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오해와 편견

 


1. 개요
2. 베트남 공화국은 아무런 정통성도 존재 명분도 없는 괴뢰국이었다?
2.1. 제네바 합의에 대한 반발과 남북총선거의 거부[1]
3. 베트민이 독립운동을 모두 주도한 덕에 명분에서 앞섰다?
4. 베트콩은 남베트남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저항조직이었다?
5. 관련 문서


1. 개요


냉전 당시 남베트남에만 일방적으로 우호적이던 시선은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남베트남의 막장스러운 실상이 많이 알려지면서 반대로 남베트남 쪽에 지나치게 부당한 인식도 일부 퍼져있는 상황이다.

2. 베트남 공화국은 아무런 정통성도 존재 명분도 없는 괴뢰국이었다?


대표적인 오해 중 하나. 베트남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오해가 빚어낸 결과물 중 하나로, 사실 베트남 공화국은 1955년 건국 당시만 해도 베트남의 반공 독립운동 세력들이 뭉쳤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나름 존재가치가 있는 나라였다. 프랑스나 미국이 억지로 만들어낸 세력이 아니라, 1955년까지만 해도 나름 식민주의와 공산주의에 모두 반대하는 세력이 남베트남 내에 강력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2] 물론 이런 나라의 특성이 바로 다음해인 56년부터 사라져버린 탓에 주목받지 못하는 감이 있다.

2.1. 제네바 합의에 대한 반발과 남북총선거의 거부[3]


북베트남에 호의적인 시각에서 흔히 드는 베트남 공화국의 정통성 부족의 근거 중 하나가 바로 남북총선거의 거부이다. 물론 남북총선거가 거부된 데에는 응오딘지엠 개인의 권좌 보전 욕구나 미국의 사정, 그리고 남북총선거를 할 경우 북베트남이 이길 게 뻔하다[4]는 이유 등으로 거부한 탓이 컸지만, 이게 모두 응오딘지엠과 미국의 독단 때문은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Nu-Anh Tran 교수에 따르면, 당시 남베트남의 주류 세력이었던 반공주의 세력[5]들 전부가 제네바 합의 자체를 40년대 말부터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에게 저질러왔던 배신행위의 일환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남베트남에서 어차피 총선거는 불발될 수밖에 없었다. 55년에 사이공 중심가에서 20만명이 반 제네바 합의 시위를 위해 모였는데, 다소 어용시위의 성격이 있기는 하지만 20만이라는 숫자는 절대로 무시할 게 못 된다.
결국, 남베트남 권력자의 정치적 이익 때문이건 민심 때문이건, 총선거는 어차피 불발되는 게 필연이었고, 이것 때문에 남베트남이 그 자신의 국민들을 상대로 정통성과 명분을 상실했다고 보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3. 베트민이 독립운동을 모두 주도한 덕에 명분에서 앞섰다?


호아하오교, 까오다이교 세력 같은 종교파 독립운동 세력이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오해. 당장 나무위키에도 한때 베트남의 독립운동 세력은 모두 베트민 같은 공산주의와 연결되어 있었고 예외가 응오딘지엠 뿐이었다는 서술이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다.
당장 베트남의 토착 불교계는 1860년(!)부터 대규모 반프랑스 봉기를 일으킬 정도로[6] 독립운동에서 유서가 깊었다. 코친차이나가 성립된 것이 1862년이다. 이에 비하면 1930년에야 세력이 정립된 베트남 공산당은 오히려 후발주자 쪽이었다.
베트남 공산당이 그나마 반불운동 한정으로 종교계에게 우위를 차지할 부분이라고는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 종교파 다수가 프랑스와 협력했다는 게 있는데, 애초에 이들이 프랑스와 협력하게 된 이유가 바로 범국적 반불운동 해놓자고 해놓고 자기들이 먼저 통수쳐서 상대방 종교 수장들을 납치하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게 과연 명분에서 우위가 될 만한 사건인지 의문이 안 들 수가 없다.[7] 게다가 베트민에게 배신당한 이후로도 오히려 베트민과 프랑스 양쪽과 싸울 것을 결심한 찐민테나, 계속 프랑스와 동맹과 적 사이를 오고가면서 싸워왔던 레꽝빈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이들 종교파가 응오딘지엠에게 모조리 숙청당한 56년 이후로는 베트남 공화국 쪽이 명분을 상실한 것이 맞지만, 그쯤 되면 북베트남 쪽도 적잖은 배신과 민간인들을 상대로 한 만행으로 명분을 상실해가던 시점이었다. 즉 그놈이 그놈인 상황에 가깝다.

4. 베트콩은 남베트남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저항조직이었다?


물론 극초기에 응오딘지엠에게 숙청당한 종교파 세력 일부가 궁지에 몰려 베트콩에 참여한 것은 맞긴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베트콩 구성원은 남베트남으로 남파되어 철저하게 베트남 공산당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하부조직에 불과했으며, 이들이 진짜로 남베트남의 자발적인 조직이었다면 베트콩의 이러한 민간인 학살, 탄압 행위들이 설명될 수 없다.
베트남국이나 베트남 공화국 정권에 맞선 남베트남인 스스로의 저항조직이라면 차라리 종교파의 반정부 연립조직 연합전선 쪽이 가까울 것이다. 베트민이나 베트콩은 오히려 초반엔 종교파 군벌, 후반엔 베트남 공화국 민병대 같은 남베트남인들 스스로의 군대가 저항하는 억압자에 가까웠다.
또한 남베트남계 군이었던 4개 사단은 (승전 후) 자고 일어나니 모두 해체되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5. 관련 문서



[1] https://gall.dcinside.com/m/war/1640404[2] 북베트남에서 없던 이유는 이들이 모두 베트남 공산당의 폭압 아래 숙청됐기 때문이다.[3] https://gall.dcinside.com/m/war/1640404[4] 북베트남이 더 인구가 많았고, 북베트남은 이미 공산당 일당독재국가였기에 얼마든지 자기네 쪽 표심을 조작할 수 있었으며, 이미 해방 초기부터 수많은 테러와 잔혹한 폭력행위를 벌여왔기에 남베트남에서도 선거 사보타주를 벌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정당한 이유와 부당한 이유가 모두 섞인 것이다.[5] 응오딘지엠 친위세력, 친정부 종교파 혁명위, 반정부 종교파 연합전선 전부 다.[6] https://gall.dcinside.com/m/war/1634011[7] 이 때문에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단순한 독립전쟁이 아니라, 이념전쟁에 가까웠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만든 것이 바로 베트민 본인들의 치사한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