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하

 



'''대하'''[1]
'''大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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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북송 시대 때의 서하(西夏). 금나라 때도 별 차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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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지도
(983년~)[2] 1038년~1227년
이칭
서하(西夏), 만비국(萬祕國),
방니정국(邦泥定國), 당올(唐兀), 당항(黨項)
위치
중국 간쑤, 칭하이, 닝샤 후이족 자치구
수도
흥경부(興慶府)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
국성
이(李)
주요 황제
경종 이원호
숭종 이건순
인종 이인효
언어
탕구트어[3]
문자
서하 문자, 한자
종교
대승 불교, 도교, 유교, 이슬람교
종족
탕구트족
통화
보전(寶錢), 통보(通寶), 원보(元寶)
성립 이전
탕구트
멸망 이후
몽골 제국
현재 국가
중국, 몽골
1. 개요
2. 역사
2.1. 종족
2.2. 중원 왕조의 책봉
2.3. 이원호가 황제로 즉위하다
2.4. 멸망 이후
2.5. 역사서
2.6. 군대
2.7. 문화
2.8. 한국과의 관계
3. 역대 황제
3.1. 계보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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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송 시대, 송나라 서북쪽에 있었던 티베트 계열의 탕구트족이 세운 왕조. 본래 탕구트 족은 자신의 나라를 "'''크고 높은 나라'''(phôn¹ mbın² lhi̯ə tha², 대백고국(大白高國)으로 번역[4]) 또는 대하(大夏), 백고대하국(白高大夏國)이라고 불렀다. 또한 탕구트를 뜻하는 미으냐(mjɨ-njaa)라고도 했다. 탕구트어와 가까운 티베트어로는 미냑(མི་ཉག་, 彌藥)이다. 서하는 북송 쪽에서 부르던 이름인데, 하나라와 구별을 위한 것이다.
1032년에 건국한 후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현재의 칭하이성, 간쑤성, 산시성 북부 일대를 직접 다스렸으며 200년 동안 중계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1227년, 몽골의 불세출의 먼치킨에 의해 멸망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 역사



2.1. 종족


탕구트인은 한마디로 말해 삼국지에 자주 나오는 강족(羌族)에서 갈라져나온 집단이다.[5] 강족은 오호십육국 시대 때 일시적이나마 좁은 의미의 중원을 지배했다. 이후 강족은 크게 발강(發羌)과 당항강(党項羌)으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서남쪽에 토번(티베트)을 세웠고 탕구트로도 불리는 후자가 간쑤(감숙)성, 산시(섬서)성 일대로 이주하여 서하를 세웠다.

2.2. 중원 왕조의 책봉


당나라는 탕구트족을 평하부(平夏部), 남산부(南山部), 동산부(東山部) 등으로 나누어 지배하였다. 9세기 후반 황소의 난 당시 평하부의 탁발사공(拓跋思恭)이 장안의 수복에 결정적 기여를 하여 당나라로부터 황실의 성(姓)인 이(李)씨를 하사받고, 정난군(定難軍)절도사로 봉해져 은, 하, 수, 정, 유 등 5개 주를 하사받은 것이 하의 시초다.
이후 송 태조가 송나라 건국 직후 탕구트 수령 이이흥(李彝興)에게 태위 칭호를 하사했다. 이이흥은 그 보답으로 송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하지만 980년부터 탕구트에 내분이 일어났고, 982년 수령 이계봉(李繼捧)이 송나라에 5개 주를 바치며 항복했다. 하지만 그의 동생 이계천(李繼遷)은 주전파를 이끌고 하주 동부에서 저항을 이어나갔다. 이계천은 수세에 몰리자 986년 요나라에 투항하여 하국공(夏國公)에 봉해졌다. 그러다 997년 결국 이계천도 송에 복속하며 탕구트의 혼란은 일단락 되는듯 하였다.
수령 직을 이은 이계천의 아들 이덕명(李德明)은 1005년에 송의 침입을 격퇴한 후 화의를 체결하며 송 황실로부터 (趙)씨 성을 하사받았다. 1009년에는 송으로부터 서평왕(西平王), 요로부터 재차 하국공에 봉해졌다. 이후 그는 요, 송과 친선을 유지하며 1031년, 서쪽의 위구르 족을 격파해 하서회랑(河西回廊)을 점령하며 세력을 키웠다. 그는 또한 이후 서하의 수도가 될 흥경성(興京城)을 축조하며 독립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2.3. 이원호가 황제로 즉위하다


1032년, 조덕명(이덕명)이 죽고 그의 아들 조원호(이원호)가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당시 이원호의 나이는 29세였다. 그는 1038년에 조씨 성을 버리고 이씨로 성을 복구하며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수도는 영하(寧夏) 흥경부(현재의 인촨). 1041년, 동등한 황제국 관계가 된 것에 반발한 송에 의해 호수천(好水川) 전투가 벌어졌는데, 송이 1만 3천 명의 사상자를 내며 크게 패했고 정천(定川) 전투에서 갈부민이 이끄는 서하군에게 9천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한다. 이후 3년간의 전쟁 끝에 화의가 맺어졌다.
이 당시 송은 와도 전쟁 중이어서 양면으로 적과 싸워야 했다. 서하와 송이 화의에 나선 까닭은 전쟁을 마친 요가 서하와 송 중에서 어느 한 편이 될 가능성을 양국 모두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서하가 화의를 제안하고 송이 동의하여 1044년 송이 서하에게 매년 공물을 보내는 대신 서하는 송의 신하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서하의 황제는 하국왕(夏國王)에 봉해졌고, 송은 매년 비단 13만 필, 5만 냥, 2만 근을 보냈다. 이원호는 또한 토번을 크게 물리치며 영토를 확장했다.
고려가 동쪽에서 요나라와 송나라 사이 3강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서하는 서쪽에서 요나라, 송나라와 함께 3강 체제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다만, 송과 더 친한 고려와 달리 서하는 요나라와 더 우호적인 사이였다.[6] 이때문에 서하는 북송 말까지 칭신을 하면서도 송과 언제 깨질지 모르는 긴장 어린 관계를 유지했다. 북송과 요가 금나라에 망한 후에는 금과도 관계를 유지했다. 1194년 환종금나라에 의해서 하국왕(夏國王)에 책봉된 것이 그 사례.
불교를 국교로 하고, 서하 문자 등 독자적인 문화를 갖춘 문명국이었지만 징기스 칸에게 패한 이후 복속되었는데, 그가 정복 사업을 벌일 때 지원군이나 물자를 내놓지 않고 버티기 놀이를 해서 화를 돋우었다. 서하에게는 다행히도 칭기즈 칸이 2차로 서하를 침공하던 중에 말에서 떨어져 진중에서 병으로 죽었으나, 그의 유언이 '서하인을 한 명도 남기지 말라' 라는 것이었다.

2.4. 멸망 이후


하지만 이후에 임시 칸에 오른 툴루이는 서하인을 모두 죽이지는 않았다. 서하인이 많이 학살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적지 않은 서하인들이 몽골에 흡수되었다. 서하의 요새 중 하나인 카라호토[7]는 몽골이 교역상의 이유로 보존한 덕분에 서하인들은 카라호토에서 명맥을 이어나갔다. 실제로 서하 출신 장수 차간(察罕, ?~1255)은 몽골군을 이끌고 남송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후 서하인의 후손 중 일부는 안후이 성 근처에서 살다가 원이 망한 뒤에 한족에 흡수되어 소멸하였다.[8] 카라호토에서 명맥을 이어나가던 서하인들은 1372년 명 태조 주원장의 지시로 카라호토를 침공한 풍승(馮勝)의 명나라군에 의해 멸망했다.
이 당시 카라호토는 소빙기에 접어들면서 주변 오아시스가 소멸하기 시작하여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때 쳐들어온 풍승은 둑을 쌓아서 카라호토로 들어가는 수로를 차단해버렸다. 결국 카라호토는 명군의 공격으로 함락되고 서하인들은 사라졌다. 사라진 서하의 탕구트인들과 가장 가까운 민족으로는 중국 쓰촨 성, 간쑤 성, 칭하이 성 등지에 사는 강족(羌族)이 있다. 다만 서하의 DNA적 특성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9]

2.5. 역사서


서하인 자신들이 남긴 서하의 역사서는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20세기 초에 둔황에서 아우렐 스타인(Aurel Stein)과 폴 펠리오(Paul Pelliot)가 서하의 탕구트 문자로 기록된 문헌들을 발견하긴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의 표트르 코즐로프(Пётр Козло́в)가 카라호토를 발굴하면서 탕구트 문헌들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이들 문헌들은 대부분 불교 서적이었다. 현존하는 역사서가 전혀 없어 '처음부터 역사서 편찬 같은 것을 안 한 건가' 라는 의혹이 일기도 하지만 중원의 왕조를 모방하여 황제국의 제도를 갖춘 나라가 역사를 기록하지 않을 리는 없다. 일찍이 인종 시기에 한림학사원(翰林學士院)을 설치하고 실록을 편찬하게 하였으며 1225년에는 나세창(羅世昌)이라는 신하가 관직을 그만둔 후 하국세차(夏國世次)란 역사서를 저술한 바 있다.
다만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칭기즈 칸의 유언에 의해 자행된 서하인 학살 기록이나, 옛 서하의 강역 내에 남아 있는 황폐화된 유적들을 보아 종합해보면, 전쟁과 방화 등의 난리로 인해서 사서들이 모두 유실됐을 가능성이 있다. 현존 사서가 없기 때문에 서하의 역사에 대해서 서하인들이 남긴 '''서하문자'''로 기록된 편지, 비문, 문집 등을 활용하거나 송나라에서 남긴 기록이나 몽골인들이 남긴 기록 등을 참고하여 연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서하의 역사나 문화를 연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대표적으로 서하 역사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부분은 '송사 하국전(夏國傳)'이 있다.

2.6. 군대


중국사에서 드물게 여군(女軍)이 존재했던 왕조였다. 이들 여군을 마괴(麻魁)라고 불렀으며, 송나라와의 전쟁에서도 활약했다. 철요자라는, 직역하면 전갈기병 정도 되는 기병종도 존재하였는데, 말과 탑승자의 갑옷을 하나로 묶어 탑승자가 전투 중에 죽어도 말은 계속 전진해 적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특이한 병종이 존재하기도 하였다. 이 병종은 나중에 금나라의 철기병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10] 1998년에 저술된 "서하의 군사, 과학, 그리고 기술"에 적힌 바로는 기병, 전차, 궁병, 포병, 수륙양용군을 포함한 군사적 기술을 통해 요, 금, 송 등 당대의 중국 왕조들 사이에서 동등한 위치에 서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서하는 남자의 나이가 15세 이상이 되면 모두 어른으로 간주하고 군인이 될 의무를 적용시키는 징병제 국가였다. 그래서 서하군의 총인원 수는 50여 만 명이나 되었다. 서하군은 젊고 용감한 사람을 전투병으로 삼았고, 겁이 많거나 나약한 사람은 후방에서 농사를 지어 식량을 지원하도록 배려했다.
보통 서하군은 10일 이내로 전투를 끝내는 속전속결을 선호했고, 그래서 병사들이 휴대한 식량도 10일분을 넘기지 않았다. 서하인들은 말을 잘 다루고 굶주림과 갈증과 더위와 추위를 잘 견뎠으며, 전황이 불리하면 재빨리 후퇴하여 남은 전력을 보존했다.
서하군에는 전쟁 포로들로 구성된 특수 부대인 금생(擒生)도 있었는데, 이들의 인원수는 총 10만 명이었다. 대개 금생은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한족들이었고, 간혹 거란족이나 토번족도 있었다. 이밖에도 서하군은 주변의 이민족들 중에서 활쏘기와 말타기에 뛰어난 자들을 5000명 뽑아서 육반직(六班直)이라 부르며, 매달 쌀 2석을 급료로 주었다. 서하에게는 외인부대로 복무하는 외부 동맹군도 있었는데, 횡산(橫山)에 사는 강족(羌族)의 일파인 산와(山訛)였다. 송사를 보면 이들은 전투에서 서하인들보다 월등한 용맹성과 기량을 보여, 서하군보다 훨씬 강력했다고 평가받았다.[11]

2.7. 문화


서하 또는 서하의 정체성을 가졌던 당항족들이 자신들의 역사책을 기록하지 못하다보니 그만큼 완전히 서하국과 당항족들의 문화가 어땠는지 알기 어려운 면도 있다. 그나마 서하문자들이 존재했고, 다는 아니지만 일부분 해독되는 중이라서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벽화, 도자기, 칠기, 목제나 석제, 금속제품 등의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더욱 알려지기도 한 점도 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한자를 참고로 한 서하문자가 대표적이며, 불교와 유교, 토속신앙 중심의 문화가 발전되었다. 불교를 많이 믿다 보니 불화와 대장경들도 남겼다.
건축물은 일부 탑들과 성터, 그리고 서하왕릉이 있다. 서하왕릉은 "동양의 금자탑(피라미드)"이라고 불리며, 현재는 흙으로 쌓인 모습이지만 과거에는 여기에 탑처럼 생긴 큰 건축물을 세웠다.
다른 북방유목민 및 기마민족들처럼 변발을 하기도 했다.
당항족 고유 문화를 중심으로 하여 송, 요, 금, 티베트, 위구르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 그 외 서역지방의 여러 민족들의 문화들도 존재했다.
서하의 관료인들

2.8. 한국과의 관계


서하와 고려와의 관계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의 교역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

3. 역대 황제



대수
묘호
시호
성호(城號)[12]
휘(탕구트식/중국식)
연호
재위기간
능호
추존
-
문선황제
(文宣皇帝)
-
-/공구(孔丘)
-
-
-
추존
태조
(太祖)
신무황제
(神武皇帝)
-
-/이계천(李繼遷)
-
-
유릉(裕陵)
추존
태종
(太宗)
광성황제
(光聖皇帝)
-
-/이덕명(李德明)
-
-
가릉(嘉陵)
1대
경종
(景宗)
무열황제
(武烈皇帝)
풍각성황제
(風角城皇帝)
외리(嵬理)
혹은 낭소(曩霄)/
이원호(李元昊)
현도(顯道), 개운(開運), 광운(廣運),
대경(大慶), 천수례법연조
(天授禮法延祚)
1038~1048
태릉(泰陵)
2대
의종
(毅宗)
소영황제
(昭英皇帝)
평성황제
(平城皇帝)
영령량조(寧令諒祚)/
이양조(李諒祚)
연사령국(延嗣寧國),
천우수성(天祐垂聖),
복성승도(福聖承道), 다도(奲都),
공화(拱化)
1048~1067
안릉(安陵)
3대
혜종
(惠宗)
강정황제
(康靖皇帝)
백성황제
(白城皇帝)
-/이병상(李秉常)
건도(乾道), 천사례성국경
(天賜禮盛國慶),
대안(大安), 천안례정(天安禮定)
1067~1086
헌릉(獻陵)
4대
숭종
(崇宗)
성문황제
(聖文皇帝)
명성황제
(明城皇帝)
-/이건순(李乾順)
천의치평(天儀治平),
천우민안(天祐民安),
영안(永安), 정관(貞觀), 옹녕(雍寧),
원덕(元德), 정덕(正德), 대덕(大德)
1086~1139
현릉(顯陵)
5대
인종
(仁宗)
성덕황제
(聖德皇帝)
주성황제
(珠城皇帝)
-/이인효(李仁孝)
대경(大慶), 인경(人慶),
천성(天盛), 건우(乾祐)
1139~1193
수릉(壽陵)
6대
환종
(桓宗)
소간황제
(昭簡皇帝)
호성황제
(護城皇帝)
-/이순우(李純佑)
대경(大慶)
1193~1206
장릉(莊陵)
7대
양종
(襄宗)
경목황제
(敬穆皇帝)
-
-/이안전(李安全)
응천(應天), 황건(皇建)
1206~1211
강릉(康陵)
8대
신종
(神宗)
영문황제
(英文皇帝)
-
-/이준욱(李遵頊)
광정(光定)
1211~1223
-
9대
헌종
(獻宗)
효애황제
(孝哀皇帝)
-
-/이덕왕(李德旺)
건정(乾定)
1223-1226
-
10대
-
말제 남평왕
(末帝南平王)
-
-/이현(李晛)
보의(寶義)
1226-1227
-

3.1. 계보


'''이계천'''
이덕명
'''1. 이원호'''
2. 이양조
영령가
3. 이병상
4. 이건순
5. 이인효
이인우
6. 이순우
7. 이안전
이언종

8. 이준욱

9. 이덕왕
청평군왕

'''10(末). 이현'''

4. 관련 문서


  • 슈토헬 - 칭기즈 칸이 서하와 금나라를 정복하는 와중에 서하 문자를 보호하려는 사람들을 다루는 만화.
  • 선더포스Ⅵ - 뜬금없이 서하 문자가 많이 나온다. 그뿐.
  • 징기스칸 4 - 시나리오 1에서 흥경과 돈황 두 도시를 보유한 국가로 나온다. 서하가 멸망한 이후 시나리오에서는 돈황은 몽골 제국, 원, 명의 도시로 남아 있지만 흥경은 몽골에게 완전히 폐도 되면서 빈 땅으로 남아있다.
  • 회전사 - 홍콩손위군의 만화로, 배경이 서하국이다.
  • 천룡팔부 - 서하국의 황후로 이추수가, 허죽의 정인으로 은천공주가 나온다.
  • 당항 - 6세기 무렵부터 14세기경까지 중국 북서부를 중심으로 활약한 민족.
  • 서하 문자 - 탕구트족 계통의 국가인 서하(西夏)에서 쓰인 표의문자.
  • 돈황 - 11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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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983년 이계천(李繼遷)을 요나라가 하국왕(夏國王)에 책봉[3] 중국티베트어족의 티베트버마어파에 속하는 언어였다.[4] 서하 문자 표기[5] 다만 탕구트인이 탁발선비족의 후손이라는 의견도 있다. 송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인 송사에 의하면, 서하 왕실의 선조는 탁발적사(拓拔赤辭)인데, 탁발적사의 성씨인 탁발은 서기 4세기에 만주 북부에서 중원으로 남하하여 북위를 세운 탁발선비족의 부족 이름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 반박되는 의견도 있는데 성씨를 탁발씨로 한건 자칭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티베트계, 그러니까 정확히는 강족계에 해당되는 민족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오히려 강족계열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실제로 서하어 역시 한장어족에 속했다. 물론 선비족의 영역이 지금의 칭하이 성 및 신장 지역 일대를 점령하면서 티베트와 접하기도 했고 강족과도 여러 접촉이 있었던 만큼 탕구트족 역시 일부 선비족들과의 혼혈도 있었거나 서로 접촉 및 동화되어 일부 탕구트족들이 선비족화되거나 반대로 일부 선비족들이 탕구트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탁발씨를 자칭한 건 선비족의 영향(문화적 등)을 받아서 그렇다고 봐야 한다. 수나라, 당나라가 선비족과 연관있었다고 해도 수나라와 당나라가 선비족의 나라가 아닌 것과 비슷하다.[6] 서하의 황후 중에는 숭종의 황후처럼 요나라의 황족도 여럿 있었다.[7] ᠬᠠᠷᠠ ᠬᠣᠲᠠ. 이는 몽골어 이름이며, 탕구트어로는 검은 강을 뜻하는 zjɨ̱r²-nja̱¹. 한자로는 흑성(黑城), 흑수성(黑水城)으로 불린다.[8] 명나라 중기인 16세기 초까지는 서하 문자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9] CCTV 보도.[10] 이 철요자라는 병종은 사실 서하의 고유 병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중기병을 다수 운용한 유목제국인 요나라에도 말과 기수를 묶어 낙마를 통한 전투력 저하를 막은 병종이 있었고 이들과 교전하던 금나라 역시 괴자마라는 비슷한 병종을 남송과의 전투에서 운용했다.[11]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06~207쪽[12] 서하의 황제에게는 다른 왕조와 독특하게 성호라는 불리는 존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