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민테

 

1. 개요
2. 생애
3. 누가 죽였는가?
4. 그의 죽음에 따른 영향


1. 개요


찐민테(Trình Minh Thé̂, 程明世, 정명세)는 베트남의 군인,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였다.

2. 생애


떠이닌 성에서 1920년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까오다이교 가정에서 자랐기에 당연히 까오다이교 신자가 되었다. 까오다이교는 2차대전 당시 프랑스군의 탄압에 피해를 보았기에 프랑스에 적이었던 일본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던 때가 있었고,[1] 그 영향으로 당시 20대였던 그 역시 일본군에게서 훈련을 받았다.[2] 하지만 딱히 친일적인 성향을 보였다기보다는, 그저 까오다이교가 프랑스에게 탄압받아 일본군에게 협력한 행적에 그 역시 묻혀갔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1945년 일본 제국이 패망하면서 베트남은 다시 프랑스 치하로 돌아갔다. 호아하오교[3]와 까오다이교의 군대는 1940년대 후반에 베트민과 손을 잡고 프랑스군에 맞써 싸우는 길을 택했으나, 1947년이 되자 베트민이 이들의 통수를 치고 호아하오교와 까오다이교의 주요 인사들을 납치하기 시작하자 반대로 반공주의로 돌아서서 프랑스와 협력해버렸다. 찐민테는 여기에 반발해서 까오다이군을 탈퇴, 스스로의 까오다이교 민병대를 조직해서 베트민과 프랑스 양쪽을 상대로 맞써 싸웠다.
1950년대에 미국 정보부가 추산한 바에 따르면, 까오다이교 휘하의 병력 수 전체가 만명 정도였는데, 그 중 찐민테 휘하의 군대는 약 4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응오딘지엠이 베트남국 내에서 급격하게 기세를 올리고 난립한 군벌들을 베트남 국민군[4]으로 묶는 과정에서, 찐민테 역시 응오딘지엠 세력에 합류하게 된다. 다른 수많은 군벌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지엠에게 아주 우호적이라고 보긴 힘들었던 것으로 보이나, 결국 3월 27일에는 결국 반공투쟁을 더 효과적으로 하겠다면서 완전히 응오딘지엠을 지지하게 된다. 직후 그 직속 병력 뿐 아니라 다른 까오다이군까지 합해 약 8000명 정도의 병력이 베트남 국민군에 합류를 약속받았다. 이 과정에서 응오딘지엠이 찐민테와 응우옌탄푸옹같은 군벌 지도자들에게 돈을 줬는지도 논쟁거리가 됐다. 실제로 돈을 받았건 아니건 간에, Nu-Anh Tran 교수는 찐민테에게 실제로 돈이 들어갔다면 그 액수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던 군벌의 수장 치고는 죽을 때까지 매우 가난했기 때문이다. 군벌 중 몇 안되게 프랑스군과 단 한 차례도 프랑스와 협력한 적이 없어서 프랑스에게 돈을 받았을 리도 없고, 돈을 응오딘지엠으로부터 받았어도 휘하 병력 먹여살리기도 바쁜 수준이었을 거라고.[5]
여러 세력의 다툼이 엇갈리는 혼돈 속에, 찐민테는 1955년 5월 3일, 뒷통수에 어떤 저격수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만다. 고작 만 35세, 너무나도 때 이른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3. 누가 죽였는가?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죽음이다. 혼란스럽던 당시 베트남국의 상황에서 그를 죽일 만한 잠재적인 적들이 너무 많았는데다가,[6] 결정적으로 그를 죽인 범인이 안 잡혔기 때문이다. 현 베트남 정부 역시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던 그가 영웅시되는 것이 그닥 달갑지 않을 테니 그의 죽음의 진상을 조사해봤자 별로 이득이 없을 것이다. 설령 베트남이 민주화된다고 해도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인데다가, 그 이후 베트남이 너무 오랫동안 혼란에 휩싸여서 진상조사가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다.

4. 그의 죽음에 따른 영향


일단 잠재적인 정적이 하나 줄어든 응오딘지엠 입장에선 단기적으론 호재였다. 하지만, 이후 응오딘지엠이 보여준 군사적인 무능함 등을 생각해보자면, 찐민테 장군을 동맹으로 삼을 일이 없게 된 것이 과연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이득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까오다이교가 여러 요인으로 친불 성향을 보였을 때 스스로 그 움직임에 반발해 부하들을 끌어모으고,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로 계속 베트민과 프랑스 양 쪽과 싸운 것만으로도 이미 찐민테의 군사적인 역량과 리더쉽은 검증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불 반불을 막론하고 전반적으로 응오딘지엠에게 전혀 협조적이지 않았던 종교 기반 군벌 중에서 찐민테 정도는 정말 양반인 수준이었다. 또 다른 반불/반공 군벌이었던 호아하오교의 레꽝빙은 결국 빙쑤옌과 협조한데다 응오딘지엠에게 굴복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토벌된다. 만약 진짜로 응오딘지엠이 찐민테를 암살한 거면 그야말로 혹 떼려다가 혹 붙인 격이다.
미국과 남베트남의 입장에서는 큰 악재였다. 찐민테는 응오딘지엠이 가지고 있던 '반공과 반불을 동시에 했던 사람'이라는 위치를 대체할 수 있던 몇 안되는 인재였다. 비록 찐민테가 국가원수로써도 장군으로써만큼 유능했을지는 전혀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군재가 응오딘지엠보다 훨씬 뛰어났던 것은 사실이며, 나이도 젊어서 앞날이 창창했고,[7] Nu-Anh Tran 교수가 언급하듯 그의 가난한 재정상황으로 보아 확실히 청렴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추청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세력을 잡고 있던 떠이닌 성은 하필 나중에 호치민 루트의 주요 종착점 중 하나가 되는 곳이었다. 찐민테가 지도자가 됐건 못 됐건, 그가 죽었던 건 응오딘지엠 개인 입장이면 모를까 남베트남 전체 입장에선 확실히 손해였던 것이다.
그가 죽기 전에 응오딘지엠에게 받았던 약속과 달리, 응오딘지엠은 결국 그의 부대를 베트남 공화국군에 합류시켜주지 않았다. 영향력 있는 리더가 죽자 단체로 통수를 맞게 된 것이다.

[1] https://www.jstor.org/stable/20071767?seq=1[2] 베트남어 위키피디아 찐민테 문서에서 참조.[3] 불교에 기반한 베트남 토착 종교.[4] Vietemanese nationalist army, 훗날의 베트남 공화국군.[5] https://escholarship.org/content/qt4407j6sj/qt4407j6sj.pdf [6] 그와 적대했던 프랑스 당국이나 기타 친불 세력, 베트민, 다른 군벌 지도자나 심지어 그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했을 법한 응오딘지엠의 세력까지도.[7] 훗날 베트남 공화국의 국가원수가 되는 응우옌반티에우보다 고작 세 살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