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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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 노동당, 인민혁명당이 기반인 베트남 유일 합법정당이자, 공산주의 정당이다. 그 유명한 호찌민이 있었던 그 정당이다.
1930년 2월 3일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호찌민(胡志明)이 베트남 국내의 여러 급진적 사회주의 정당을 규합해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설하였다.[4] 같은 해 10월의 제1회 중앙위원회에서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개칭하였고, 초대 총비서로 쩐푸(Trần Phú, 陳富)를 선출했다. 1935년에는 최초의 당대회인 제1차 당대회〉를 마카오에서 거행했다.
1945년에는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 초대 국가 주석은 호찌민) 성립 후, 인도차이나 전쟁을 보다 광범위한 기반에서 전개하기 위해 월맹(베트남 독립 동맹회)에 합류하면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해산되었다.
1951년 2월에는 베트남 북부의 투옌꽝 성(宣光)에서 '''제2차 당대회'''가 개최되어 호찌민을 당주석으로 하는 《베트남 노동당》을 재발족한다. 1960년의 제3차 당대회는 수도의 하노이에서 열렸고, 여기에서 ‘남베트남의 해방’과 ‘북부의 사회주의 건설’을 결의하였다. 1969년 9월 2일 호찌민이 사망하자 공석이 된 당주석의 자리에 당 제1비서였던 레주언(黎筍)이 직무를 계승했다. 북베트남이 베트남 전쟁에 승리하면서, 베트남 노동당은 제4차 당대회를 열어 다시 베트남 공산당으로 개칭했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1979년에 크메르 루주를 몰아내고 캄보디아에 군사 개입을 하게 되고 국제적으로 고립 상태가 되자 경제적인 어려움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1986년 7월 레주언이 사망하면서 쯔엉찐(Trường Chinh, 長征)이 총비서가 되었지만 12월에 열린 제6차 당대회에서 도이머이 노선이 채택되어 응우옌반린(Nguyễn Văn Linh, 阮文靈)이 총비서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을 모방한 '''일당독재체제[5] 의 유지와 외국자본 도입에 의한 경제성장의 추구'''가 기본정책이 되었다. 1991년에는 도므어이(Đô Mùói, 杜梅)가 총비서가 되었고, 1997년부터는 레카피에우(Lê Kha Phieu, 黎可漂), 2001년부터는 농득마잉(Nông Đúc Manh, 儂德孟)이 총비서를 맡다가 응우옌푸쫑이 집권중이다.
2006년 4월에 열린 제10차 당대회에서는 그 직전에 발각된 오직 사건으로 교통 운수성 차관이 체포되어서 악화되는 당관료의 부패에 대한 농득마잉 총비서의 책임을 묻는 소리가 강해졌기 때문에, 반대파가 응우옌민찌엣[6] 를 세워 중앙위원의 자유선거로 총비서를 선택하기로 결정되었다. 직전에 응우옌이 사퇴했기 때문에 투표는 행해지지 않고 농 총비서는 재임되었지만 이는 당원의 의식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으로서 베트남 국외에서 크게 전해지기도 했다.
일당제 특성상 베트남 국회 의석의 절대 다수를 늘 차지하고있다. 무소속 의원들이 상당수 있기는 하지만 반체제 인사들은 사전심사를 통해 탈락시키는것이 관행인지라 야당인사들을 의석을 차지하지 못한다. 다만 국회의원 선거에서 1선거구당 다수의 후보를 내기때문에[7] 평판이 안 좋은 국회의원은 유권자들이 낙선시킬수있는지라 그나마 중국이나 북한같은 곳보다는 물갈이가 잘 된다는 평이기는 하다 그리고 중국처럼 전세계적으로 뻘짓을 하지않으면서 국민들의 자유와 인권도 어느정도 보장하고 있는정당이라 그런지 이미지는 중국 공산당에 비하면 상당히 좋다.
2. 역대 총비서
[1] 당공산월남[2] 소련 국기와 비슷하긴 하지만, 별이 없다.[3] 현재의 중국 공산당처럼 경제 자본은 대부분 국유화 하되 시장 경제 정책을 도입해 운영하는 사회주의 개발독재를 정책방향으로 삼고있다. 다만 이때문에 극좌 정당이 맞는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긴하다.[4] 처음 당명은 베트남 공산당이었으나, 나중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꿨다.[5] 1988년까지는 구색정당이 존재하는 헤게모니 정당제였다가 이후는 일당제가 되었다.[6] 阮明哲, 당시 호찌민시 당위원회 서기[7] 참고로 베트남의 선거제도는 중선거구제이다.[8] 베트남 소수민족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