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신

 

范愼/范慎[1]
(206-274)
삼국시대 오나라의 신하로 자는 효경(孝敬). 아들은 범요, 딸은 범희.
광릉 사람으로 229년에 손등이 태자로 임명되자 사경, 조현, 양도와 함께 빈객이 된다.
제갈각이 손권에게 말을 바쳤을 때 먼저 그 귀를 뚫어놓았는데, 마침 자리에 있던 범신은 제갈각을 조롱하며 말하길

말이 비록 큰 짐승이고, 하늘로부터 품성을 타고났지만 지금 그 귀가 상했으니 어찌 그 미덕이 상하지 않았겠는가?

라고 말하자 제갈각이 답하길

모친은 여인 중에서도 은애가 지극한 사람인데, 귀를 뚫어 구슬을 걸은들 그 미덕에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라며 친구 제갈각에게 발렸다는 훈훈한(…) 이야기가 있다.
호종이 손등의 명으로 빈우목을 만들었을 때 학문을 연구해 미세하게 살피는 것이 유하[2]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지만 또 다른 자신의 친구 양도는 범신을 깊이가 없다면서 비판했으며, 241년에 손등이 죽을 때 유서에는 화융과 함께 일반 사람들보다 무용이 뛰어나면서 웅장하고 절개가 있으며, 국사의 풍모가 있다고 평가받았다.
자신을 인정하는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고, 우수한 친구들과 두터운 친분을 맺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자신의 영광으로 생각했으며, 범신은 20편의 논을 지어 교비라 이름지었다. 이후에 시중으로 임명되고 지방으로 나가 무창의 좌부독이 되어 군대를 정돈있게 다스렸다.
271년에 손호는 수도를 옮기고 그의 존재를 꺼려 '범신은 공훈과 덕행이 모두 성대하므로 짐이 공경하고 의지하고 있다. 마땅히 상공의 지위에 오르게 해 사람들의 기대에 부합해야 한다.' 라는 조서를 내려 태위로 임명했으며, 범신은 자신이 오랫 동안 무장으로 있었던 것이 한스러웠으므로 늙고 쇠약해졌다는 이유로 사퇴했다. 그가 떠나려하자 그의 병사들은 그를 그리워 해 모든 장병들이 눈물을 흘렸으며, 274년에 사망하자 아들 범요가 뒤를 잇는다.
범희와 얽힌 일화는 범희 문서 참조.

[1] 제갈각 별전에서는 范慎라 표시[2] 공자의 제자인 자유와 자하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