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송)

 



'''북송 제4대 황제'''
'''仁宗 明皇帝 | 인종 명황제'''

'''묘호'''
'''인종(仁宗)'''
'''시호'''
체천법도극공전덕신문성무예철명효황제
(體天法道極功全德神文聖武睿哲明孝皇帝)
'''연호'''
천성(天聖, 1023년 ~ 1032년 11월)
명도(明道, 1032년 11월 ~ 1033년)
경우(景祐, 1034년 ~ 1038년 11월)
보원(寶元, 1038년 11월 ~ 1040년 2월)
강정(康定, 1040년 2월 ~ 1041년 11월)
경력(慶曆, 1041년 11월 ~ 1048년)
황우(皇祐, 1049년 ~ 1054년 3월)
지화(至和, 1054년 3월 ~ 1056년 9월)
가우(嘉祐, 1056년 9월 ~ 1063년)
'''생몰'''
1010년 5월 30일 ~ 1063년 4월 30일 (54세)
'''국적'''
북송(北宋)
'''재위'''
'''북송의 황제'''
1022년 3월 23일 ~ 1063년 4월 30일 (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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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趙)
''''''
수익(受益) → 정(禎)
'''부모'''
부황 진종(眞宗) 조항(趙恒)
모후 장의황후(章懿皇后) 이씨(李氏)
황후 ||[[인종폐후 곽씨|{{{#000,#fff 폐후 곽씨(廢后 郭氏)
]]
자성광헌황후 조씨(慈聖光獻皇后 曹氏)
온성황후 장씨(溫成皇后 張氏)
황후 장씨(皇后 張氏)[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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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 재위 기간
3.1. 즉위
3.2. 서하와의 전쟁
3.3. 범중엄의 개혁과 좌절
3.4. 북송의 전성기
3.5. 가족 관계와 후사 문제
4. 후대의 창작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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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북송의 제4대 황제. 묘호는 인종(仁宗), 시호는 체천법도극공전덕신문성무예철명효황제(體天法道極功全德神文聖武睿哲明孝皇帝). 휘는 정(禎).

2. 출생의 비밀?


제3대 황제 진종의 여섯 번째 아들로 사실 막내이다. 그럼에도 제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태어난 진종의 아들들이 유년기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해 살아남은 형제자매 중 유년기 이상을 넘긴 사실상 외동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휘는 수익(受益)이었고 궁 안에서 신비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진종의 후궁 이씨[2]가 낳은 아들이었으나, 진종의 묵인 아래 진종의 황후인 장헌명숙황후 유씨가 키웠다. 그 이유는 어린 인종이 적통은 아니지만 진종의 유일한 아들이니 적모가 키워야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고. 이후 아들을 유아에게 빼앗긴 이씨는 인종과는 절대 대면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받아 별궁에 유폐되어 살아야 했다. 이후에도 이씨의 존재를 철저히 감추었기 때문에 인종은 생모와는 단 한번도 마주치지 못해 얼굴도 몰랐고, 장헌황후가 친모인줄 알고 자랐다[3]. 이렇게 태어난 직후부터 유아 손에서 자란 인종은 5살에 경국공에 봉해졌고, 수군왕(壽郡王)이 되었다가 고작 9살의 나이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훗날 유아가 사망하고 난 뒤에야 자신의 생모가 신비 이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때 그는 자신을 속였다는 것에 진노하여 장헌황후 유씨와 그 일족을 처벌하려 하였으나, 자신의 생모가 죽었을 때 황후의 예를 갖추어서 정중히 장례를 치러주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유씨 일족을 용서하였다.[4] 이후 인종은 자신이 생모 이씨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을 책망하며 포증에게 자신의 용포를 때리게 하여 불효의 잘못을 표시하였다고 하며 생모의 묘를 황후의 격에 맞게 다시 조성하고 황후로 추존해 장의황후라는 시호를 올렸다. 이어 장헌황후 유씨 생전에 관직을 잃고 도성 밖으로 쫓겨나 살던 외삼촌 이용화(李用和)를 황궁으로 불러 만난 뒤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5].
이 이야기는 송인종 시대를 다루는 중국 사극에 많이 각색되어 채용되었으며 유명한 것은 국내에서도 방영되었던 판관 포청천 시리즈의 이묘환태자이다. 그리고 신 칠협오의 인간도에서도 이묘환태자의 이아기가 각색되어 방영되었다.

3. 재위 기간


총 41년간 재위했다. 물론 어린 나이에 즉위해 한동안은 장헌명숙황후 유씨수렴청정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꽤 긴 편이다.

3.1. 즉위


9살의 나이에 황태자가 되었다가 4년 뒤인 1022년에 아버지 진종이 붕어하자 고작 13살의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이때 나이가 아직 어려서 친어머니로 알고 있던 장헌황후 유씨(유아)가 수렴청정을 했다. 장헌황후 유씨의 수렴청정이 있기 전 진종은 병석에서 계속 어린 외아들의 미래를 계속 걱정해[6] 숨을 거두기 전 말을 못 하는 상황에서도 모든 대신들을 침전으로 불러 모았다. 이때 재상 정위를 필두로 한 문무백관들이 “황태자가 어리나 총명하고 이미 대통을 이을 준비를 모두 갖추었으니 문무백관들은 전력을 다해 폐위 등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어린 황태자를 보필할 것”, “황태자를 도와 수렴청정을 할 황후를 도와 전력으로 복종할 것”을 맹세하자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고, 유능하고 똑똑한 동생인 경왕 조원엄 대신 유아가 어린 인종을 대신해 수렴청정때 군국대사의 처분권을 행사하도록 유언을 한 뒤 세상을 떴다고 한다.[7]

3.2. 서하와의 전쟁


1038년 서하가 섬서성을 침공하면서 서하와 대립 구도에 놓였는데, 이에 범중엄을 기용하여 군사 제도를 개혁하고 병사들을 훈련시켜서 나름대로 전력 강화를 꾀하였다. 이후 승상으로 기용된 범중엄은 관리 제도를 개편하고, 혹시 모를 서하와 요의 도발에 대응하기 위한 무력 강화 등을 골자로 하는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서하는 1041년 다시 한 번 대대적인 원정을 단행하였는데, 초전에 송군이 개발살 나버려서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도 했지만 무너질듯 말듯 버텨낸 덕분에 전쟁은 점점 길어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송이 요나라와 강화 조약을 맺으면서 군사력 일부를 서하 방면으로 돌릴 수 있게 되었고, 서하 역시 계속된 전쟁에 지쳐버린 상황이라 결국 상대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있었던 서하가 먼저 강화를 신청하였다. 송 역시 전쟁이 길어지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고, 만약 요가 서하와 동맹을 맺고 공동 전선을 형성하면 매우 곤란해질 수 있었기에 즉시 강화 교섭에 착수하였다.[8]
그 결과 1044년 서하는 송의 황제를 천자로 인정하고 신하의 나라가 되는 조건으로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서하의 황제는 하국왕에 봉해졌으며, 매년 비단 13만필, 5만냥, 2만근씩 '''송이 서하에게 공물을 제공하는 것'''으로 상황이 마무리되었다.[9]

3.3. 범중엄의 개혁과 좌절


인종 경력(庆历)3년(1043) 무렵부터 송나라 서쪽 국경은 점차 안정되어갔다. 그러나 당시 송나라 내부는 요나라, 서하와의 계속되는 전쟁과 세폐 문제, 조정 내 부정부패와 관료들의 봉급 문제 등으로 국고가 점점 탕진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종은 범중엄을 급히 개봉으로 불러 그를 부밀부사로, 소위 ‘4간’이라고 불리는 4명의 간관(채양, 구양수, 왕소, 김정)을 새로 임명했다. 이후 이들 4간은 8월 범중엄을 재상으로 추천했고 인종은 부재상 왕거정을 파면한 뒤 범중엄을 참지정사로 삼고 부필, 범중엄과 수차례에 걸쳐 치국방략을 논의했다.
이 당시 범중엄은 인종에게 오래된 문제 해결을 고치는 건 힘들고 개혁도 실패할 확률이 높음을 말하면서 개혁추진도 신중하고 천천히 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인종은 범중엄이 이렇게 말했음에도 자신이 직접 자리까지 만들면서 범중엄을 재촉했다. 따라서 범중엄은 조정에 다시 들어오면서 「답수조조진10사(答手詔條陳十事)」를 적어 인종에게 올렸다. 이후 이 내용이 받아들여지면서 소위 ‘경력신정’이라고 불리는 개혁이 시행됐다.
당시 범중엄이 인종에게 건의해 반포된 내용들에는 조정 내 쇄신안과 함께 「답수조조진10사」에서 언급된 과거제의 엄격한 시행, 승진제도의 엄격한 시행, 지방에 파견하는 장관들을 잘 선발해야 함, 농사와 잠업 중시, 백성들의 부역을 줄일 것, 군을 정비하고 장비 관리에 힘쓸 것 등이 담겨 있었다. 이런 조치가 발표된 이후, 범중엄은 다시 한번 인종에게 상소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은밀히 개봉 외성을 수리할 것과 비밀리에 적을 토벌할 계책 등이 7가지가 추가로 포함됐고, 재상권 확대, 황제의 은혜 조치를 엄중하게 하는 등 조치도 건의됐다.
범중엄의 건의 아래 경력신정이 추진됐지만, 신정 초기부터 황실, 외척, 권신 등의 거센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때 반대파 대신들은 매일같이 인종을 찾아가 “범중엄이 일부와 결탁해 직권을 남용하고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다”고 참소했고, 조정 내에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따라서 범중엄은 더 이상 도성 안에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인종에게 변경의 일이 생겼기에 서부 변경을 수비하러 가겠다고 자청하기에 이른다.
범중엄이 스스로 변경 수비를 자처하자, 계속해서 신정을 반대하던 이들에게 시달리던 인종​은 1045년 정월 범중엄을 즉시 변경으로 내보냈다.[10] 이처럼 범중엄 주도로 진행된 개혁은 1여년만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범중엄 주도로 진행된 짦았던 신정 기간 동안 한때나마 관료기구도 재정비되면서 가문에 의지해 관직에 진출하던 풍속이 엄격히 제한되고, 경력만으로 승진하던 관례를 대신해 한 개인의 품성과 업적 등을 승진에 반영하는 조치들이 이뤄졌다. 또 이전과 다르게 과거시험도 실용적 답안들이 늘었고, 그 결과 학교가 증가하고 새로운 학풍도 싹트게 된 긍정적인 측면은 있었다.

3.4. 북송의 전성기


인종의 치세는 아버지 진종의 치세와 더불어 북송의 전성기로 평가받는다. 두 황제의 연호를 따서 소위 '함평-경력 치세'라고 불리기도 한다. 외적의 침입을 받기도 했지만, 진종과 인종의 치세에 내부적으로는 유례없는 태평기였고 경제와 문화가 크게 발전하여 번영을 누렸다. 또 ‘경력의 치’ 당시 인종을 보필했던 명신들도 많이 나왔는데 한기, 범중엄, 구양수, 포증, 부필 등이 그들이다. 또 인종 이후인 영종, 신종대 활약하는 사마광, 왕안석 등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거나 과거를 통해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사실 인종 본인의 능력에 대해서는 송의 전성기를 이끈 최고의 명군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때와 수하를 잘 만난 것에 불과한 평범한 범군이라는 평가도 있다. 왜냐하면 치세 말기 쯤부턴 상인과 지주 계층의 증가 등으로 인하여 세수는 줄었는데 주변국에 제공하는 공물과 자체적인 국방력 강화 정책으로 인한 지출은 꾸준히 발생했기 때문에 송 재정에 부담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애 전반에 큰 실정을 한 것은 없었고 나름대로 평타는 쳤던 군주임에도 시호로 ‘인(仁)’이 내려진 이유는 아량 넒고 <송사> 본기에서 "공검인서(恭儉仁恕)”라고 평을 내릴 정도로 대인배다운 성품을 가진 온후한 군주였기 때문이다. 인종은 포증이 자신의 용안에 침까지 튀어가면서 강하게 말하는 것에 대해 불쾌하다며 화를 내지 않았고, 간관들이 자신을 비판한 것은 당연한 말을 한 것이라고 도리어 감쌌다. 또 애첩 장귀비의 큰아버지 장요좌를 선휘남원사에 임명한 행동을 놓고, 포증이 간관들과 연합해 자신에게 “군주로서의 도리도 없고 패덕한 군주”라고 최악의 악평을 쏟아내며 디스한 발언에 대해서도 잠시 화만 냈을 뿐 대역죄로 다스리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양보까지 하며 넘어갔다.
이런 인종의 모습은 대간이 아닌 관리들이나 사대부들이 자신에 대한 비판이나 비평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인종은 그들이 사생활에 대한 말도 안되는 비난을 하거나 자신을 나쁘게 비평하는 행동이라고 해도 뒤끝있게 보복을 하거나 처벌하지 않았고 때론 이를 받아들였다.[11] 아울러 인종은 궐내 궁녀들이나 내시들을 배려하고 그들의 실수조차 넘어가는 온후한 군주였다.[12]
이런 까닭에 이후 조선에서도 이상적인 군주의 예로 사대부들에게 높이 평가받았다. 그 이유는 유학을 진흥시켰으며 특히 신하들의 비판도 수용하고 때로는 하자는 대로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조선 영조가 모친 숙빈 최씨 이야기 나올때마다 인종과 인종의 생모 장의황후 이씨의 사례들을 언급했다고 한다.
진종 못지 않게 학문을 중시한 군주였기에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한 권학문(勸學文)을 남겼는데, 보면 아버지만큼 노골적으로 물질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朕觀無學人(짐관무학인): 짐이 배움이 없는 사람을 보건대
無物堪比倫(무물감비륜): 이 같은 무리에 비교할 것이 없느니라.
若比於草木(약비어초목): 풀과 나무에 견주어 보면
草有靈芝木有椿(초유영지목유춘): 풀에는 영지가 있고 나무에는 춘목이 있다.
若比於禽獸(약비어금수): 새와 짐승에 견주어 보면
禽有鸞鳳獸有麟(금유란봉수유린): 새에는 난새와 봉황이 있고 짐승에는 기린이 있다.
若比於糞土(약비어분토): 똥과 흙에 견주어 보면
糞滋五穀土養民(분자오곡토양민): 은 오곡을 살찌우고 은 백성을 기른다.
世間無限物(세간무한물): 세상의 무수한 사물 중에서
無比無學人(무비무학인): 배움 없는 사람과 비교할 것은 없느니라.
요약하자면 "공부 안하는 놈은 쓸모가 없다! 개돼지만도 못하다! 똥은 거름으로나 쓰지, 사람이 공부를 안하면 똥만도 못하다!" 는 무시무시한 내용이다.

3.5. 가족 관계와 후사 문제


[image]
'''인종(오른쪽)과 자성광헌황후 조씨'''
인종의 첫번째 황후는 폐후 곽씨(廢后 郭氏)였다. 하지만 투기가 심하고 인종의 얼굴에 손찌검을 하고 상처를 내었다는 이유로 1033년 폐후된 뒤[13] 정비(淨妃)로 강등되었다가 1035년에 사사되었다. 곽씨를 폐황후시킨 뒤, 1034년에 18살이었던 개국 공신 조빈의 손녀를 황후로 세웠는데 그녀가 두번째 황후이자 계후인 자성광헌황후 조씨(慈聖光献皇后 曹氏)였다. 자성광헌황후 조씨는 개국 공신의 손녀인데다 명문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농사를 짓고 누에를 쳤으며 성품 또한 온화하고 소박한데다 침착했다고 <송사>에서는 전해지는데, 그녀는 후계자 선정문제를 놓고 남편 인종과 대립하여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양자인 영종과도 국정 주도권과 친부의 봉직 제수 문제 등으로 영종이 병석에 눕기 전까지 대립했다고 한다. 아울러 황후 조씨는 궁 안에서 변고가 났을때, 잠시 혼란에 빠져 불안해하던 남편 인종에게 서둘러 반란 진압을 위해 군을 움직이도록 하고 침착하게 대응케 했던 일화도 있다.
인종은 그 외에도 16명의 후궁을 뒀는데[14] 이중 인종의 총애를 받았던 장 귀비는 그녀 사후 인종에 의해 추존되어 온성황후 장씨(溫成皇后 張氏)가 되었다. 그는 총 3남 13녀의 자녀를 두었지만 사후 추존된 온성황후 장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 셋[15]을 제외하고는 정실부인들[16]과의 사이에서는 아들을 얻지 못했고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들도 모두 유년기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따라서 인종은 대를 이을 양자로 송태종의 4남 상공정왕 조원빈(趙元份)의 손자이며 사촌 동생 복안의왕 조윤양의 13번째 아들인 조종실[17]을 일찍이 궁으로 데리고 가서 길렀다. 양자인 조종실[18]은 궁에서 성장하다가 인종이 아들을 얻자 다시 사저로 돌아갔다. 이후 1043년 인종의 친아들이 요절한 이후에도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지 않았고 사저에서 살다가 뒤를 이어 영종으로 즉위하게 된다.
인종은 1063년에 병사했으며 영소릉에 안장되었다.

4. 후대의 창작


실존인물 포청천의 활동 시기와 그를 기반으로 한 드라마 판관 포청천의 배경 시대가 송 인종의 재위 시기이다. 참고로 판관 포청천에서 다뤘던 살쾡이 태자 전설은 사실 알고 보면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경극으로, 다른 후궁들과 그 소생들을 독살했던 성화제의 후궁 만 귀비를 비판하면서 검열을 피하기 위해 위의 장헌황후 유씨와 장의황후 이씨의 이야기로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19]
수호지의 프롤로그 부분에 등장하여 '태위 홍신'을 108마왕이 봉인된 복마전에 보낸 황제도 바로 인종이다.[20] 이때 인종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태어난 이후로 울음을 멈추지 않았는데 아무도 이걸 그치게 하지 못하다가 어느 도사가 한 마디 말을 해서 울음을 그치게 했다고 한다. 이유인즉 황자로 태어나서 어떻게 나라를 운영할 것(...)인가에 대해서 걱정을 한 것이고[21] 도사는 이것을 알고는 '하늘이 무곡성과 문곡성을 내려줬다'라고 하면서 안심하라고 말해준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여기서 무곡성이 서하와의 전투에서 활약한 명장 적청(狄靑)이고, 문곡성이 판관 포청천으로 유명한 개봉 부윤 포증이었다는 이야기.
장예모 감독의 영화 그레이트 월에도 등장. 어린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아이다 보니 괴물들에 겁먹고 찌질한(...) 모습만 보여준다. 근데 이와 별개로 이 영화 최대의 미스터리는 '''괴물들이 도성을 털었는데 황제는 살아있었다'''는 것.
2020 중국 드라마 청평악(清平乐)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드라마 청평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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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온성황후 장씨와는 다른 인물로, 장미의 증손녀이다. 사후 인종에 의해 황후로 추존되었는데, 시호는 불명이다.[2] 아들 인종에 의해 장의황후 이씨로 추존되었다. 장헌명숙황후 유씨(유아)가 덕비였던 시절 그녀를 시중들던 궁녀로 절강 출신이었다. 항주일대의 관료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본래 사람됨이 장중하고 모범적이었으며 말수가 적었는데 미인이었다. 당시 덕비였던 유아는 그녀에게 진종 곁에서 침대를 관리하고 이불과 베게를 갈아주는 일을 하도록 했는데, 이때 진종의 눈에 띄게 되었다고 한다. 진종은 이씨를 데리고 높은 누각에 올라갔다가 비녀가 떨어졌는데 비녀가 망가지지 않아 귀한 아들을 낳을 징조라 하여 가까이 하였다고 한다.[3] 당시 유아의 권세가 워낙 막강했기에 어떤 신하도 사실을 말하지 못했고, 인종의 생모 신비 이씨도 아들의 황위와 목숨도 위험해질까봐 황궁에서 있는듯 없는듯 조용히 살았다. 신비 이씨는 본래 황궁 내에서 자신의 사람을 만들어 세를 키우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궁에서 근무하던 동생 이용화마저 관직을 잃고 도성 밖으로 쫓겨난 후, 홀로 냉궁에서 쓸쓸히 보내다 병을 얻어 명도(明道) 원년(1032) 2월 황궁에서 46세의 나이에 사망했다.[4] 원래 장헌황후 유씨(유아)는 신비 이씨의 장례를 일반 궁녀의 장례대로 아무렇게나 치르려고 했으나, 후에 인종이 알게 되면 화가 미칠 것이라는 재상 여이간의 충고로 황후의 예로 치러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때 여이간의 말을 들은 유아는 크게 화를 내며 “왜 내궁 일에 관여하려는거요? 궁녀 하나 죽은 것에 어찌 그리 깐깐하게 군단 말이오!”라고 말한 뒤 여이간에게 욕까지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여이간이 나가서 가만히 오래 기다리자 이성을 찾은 유아가 다시 여이간을 불렀는데 이때 여이간이 “태후께서는 당신의 유 씨 집안을 온전하게 보존하실 생각이 없으신거요? 만약에 당신이 유 씨 가문을 대를 이을 생각이라면 마땅히 신비 이씨를 후하게 장례를 치러야 할 것이요.”라고 충고했고, 그 말을 들은 유아는 태감 나숭훈(羅崇勛)에게 인종의 생모 장례를 황후의 예로 정중히 치루라고 지시내렸다. 하지만 이때도 유아는 도성 밖으로 나갈때 궁문으로 출관하지 못하게 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여이간이 다시 유아를 찾아가 황후의 예로 장례를 치루라고 충고해 신비 이씨의 관은 서화문으로 출관해 도성 밖 남쪽 홍복원 안에 안치되었다.[5] 인종은 생모 장의황후 이씨의 묘를 영정릉에 안장하고 외삼촌 이용화의 관직을 높였다. 더해 외가 이씨 가문을 황제 외가의 예로 후하게 대하고, 황실 사람 중 복강공주를 이용화의 아들 이위(李瑋)에게 시집보냈다.[6] 진종의 동생인 경왕 조원엄의 능력이 출중했고 태조에서 태종으로 제위가 넘어간 이전 사례도 있었기에 진종이 13세 밖에 안된 외동아들을 걱정한 건 무리가 아니었다.[7] 인종의 삼촌인 경왕 조원엄은 형 진종이 죽은 뒤 유아가 죽기 전까지 십여년간 조정에 나타나지 않고 그 누구도 손님으로 받아주지 않은 채 은거생활을 하다가 유아가 죽은 이후 인종이 친정을 하게 되자 황궁으로 가 조카 인종을 만나뵈었다고 한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인종의 숙부인 조원엄이 인종에게 생모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았겠느냐 하는 말도 있다.[8] 여담으로 서하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명장으로 적청이라는 인물이 유명하다. 송나라를 대표하는 명장 중 한 명으로 당대에 무곡성(武曲星)의 화신으로 여겨질 정도로 대활약을 펼쳐 많은 공을 세웠으나 그런 만큼 시기와 모략도 잇달아 결국 파직되고 만다. 많은 민간 설화를 남긴 무인으로 중국에서 지금까지도 인기가 많은 무인 중 한 사람이다.[9] 송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결정한 정책. 어떻게 보면 후대의 , 이 조공국에게 더 많은 이익을 안겨주었던 사건의 시초(?)이기도 하다.[10] 이후 범중엄은 서부 변경 업무를 맡으면서 견고한 방어벽을 만들고 서하가 함부로 송나라 국경을 공격하지 못하게끔 했다.[11] 이는 송태조가 사대부와 상소하는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석각 유훈을 내린 탓도 있을 것이다.[12] 이에 대한 일화도 꽤 있는데 목이 마른데도 미처 물을 준비 못한 내시가 이 일로 처벌받을까봐 궁안에 들어올 때까지 참았다거나, 밤 늦게 갑자기 양고기를 야식으로 먹고 싶었음에도 수라간 사람들과 궁녀들이 이 일로 인해 매일 양 잡을 준비를 하고 고생할 것을 걱정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다가 이 일을 말한 이후에도 준비하지 못하게 한 일화가 있다.[13] 인종은 곽황후를 폐할 때 자신이 총애한 장귀비(당시 장미인)를 황후로 삼으려 했다. 이때 장귀비의 황후 책봉을 찬성한 여이간과 책봉을 반대한 범중엄, 구양수, 한기 등의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 당시 범중엄 등 반대파들은 “국모이신 황후마마를 경솔하게 폐립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대의명분을 내세워 여이간을 비난했다.[14] 사후 추존된 온성황후 장씨를 제외하면 15명이다.[15] 동국 공주, 진국 공주, 당국 공주[16] 추존된 온성황후 포함[17] 즉, 송 인종에게는 5촌 조카.[18] 뒤에 휘를 서(曙)로 바꿨다. 참고로 조서의 아내 고씨의 이모가 인종의 계후인 자성광헌황후 조씨이다.[19] 실제 역사에서는 장헌황후 유씨가 죽은 후에야 사실이 알려졌으며 이씨는 사실 진종에게 별다른 사랑을 받지 못했다. 애초에 진종은 왕자 시절부터 유부녀였던 유씨를 지극히 사랑해서 아버지인 태종의 명령으로 왕자궁에 감금당하고 못 만나게 되어서도 유씨를 잊지 않고 제위에 오른 뒤에는 그녀를 정식으로 궁으로 불러들여서 황후로 삼았을 정도였고 이씨는 진종이 그냥 한동안 관심을 보였던 일개 후궁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아예 취급이 다른 것이다. 진종 또한 이씨가 아들을 낳고서도 유씨의 청에 따라 그녀가 키우도록 하고 이씨에 대해서는 존재 자체를 깨끗이 잊어버렸다.[20] 정확히는 나라에 역병이 들어 이를 물리칠 도사를 찾기 위해 보냈던 것.[21] 물론 결과적으로 황제가 된 것에서 만든 이야기지만 원래는 막내라는 점에서 끼워맞추기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