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푸

 


1. 개요
1.1. 중국 내 인식
1.2. 명칭의 유래
2. 호복이란?
3. 시대별 한푸의 모습
4. 종류
4.2. 남성 한푸
5. 한푸 트렌드


1. 개요


정체: 漢服
간체: 汉服
Hànfú
다른 명칭
漢裝
華服
한국식 한문 독음으로는 우리나라의 전통 의상처럼 둘 다 한복이지만, 한자가 漢服韓服으로 다르다. 때문에 중국어 발음에 따라 '한푸(Hanfu)'라고 구분에서 일컫는다. 또한 전통 의상은 대개 그 나라의 발음대로 부르고 표기하기 때문에 어찌 되었든 한푸라 일컫는 것이 맞다. 우리가 일본의 전통의상을 한국 한자음인 '착물(着物)'이 아니라 기모노라 하고, 만족(满族)의 전통의상을 '기포(旗袍)'가 아닌 치파오[1]라 일컫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재 중국 전통의상으로 널리 알려진 치파오(旗袍)는 청나라 이후 전래된 만주족의 전통복장에서 비롯된 복식으로, 이전 한족의 복식과는 차이가 크다. 즉, 치파오모든 중국 시대의 복식을 한푸라 할 수 있다. 사실 한푸란 말도 중국 인터넷에서 임시로 만든 말이다. 다만, 여기서 치파오만 한푸의 분류에서 빼놓는 것은 상당한 모순이 존재한다. 자세한 것은 후술.
한푸(漢服)는 본래 남녀를 불문하고 바지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한복(韓服)의 근간이 되기도 하는 북방계 호복을 들여오면서 바지를 도입했다. 동아시아는 문화적으로 매우 가깝기 때문에 서로의 의복 양식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한국은 조선 이전까지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단령을 관복으로 사용했으며, 중국은 명나라 홍치제이전까지 고려풍이 유행하기도 했다. 특히나 중국의 한푸는 이민족의 영향을 받으며 계속해서 변해왔다.[2]
한복(韓服)은 본래 북방계 복식의 특징을 따라 소매가 좁았는데 한푸(漢服)의 영향을 받아 소매가 넓어졌다.[3] 중국도 마찬가지로 북방 유목민족[4] 복식에서 유래한 호복의 영향을 받아 춘추전국시대 이후부터 북방계 호복양식인 바지를 한푸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주로 거란족, 선비족 같은 몽골계 유목민이 입던 호복인 단령을 수, 당 시기부터 받아들이기도 했다.[5]
사실 같은 시대라도 의복은 천차만별이라, 가령 조복식의 예복, 단령 같은 공복, 평상복 등 종류가 매우 다양해 여기에 나와있는 옷들은 아주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자세한 의복들은 관련 링크의 "연관목차"를 클릭하여 왕과 귀족들 의복을 확인하면 볼 수 있다. 일단 고려 때의 의복이지만 상위층은 중국의 의복을 채용하였으므로 참고하면 좋다. 조복, 면복, 구장복, 칠장복, 공복 등을 참고하면 된다, 친절하게도 그 의복에 대한 상세한 출처가 있어 어느 시대 중국 것인지 확인이 가능하다.(사실 본 링크의 의복들 대다수가 복원 사료로 중국의 의복에 근거하여 복원)

1.1. 중국 내 인식


2006년엔 베이징대 역사학과 학생들이 복원한 고려양 한푸를 홍보한답시고 한푸를 입고 시민들과 만났으나, 정작 시민들은 당시 대장금의 인기와 한류의 영향에 의한 한복의 인지도 상승 등으로 한푸를 한복 또는 대장금 옷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상당수였다고 한다.# [6] 중국에서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우선 청나라 때 변발정책과 더불어서 복장도 바꿀 것(체발역복)을 강제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한푸가 거의 300년 단절된 것도 있고, 여기에 추가로 모택동 시절의 문화대혁명 때문에 전통문화와 단절된 문제가 굉장히 심각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명나라 초기 북경 일대의 고려양 한푸야 고려옷과 교류하여 영향을 받은 것이고 별로 오래 유행했던 것도 아니라서 한복으로 착각한다고 이상한 건 아닌데, 당나라 복식을 가지고 기모노 아니냐 일본인 코스프레하냐고 묻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한족 민족주의자들은 청나라를 만악의 근원으로 취급하고 이들 사이에선 만주족과 연관된 음모론까지 등장했다. 만주족들이 중국 공산당 및 그와 연계된 조직을 모두 은밀히 조종하고 있으며, 계획생육정책 또한 한족을 말살하기 위한 계획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현대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한족들의 민족주의 의식의 고취와 더불어 한족의 한푸를 입자는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한푸운동(영문위키). 근데 전국 시대부터 이민족들의 옷(호복)이 유입되어 중국 역사가 흘러가면 갈수록 원본에 가까운 치마형 한푸보다는 바지저고리 형태의 실용적인 의복을 착장하는 경향이 점점 더 심해진다. 이유야 당연히 활동이 편해서. 실제로 호복 유입 전의 한푸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현재 한푸라고 홍보되고 있는 중국 고중세 복식들은 한족의 한푸의 원형에 호복의 양식이 깊이 들어간 형태이다. 진심으로 한족의 한푸를 입자고 할 거면 한국의 심의 비슷한 옷을 입어야 한다.

1.2. 명칭의 유래


사실 한푸라는 명칭은 21세기에 들어와서 새로 생긴 신조어다. 특히 한족주의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치파오를 비롯한 만주족(청나라) 문화에 대한 반발 심리로 정착된 용어인데, 일단 한푸 부흥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은 '삼황오제 시대부터 청나라 이전까지 한족들이 입어왔던 모든 옷'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한푸라는 용어는 기준이 상당히 모호하여 중국 복식학계에서도 인정받지 못 한다. 중앙일보 - 치파오 벗고 한푸 입는 중국…한족주의 부활하나 기사에서 <한푸는 민감한 주제라며 익명을 요구한 베이징의 복식 전문가는 “한푸는 신조어”라고 말했다. “한족의 전통 복장을 뭉뚱그려 ‘한푸’라고 부를 뿐, 한·당·송·명 등 한족 왕조마다 독자적인 복식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한푸라는 단어가 정착한 것은 2000년대로 추정되고 있는데, 위 기사에서는 <2001년 중국 상하이 APEC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이 치파오를 입고 사진을 찍었는데, 여기에 일부 중국인들이 반발하면서 '한푸'라는 단어를 새로 만들었고, 상술한 기사에서는 2003년 정저우(鄭州)의 노동자 왕러톈(王樂天)이 직접 만든 한푸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는 뉴스가 보도되면서 한푸 부흥운동이 시작됐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2004년에는 싱어송라이터 쑨이(孫異)가 한푸 부흥 운동 주제가 ‘중회한당’을 작곡하는 등, 부흥운동이 힘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리잡은 한푸라는 명칭은 학술적인 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래서 중국 복식계에서도 한푸의 정의를 두고 논란이 많다. 명칭부터 청나라에 대한 반발 및, 한족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용어라는 문제점과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러나, 중국 내 복식학자들은 2020년대 들어 심각해진 중국의 복식 동북공정을 우려하면서도 한족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당 양쪽의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에 명칭과 분류에 대한 학술적 정의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못 하는 상황이다.
청나라와 만주족 문화를 버리고, 대신 한족의 문화를 부흥시키자는 중심의 민족주의가 공고해진다는 비판 역시 뒤따른다. 위 기사에 따르면 <장셴(張跣) 청년정치학원 교수는 “한푸 운동은 한족의 순결성과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것”이라며 “한푸 운동은 ‘민족의식의 회귀’가 아니라 ‘민족의식의 퇴화’이며 ‘문화의 자각’이 아닌 ‘역사의 퇴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중국의 현행 헌법은 “민족단결을 유지·보호하는 투쟁 중에 대민족주의(大民族主義), 특히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를 반대한다”고 전문에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헌법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때문에 공산당에서는 한복을 중국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역사왜곡을 진행하면서도, 한푸 부흥운동 세력들에 대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느정도 목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적당히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2. 호복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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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호복.
스키타이를 위시한 북방계 기마민족의 복식으로 남방계 정주민족의 복식인 한푸와 대비되는 복식이다. 남방계 복식과 가장 큰 차이점은 말을 타기 편하도록 바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호복은 한족주의자들이 존재를 부정하고 역시 한푸의 일종이라고 주장하는 복식이기도 한데, 자신들의 조상이 오랑캐의 옷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부정하는 심리이다. 호복은 한푸보다 오히려 한복과 비슷하지 않은가? 모자에 깃털이 있는 등,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복식과도 상당히 비슷해 보인다. 사실 우리나라 한복 자체가 북방계인 알타이계 복식이 근간이다. 호복이란 게 이런 북방계 복식이니 비슷한 것은 당연지사. 소매가 좁은 것이 바로 정통 한푸의 통소매와 대비되는 활동성이 높은 호복의 특징이다.
호복은 전국시대였던 기원전 3세기 이후 중국의 한푸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대표적인 영향이 바지의 도입이다. 한푸는 본래 상의하상(上衣下裳)형 복식으로, 남성도 치마를 둘렀으며, 상의에 바지를 입는 상유하고(上襦下袴)형 복식은 본래 기마민족의 복식이던 호복의 특징이다. 그러다가 조무령왕이 기마전술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 '오랑캐의 야만적인 옷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격렬하게 반대하던 신하, 왕족, 태자 등을[7] 무시하고 호복령을 도입한 것이 기점이 되어 전국시대 국가들이 일제히 군사력 확충을 위해 기마병을 운용하며 바지를 입기 시작하면서 한푸에 북방계 바지가 생겨났고, 이후 단령을 비롯한 호복이 한푸에 편입되었다.
자세한 것은 호복 문서로.

3. 시대별 한푸의 모습



3.1. 상/주 시대


상(은)나라 시대 한푸.
오스프리에서 그린 주나라 시대 한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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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이 복식 계통인 호복 스타일과 달리 바지가 없고 남녀 모두 치마가 발달했으며, 몹에 겹겹이 둘둘 감는 형식이다. 조선시대 한국의 선비들이 주로 입은 심의는 이것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3.2. 춘추전국시대


남성들의 경우 이때부터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중국의 기마술은 이 시대에 도입되었고, 한푸의 바지도 전국시대 조나라에서 조무령왕이 중원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북방 민족들의 기마병을 도입하면서, 말을 타기에 유리한 바지가 함께 도입된 것이다. 처음엔 '어찌 우리가 오랑캐들 옷차림을 따라하느냐'면서 반대여론도 많았지만, 전란의 시대에 군사력 증강을 위한 기마병 편제가 전 중원에 퍼지면서 군복 격이었던 바지가 전 중국에서 남성 의상이 되었다.[9]

3.3. 진나라, 한나라


사진은 진나라와 한나라의 한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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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푸는 북방계의 옷인 한복과 달리 남방계의 옷이기 때문에 바지를 입지 않거나 가랑이가 트인 풍차바리를 입었기 때문에 빙글빙글 돌려 허리에 묶는 원피스 형태의 곡거포(曲裾袍)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목을 완전히 목도리처럼 감싸던 형태가 점차 아래로 내려와 내의와 중의가 드러났으며, 고대 기록에 남아 있는 다양한 모양의 상투에서 중화 여러 민족이 융합되었음을 알수 있다. 또한 몸을 한벌로 깊게 감싸는 옷인 심의(深衣)는 이 곡거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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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초기에 옷자락이 곧은 직거포(直裾袍)가 잠시 유행하였다가 한나라 중기 이후에 바지가 발달하면서 자리잡게 된다.

3.4. 위진남북조시대


전통 예법과 교리를 중시했던 한나라가 멸망하고, 사회 혼란기 속에서 중국인들은 자유로운 기풍을 추구했다. 남자들이 화장을 하기도 하고, 여자들의 옷은 화려하고 복잡한 형태로 꾸며진 잡거수소복으로 발달하게 된다. 또한 워낙 많은 나라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그 형태가 획일화 되었다고 할 수 없다.
도교의 유행으로 선녀를 형상화한 기풍이 유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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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의의 발달로 점차 옷깃과 옷자락이 곧아지고 바지저고리, 치마저고리의 두벌옷 형태 발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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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대수관삼으로 남성들이 입던 옷이다.

3.5.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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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초당(初唐), 무주(武周), 성당(盛唐), 중당(中唐), 그리고 만당(晚唐) 시기의 여성 복식
당나라는 실크로드를 통해 외국과의 교류도 많고 문화와 경제가 크게 번성했던 시기였다. 중국 고유의 문화에 여러 지역의 문화가 융합하여 많은 발전을 보였다. 의복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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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유교적인 관습에 제한받던 여성들의 의복은 굉장히 개방적으로 변해갔다. 옷깃이 내려가고 소매가 넓고 크며 치마를 허리 높이 묶어 가슴을 강조했으며, 투명한 얇은 비단으로 몸만 가리는 대담한 형태의 복식이었다.
또한 중국에서 가장 선호하는 전통의상이다. 흔히들 최고의 전통의상으로 당나라때의 의상을 꼽는다. 한국에서 조선 말기의 한복을 제일 선호하는 것과 같이,[10] 중국에서 여인의 전통의상으로 당나라 때 한푸를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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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남북국 시대에 들어 신라발해 모두 왕족과 귀족 등 고위층을 중심으로 이러한 당나라풍 복식을 적극적으로 반영했고, 일본은 비슷한 시기였던 나라시대~헤이안 초기기모노에서 당나라 스타일의 디자인을 찾아볼 수 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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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를 추구하는 풍조가 성행해 화장술이 발달했다. 얼굴을 새하얗게 칠하고 짙은 눈썹, 펭귄 같은 입술, 과한 볼터치, 인도의 영향을 받은 미간의 꽃점 등으로 포인트를 주는 게 특징이다.

3.6. 송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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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때 의복은 당나라의 의복에 송나라만의 특징을 더했다. 당나라와 달리 정세가 안정적이지 못한데다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당나라보다는 덜 화려하고 조금 더 소박한 디자인을 추구했다. 전대의 당나라와 후대의 명나라때도 그랬지만 송나라의 복식 역시 고려의 복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남성의 복식의 경우 당나라때터 입었던 기존의 단령복두 이외에도, 조선 후기의 고사인물화 같은 곳에도 볼 수 있는 포(袍) 위에 치마를 두르는 복장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사복겸 일상복으로 동파관과 심의#s-2를 입게되는데, 동파관과 심의는 고려에 전파되어 이 후의 조선에서도 사대부들이 널리 입었다.
첫번째에서 세번째 사진과 네번째 그림에서 6번째 장면을 보면 기본적으로 상류층 여자들은 가슴가리개 형태의 저고리(?)와 속치마 밑 속바지를 입고, 그 위에 치마를 두른 다음 마무리로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배자를 입었다. 착장법 이 긴 배자의 소매와 옷깃에 자수를 넣어 장식했다.

3.7. 명나라


명나라 초기의 한푸는 여러 모로 고려조선시대 한복과 많이 닮았는데 이는 원나라 말기 중국에 보내진 환관, 공녀들에 의해 고려의 풍속의 영향을 받은 고려양이라고 하는 한복 형태의 복장이 유행하게 되었고, 원나라가 망해서 쫓겨나간 뒤 명나라 초기 때에도 현재의 베이징이 있는 북부 지역의 한족들이 이런 고려식 옷을 입은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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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들을 보면 한눈에 봐도 용의 눈물 등의 한국 사극에서 나오는 여말선초의 상류층 여성복을 그대로 복사한 수준으로 닮아있다는 걸 알 수있는데, 본래 원나라 말에 북경 일대의 여성들 사이에서 대유행했던 스타일이다. 홍무제 시기만 하더라도 수도는 남경이었고, 남방에서는 고려양과 상관없이 송나라 시대의 패션을 고수했기 때문에 본래는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영락제가 자기 근거지였던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고려양이 중화를 대표하는 패션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로 인해 홍치제 때 고려양을 금지하여 짦은 시간에 명확한 투피스 형태의 고려양 복식에서 길고 가느다란 실루엣을 가진 형태의 한푸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전 시대부터 지속적인 호복의 유입으로 한족들도 투피스(이부식二剖式) 형태의 옷을 받아들여 입은 상태였다. 물론 원조는 상의와 치마가 붙어 있는 원피스 형태의 긴 포이다. 사실당나라송나라의 한푸 역시 상의와 하의가 나누어진 이부식의 옷이다.
다만 한족들 특유의 미의식이 지속적으로 남아 있어서, 투피스 형태의 복장도 옛날 한나라 시대의 원조 한푸처럼 몸에 착 감기는 '가늘고 긴 실루엣'을 추구하였다. 반대로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일관되게 여러 벌 껴입어 나타나는 '풍성한 치마' 컨셉을 추구했기 때문에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명복의 경우 명나라 중후기부터 입은 의상을 보면, 이질적이기까지 한 초기의 명나라 복장보다 송나라 시대의 가녀린 느낌과 비슷해진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때도 전기와 마찬가지로 치마(췬裙)와 저고리(아오?)로 구성된 투피스이기는 했다. 느낌과 착장법이 이전 한족식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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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치제 이후 여성복에서는 고려양이 사라졌지만 특이하게 고려양의 여성복이 남성복으로 변화하여 명말까지 명나라 남성 복식에 흔적을 남기게 된다. 위 사진의 금의위 관복을 보면 고려양 철릭(몽골 기원)이 중국식으로 변한 모습이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다.
간혹 위와 같은 그림을 대면서 해당 복식 형태는 한족 고유의 전통복식이라고 주장하며 한국복식이 한푸의 짝퉁이라는 개드립을 치기도 하는데, 혈통상 한화호족 왕조였던 당나라의 복식은 그렇다 쳐도 순수 한족왕조였던 송나라의 전통복식에 대해서는 알아보지도 않고 원말명초에 북경 일대에서 유행했던 고려양의 존재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중국에서도 원나라 말기로부터 명나라 초기까지의 기간 동안에 고려양이 유행했다는 것을 모르고 이 한푸가 조선 한복의 원형이 된 것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데, 위대한 중화의 전통 복식이라고 알고 있었던 무언가가 사실은 고려옷 짝퉁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도 하거니와 애초에 고려양이 전통 한푸를 제끼고 대유행한 이유[12]부터 굴욕의 역사인지라 중국인들이 잘 전달을 안 하는 탓이다. 이런 중국인을 만나면 '그게 정말 중화의 전통 복식이었다면 고려양이라고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황제가 칙령을 내려서 금지시키지도 않았겠지.'라고 말해주면 된다.
명나라 중~후기의 여성 한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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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중후기로 가면 고려양은 사라지지만, 대신 오래전부터 유입된 북방계 패션과 원나라 때 몽골풍의 영향으로 중앙으로 여미는 형태의 차이나카라 패션으로 변모한다.
전체적인 실루엣이 1자 형태로 직선적으로 떨어지는 이 의복은 앞뒤를 남기고 양 옆으로 밑단까지 주름을 끝까지 잡은 긴 치마(마면군馬面裙)에 길게 내려오는 저고리(아오)를 입고 그 위에 소매와 옷깃에 자수가 들어간 겉옷(평상시에는 소매가 좁은 착수 배자)이나 조끼(배심,비갑)를 입었다. 겉옷의 네모난 깃(방령)에 주로 장식이 들어갔다.
명나라 여성들은 조선 여성들과 다르게 평상시에도 치마와 저고리만 입기보다는 위에 다양한 겉옷을 입는 것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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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들의 복식인 도포(道袍,dao-pao)의 모습
고려양 이외에도 원나라 이전의 송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따랐기 때문에, 남성 복식에서는 그 영향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심의#s-2단령과 기타 포(袍) 종류가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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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혼례복을 입은 모습.[13]
참고로 남성의 복장이 한국에서도 전통혼례복으로 사용되는 조선시대 관복과 비슷한 것은 단령이 중국에서 들어온 옷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단령 자체도 중국 전통 복식은 아니고 당나라 때 들어온 서역 계통 호복의 일종이다. 본래 선비족 계열인 무천진 관롱집단이었음에도 이민족 왕조가 아닌 정통 한족 왕조를 자칭한 수나라당나라의 영향으로 중국화되었다.
청나라 때는 조선 사람들이 사신으로 오거나 중국 유학자들이 조선에 갔을 때 조선 사람들의 옷과 상투를 보고 '이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명나라의 옷이다!'라면서 통곡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심의, 관복인 단령은 모두 한푸가 넘어간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반면, 조선인들은 청나라에 가서 변발 치파오 오랑캐[14]이 가득한 것을 보고 통곡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안토니오 꼬레아의 초상화라고 알려졌던 루벤스의 작품 한복 입은 남자도 연구 결과 1600년 네덜란드를 방문햇던 명나라 상인의 한푸를 그린 것임이 밝혀졌다.
이들에게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한푸가 아주 없어지지는 않았고, 승려도사 그리고 경극과 곤곡을 비롯한 연극 배우라는 특정 신분은 여전히 한푸를 입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도사들은 청나라 때에도 변발을 하지 않았다.

3.8. 청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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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전기와 후기의 대표적인 여성 의상과, 청 초기의 한족 여성 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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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중후기~ 근대로 넘어가는 때의 여성 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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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시대의 한푸를 입은 중국 한족 여성 일러스트. 해당 일러스트 작가가 중국을 구성하는 민족들(한족+소수민족)의 전통의상 차림을 그린 것인데, 한족의 의상이 청 시대의 한푸이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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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후궁견환전>에서, 입궁 전 한족의 평상복 차림을 한 주인공 견환. 견환은 한군기 출신이다.
청 시대 한족 여성들은 치파오를 입는 만주족 여성과 달리, 치마(췬)와 저고리(아오)로 구성된 복장을 계속 입었다. 더불어 전족 풍습도 유지했다. 남자들의 복식은 만주족 의상에 동화되었으나,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한족식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바깥 활동이 적은 여자들의 풍습은 청나라 정부에서[16][17] 그냥 내버려둔 측면이 크다.
명나라 시대에 존재했고, 조선에도 전해졌던 하피는 청나라 시대에 와서는 본래의 긴 띠의 형태에서 조끼 형태의 겉옷으로 변화했고, 한족 명부(귀부인)는 길일이 되면 망포(蟒袍)라는 한족의 의복 위에 조끼로 변한 하피(霞帔)를 덧입고 그 위에 운견(雲肩)이라는, 역시 명나라 시대부터 이어온 어깨 망토를 걸쳤다. 머리에는 명나라 시대부터 내려왔던 봉관을 썼다. 이런 식으로
청 시대에는 이질적으로 정주민족인 한족들이 이부식으로 나뉜 복장을 하고 만주족이 긴 치파오를 입었는데, 이것은 원-명을 거치면서 한족 문화에 이부식 옷차림이 정착된 것이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만주족의 의복 역시 완벽한 원피스 형태 복장이라고 보기 힘들다. 만주족의 옷은 명나라조선과 마찬가지로 이부식 복장 위에 포를 덧입는 것으로 봐야 맞다. 만주족의 치파오는 긴 겉옷(포)의 역할을 한 것으로, 안쪽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저고리와 바지의 이부식 복장을 갖추어 입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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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시대의 아오와 마면군.
청나라 시대의 한푸는 만주족의 영향을 짙게 받아, 상의의 경우에는 옷의 형태와 여밈이 치파오와 비슷한 단추 여밈으로 바뀌었다. 반면 치마는 명나라 시대부터 입었던 마면군을 계속해서 입었는데, 청대에는 더 화려하고 정교하게 변했다. 난간 모양처럼 치마폭에 선을 두르거나, 무수히 많은 주름을 잡고 그 위에 자수를 놓는 등 사치스럽게 장식한 치마가 많았다. 명나라를 포함한 순수 한족 왕조에서 유교의 영향으로 검소함을 추구한 반면, 이민족계 혼혈왕조인 당나라와 순수 이민족 왕조인 원나라, 청나라는 상대적으로 화려함을 추구했기 때문에 한족 여성들의 의상도 그 영향을 받아 이민족계 왕조 치하에서는 상대적으로 화려해진 듯하다.
청나라 시대에는 하의로 바지만을 입기도 했는데, 이것은 만주식 문화로, 치마를 입지 않고 바지만 입는 것은 초중기에는 주로 하급 계층의 여성이 그렇게 했다. 하지만 청나라 후기에 들어서면서 신분과 민족을 막론하고 한족 여성도 저고리와 바지만 입기도 했다. 이후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한족 여성들은 이부식 의상을 고수했지만 정작 한족 국가인 중화민국 수립 이후에는 오히려 만주족이 입었던 치파오를 입기 시작하고 발전시켜 나갔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차이나 드레스' 이미지는 1920~30년도 중화민국 시기에 한족들이 개량한 의상으로 그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차이나 드레스'는 알고 보면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옷[19]일 가능성이 크다.
현재 청나라 시대의 한푸는 중국식 전통 혼례 복장으로 많이 쓰인다.[20] 요새 들어 일부 한족 민족주의자들의 활동이 거세지면서 명나라 시대의 한푸나 그 이전 시대의 한푸를 혼례 복장으로 이용하기도 하지만, 화교들을 포함한 많은 한족 집단이 여전히 청나라 시대의 한푸를 혼례 복식으로 쓴다.[21] 청나라 시대에도 한족 새색시는 만주족 새색시와 다른 차림으로 성장하였으므로 그 전통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여성용 한푸 외에 남성용 한푸 역시 명맥이 끊기지는 않았다. 도교 도사들은 한족의 한푸와 속발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고, 그외 만주족 귀족이나 황족들은 한푸를 취미삼아 입을 수 있었기에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4. 종류


* 여기에 표기된 한자는 모두 정체자이며, 중국에서 쓰는 것은 간체자다.

* 기모노 항목을 봐도 알 수 있듯 전통복식은 대개 그 나라의 발음대로 부른다. 반대로 외국에서는 한복을 한국 발음대로 표기하고 부른다. 한국식 한문 독음이 아닌 중국어 발음대로 적어야 한다.

  • 샹이샤상(上衣下裳/shàngyīxiàshāng) : 상의와 치마를 입은 복식을 뜻하는 말로, 중국 복식을 대표하는 말로 통용된다.[22] 말 그대로 상의와 치마를 입은 것을 상의하상이라 한다.

4.1. 여성 한푸



4.2. 남성 한푸


  • 몐푸(冕服/miǎnfú)
  • 후푸(胡服/húfú)
  • 창산長衫/chángshān)
  • 자오산(罩衫/zhàoshān)
  • 차오푸(朝服/cháofú)
  • 창푸(長服/chángfú)
  • 파오산(袍衫/páoshān)
  • 비자(比甲/bǐjiǎ)
  • 룽파오(龙袍/lóngpáo) : 용포
  • 망파오(蟒袍/mǎngpáo)
  • 푸터우(幞頭/fútóu)
  • 잉자오푸터우(硬脚幞頭/yìngjiǎofútóu)
  • 리꽌(禮冠/lǐguān)
  • 우샤마오(烏沙帽/wūshāmào)
당나라 한푸 관련[23]
송, 명 한푸 관련

5. 한푸 트렌드


현재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微博)의 검색어 ‘#한푸’는 클릭 수가 21억 6천만 건을 기록했다. 2020년 7월 17억 3천만 건에서 2020년 10월에만 4억여 건이 폭등했다. 짧은 동영상 플랫폼인 틱톡에 올라온 한푸 영상은 350만 건, 중국이 차단한 인스타그램에도 #한푸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이 4만 5천 건에 이른다. 한푸 열풍이 전세계 화교 사회로 번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중국의 환구시보는 '중국 내에서 한푸 입기 열풍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 최대 온라인 쇼핑몰타오바오의 관계자는 "송나라 배경의 드라마 <녹비홍수>가 인기를 끌면서 2020년 3월 한푸 판매량이 전년보다 146% 급증했다." 하고 말했다. 타오바오가 발표한 '2019 중국 패션 트랜드 보고'에 따르면 여성복 인기검색어 3위, 남성복 인기검색어 10위에 '한푸'가 올랐다. 중국 최초의 한푸 브랜드 '중회한당'은 올해 10월까지 13개 매장을 새로 오픈했다. 올해 1분기 매출액이 지난해 전체 매출에 육박할 정도로 인기가 급상승중이다. 한푸 관련 포스트
그렇지만, 단순히 잃어버린 역사를 찾자는 좋은 취지의 운동이 아니고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가 심화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중국인들이 자국의 한푸를 사랑하는 수준을 넘어서 중국 영토 내에서 출토되는 것들은 물론, 중국의 소수민족이 입는 모든 양식의 의복들을 싸그리 다 한푸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심지어 한복기모노 등 주변국의 전통복장들도 모조리 한푸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2020년, 샤이닝니키 한복 사태를 위시한 중국의 한복 왜곡 논란이 일어나면서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중국의 한족주의자들은 한푸 역시 호복을 비롯한 주변 복식의 영향을 받아왔고, 한복과 기모노 등 주변국들의 의상들이 독자적인 발전계보를 탔다는 증거를 가져다줘도 본 척도 안 한다. 트위터인스타그램 등지에서는 VPN을 사용하는 중국 네티즌들과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다른 나라의 네티즌들이 설전을 벌이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금이라도 주변국의 전통복장과 닮은 부분을 찾아내기 위해서 신장 위구르 자치구 같은 지역의 전통복식을 들고와서 한푸를 배꼈네 마네 하는 모습을 보면 황당할 정도. 특히 원말명초 고려양 문제에 관해서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여 거론하면 분노한다.
한푸 부흥운동은 치파오를 비롯한 청나라의 문화에 반발하여 한족 중심 민간단체가 시작했다. 그런데 한족이 아닌 다른 민족들의 복식의 영향을 받았거나 한족과 한족 외 타 민족이 지배계층이었던 시절 중국인들이 입어온 당나라,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명나라 복식 모두 호복이거나 호복의 영향을 짙게 받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복식들은 물론 중국 소수민족의 옷들까지 전부 한푸(漢服)라고 부르지만 유독 만주족의 영향을 받은 치파오만은 한푸가 아니라고 하니, 과연 한푸가 무엇인지부터 따져야 할 판이다. 사실 민간 주도 한푸 부흥운동은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중국 정부의 입장과도 차이가 있다. 만주족을 배제하고 한족 중심의 사상을 주장하는 것은 쑨원의 오족공화[24]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관점이라는 것이다. 당장 중국 헌법은 대한족주의를 반대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만주족의 치파오만을 유독 배제하고 한족의 한푸를 내세우는 것은 중국의 현행법을 정면으로 저촉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 역시 나온다. 중국 공산당 측은 한푸 부흥 운동을 반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제재하지도 않는 애매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1] 중문 위키에는 만주어sijigiyan(시지갼)이라고 나와있다. 만주 문자 표기는 ᠰᡳᠵᡳᡤᡳᠶᠠᠨ를 오른쪽으로 세운 것으로 나온다.[2] 당나라와 수나라는 한족과 선비족이 세운 국가이기 때문에 의복에서 선비족의 복식과 한족의 복식이 융합된 형식을 보이며, 명나라는 홍치제 이전까지 고려풍을, 홍치제 이후부턴 송나라의 의복과 몽골풍이 섞인 형태의 한푸가 유행했다.[3] 그러나 조선시대를 지나며 다시 소매는 좁아지게 된다.[4] 원, 명 시기 잠깐 동안은 한반도 계통 복식을, 청 때는 만주식 복식도 받아들였다.[5] 수나라와 당나라 자체가 황실 지도층이 한족에 동화된 선비족 계통이어서 선비족의 호복문화가 당대 중국 의복문화에 매우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6] 다만 명나라 초기 시절의 한푸는 고려양의 한복스타일에 가까운 한푸라서 한복과 헷갈릴 우려가 더 있다. 중국에서도 인식이 잘 되어 있는 당나라 복식을 재현했다면 이런 반응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7] 무령왕은 산더미로 쌓인 상소를 무시하고 아예 호복령을 반대하던 태자를 폐위하는 강경책을 펼치며 호복령을 밀어붙였다. 그야말로 당대 상식을 뒤엎은 개혁가였던 셈.[8] 춘추 시대만 하더라도 지금의 황허 일대는 수풀이 우거진 밀림지대에 가까운 식생이었다. 실제로 아직도 심심하면 당시의 코뿔소나 코끼리의 유골이 발굴되기도 한다.[9] 이는 비슷한 시기의 서방(고대 로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의복의 형태가 치마이니 원래는 다들 남녀 할 것 없이 치마만 입고 다녔다. 그러다 추운 지방에 사는 북방민족들이 추위를 견디기 위해, 또 말을 타기 위한 이유 등으로 바지를 발명해낸 것. 중국은 전국시대에 중원의 북방 기마민족들로부터 바지가 전해졌고 라틴족은 고대 로마 시대에 켈트족으로부터 바지가 전해졌다.[10] 그게 제일 익숙한 것도 있다. 해방 전까지만 하더라도 조선 말기의 양식의 한복은 꽤 입었으니까. 아니, 20세기 후반까지도 시골이나 명절, 행사 등에는 한복을 많이 입었는데 이는 조선 말기 양식을 시대에 맞춰 개량한 거라 거의 차이가 없었다.[11] 참고로 일부 한/중/일 네티즌들이 당나라 복식의 전파를 과도하게 해석하여 한국의 고대 한복과 기모노의 근간이 당나라 한푸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고, 전문가를 자청하는 이들마저 진지하게 그런 주장을 펴는 경우가 있으나, 기모노의 근간은 한복과 같은 호복이 일본에 자생하던 관두의와 융합하면서 정립된 것이다. 동시기 한복과 기모노 모두 당나라의 영향을 짙게 받은 것이지, 아예 당나라 복식이 한복과 기모노의 근간이라는 주장은 영 맞지 않다.[12] 그야 물론 한족이 몽골인에게 종속되어서...[13] 참고로 이 사진 속 신부가 쓴 봉관(鳳冠)은 청나라 때 양식으로, 정확히는 경극과 같은 연극에서 쓰는 의상소품을 그대로 썼다.[14] 청나라의 다수 민족이 한족인 관계로 이들 중 대부분이 한족이었다! 청나라는 유목민 정부였고. 한족들의 문화에 동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유목민 풍속이었던 변발과 치파오를 강요했기 때문이었다.[15] 해당 일러스트 작가는 대만인이다.[16] 만약에 한족 남성들이 한푸를 입다가 청나라 정부에게 발각당할 경우 아마 바로 처형당했을 것이다. 그나마 유교도나 도사들은 속발을 하고 한푸를 입었지만. [17] 남성 한족 전통 한푸를 유지시켜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만주족인데 만주족에겐 복식을 제한하는 법이 없어서 만주족 남성이 한족식 한푸를 입고 다녀도 큰 문제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건륭제 초상화 중 한족 한푸를 입고 그린 것이 있다. 정작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중화권 사극에 등장하는 만주족 캐릭터는 한푸를 입은 모습이 전혀 안 나오지만... 그리고 남성 한족 전통 한푸가 유지된 것은 유목민계 정복왕조답게 종교에 관대한 청나라에서 앞서 말한 것처럼 유교도 및 도사들의 한푸 착용을 금지하지 않은 것도 크다.[18] 고대 한국의 기본 복장 역시 바지-저고리 위에 포를 덧입는 것이었다. 유목 문화가 남아 있는 기마민족의 공통적인 복식 문화라 할 수 있다.[19] 여기서 말하는 '차이나 드레스'는 기존 치파오를 개량하여 타이트하게 만들고 여러 가지 디자인을 한 근세의 물건이다. 물론, 현대에 개량된 치파오도 엄연히 그 원본으로 만주족의 치파오가 있기에,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의상이라는 말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근세에 들어, 한족-만주족 가리지 않고 중국 국적의 여성이면 치파오를 전통 의상으로 입게 된 역사가 오래지 않았다>고 쓰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20] 현대 만주족의 경우 언어, 문화적으로 한족에 거의 동화되긴 했지만 신부가 전통 혼례 복장으로 청나라 만주족 여성의 복장을 입는 점에서 한족과는 차별화된다. 한족계 무슬림인 회족 또한 한푸와 전혀 다른 형태인 자신들의 전통의상을 전통 혼례 복장으로 입는다.[21] 동남아시아로 간 화교 집단인 "페라나칸" 집단의 전통 혼례 복식은 청 시대의 아오췬과 매우 비슷하다[22] 한복은 반대로 위에 저고리, 밑에 바지를 입는다 하여 상유하고(上襦下袴)라 한다.[23] 중국 방송이라 그런지 기모노한복의 원류가 중국이라는 식으로 말하니 참고하고 걸러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한복과 기모노 모두 호복이 근간이다. 기모노는 8세기 경 한푸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았지만 한푸가 원류는 아니며, 한복 역시 문물 교류 과정에서 활수(闊袖)형 복식이 등장하는 등의 영향을 받고 관복 등에서 일부 복식을 도입했을 뿐, 원류는 엄연히 다른 복식이다. 한복은 속옷을 여러 겹으로 입어 하의를 부풀리기 때문에 풍성한 실루엣을 가지는데다 초기 한푸가 통옷인 것과 달리 초기부터 상의와 하의가 분리되었으며, 한푸는 기본적으로 하의는 치마를 입지만 한복은 바지를 입는다.[24] 한족, 만주족, 몽골족, 회족(위구르족 포함), 티베트족이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 협력하는 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쑨원의 구상.