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건

 


1. 머리에 착용한 의복
2. 후한 말의 인물


1. 머리에 착용한 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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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식 복건

복건과 심의를 착용한 흥선대원군 초상화
幅巾
머리에 착용하는 한푸(漢服)와 한복(韓服)의 일종. 비단으로 짠 두건을 머리에 써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는 용도로 사용한다. 심의와는 세트로 취급된다. 복건이란 한 폭의 베를 사용하여 머리를 감싸고, 뒤쪽으로 드림이 있는 모자의 일종으로 은사(隱士,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세상을 피해 학문을 하며 조용히 살아가는 선비)들이 주로 사용하였다.
정자관과 함께 전형적인 선비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필수요소로, 후한서에서 대학자 정현이 착용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선비와 학자들이 복건을 애용한 역사는 유구하다.[1] 복건은 후한 때 유행했고, 진나라와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은사나 도인의 아복(雅服, 평상복)으로 사용되었다. 그 뒤 송나라 때에 와서 사마광(司馬光)이 복건과 심의(深衣)를 일상복으로 착용하였는데, 이를 주희(朱熹)가 『가례(家禮)』에서 추천하면서 유학자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말 성리학이 전래된 이후로 유학자들이 심의와 함께 복건을 유가(儒家)의 법복으로 숭상하여 착용하게 되었으나 그 모습이 괴상하여 일반화되지는 못하였고, 일부 유학자들이 조선 말까지 착용하였다. 하지만 현대에는 아기잔치 사진 찍을 때나 씌워주는 정도.
1000원권 지폐에는 복건을 쓴 퇴계 이황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지만, 정작 퇴계는 복건을 의 고깔 같다며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2. 후한 말의 인물



服虔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기의 인물. 자는 자신(子愼).
하남 형양 사람으로 초명은 중(重)이고 다른 이름은 기(祇)였는데 후에 건으로 개명했다. 젊어서 가난했지만 태학의 학생이 되었으며, 춘추좌씨전에 밝아 훈고학에 근거해 주석을 만들었고 효렴에 천거되어 상서랑, 고평현령을 지냈다가 중평 말년에는 구강태수가 되었다. 면직되자 난리로 인해 여러 곳을 떠돌다가 병사했다.
복건이 남긴 주석은 춘추좌씨전해 또는 복씨주라고 불리는데, 가규의 주와 쌍벽을 이루어 위나라와 진나라 때 두예의 주석과 병칭되었다가 수나라 이후에 유실되어 그 일부만 남아있다고 한다.
또한 통속문이라는 저서를 남겼다고 알려졌지만 안씨가훈이라는 책에서 통속문에서 세간에 이르기를 그 저자는 복건이라고 했는데, 그 서문에는 위나라 때 사람인 소림과 장읍의 말을 인용한 것과 정현 이전에는 누구도 반절음을 알지 못했다고 나온다. 그래서 완효서가 통속문은 복건이 아니라 이건이라는 사람이 남겼다고 했지만 그 사람이 지었다고 되어 있는 것이 없으므로 결국 통속문은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세설신어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복건은 춘추에 매우 정통해 주를 달고자 해 다른 견해를 참고하려 했는데, 최열이 문하생을 모아 춘추전을 강론한다는 소문을 듣고 성명을 숨긴 채 최열의 문하생에게 밥을 지어 주는 사람으로 고용되었다. 매번 강론할 때가 되면지게문과 벽 사이의 틈으로 몰래 엿들었는데, 나중에 최열의 견해가 자기를 능가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잠시 여러 문하생들과 강론 내용의 장단점을 토론했다.

최열은 이 일을 듣고 누구인지 짐작하지 못하다가 평소에 복건의 명성을 들었기 때문에 혹시 복건이 아닐까 의심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찍 가서 복건이 아직 깨어나지 않았을 때 자신(子愼)!이라고 불렀다. 복건이 엉겁결에 자기도 모르게 놀라 대답했는데, 복건과 최열은 서로 친한 벗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지은 글은 총 10여 편이 있었다고 한다.

[1] "정현은 조복을 받지 않고 복건을 쓴 채로 황제를 알현하였다." - 후한서 정현전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