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

 



'''동오 4대 황제'''
'''말제 | 末帝'''

'''제호'''
말제(末帝)
'''작위'''
오정후(烏程侯) / 귀명후(歸命侯)
'''최종직위'''
승상(丞相)
'''성씨'''
(孫)
''''''
(皓)
''''''
원종(元宗) / 호종(皓宗)
'''별명'''
팽조(彭祖)
'''연호'''
원흥(元興, 264년 ~ 265년)
감로(甘露, 265년 ~ 266년)
보정(寶鼎, 266년 ~ 269년)
건형(建衡, 269년 ~ 271년)
봉황(鳳凰, 272년 ~ 274년)
천책(天冊, 275년 ~ 276년)
천새(天璽, 276년)
천기(天紀, 277년 ~ 280년)
'''생몰 연도'''
242년 ~ 284년 4년 12월
'''재위 기간'''
264년 ~ 280년 5월 1일
'''능묘'''
북망산(北邙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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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즉위 이전
2.2. 폭군이 되다
2.3. 오나라 멸망 후
3. 가족 관계
4. 평가
5. 미디어 믹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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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의 제4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시호가 없어서, 말황제나 오정후(烏程侯) 혹은 귀명후(歸命侯)라고 불리기도 한다. 는 원종(元宗), 호종(皓宗). 별명은 팽조(彭祖).
손권의 셋째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손화[1]의 아들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119회와 120회에서 등장한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아버지 손화가 승상 손준의 명령으로 자결한 후, 적모 장비(張妃)도 손화를 따라 죽었으므로, 친모인 하희에게 양육받았다.
경제 손휴 시대에 오정후(烏程侯)에 봉해졌다. 서호의 백성 경양이 손호의 관상을 보고는, 매우 고귀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다. 손호는 속으로는 기뻐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수신기에 따르면 오나라 손량 오봉 2년 5월에 양선현의 이리산에서 큰 돌이 저절로 섰다. 이는 손호가 허물어졌던 선조의 가문을 계승하여, 다시 그 지위를 복위할 때임을 알려준 것이다. 오나라 손휴의 영안 4년 안오현의 평민 진초가 죽은 지 이레 만에 다시 살아나 무덤을 뚫고 나왔다. 오정후 손호가 망하였던 자신의 가문을 이어 받아, 왕위에 오를 징조였다.
손휴가 죽을 때, 촉나라가 멸망했고 교지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국가가 혼란스러웠기에 사람들은 훌륭한 군주를 얻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만욱은 손호의 옛 친구였는데 만욱은 손호가 총명하다며 복양흥, 장포 등과 협의하여 손호를 제위에 올리길 희망했다.
복양흥과 장포는 손휴의 아내, 주부인에게 손호를 후사로 삼도록 하라고 권유하였다. 주부인은 "나는 지아비를 잃은 과부인데, 어찌 사직의 걱정을 알겠습니까? 단지 오나라가 멸망하지 않고 종묘가 의지할 곳이 있으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손호를 제위에 올린다. 황제가 될 당시 손호는 23세였다.

2.2. 폭군이 되다


손호는 즉위 초에는 선정을 베풀어서 현명한 임금으로 칭송받았다. 그런데 이게 3개월도 못갔다. 오히려 폭군이 되어 보천의 건의로 건업에서 무창(우한)[2]으로 천도하고 토목 공사를 자주 일으키며 향락과 주색잡기에 빠졌다. 또 국고가 바닥나는데도 사치를 부렸고 화리를 공격하러 가면서 수많은 후궁들과 같이 가면서 진군하다가 추위를 이기지 못한 병사들의 반란 모의를 듣고 돌아오기도 했다. 손호의 애첩들도 막장이어서 어떤 여자는 사람을 시장에 보내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기도 했다.
266년 손호가 무창(武昌)에 있을때, 오흥군(吳興郡)의 시단이라는 사람이, 자기 백성들이 고달파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1만여명의 백성들을 이끌고, 손호의 이복동생인 손겸을 협박하여 건업으로 가서, 그곳에서 손겸을 황제로 세우려고 했다가 정고제갈정에게 토벌되었다. 손호는 동생을 독살하였고, 그의 모자 모두 죽였다. 또 다른 동생 손준(孫俊)은 장승의 외손자로 곧 손화의 적자였는데, 총명하여 말재주도 뛰어나, 멀리서까지 칭찬이 자자했으나, 손호는 그도 죽였다.
당시 화핵의 상소를 보면 손권 이후의 오나라가 가진 막장 상황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손권이 죽은 이후부터 권신들이 정권을 전횡하며, 안정과 생존의 근본을 잃게 되었고, 한 순간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여러 차례 군대를 일으켜 창고에 쌓아놓은 것을 기울여 다 사용하였으며, 병사들은 수고하고 백성은 빈곤하게 되어 한시도 안정을 얻지 못하게 되었으며 지금 생존하고 있는 자들은 부상을 입고 남은 무리들이며, 고통과 슬픔이 있는 백성뿐이라서 군용물자는 텅 비게 되었고, 창고는 부실하며, 베나 비단을 내리는 것은 추위와 더위를 막기에 넉넉하지 못하며, 게다가 산업을 잃어 가가호호가 곤궁하고 굶주린 사람들이 관청의 공급에 의지하여 구제되고 있다 했다.
또 그는, 경도(都)의 많은 관원들이 각자 백성을 징용하면서 백성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있어 항상 규정된 한계 가까이 이르고 추수할 달이 되면 기한 내에 부세를 납입하도록 질책하고 관원들은 백성들의 파종할 시기를 빼앗았지만, 금년의 세금을 재촉하며, 만일 체납하는 자가 있으면 재물을 기록하여 몰수했기에 백성들이 빈곤하며 입을 것과 먹을 것이 부족하다고 했다. 지금 창고는 부실하고 백성은 노역을 하고 있으며, 굶주린 자가 먹을 수 없고, 수고로운 자가 휴식할 수 없으며, 공로 있는 자가 상을 받을 수 없으니, 군주는 백성의 세 가지 희망을 저버렸기 때문에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고 공을 세우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정도면 가히 오나라는 손호 때부터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특히 손호는 살인도 밥 먹듯이 해서 그가 죽인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복양흥, 장포 : 손호를 제위에 올린 것을 후회했다가 손호에게 주살당하고 삼족이 멸해진다.
  • 서소 : 항목 참조.
  • 주부인, 손만, 손공 : 265년 7월, 손호는 손휴의 아내였던 주부인을 핍박하여 죽였다. 주부인의 시신을 정전에서 장사지내지 못하게 하고는 병들어 죽은 것처럼 꾸몄다. 또한 손휴의 네 아들을 오의 작은 성에 몰아넣고, 나이가 많은 순으로 둘을 죽였다.
  • 이욱, 서존 : 270년에 이욱과 서존이 교지를 정벌하러 가는 길에 건안 길이 불편하다고 풍비를 죽이고 돌아오자 하정은 이 일을 손호에게 알려 이욱과 서존의 가족들까지 모두 사형시키게 한다.
  • 장미인 : 아버지를 죽인 것에 대해 원망의 말을 하자 때려 죽이고[3] 그녀의 언니 장부인을 새로 후궁으로 삼았다.
  • 장준, 손분, 손봉 : 270년에 손호의 좌부인(장부인)이 죽자 손호가 너무 슬픈 나머지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손호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손분(손권의 오남)과 손봉(손소의 아들, 손책의 손자) 둘 중 하나가 뒤를 이어야 한다는 풍문까지 돌았다. 장준은 이 말을 믿고 손분에게 미리 잘 보이기 위해 손분의 어머니 중희의 묘를 청소했는데, 이 일이 손호한테 알려지면서 장준의 삼족이 멸족되었다. 또한 손분, 손분의 다섯 아들, 손봉도 주살되었다.
  • 만욱[4], 유평, 정온 : 271년에 만욱, 유평, 정봉이 손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자신들끼리 정무를 보기로 약조했는데 이 발언이 손호의 귀에 들어가서 272년 연회에서 만욱과 유평에게 독주를 보내는 등 죽게 만들었다. 이 시점에서 정봉은 이미 사망한 상태라 아들 정온이 대신 처형당했다.
  • 왕번 : 항목 참조.
  • 하소 : 항목 참조.
  • 위소 : 항목 참조.
  • 장상[5] : 항목 참조.
  • 누현, 누거 : 항목 참조.
  • 차준, 장영 : 항목 참조.
  • 웅목 : 항목 참조.
그가 총애했던 간신들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 손호 자신이 죽였다.
  • 잠혼 : 연의에선 환관이지만 정사에서는 아니다.
  • 장숙 : 손호에게 죽었다.
  • 하정 : 손호에게 죽었다.
  • 진성 : 손호에게 죽었다.
  • 조보 : 육개의 상소에서만 언급되는 간신.
  • 하희 : 손호의 모친. 등부인전에 따르면 모친 하씨(하희)가 손호를 항상 좌우했다.
  • 하식, 하홍, 하장 : 손호의 외가족으로 권세를 믿고 교만하고 방자하게 굴어 백성들이 근심했다.
화핵육개같은 자들이 이런 행위를 막기 위해 상소문 수백장을 올렸지만 손호는 모두 무시했다. 나중에 육개는 육항이 외지에서 많은 병사를 이끌고 있어 어찌하지 못했지만 육개와 육항이 연달아 죽자 그의 가족을 모두 귀양보내고 화핵 또한 얼마 못가 면직시킨다.
그리고 손호는 신하들을 모아놓고 주연을 베풀면, 항상 모두가 취해 쓰러질 때까지 마시게 했다. 그때 환관들을 시켜 이들을 감시하게 했고, 거나하게 취한 신하들에게 왕의 뒷담을 유도하는 등 속마음을 떠보게 했다고 한다. 여기서 불평불만을 하거나 폭언을 하는 신하들을 골라냈으며 정도의 차이에 따라 목을 베거나 벌을 주었다고 전한다.
후궁은 수천 명이나 되었는데 오나라는 제대로 된 후궁제도가 없었으므로 손호는 후궁들에게 황후의 인새를 마구 나누어 주었다. 또, 궁안으로 물살이 센 물을 끌어들여 궁녀들 가운데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는 모두 죽여 그 물로 흘러가도록 했다. 또한 형벌도 아주 가혹해서 사람의 가죽을 벗기거나 발을 끊거나 사람들이 곁눈질하고 쳐다보는 걸 싫어하여 사람의 눈을 뽑았다고도 한다. 다만 손호전의 주석에 따르면 진의 시중 유준(庾峻)[6] 등이 손호의 시중 이인(李仁)에게 이게 정말 사실이냐고 물었는데 이인은 전해진게 잘못된 것이며 천하의 악이 모두 그의 탓으로 돌려지기 때문이고 또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들 손호가 죄인을 벌할 권리가 있고 곁눈질하는건 신하로서 오만무례한 것인데 죽인다고 해도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했고 물은 사람들이 수긍했다고 한다.
그러나 손호가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게 와전이 되었다고 해도 막장은 막장이었다. 시기가 얼마나 막장이었으면 설영 같은 경우는 손호 정권에서 높은 직위에 올랐다는 까닭만으로 진수에게 의심스럽다는 평을 받았을 정도. 진수는 손호는 부당한 형벌을 남용하였으므로, 죽거나 쫓겨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고 아래 사람마다 두려워하여 모두 하루하루 생명을 보존하기를 원하고, 아침에 저녁의 일을 헤아리지 못했으며 사납고 미련하며 잔혹한 법령을 마음대로 시행하여, 충성스럽게 간언하는 신하를 주살하고 참언하고 아첨하는 자는 승진시켰으며, 그 백성들을 학대하여 부리고, 음란하고 사치스러움이 극에 달했으니, 마땅히 허리와 머리를 분리시켜(...) 백성들에게 사죄시켜야 했고 은혜를 지나치게 배풀었다고 했다.
손성 역시 손호의 죄는 떠돌이 도적같고 잔학함은 주왕걸왕을 넘어섰으니 그냥 닥치고 효수해서(...) 원혼들에게 사과했어야 한다며 귀명후라고 우대한 것은 잘못이며 천벌을 행하고 죄 지은 자를 쳐서 억울하게 죽은 백성들을 조상(弔喪) 하지 않았으니, 사납고 혹독한 자에 대한 계율이 없게 되었다며 당시 서진 정권을 깠다. 진수와 손성은 하다못해 유선에 대해서도 암군, 혼군이라고 까긴 했지만 참수, 요참하라는 말까진 하지 않았는데 손호는 볼 것도 없이 바로 인수분해(...)해서 천하에 사죄시켰어야 한다고 했을 정도면 손호가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알 수 있다.
상광이란 점술사가 손호에게 수레를 타고 낙양에 입성할거라 예언을 하자,[7] 나라 사정은 생각지 않고 진나라를 공격할 생각을 했다. 그리고...
더군다나 손호가 어찌나 자질이 없는 위인이었냐 하면 이 당시 진나라에서 사마염에게 올린 보고서 중 하나에는 '''지금이 아니면 오나라를 멸망시킬 수 없습니다. 손호가 집권한 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가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합비와 건업 사이에 흐르는 강은 사실 아무도 건너지 못한 강이었다. 손권장료에게 얻어터지기도 했으나 반대로 조휴서성에게 얻어터졌으며 조진하후상 역시 반장에게 얻어터진 곳이 거기였다. 이런 난공불락의 요새인 건업도 손호가 다스리는 곳이라서 함락시킬 수가 있다는 말이 있었으니 손호의 됨됨이가 얼마나 막장인지 알 수 있다. 다만 합비나 건업이 워낙 난공불락인지라 실제로 사마염은 공격루트를 교주로 선택했고 그것도 곽마가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서 오나라를 절묘하게 멸망시켰다.

2.3. 오나라 멸망 후


결국 280년에 사마염(晉)에게 대공격을 받아 오나라는 멸망한다. 손호는 왕준, 사마주, 왕혼에게 각각 사자를 파견해 항복 의사를 전했다. 그는 '한나라가 천하를 통치할 능력을 상실하고 구주가 분열되었을때, 내 조상들은 강남을 차지했는데 지금 대진은 천자가 일어나 은덕을 사해에 펼쳤으며 어둡고 우매하여 구차하게 편안하려고 하여 천명을 아직 깨닫지 못했으나 오늘에야 이르러서야 천자의 육군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감히 천조의 넓은 도량과 빛나는 은덕에 기대 머리를 숙여 귀순하겠다'고 했고 이게 받아들여져 백성들을 구제하기를 희망할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강표전에 따르면 외삼촌 하식에게는 '하늘이 오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망하게 했고 무슨 얼굴로 선대 4명의 황제를 뵈어야 하느냐!'고 편지를 보냈고 신하들에게는 '자리에 있는 여러 해 동안 정교가 흉패하여 마침내 백성들로 하여금 도탄속에서 궁핍하도록 만들었으며 스스로 궁실에 거하면서 무거운 질병을 끌어안고 계책이 부족하며 생각하는 바가 중도를 벗어나 많은 것이 황당하고 참람했고 주변의 소인들로 인해 참혹함이 생기고 포학한 독이 횡류하니 충성스럽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해를 입었으며 어두워서 깨우치지 못하고 그 막힌 바를 찾아보니 내가 그대들을 저버린 탓이라고 했고 초나라를 버리고 한나라를 섬긴 장량진평처럼 서진의 조정에서 출사하라'고 편지를 보냈다. 최소한 자기가 나라를 망쳤다는 자각은 있었던 듯 하다.
280년 3월 15일, 왕준이 가장 먼저 도착해 손호의 투항을 접수하고 손호의 결박을 풀어주고 관을 불태웠다. 사마주는 손호가 자신에게 인수를 주었기 때문에 사자를 파견해 손호를 돌려보냈다. 진나라 군에게 붙잡힌 손호는 가족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옮겨 5월 1일에 낙양으로 압송되었으며 사마염은 그에게 귀명후(歸命侯)의 칭호를 내렸다. 또 손호의 태자 손근을 중랑으로 임명하고 아들 중에서 왕으로 봉해진 자는 낭중으로 임명했다. 의복과 수레, 밭 30경을 주고 해마다 곡물 5천석, 돈 50만전, 비단 5백필, 솜 5백근을 주도록 했다. 진서 무제기에 따르면 오의 옛 명망 있는 사람들은 재능에 따라 순서대로 발탁하고 옛 오나라 황실인 손씨와 대장 중 사망한 가솔은 수양(수춘)으로 이주시켰다.
그래도 진에 끌려가서도 바보짓만 한 유선과는 다르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예를 들면 낙양에 끌려가 사마염 앞에 무릎을 꿇은 손호에게 사마염이 '짐이 이런 자리를 만들어놓고 그대가 오기를 기다린 지 오래다'고 하자 손호는 ''''신도 남쪽에서 이런 자리를 만들어 놓고 폐하를 기다렸었습니다''''고 받아넘겼다.
똑같은 항복 군주라 할지라도 유선은 정말 심하다 싶을 정도로 사마염의 말을 잘듣고 고분고분하고 완전히 순종했는데에 비해[8] 손호는 이런 식으로 사마염에게 계속 딴죽을 걸며 사마염을 부정하려 들었다. 하지만 사마염은 이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손호를 일종의 코미디언 정도로 보았다.
가충에게 왜 사람 얼굴을 벗겼냐는 조롱을 받자 "남의 신하가 되어 그 임금을 해치려드는 무리는 그같이 벌해야 마땅하다"고 쏘아줬다고 한다.[9] 이는 위나라 황제 조모사마소를 토벌하기 위해 궐기했을 때 가충이 이끄는 병사에게 조모가 살해당했던 사건을 은근히 암시하는 것으로 우회적으로 가충을 공격한 것이다.
일설에는 이것을 질문한 자가 가충이 아니고 왕제라고 하며 사마염과 왕제가 바둑을 둘 때 질문한 것이라고 하는데 왕제가 손호에게 "듣기로 당신은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사람의 발꿈치를 자르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던데 왜 그런 것인가?"라고 질문하자 손호가 대답하길 "신하가 군왕에게 무례하면 그것은 낯짝이 없는 짓이다. 그래서 그의 얼굴 가죽을 벗기는 것이 가장 적합한 벌이다." 그리고 당시 왕제의 두 발이 곧게 펴져서 사마염에게 닿을락말락 하니 그것도 추가로 조롱하는 패기를 보여준다.
세설신어에서 나온 일화로, 또 한번은, 사마염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연회를 베푸는데, 가무로 흥을 돋구고 있었다. 이때 손호에게 "듣기로 너희 오나라의 음악이 괜찮고, '이여가(爾汝歌)'[10]를 즐겨 부른다는데, 귀명후(손호), 그대가 한 수 불러주면 어떤가?" 그때의 가치관으로 보자면 손호는 항복했음에도 일국의 군주였으니 배우처럼 노래하게 시키는 것은 모욕적인 일. 하지만 손호는 정말로 노래를 부른다.

옛날에는 ''''''와 이웃이었는데, 지금은 ''''''의 신하다. ''''''에게 술 한잔을 올리니, ''''''는 만수무강하라.

(昔與'''汝'''爲隣, 今與'''汝'''爲臣, 上'''汝'''一杯酒, 令'''汝'''壽萬春)

당연히 일국의 황제에게 하기에 너무나도 무례한 내용이다. 하지만 손호의 이 대응을 좀 더 해석하자면 ''''''는 스스로 짐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를 '''너(汝)'''라고 부르겠다. 이건 ''''''가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이니[11], ''''''의 잘못이다.[12] 자신의 체면을 지키면서 상대방을 무안하게 만들 수 있는 뛰어난 대응으로, 이런 것을 볼 때 여러모로 대비되는 촉과 오의 최후 군주스러운 일화들이다[13].
그렇지만 낙양으로 간지 4년만인 284년에 죽었고 북망산에 묻혔다. 그리고 그의 무덤 바로 옆에는 훗날 백제의자왕이 묻히게 된다. 또한 유선이나 연남생, 연남산 형제도 여기에 묻혔다. 중국 역사도 아닌 한국 역사의 왕이 중국에 묻힌 것이 아이러니하기도 한 부분 중 하나다.

3. 가족 관계



4. 평가


오의 멸망에 있어서 손호의 구실은 결정적인 것으로 평가받으며, 배송지손권 최악의 뻘짓인 이궁의 변에 대해서도 '''어차피 태자인 손화가 제위를 물려받으면 그 다음은 손호니까 오의 멸망은 정해져 있었음'''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다.[14] 단 이는 손화를 폐한 것이 옳았다기보다는 이궁의 변보다도 손호가 끼친 악영향이 오 멸망에 더 결정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손호가 즉위한 것 자체가 이궁의 변으로 오나라의 정치 시스템이 망가졌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물이라 이궁의 변이 오의 멸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물론 진나라 사관인 진수가 정당성을 위해 손호를 폭군으로 날조했을 가능성도 의심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손호 시기에 수많은 신하들이 어처구니없이 죽임을 당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날조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무엇보다 진수가 기록하지 않은 조모의 살해 과정의 경우 배송지가 다른 사서를 인용해가면서 내용을 추가하여 비판했지만 손호에 있어선 그런 것도 없었다. 즉위 석달만에 복양흥장포 같은 공신들을 죽이고 삼족을 멸하는 스케일의 사건을 날조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고, 나라 꼴이 개판인데 5천명의 궁녀를 두는 등의 막장 행각도 검증이 된다는 사실[15][16] 또한 감안해야 한다.
다만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손호의 성격의 형성에 부모의 억울한 죽음이 어느 정도는 작용했음을 감안하면[17] 애초에 손권이 이궁의 변이라는 병크를 저지르지만 않았어도 정상적으로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은근히 동정론이 있는 유선과는 달리 손호는 '''평범한 폭군'''으로 평가된다. 유선은 비록 무능할지언정 유선 자신이 직접 나라를 말아먹진 않았다는 점에서[18] 둘은 암군폭군의 차이를 설명하기 좋은 예시 중 하나다. '''폭군보단 차라리 암군이 낫다'''는 예시이기도 하고.
나름대로 나라를 중흥시키려고 노력했다는 평도 있지만,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게 이때 오나라는 그냥 헬게이트였다. 이 시기 일어난 반란이 적지 않았으며, 특히 교주 같은 경우는 아예 진나라 쪽으로 넘어갔었던 적도 있었다.[19] 잦은 토목 공사, 자주 바꾼 연호, 여러 번 이루어진 천도, 많은 숙청 등으로 보았을 때, 황제로서의 중앙 집권이나 권위에 다소 집착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중신 육개나 정봉 등이 손호를 폐출하려는 시도나 손호를 빼고 정무를 보자고 담합을 했다는 것[20]은 이 인물이 황제로서 멀쩡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삼국지연산군이라 하면 비슷할 것이다.

5. 미디어 믹스



5.1. 삼국지 시리즈


[image]
삼국지 9, 10, 11
[image]
삼국지 12, 13
6탄까지는 능력치가 조금 구린 정도였지만 7부터 능력치는 백하팔인 중 하나에 낄 정도로 안습이 되었다. 그런데 12탄부터는 다시 쓸 만하다.
촉한이 멸망한 이후인 264년에 즉위하기 때문에 시리즈에 따라서 일반적으로 최대 263년까지의 시나리오만을 다루는 삼국지 시리즈의 특성 상 손호가 초기부터 군주로 등장하는 시나리오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단 9탄은 제외. 삼국지 3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3에서의 능력치는 육전지휘 69/수전지휘 23/무력 70/지력 62/정치력 51/매력 46로 이 시리즈에서만은 반장과 비슷한 능력치이다. 그러나 후반부 인물에게 박한 코에이답게 작은 할아버지인 손익#s-2보다 모든 능력에서 밀린다.
삼국지 6에서 그나마 무력과 매력이 70대 후반으로 무기 좋은 거 하나 껴주면 거의 90 가까이는 상승한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0/무력 31/지력 40/정치력 10. 혼란과 매도가 있다고는 하지만 누가 당해줄까. 몽충이 있으니 후반기 시나리오, 영웅집결에서 배 셔틀이나 시키자.
삼국지 9의 if 시나리오 중 하나인 264년 서촉 동란 시나리오에서 손호가 군주로 등장한다. 진나라와의 규모, 인재 차이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며, 무엇보다 이때가 되면 S급 장수들은 육항 빼고 모두 사망한 상황에다 새로 등장하는 장수들은 B급인 모경, 육경, 양직 3명뿐이고, 발탁 무장마저 군주의 의리과 야망를 그대로 이어받는지라 오 처지에서는 망했어요.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3/무력 28/지력 30/정치력 5/매력 4로 백하팔인의 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총합 80은 유선보다도 낮을 정도.[21] 특기는 2개 있지만 일제 특기는 통솔력이 13인 손호에겐 진주 목걸이일 뿐이고 나머지 하나는 폭군답게 '''주호'''.
삼국지 11에서도 백하팔인의 자리를 지켰으며, 능력치 중 정치력과 매력이 각각 6, 3이다. 당연히 특기도 없다.
삼국지 12에선 짤린 줄 알았으나 PK에서 등장했다. 그런데 능력치가 엄청나게 버프되어 나왔다. 전작에서 28, 31이던 무력과 지력이 '''70대'''로 올라갔을 뿐더러 정치력 또한 23으로 올라갔다. 능력치 평균이 전작보다 무려 '''3배''' 가까이 올라간 것이다. 특기도 많은 편이라 그런대로 쓸 만하다. 전법은 공성강화로 '''백도어'''용으로 쓸 만하다. 일러스트도 평범한 살찐 폭군이던 전작들에 비하면 묘하게 멋있어졌는데, 자세히 보면 무서운 얼굴로 도검을 들고 노려보고 있다.
무력은 조금 오버하게 버프한 것으로 보여도 지력은 위에 일화들과 같이 군주로서의 자질은 마이너스지만 개인은 상당히 똑똑한 면모를 보인 것을 볼 때 적절한 고증에 가깝다. 사실 무력과 정치력 또한 권신에 휘둘려 막장테크를 타던 오나라에서 토목 공사 등의 정책을 실천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으며, 호족 세력 등이 어마어마한 집권 구조에서 암살당하지 않고 통치했다는 걸 보면 이해할 만한 수치다. 물론 증조 할아버지일족 할아버지가 워낙 먼치킨에 소문난 미남이기까지 했으니.... 일러스트에 경우 폭군 이미지가 잘 표현됐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41/무력 73/지력 71/정치력 23. 특기는 수영 5 단 하나. 전수특기도 당연히 수영이고 전법은 특공지휘.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13, 무력 28, 지력 31, 정치 6, 매력 4로 '''삼국지 11때 처럼 다시 백하팔인급으로 되돌아왔다!''' 정확이 말하면 통솔력이 28, 무력이 45, 지력이 40, 정치력이 17 하락한 것이다. 개성은 사역, 징세, 저돌, 낭비, 악명, 주의는 아도, 정책은 침략황폐 Lv 1, 진형은 어린, 학익, 전법은 도발, 친애무장은 만욱, 잠혼, 혐오무장은 누현, 보천, 위소, 유평이다.

5.2. 영걸전 시리즈


삼국지 공명전에서 오나라의 뒤치기로 공명이 북벌중단 후 복귀하고서 강릉으로 공격해 들어갈 때 원군으로 등장한다. 강유와 일기토가 있고 일기토를 볼 경우 사로잡힌 뒤 촉한과 오가 화친하면서 석방된다.[22] 삼국지 공명전 GBA판에서는 손호가 손등으로 교체됐다.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무력, 지력, 통솔, 민첩, 행운 능력치의 총합이 100도 되지 않아 이 게임에서 유일한 백하일인으로 군림하고 있다. 병과도 노병계로,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5.3. 삼국전투기


삼국전투기에서는 손화의 시첩 하희에게 안겨있는 모습으로 첫 등장. 개 같은 성격 때문에 개로 패러디되었고, 작가 공인으로 '''개놈'''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눈가의 점 등으로 보아 바우와우바우로 추정되었고, 영안 전투(3)에서 성장한 모습이 나오며 확정되었다.[23] 해당 편의 마지막 컷에서 아니면... 어쩌면... 흠... 에이 설마 아니겠지.하고 떡밥을 던지기도.[24]
황제 노릇을 16년동안 한 까닭이 '''백성과 소호족에게 강했으나 대호족과 서진에게 눈치를 보고있었다고'''[25], 최훈은 아예 원래는 손오가 270년에 사마준, 양호 등이 대오전선으로 전진 배치되어 서진한테 망할거였는데 독발수기능의 난으로 인해 10여년 더 숨이 붙었다고 기술한다. 작중에선 내추럴 본 폭군으로만 묘사되며[26] 아예 '''멍군'''으로 불린다. 폭군이라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인지 상어이빨이 특징이다.

6. 둘러보기



[1] 손화는 손권의 노망 탓에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나 장사왕으로 봉해져 유배를 갔으며, 나중에 제갈각이 주살당할 때 제갈각의 조카가 손화의 아내라는 점 때문에 손준에게 살해당했다.[2] 삼국시대의 형주 강하에 속했다.[3] 그리고는 또 그녀가 그립다고 그녀의 모습을 닮은 목제 리얼돌을 만들었다...[4] 손호의 옛 친구였음에도 죽였다.[5] 장굉의 손자다.[6] 다만, 이 시점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인 유민이 맞을 것이다.[7] 실제 역사를 생각한다면 항복하여 그렇게 된다는 뜻인데, 손호는 자신이 이겨서 그렇게 된다는 의미로 착각한 것이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델포이 신탁에서 "전쟁을 일으키면 (자신의) 거대한 왕국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예언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 전쟁을 했다가 패했다는 일화와 비슷하다.[8] 하다못해 사마소는 나라가 망한게 꼭 지탓은 아니라고 해도 죄책감은 있어야 하는거 아니냐고 깠고, 극정도 유선에게 "나라가 망했으면 좀 슬퍼하는 척이라도 하십시오" 라고 했을 정도로 순종했다.[9] 출처: 자치통감[10] 汝자를 넣어서 부르는 노래.[11]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여가가 너를 넣어서 부르는 노래다.[12] 당연히 만수무강하라는 말(令汝壽萬春)도 정말 잘 살으라는 의미가 전혀 아니고 ''''잘먹고 잘살아라 쉬부럴놈아''''라는 의미(...).[13] 다만 손호의 이런 모습을 근거로 그의 패기나 비굴하지 않은 면모를 너무 고평가하는 것도 곤란하다. 당대의 명분론적으로 보건 현대인도 이해하기 쉬운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보건 일국의 황제였던 자가 적국에 투항하여 무릎꿇고 칭신하며 목숨을 구걸하고 살아남은 것으로 이미 더할나위없이 완벽하고 철저하게 비굴한 모습을 보여준 셈이고, 이렇게까지 비굴한 모습을 보인 이후에 말재주를 좀 부려 자신의 체면을 지키고 상대를 무안하게 만들었다고 해 봤자 참기름 한 드럼통 쏟고 깨알 두어개 주운 셈이다. 차라리 나라가 망했어도 어떻게든 재기할 기회라도 노렸다면 그거야말로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 셈이겠지만... 그랬으면 당연히 사마염이 손호를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손호가 보여준 패기있는 모습이란 것도 현실적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고, 정신승리 수준의 광대짓 정도였기에 손호가 대놓고 개기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가만히 놔뒀던 것. 말하자면 개인 수준에서는 재치도 있고 담력도 있는 인물이었다고 인정할 수 있겠지만 이게 황제였던 자로써 패기있는 모습이라 보기는 어렵다.[14] 단, 손화가 정상적으로 제위를 계승했다면 손화의 정실 부인의 자식인 손준이 서출 장자인 손호보다 혈통 면에서 우월하므로 꼭 손호가 황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황제가 된 것은 비정상적 제위 계승이라 나이가 목소리를 낸 거고. 그리고 손호의 포악한 성격이 이궁의 변 때문에 생겼을 수도 있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자기 아버지가 이유없이 갈려나가는 상황에서 맨정신인 이가 몇이나 될까?) 이것은 결론적으로 너무 결과론적인 판단이자 개연성 없는 가정이다.[15] 오 멸망 후 거둔 전리품에 실제로 5천명의 궁녀가 있었으며, 이들은 고스란히 사마염이 흡수해 거대 하렘을 건설했다고 분명히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16] 여담이지만 백제의 마지막 군주 의자왕은 실제로 삼천 명의 궁녀를 거느리기는 커녕 궁녀를 다 합해도 이백여명 남짓으로 추정된다. 혹자는 중화 문화권에서 전통적으로 1, 3, 5, 7, 9의 위계를 쓰기 때문에 훗날 의자왕이 궁녀 삼천을 거느렸다는 낭설이 돈 데에 망군 손호의 오천 궁녀 이야기가 영향을 주지 않았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대륙에서 황제를 했던 손호가 5천 명 클라스이니 그보다 한 격 낮춘 3천 명으로 조작해 의자왕에게 손호와 같은 망군의 이미지를 씌우기 위함이 아니었느냐는 해석이다.[17] 손화가 죽었을 때 손호 나이 만 11세. 아버지가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는건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나이니 이로 인해 성격이 삐뚤어졌을 가능성이 없진 않다.[18] 유선은 환관이자 간신황호와 친해지게 되면서 말년에 그에게 정치적인 권한을 주어 정치적으로 막장이 되며 암군이 됐지 그 이전까지 무능함과 별개로 어느 정도 자신의 일을 하였고 암군이 됐을 시에도 손호처럼 신하들을 죽이지도 않았다.[19] 손휴 사망 직후, 교주에서의 폭정에 못 견딘 사람들이 봉기하여 진나라로 교주 땅을 넘겼다. 이후 오나라가 다시 어찌어찌 탈환했으나, 279년에 곽마라는 인물이 교주에서 난을 일으킨다. 교주에서의 이러한 정세 변화가 간접적으로 오의 멸망을 앞당기게 하였다.[20] 모두 불발로 끝났다. 역모의 뉘앙스로 보기도 어려운 게, 육개는 죽을 때까지도 나라 걱정이었으며, 정봉은 흉신 손침을 축출한 핵심 인물이었다.[21] 물론 유선은 총합 85 중 매력이 64로 매력빨이 절대적이긴 하다.[22] 234년 공명의 6차 북벌 직후의 이벤트로 다뤄진다. 즉, 손호는 원래대로라면 이 시기엔 태어나지도 않았어야 한다.[23] 손호의 등장으로 삼국전투기는 오나라가 망할 때까지(280년) 그린다는 게 확실해졌다.[24]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인 손화의 복수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오나라에 대한 최고의 복수. 해당 화 베댓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25] 다만 손호의 재위 기간에도 서진에게 시비는 많이 틀었고, 위의 이여가에 대한 일화나 교주를 두고 다툰 점을 미루어 볼 때 서진에 대한 것은 다소 애매하다.[26] 물론 최훈도 미심적은 부분에 대해서 지적하긴 하지만 작중 묘사는 그냥 폭군의 묘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