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종(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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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북송의 제3대 황제. 묘호는 진종(眞宗), 시호는 응부계고신공양덕문명무정장성원효황제(應符稽古神功讓德文明武定章聖元孝皇帝). 초명은 덕창(德昌), 나중에 원휴(元休), 원간(元侃)으로 바꿨다가 후에 또다시 항(恒)으로 개명하였다. 송태종의 아들이며, 송태조와 송태종 때의 창업, 통일에 이어서 아들 인종과 함께 북송의 국가 발전기, 전성기로 이어지는 시기의 황제이다.
2. 생애
2.1. 즉위 이전의 삶
968년 12월 2일(양력 12월 23일)에 태종과 원덕황후 이씨(元德皇后 李氏)[1] 사이에서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조덕창이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남들보다 영특하였기에 큰아버지인 송태조가 사랑하여 궁 안에서 길렀다고 한다. 이후 차례로 한왕(韓王), 양왕(襄王), 수왕(壽王)에 봉해졌으며 986년 7월 휘를 원간(元侃)으로 바꿨다.
2.2. 태자 책봉과 즉위
원래 송나라의 제위 계승은 태종의 모후인 소헌황후 두씨의 유훈에 따라 태조에서 태종으로 그리고 태종의 아우인 부도왕(涪悼王) 조정미(趙廷美)를 거쳐 다시 태조의 아들인 조덕소에게 이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동생이나 조카들에게 제위를 물려줄 마음이 없었고, 대신 자기 아들 중 한 명에게 황위를 잇게 할 생각이었다. 그 결과 태종은 결국 조카인 조덕소를 자결케 하고, 동생 조정미마저 모반을 꾀했다 하여 방주로 귀양 보내버렸다.
하지만 태종의 계획과 달리 진종의 첫째 형인 조원좌(趙元佐)와 둘째 형 조원희(趙元僖)는 태종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지 못했고, 삼남인 진종이 뒤를 잇게 되었다. 둘째 형 조원희는 어이없게도 요절[2] 했고, 진종의 첫째 형이자 동복 형인 조원좌는 아버지 태종이 혈육들을 잔인하게 숙청하는 방법에 반대해 숙부 조정미[3] 를 살려달라고 간청하였으나 태종은 첫째 아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조원좌는 삼촌 조정미가 유배지에서 억울함 속에 쓸쓸하게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열이 받아서 궁궐에 불을 지르고 만다. 일설에는 광증이 있는 등 정신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이 사건으로 조원좌는 폐서인되어 감금되고 제위 계승권도 상실하였다.
이런 이유로 진종은 지도(至道) 원년(995)에 황태자가 되었고, 지도 3년(997) 아버지인 태종이 붕어하자 황제가 되었다. 태종이 죽을 당시 환관 왕계은 등이 짜고 태후(명덕황후 이씨)를 설득하여 첫째인 조원좌를 즉위시키려 시도하였으나, 재상인 여단이 태종의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며 반대하여 진종이 즉위하였다. 진종은 친형인 조원좌를 동정하여 복권시킨 뒤 다시 한왕에 봉작하였다. 참고로 조원좌의 7대손이 남송 효종, 광종대의 명신이자 영종 때 재상인 조여우이다.
2.3. 함평지치(咸平之治)
진종의 치세는 중국 역사상 태평성세 시기 중 하나인 함평지치(咸平之治, 998년-1004년)라고 불린다. 그리고 아들 인종까지가 흔히 송의 전성기로 평가받는데, 당시 북송의 수도 개봉은 한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을 정도로 번영했다고 한다.
진종은 재상으로 이항(李沆)을 기용하였다. 이 시기 송의 경제, 문화적 부문은 크게 발전되고 사회가 안정되었다. 함평연간 동안 북송은 태종연간보다 토지 경작면적도 크게 늘었으며 벼 생산량이 증대되었고 직물, 염색, 제지 등 수공업도 호황을 누렸다.
또한 함평 3년(1000)에는 세계 4대 발명품 중 하나로 불리기도 하는 화약이 발명되었다.
2.4. 전연의 맹
함평지치라고 불릴 정도로 경제적으로 번영하던 송나라였지만, 건국한 지 50년도 지나지 않아 요나라의 침입을 받아 결국 1004년 굴욕적인 '전연의 맹'을 맺었다. 처음에 진종은 지레 겁먹고 도망가려 했는데, 구준 등의 신하들이 강력히 반발하자 떠밀리듯 친정하여 그나마 요와 덜 굴욕적인 협상을 맺을 수 있었다. 내용은 다음 4개 항목이다.
- 송(宋)나라는 매년 군비(軍備)로서 요(遼)나라에게 비단 20만 필, 은(銀) 10만 냥을 보낸다.
- 양국의 국경은 현재 상태로 하고, 양국의 포로 및 월경자(越境者)는 서로 송환한다.
- 송의 황제와 요의 황제는 형제의 교분(형제 관계)을 갖는다.
한편, 전연의 맹과 관련해서 진종이 전연의 맹이 이뤄지기 전에 거란 측과 결정한 맹약 사항을 신하에게 보고받았을 때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거란 진영에 사신으로 간 사람은 조리용(曹利用)이었는데, 사신으로 파견되기 전에 진종이 조리용을 불러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라면 세폐를 100만이라도 허용하거라."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조리용이 궁을 나서자 옆에 있던 재상 구준이 조리용에게 "폐하께서 비록 100만의 세폐를 허용하셨을지라도 그대는 30만을 초과해서는 안 되오. 만약 30만을 초과하면 그대가 나를 보러 올 필요 없소. 내가 그대를 죽일 테니까."라고 압박을 주었다. 결국 조리용은 거란과 교섭한 끝에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 즉 30만 선에서 합의를 보았다.
조리용이 결과를 보고하고자 진종이 머무르는 전주의 행궁으로 귀환하였다. 마침 식사를 하던 진종은 내시를 시켜 조리용에게 세폐가 얼마인지 묻게 하였으나, 조리용은 "이건 기밀사항이니까 내가 직접 황제께 아뢰겠다." 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이 대답을 듣고 내시가 진종의 방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뒤 다시 나와서 "먼저 대략의 숫자를 말하시랍니다." 하고 황명을 전했다. 그러자 조리용은 여전히 말하지 않고 단지 손가락 3개만 펴고 손짓으로 표시했다.
내시는 진종에게 "손가락 3개를 편 것을 보니 대략 '''3백만'''이 아닌가 합니다."라고 전했다. 진종은 멘붕하여 "너무 많다! 많아!"라며 큰 소리로 외쳤으나, 잠시 후 "아니야. 이 정도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괜찮은 편이다." 하고 혼란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당시 진종이 묵던 행궁이 작아서 조리용 역시 진종이 너무 많다고 소리친 것을 들을 수 있었으므로, 진종을 알현할 때 "잘못했습니다. 신이 수락한 액수가 너무 많사옵니다" 라고 용서를 빌었다. 진종이 30만도 너무 많다고 소리친 줄 알았기에 두려움에 떤 것이다. 정신줄을 수습한 진종이 다시 한 번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조리용은 벌벌 떨며 30만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진종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조리용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고 한다.
2.5. 죽음
1022년 사망했는데 어린 외아들인 인종의 안위를 숨을 거두기 전까지 걱정해 죽기 직전에 재상 정위를 비롯한 문무백관들을 침전으로 불러 모았다. 이때 정위가 대표로 “ 황태자(인종)를 잘 보필하고 역심을 품지 않을 것이며 수렴청정을 할 황후(유아)가 군국전권을 행사함에 잘 보필하겠다”라고 맹세했고, 진종은 말을 못하는 상황에서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4]
진종이 죽은 뒤 그 시신은 영정릉에 안장되었다.
3. 평가
부친인 태종 조광의가 과거 제도의 충실화를 노리고 관료 시스템을 만들어 정비했다면, 진종 때에는 송나라의 과거제도가 완성되었고 과거를 거친 관료들이 관계(官界)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제가 완성된 이후 송나라의 황제권이 강화되고 과거를 통한 관료제[5] 및 문치주의가 정착하여 '함평지치'라 불리는 송나라 번영기를 이뤘다. 하지만 관료제 정비와 과도한 문관 대우 등으로 인해 이후 송의 고질적인 약점으로 언급되는 관료제 유지를 위한 재정부담과 국방력 약화의 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한편, 진종은 학문을 좋아한 군주였다. 때문인지 진종은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한 권학문(勸學文)을 남기기도 했는데, 문젠 그 내용이 참 묘하다. 고매한 이상을 품고 정계/관계에 입문한 사람이라도 출세를 이루고 나서 탐욕에 찌들어 흑화하는 일이 적지 않은데, 진종은 아예 처음부터 부귀영화와 아름다운 여자를 얻기 위해 공부해라고 권장하고 있는 것.(...) "책 속에 미인과 황금집이 있으니 공부해라."라는 격언의 본래 출처가 바로 이 권학문이다.
여담이지만 진종의 아들인 인종역시 권학문을 지은 바 있는데, 이쪽은 "출세해서 부귀영화를 얻으려면 공부를 하자!"라고 권유한 아버지와는 달리 "사람이 공부를 안하면 아무 쓸모가 없어서 풀쪼기라니 짐승, 심지어 똥만도 못하다!" 고 협박하는 스타일이다. 말하자면 부자가 쌍으로 취향이 좀 묘하다.
도교에 심취했던 황제로도 이름이 높다. 진종은 신하들에게 도교의 비문을 짓게 하거나 봉선을 올리려고 많은 예산을 쏟아붓기도 했다. 또 자기가 사후에 묻힐 영정릉에 지나치게 공을 들여 속자치통감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훗날 조선의 세종은 "허탄한 것을 좋아했으니 어리석은 임금. 그 양반 더 오래 살았으면 자기 좋아하는 일만 해 댔을 거 아님?"이라며 디스하기도 했다.[7]
4. 가족 관계
첫 번째 황후는 장회황후 반씨[8] (章懷皇后 潘氏 / 968년 - 989년)인데 남편인 진종이 황제가 되기 전에 요절하여 후에 추존되었다. 두 번째 황후는 장목황후 곽씨(章穆皇后 郭氏 / 975년 - 1007년)이다. 세번째 황후가 그 유명한 장헌명숙황후 유씨(章獻明肅皇后 劉氏 / 969년 - 1033년)이다. 추존 황후로서 인종의 생모인 장의황후 이씨(章懿皇后 李氏 / 987년 - 1032년)와 인종의 양모 자격으로 추존된 장혜황후 양씨(章惠皇后 楊氏)가 있다.
진종에게는 막내아들인 인종을 포함해 총 6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인종을 제외한 5명의 황자들은 모두 요절하였다.
5. 둘러보기
[1] 진종의 생모로 원래 이현비(李賢妃)였다. 태종의 정처 2명(숙덕황후 윤씨, 의덕황후 부씨)이 잇달아 죽었기 때문에 황후로 책봉될 뻔했지만, 태조의 삼년상이 끝나기 전에 사망했다. 이후 아들인 진종이 즉위하자 황후로 추존되었다.[2] 시호는 소성태자(昭成太子). 태종이 매우 아낀 아들이었다고 하며 성품이 과묵하고 진중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본래 병약하였다고 하며,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아울러 아내와의 불화로 인해 싸우던 중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후 그가 죽은 후 태종은 조원희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밤마다 시를 지으면서 그리워했다. 하지만 이 무렵, 죽은 아들의 애첩 장씨가 조원희를 현혹하여 집안에서 전횡을 일삼은 사실이 태종 앞에 보고 되었다. 내용에는 ‘장씨가 노비를 때리고 자신의 하인을 때려 숨지게 한 일이 조원희가 모르게 추진되었다’ ‘장씨가 자신의 부모를 개봉 서불사에 혼령을 모시고 참월례제복을 입은 사실’ 등이 있었다. 보고를 들은 태종은 즉시 조사케했는데 모두 사실로 밝혀지자 크게 화를 내며 당장 장씨 부모의 묘를 파괴해버리고 장씨를 죽이게 했다. 따라서 장씨는 즉시 교살되었고 그 가족들도 모두 유배형에 처해졌다. 또 조원희의 측근들도 좌천되거나 유배형에 처해졌다.[3] 원래 이름은 조광미였으나 피휘하여 조정미가 되었다. 그는 조광윤, 조광의의 동복동생이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두황후가 아니라 조광윤의 유모라는 말도 있다.[4] 유능하고 뛰어난 인물인 경왕 조원엄을 비롯한 자신의 형제들, 이전 후주의 시종훈 사례를 생각해보면 진종의 어린 아들 걱정은 무리가 아니었다. 더해 진종의 부친인 태종 조광의만 봐도 금궤지맹을 주장하며 태조의 아들들을 제치고 즉위했기에.[5] 송의 관료제가 꽃을 피움은 신종 때인 원풍 연간이라고 평가받는다.[6] 여담으로 짝수 행 한자들을 보면 '녹, 옥, 족…'인바 '-ok'으로 운율이 맞춰져 있다. 이른바 운자(韻字)를 맞춘 것으로, 한시의 특징 중 하나다. [7] 세종실록, 세종 12년(1430) 11월 25일.[8] 개국공신이자 명장인 반미의 6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