가 힘을 쓸 수 없었던 까닭은 북한정부 수립 당시(1948년 9월 9일)에는 중국 공산당국공내전에서 수세에 올리고 있었고, 무정의 정치적 자산이 될 수 있었던 조선의용대[16]는 한반도에 들어오지 못하고 만주에서 치열하게 국민당군과 교전중이었기 때문에, 연안파나 무정이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소련은 그당시부터도 중국공산당을 불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공의 배경을 가진 연안파는 계속 소련군정의 견제를 받았다. 반면 소련의 배경을 업은 김일성이나 탄탄한 국내기반이 있던 박헌영은 연안파에 비해 훨씬 국내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6.25 전쟁 중에 작성된 미국 CIA 보고서에서는 해방 직후 중국에서 돌아온 김무정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김일성보다 훨씬 더 인기가 높은 인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이미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지원을 하고 있었으며 중국공산당을 배경으로 가진 연안파를 불신하였다. 이들은 연안파를 견제하며 김무정의 군사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고 이로 인해 김무정은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지 못하고 인민군 장성으로밖에 머물 수 없었다고 적혀있다.[17]
그 결과 6.25 전쟁 때까지 김무정이 맡은 직책들은 포병사령관(☆☆), 2군단장(☆☆),[18] 민족보위성 포병부상(☆☆) 등 명성에 비해 그리 높지는 않았다. 연안파의 리더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연안파 내부에서도 그다지 인정을 못 받았다고 한다. 김두봉이나 최창익이 당 내 요직에 앉아 활약할 때 그는 군부 안에서만 활약했다. 최용건 민족보위상(국방장관) 아래서 차관을 맡았다.[19] 뛰어난 무인이었으나, 정치인으로서의 정치력은 뛰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6.25 전쟁으로 조선인민군이 남침하면서 동부전선 공략을 맡았던 김광협 인민군 2군단장이 공세부진으로 해임되자, 무정은 현역으로 돌아와 중장 계급을 달고 후임 군단장을 맡았다. 인민군 2군단은 강원도를 점령하고 포항까지 진격했으나, 낙동강 전선에서 급격히 소모되었고, 결국 인천상륙작전에 퇴로가 막히면서 춘천을 거쳐 백두대간을 종단하여 평양까지 패주했다. 김일성은 무정을 평양방위사령관에 임명했으나, 당연히 방위가 될리가 없어서 평양을 다시 유엔군에게 빼앗기고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남침을 총 기획한 김일성은 정치적 라이벌들에게 패배의 책임을 덮어씌워 위기에서 탈출하려 했다. 1950년 12월 4일 자강도 만포에서 열린 노동당 당대회에서 김무정은 불법살인[20], 낙동강 방어선 공략실패, 평양 상실의 책임을 한꺼번에 뒤집어쓰고 "중대과오를 범했다"는 이유로 실각하고 만다. 이 당시 김무정과 가까웠던 중국 공산당군 출신(연안파) 장교들 역시 무더기로 축출되었다. 김일성 휘하의 만주 빨치산 출신 장교들이 이들을 대체하게 되는데, 이것은 조선인민군 장교들의 심각한 수준 저하로 이어졌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인민군은 패주 과정에서 정예부대를 날려먹고 소모가 극심했기 때문에 이후에 전선은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이 맡았고, 인민군은 조연으로 빠진 가운데, 전쟁은 유엔군과 중공군의 대결이 되고 만다.
남한 관변자료에는 총살설, 지하 노예설(…), 암살설, 병사설 등이 돌았으나 숙청 후 지하 노역장 관리로 잠시 있다가 중국측의 요청으로 송환, 1951 또는 1952년 중국에서 병사한 것으로 파악된다.[21] 어쨌든 실각후 몇달만에 사망한 것이다. 국공내전 당시 여러번 부상당했다던데, 숙청당한 후 홧병이 도졌는지 아니면 6.25 당시 부상을 입었는지, 50대도 안된 나이로 사망했다.
여담으로, 김일성은 자신의 자서전에서도 김무정을 상당히 좋게 평가했다. 실제로 조선혁명박물관에서 전직 고위인사들의 사진과 명단을 둘러보다 김무정의 이름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의 정치적 명예를 회복시킬 것을 지시한 것도 김무정이었다. 김무정의 사망 이후 평양으로 송환되어 평양 교외에 묻혀있던 그의 유해도 애국열사릉으로 이장되었다고 한다.[22]사실 중국에서 '대장정'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된다. 중국에서의 대장정은 성전이라는 말로 요약이 가능할 정도로 현 중국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급의 정통성을 갖는 셈. 김무정은 이에 참가해 살아남은 인물이다. 김무정이 단순 권력 숙청 정도가 아닌 비인간적인 고문이나 심지어 살해를 당했다면 중국 입장에선 자존심 때문에라도 곱게 넘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중국 지원 덕분에 살아난 놈이 정작 중국의 정통성을 훼손하려 드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무정이 숙청된 후 연안파는 1956년의 8월 종파사건최창익 숙청으로 궤멸되었다. 이후 김일성의 1인 독재체제가 확립되었다.[23]

3. 기타


  • 8회 조기종영에 빛나는 KBS 대하사극 "여명의 그날"에서는 주현씨가 김무정역을 맡았다.
  • 2019년 그의 생애를 다룬 무정 평전(안문석 저, 일조각)이 출판되었다.

4. 관련 문서


[1] 인근의 남석동·농포동·송정동·송향동·용향동·회암동과 함께 김해 김씨 집성촌이다.[2] 군위종대(军委纵队, 군단장 예젠잉) 휘하의 제3제대(사단에 해당)[3] 다만 김무정이라는 표현도 이에 못지 않게 많이 쓰였다.[4] 1927년경 제작된 왜정시대인물사료부동산이 13,000엔 정도 있었다고 한다.[5] 이명 김기준(金基俊).[6] 한국에는 바오딩(보정)군관학교라는 설이 있는데, 이 학교는 1923년 폐교되었으므로 이 해 중국에 건너간 무정이 입학할 수 없다. 바오딩군관학교는 1901년 청나라 시절 신식 군대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만든 사관학교이다. 나중에 유명하게 되는 황포군관학교보다 먼저 생긴 근대식 군사학교이며 2년제였다. 장제스가 바로 여기를 졸업했다.[7] 중국측 자료에서는 옌시산이 만든 북방군관학교라고 나온다. 일부 반공소스에서는 그가 전혀 군사교육을 받지 않았고 팔로군 이력도 부풀린 것이라고 주장하나, 그가 담당했던 포병운용은 군사적 무학자가 운용할 수 있는 성격의 병과가 아니므로, 어디서라도 군사학교를 제대로 다닌 것은 확실한 듯. 또한 무정의 활약상은 펑더화이 자서전과 중국의 공식자료에도 나오기 때문에 과장이 아니다. 인민해방군의 홍보사이트인 "중국군망" 인민일보의 웹사이트 "인민망"[8] 다른 한 명은 양림(楊林, 1898~1936)이라는 인물로, 대장정 당시 홍군 중앙군사위원회 간부단 참모장이었다. 이후 팔로군 15군단 75사단 참모장을 역임하였으나, 황허강 도강 작전 당시 전사한다.[9] 대장, 한국전에도 참전.[10] 중화인민공화국 수립후 중공업부 부부장(차관)[11] 무정은 장정도중 포병사령으로 전근되었다.[12] 등소평과 이혼한 부인의 재혼남편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국무원 비서장을 맡았는데, 한국으로 치면 국무조정실장쯤 된다. 이후 통일전선부 부장(장관)에 재직했다.[13] 홍군은 중장비를 다 버리고 갔으므로, 초공작전 당시 노획한 국민당군의 야포도 모두 버리고 갔고, 팔로군은 기껏해야 박격포, 산포 정도를 장비한 수준이었다.[14] "중위나 대위 계급장(김일성은 광복 당시 공식적으로는 소련군 대위였다.) 달고 온 것들이 무슨 놈의 장군!"이라고 일갈했다는 카더라가 있다.[15] 또 하나의 일화로는 자신의 몸에 있는 상처들을 보여주면서 "나도 이렇게 열심히 독립운동을 했는데 왜 어떤 사람(김일성)의 독립운동만 선전하는 것이냐"고 불만을 토로한 적도 있다고 한다.[16] 약 2개사단 병력[17] POSITION OF KIM MU-CHONG, CIA REPORT, May 17 1951[18] 동부전선 담당. 장사상륙작전 당시 인민군 맹렬부대와 함께 학도병들을 몰살시켰다.[19] 중앙일보에서 펴낸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책을 보면 귀국 길에 무정이 국민당군의 공격을 피해 혼자만 도망치자 기차 안에서 단체로 뺨을 한 대씩 때리는 등(...) 무정의 연안파 내 입지는 별로 높지 않았다고 한다.[20] 후퇴자에 대한 즉결처분을 했다는 혐의였다.[21] 중국측에서는 오히려 위궤양으로 평양에서 사망했다는 자료도 있고, 혹은 병세가 위독해지자 중국지도부의 요청으로 만주로 송환되어 당시 만주에서 가장 좋은 병원이 있던 창춘시에서 루마니아인 의사의 치료를 받았으나 현지에서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22] 중앙일보-연안파 거두 무정 장군 사후복권 확인[23] 본래 1948년 소련의 후원 아래 출범한 조선로동당과 북한 정권은 김일성의 만주빨치산계, 박헌영의 남로당계, 국내파(앞의 남로당과의 정체성 혼란이 있을 수 있는데, 남로당은 45년 해방 직후 서울에서 조직된 조선공산당 재건파들과 이후 남한 지역에서 연계된 세력을 지칭하며, 국내파는 소련이 북한에 들어올 때에 북한지역-특히 함경도-에 자생하던 공산주의자들로 해방직후에는 조선 공산당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으나, 38도선이 고착화되면서 점차 자립적으로 운영되었고, 김일성을 북한지역 지도자로 세우고자 하던 소련군정측 야욕에 맞춰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북조선공산당으로 세력화됨), 연안파, 소련파(소련이주자 2~3세들로 소련공산당과 직접적으로 연계하던 세력) 등 여러 좌익분파들이 결합한 일종의 연립정권이었다. 그러나 한국전 이후 8월 종파사건 등 여러 차례의 숙청으로 1950년대 말 만주빨치산계 단독정권이 되었다. 지금처럼 김일성이 신으로 추앙받는 김씨왕조체제는 주체사상이 정립되고 김정일이 후계자로 결정되는 1970년대 중반에 확립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