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중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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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북송의 정치가이자, 개혁가이다. 송인종을 도와 여러가지 개혁정책을 내놓았다. 자는 희문(希文), 시호는 문정(文正)"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 전에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기뻐한 후에 기뻐하라!"
先天下之憂而憂 (선천하지우이우) 後天下之樂而樂歟 (후천하지락이락여)
-악양루기 中-
2. 생애
989년 소주(蘇州)에서 태어났고 2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산둥 성의 지저우의 장산현 주씨 집안에 개가를 하여 이름도 '주열'로 바꾸었다. 이후 성장하면서 생가를 알아내고는 다시 제 이름을 찾았다. 이후 응천부로 가서 고학을 하여, 1015년에 진사에 급제하고 광덕군(廣徳軍)의 사리참사를 역임했다.
안수의 추천을 받아 비각교리가 되었고 송나라 인종이 친정을 하면서 중앙 관리가 되었다. 비각교리 당시 장헌명숙황후 유씨가 황제에게 대권을 이제 인종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하중부통판(河中府通判)으로 발령받아 조정을 떠나야 했고 그 다음에는 아예 진주통판(陳州通判)으로 좌천되었다가 1033년에 황태후가 죽은 후 그를 기억한 인종이 그를 다시 불렀다. 복귀한 후 그후 황태후가 축출했던 자들이 그녀의 악행을 고발해 논쟁이 불거졌지만 범중엄이 태후가 황제를 10년이 넘도록 보좌하며 몇가지 과오를 저질렀지만 그게 공을 덮을 정도는 아니라고 말했고 인종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아(장헌명숙황후 유씨의 본명)에 대한 비판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했다.
이후 곽황후(郭皇后)의 폐립문제를 놓고 찬성파인 재상 여이간(呂夷簡)과 대립했기 때문에 요주로 좌천되게 된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52세 때 서하가 쳐들어옴에 따라 전운사로 출정하게 된다. 이때 그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정책을 펴 서하군의 공격을 번번이 무찔렀다. 범중엄은 우선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그들의 지지를 받은 다음 군기 확립, 군사 훈련, 진지구축 등을 철저히 하여 적들을 방어했다. 그가 지킨 대순성(大順城)은 무려 6만 대군이 쳐들어와도 무너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고향을 떠난 강족들을 다시 불러모으는데 성공했다.[1]
이 공로로 그는 부재상으로 승진하였고 1043년 관리제도를 정비하여 인재를 양성하며, 무력을 강화하는 개혁조치를 제안했다. 인종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여 전국적으로 실시하였고 1041년부터 7년간 시행된 이 개혁을 경력신정(慶曆新政)이라고 불렀다.
그가 주장한 10대 개혁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관직은 강등과 승진을 분명히 한다.
2. 요행수를 억제한다
3. 과거제도를 엄격히 시행한다.
4. 각 주의 장관을 신중히 선택한다.
5. 공전(公田)을 고르게 한다.
6. 농경과 양잠을 중시한다
7. 군대를 정비한다
8. 노역을 줄인다
9. 조정의 은택과 신의를 제대로 갖춘다.
10. 조정의 명령을 신중하게 내린다.
하지만 기득권의 반발로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2] 1045년에는 참지정사의 직에서 파면되었다. 그 후 급시중 벼슬을 3년간 지내면서 등주에 머물렀고[3] 이 때 악양루를 보수하면서 악양루기를 남겼다. 1049년에는 항주로 옮겼으며 1051년 호부시랑이 되었고 그 후 청주로 부임하였으나 겨울이 되면서 병이 심해져 영주로 옮겼고 마지막에는 서주에서 64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1] 훗날 범중엄이 죽을 때 강족들은 슬퍼했고 범중엄은 강족의 추장들로부터 '용도노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2] 이는 범중엄의 성향과도 연관이 있었다. 범중엄은 개혁안은 내놓았으나 만일에 경우에 대비해 신중한 자세로 임했고, 모든 것을 바꾸기보다는 공정한 업무집행을 위해 관리들이 갑자기 고위직에 올라가는 것을 방지하고, 태조 때부터 시행하온 마감법(관리들의 성적을 매기는 제도),음자제(공신의 자손이 관직을 얻는 제도)를 수정했을 뿐, 기존 규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거기다 범중엄은 이상주의적 성격이 강해 정치적 수완이 부족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대해 정치적 반대파를 양산했다. [3] 1048년에 조정에서 지형남부에 그를 앉혀 이곳을 떠나야 했으나 등주 사람들의 만류로 좀 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